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넷

상세검색 공유하기 모바일 메뉴 검색 공유
닫기

상세검색

닫기
기사제목
작성·발신·수신자
날짜
~
본문
사료라이브러리 열기
ID :NAHF.gd.k_0002_0380IDURL
사료라이브러리 열기
  • 글씨크게
  • 글씨작게
  • 프린트
  • 텍스트
  • 오류신고

이중하가 수행원들을 보내 청국 관원 측량위원을 맞이하러 가겠다고 회신

 
  • 발신자李重夏
  • 수신자方朗, 德玉, 秦煐
  • 발송일1887년 4월 15일(음)
□ 같은 날[1887년 4월 15일] 조회에 답함
 통정대부행덕원도호부사병마절제사(通政大夫行德源都護府使兵馬節制使) 겸(兼) 감리원산항통상사무토문강감계사(監理元山港通商事務土門江勘界使) 이(李) [주325]
편자주 325
닫기

이중하를 말한다.

가 조회에 답장하는 일입니다. 바로 귀국처 조회를 받았는데 내용은 ‘번거로운 것을 덜고 말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 뒤이어 총리 찰칙을 펴본 중에는 이미 강의 수원(水源)을 조사하라는 유지(諭旨)가 있으니 마땅히 별도로 1명의 관원을 파견하고 같이 가기로 약속한 기일을 정해 알려준 사실에 의해 먼저 본국처(本局處)에 왔습니다. 지금 파견하는 측량위원(測量委員) 유우경(劉虞卿)은 궁병(弓兵)·승수(繩手)를 대동하고 측량기구(測量器具)를 말에 싣고 17일에 길을 떠나 먼저 가서 측량할 것입니다. 귀 부사(府使)는 몇 인원을 선발하여 파견하되 일찍 파견하는 것이 타당하고 이 편에 같이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받고서 폐직(敝職, 이중하)이 근래 답장한 것을 살피는 중에 황조도지(皇朝圖誌)를 근거로 삼아서 홍토수가 틀림없이 대도문강이 됨을 정했습니다. 또한 목총관(穆總管)의 정계(定界) 사실[故實] 사본을 보내 명확한 근거가 있어 거의 훤히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혹시 의심 가는 것이 있다면 이치상 응당 반박하고 변론을 주시면 이것이 가부(可否)를 고정(考訂)하고 양자가 서로 상의하여 확정하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귀 조회 내에 한 글자도 가부(可否)의 가르침이 없으니 삼가 기다리던 나머지 미심하여 매우 답답합니다. 구계(舊界)는 이미 의심이 없으니 다른 물은 실로 조사할 바가 아닌데 귀국처가 조사하고자 기약하여 이같이 기일을 정하니 저도[敝職, 李重夏] 또한 마땅히 수행원 전임(前任) 오위장(五衛將) [주326]
편자주 326
닫기

조선시대 군직(軍職)을 말한다. 5위는 평상시에 주로 입직(入直)과 행순(行巡 : 도성 내외를 순찰하는 일) 및 시위(侍衛)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5위장들은 외소(外所)·남소(南所)·서소(西所)·동소(東所)·북소(北所) 등 다섯 위장소(衛將所)에 번을 갈아 각각 1명씩 입직하여 왕의 지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선 초기에 오위장의 품계는 종2품이었으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5위의 기능이 대폭 축소되어 궁성 숙위(宿衛)만을 맡게 되자 5위장의 기능도 이것에 한정되어 품계가 종2품에서 정3품으로 낮아졌다. 오위장은 1882년(고종 19) 군제개혁 때 5위와 함께 폐지되었다.

오원정(吳元貞) [주327]
편자주 327
닫기

오원정은 1885년(고종 22) 1차 감계회담 때도 수행원이었다. 당시 수행원은 안무영(按撫營) 중군(中軍) 최두형(崔斗衡), 전오위장(前五衛將) 최오길(崔五吉), 전첨지(前僉知)이후섭(李垕燮), 출신(出身) 오원정(吳元貞), 영리(營吏) 전보권(全普權), 가동(家僮) 흥업(興業), 근예(跟隷) 춘길(春吉)·응범(應範)·이돌(利乭) 등이었다(『감계사등록』 상,『백두산일기』, “隨員按撫中軍崔斗衡前五衛將崔五吉前僉知李后(垕)燮出身吳元貞營吏全普權家僮興業跟隷春吉應範利乭略干人”).

등 2인을 파견해 보내서 17일 길을 떠나 같이 갈 것입니다. 응당 글을 갖추어 조복(照覆)하고 이에 조복하오니 귀국처는 잘 살펴보시기를 번거롭게 청합니다. 시행해 주십시오. 이에 조복(照覆)합니다.

 
주 325
이중하를 말한다.
주 326
조선시대 군직(軍職)을 말한다. 5위는 평상시에 주로 입직(入直)과 행순(行巡 : 도성 내외를 순찰하는 일) 및 시위(侍衛)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5위장들은 외소(外所)·남소(南所)·서소(西所)·동소(東所)·북소(北所) 등 다섯 위장소(衛將所)에 번을 갈아 각각 1명씩 입직하여 왕의 지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선 초기에 오위장의 품계는 종2품이었으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5위의 기능이 대폭 축소되어 궁성 숙위(宿衛)만을 맡게 되자 5위장의 기능도 이것에 한정되어 품계가 종2품에서 정3품으로 낮아졌다. 오위장은 1882년(고종 19) 군제개혁 때 5위와 함께 폐지되었다.
주 327
오원정은 1885년(고종 22) 1차 감계회담 때도 수행원이었다. 당시 수행원은 안무영(按撫營) 중군(中軍) 최두형(崔斗衡), 전오위장(前五衛將) 최오길(崔五吉), 전첨지(前僉知)이후섭(李垕燮), 출신(出身) 오원정(吳元貞), 영리(營吏) 전보권(全普權), 가동(家僮) 흥업(興業), 근예(跟隷) 춘길(春吉)·응범(應範)·이돌(利乭) 등이었다(『감계사등록』 상,『백두산일기』, “隨員按撫中軍崔斗衡前五衛將崔五吉前僉知李后(垕)燮出身吳元貞營吏全普權家僮興業跟隷春吉應範利乭略干人”).
 

태그 :

태그등록
이전페이지 리스트보기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