고구려사에 나타난 조공ㆍ책봉의 의미
고구려사에 나타난 조공ㆍ책봉의 의미
▶ 고구려는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지방정권이다.
▶ 조공·책봉은 고대의 외교형식으로, 이것만으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 할 수 없다.
중국학자들은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으므로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공·책봉은 전근대시기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과 맺었던 외교형식으로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속국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주변 국가들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 때문에 적극적으로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 중국학자들도 이러한 점을 알고 중국과 다른 나라의 관계를 볼 때, 명분상·자구상의 조공·책봉 관계와 실제 상황을 구분해서 파악한다. 그런데 유독 고구려에 대해서만 실상을 왜곡하고 있다.
조공·책봉이 정착되는 중국의 남북조 시기에 고구려는 오히려 남조·북조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고구려는 두 왕조와 모두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지만,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두 왕조와의 관계를 조정했다. 그러나 어느 왕조도 고구려에 제재를 가하거나 정치적으로 간섭할 수 없었다. 이는 조공·책봉이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지 못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약 조공·책봉 관계만으로 중국의 지방정권이라 간주한다면, 신라·백제는 물론이고 일본·베트남·고려·조선 등 지역과 시대를 달리하는 거의 모든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까지도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보아야 옳다.
고구려사에 나타난 조공·책봉
• 평양 천도 이전까지 고구려와 중국 사이에는 평화기간 보다는 전쟁기간이 더 길었고, 책봉도 없었음. 이는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닌 독립국임을 증명함• 고구려는 북위(北魏)와의 조공·책봉 관계에도 불구하고 북위군에 맞서 북연왕(北燕王) 풍홍(馮弘)을 영입하였고, 송환 요구를 거부하였음. 북위와 적대하고 있던 남조의 제(齊)와 사절을 교환, 월경(越境)외교를 전개하였음. 조공·책봉 관계의 구속력이 어떤 수준이었는가를 보여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