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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하가 보낸 글에 대한 청국 관원의 답신

 
  • 발신자淸國官員
  • 수신자李重夏
  • 발송일1887년 4월 11일(음)
□ [1887년 4월] 11일 청국 관원의 답변
 ○ 보내신 문서에 대해서는 익히 모두 알고 있으나, 그 가운데 큰 오류로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일이 답복(答覆) [주249]
편자주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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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요구나 문제에 대해서 회답하거나 답변함을 말한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몇 년 전 귀 부사와 회동 [주250]
편자주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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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회동 : 1885년인 을유년 감계회담 때 같이 만나 회담한 일을 말한다.

에서 도문강계(圖們江界)를 사감(査勘)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명하신 뜻은 강류(江流)를 따라서 강원(江源)을 탐사하라는 것이었지, 먼저 강원을 선택하고서 강류를 결정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 장건(張騫) [주251]
편자주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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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무제(武帝)의 명을 받고 흉노를 협공하는 방안으로 대월지(大月氏)와 동맹하고자 기원전 139년경 장안을 출발하여 서역으로 파견된 무제의 외교 밀사였다. 그런데 장건은 대월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흉노에게 붙잡혀 10년 동안이나 억류되었다. 그는 흉노여자와 결혼하여 자식까지 두었음에도 결국 흉노를 탈출하여 험난한 파미르 고원 저편의 대완(大宛)에 다다랐고, 한나라와 교역하기를 원했던 대완(大宛)의 왕은 장건에게 사람을 붙여 대월지로 보내주었다. 하지만, 대월지의 왕은 무제의 동맹제의를 거절했다. 한나라는 너무 멀리 있어 흉노의 공격을 받아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건은 바로 한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주변 여러 나라들의 지리와 정세, 물산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자신이 취합한 정보를 한무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흉노를 피하는 방법으로 타림분지의 남쪽 실크로드(서역남도)를 택했다. 귀국 중 또 다시 흉노의 포로가 되기도 했던 장건이 우여곡절 끝에 장안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126년이었다. 처음 한나라를 떠날 때 100명이었던 장건의 일행은 단 2사람으로 줄어있었다. 장건은 황제의 명으로 양마(良馬)를 구하기 위해 재차 서역길에 나섰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후 기원전 121년 장건은 3차로 황제의 명에 의해 오손(烏孫)으로 파견되었다. 그 곳에서 장건은 그의 부사(副使)들을 페르시아를 비롯한 인근나라들로 보냈고 그들은 서역제국의 사절과 대상(隊商)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한나라는 서북쪽의 각 나라들과 통교하기 시작했다.

이 하원(河源, 황하의 원류)을 탐사할 때 또한 강류를 따라서 강원을 궁구했으니, 강원을 탐사하자는 논의가 억지스런 주장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시[을유년, 1885] 무산을 경유하여 삼강구(三江口) [주252]
편자주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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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수(西頭水)와 두만강이 합쳐지는 지점을 말하며 삼하강구(三河江口)라고도 한다(박영철, 「백두산유람록」, 장서각, B15HB 14).

에 이르러, 부사[이중하]와 같이 3로(三路)로 나누어 [주253]
편자주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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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 감계시의 답사를 말한다. 당시 답사는 조선측 이중하와 청국의 진영, 가항계(賈亢桂) 등이 홍토수의 근원과 정계비를 조사하는 여정, 조선측 오원정(吳元貞)과 청국의 회도관(繪圖官) 염영(廉榮)등이 서두수의 근원을 조사하는 여정, 조선측 조창식(趙昌植)과 청국의 덕옥 등이 홍단수 근원을 조사하는 여정 등의 3가지 답사로가 있었다.

각 파견 인원이 먼저 강원을 탐사했습니다. 이어 부사가 비퇴(碑堆)의 설 [주254]
편자주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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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 감계회담에서 이중하가 조선과 청국의 경계를 백두산정계비를 시작으로 세워졌던 석퇴(石堆), 토퇴(土堆), 목책(木柵)의 존재를 조사하자는 의견을 말한다. 당시 이중하의 주장에 따라 비퇴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백두산을 답사하기도 하였다.

을 고집했기 때문에 그 의견을 따라서 식량을 싸들고, 장작을 등지고, 눈을 먹으며, 밤길을 걷는 수고 [주255]
편자주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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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등반을 말한다.

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같이 가서 함께 감계하여 그 의문을 풀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부사가 물줄기가 서로 연접해 있다고 말했으나, 홍토산(紅土山) [주256]
편자주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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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포고리산(布庫里山)이었으며, 산 아래에는 포극호리(布勒瑚里)라는 연못이 있는데, 삼천여욕궁지(三天女浴躬池)라고 한다. 지역민들은 원지(圓池)라고 한다(외교안보연구원, 「간도에 관한 역사지리자료」 1, 1991, 74쪽).

을 조사하고 검토하여 동유와붕(董維窩棚) [주257]
편자주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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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 동쪽의 물 이름으로 황화송구자(黃花松溝子, 伊戞力蓋) 동쪽 사을수(斜乙水)와 그 동쪽 이 물이 합해져 낭낭고(娘娘庫)로 들어간다고 한다(이왕무 외 역, 「역주 감계사등록」, 동북아역사재단, 2008, 202쪽).

이 모두 완만한 산등성이에 속한다는 사실을 살피게 되어서는 아무런 물줄기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회도(繪圖)를 감정(勘定)하고 서로 화압검인(畵押鈐印) [주258]
편자주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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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의 작성을 마치고 서압(署押)인 싸인을 하고 인장을 날인하는 것을 말한다.

하여 각자 다른 말이 없었는데, 그 누가 묵적(墨跡)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논란이 생길 줄 알았겠습니까? 해당처의 물줄기가 이미 끊어졌으니, 비록 부사가 그때 또한 조사(措詞)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강변한들, 사후에 이르러 비(碑)의 오류를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부득불 하나의 이해를 구하여 이전의 잘못을 덮어 가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 정부가 또 복류 40리(伏流四十里) 설 [주259]
편자주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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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문강의 원류(原流)가 토퇴 밑으로 40리에 걸쳐 흐른다는 말이다.

을 주장하는 것은 곧 이전의 이러한 오류로서, 오히려 유형(有形)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무형(無形)을 유형이라고 여기는 것이니, 더 변할수록 더 기이해지고, 더 생각할수록 더 허깨비 같아지는 것입니다. 총체적으로 보건대 물이 있는데 물이 없다고 강변할 수 없는 것처럼, 명백하게 없는 물을 어찌 물이 있다고 가리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복류(伏流) 이 한 가지는 『흠정회전(欽定會典)』 등 여러 책을 고찰해 보면 모두 도문강원(圖們江源)을 논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이해도 없이 귀 정부는 과연 무슨 소견을 갖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귀국(貴國)이 우리 청 조정에 신하처럼 복종하여 번봉(藩封)이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주260]
편자주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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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서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맺은 청국과의 사대관계를 말한다.

근자에 귀국은 매번 재앙과 난리 [주261]
편자주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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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말한다. 조선에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참모인 오장경과 병력을 파견하여 명성황후 세력과 함께 반란군을 진압한다. 이때 22세의 원세개(袁世凱, 1860~1916)가 삼촌의 추천으로 이홍장의 휘하에 들어가 오장경(吳長慶)과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원세개는 경군전적영무처차석(慶軍前敵營務處次席)이라는 신분으로 한성 방위 책임자로 머물며 고종과 조선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원세개는 청국에서 정식으로 파견한 외교관이 아니었으며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본국으로 도주할 때까지 북양대신의 파견원 신분이었다.

를 만났기에, 우리 황제께서 누차 탕금(帑金) [주262]
편자주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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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과 왕실의 재산을 정부 기구와 관련 없이 보관하는 것을 말한다. 내탕에는 왕실에서 직접 경영하는 농지와 산림, 어장 등에서 산출된 이익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국왕이 한나라의 주인이면서도 사적인 재물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으로 인해 내탕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주요한 비판 대상이었다. 내탕은 주나라 이래로 존재하던 제왕의 사고(私庫)로 당나라는 대영고(大盈庫), 송나라는 봉춘고(封樁庫) 등이 있었다(「우서(迂書)」 권10, 「논내탕(論內帑)」).

을 내어 병사를 징발하여 보호해 주었으니, 덮어주고 감싸준 은혜는 이미 넉넉하고 두텁습니다. [주263]
편자주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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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내정간섭이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사태수습을 위해 청국에서 파견한 원세개는 조선 정세를 논함[朝鮮大局論]이라는 글을 써서 의정부(議政府)에 보내 고종과 정부를 압박하였다. 원세개는 조선대국론에서 “조선은 본래 중국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 중국을 버리고 다른 데로 향하려 한다면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에게서 떨어져서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특히 중국을 배반하고 자주(自主)를 하자면, 형세로 보아 반드시 구주의 나라들을 끌어들여다 원조를 받게 될 것인데, 구주의 나라들의 본성이 잔인하여 남을 침략할 것을 꾀하므로 많은 선물과 달콤한 말로 백방으로 회유하여 틈을 타서 들어와서는 반드시 먼저 그 이권을 빼앗고 그 다음에는 중요한 지역을 점령할 것”이라면서 중국의 보호를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이외에 원세개는 대신 임명에 대한 문제[任大臣], 간사한 신하들을 멀리 하는 문제[屛細臣], 여러 관청을 이용하는 문제[用庶司], 민심을 얻는 문제[收民心], 시기심과 의심을 푸는 문제[釋猜疑], 재정을 절약하는 문제[節財用], 신하들의 말을 신중히 듣는 문제[愼聽問], 상과 벌을 정확히 주는 문제[明賞罰], 친할 사람을 가까이 하는 문제[親所親], 외교를 조심하는 문제[審外交] 등의 10가지 대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고종실록」 권23, 고종 23년, 7월 29일(경신)).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 이중하는 을유년 감계회담 때와 달리 청국의 적극적인 외교적 압박 하에 회담에 임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으며, 결국 을유년에 주장한 감계 내용을 수정하여 회담에 임하였다.

귀 국왕 및 정부의 여러 신하들은 마땅히 어떻게 삼가 공경히 그 직무를 다하고, 우러러 황제의 인자함에 답할 것입니까? 이에 부사가 한두 번 명을 받들어 도문강의 근원을 같이 조사했는데, 일은 2차례 시간은 3년이 지났건만 지적한 오류는 글로 다 쓸 수가 없습니다. 감계의 일을 살펴보면 마치 어린아이들 장난과 같으니,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도리가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인지요. 아니면 어찌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의리 [주264]
편자주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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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외교정책인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사대를 말한다. 사대는 중국, 교린은 일본과 여진, 유구 등에 대한 외교정책이었다. 사대는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는 것이며, 교린은 이웃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외교 방침이었다. 조선에서는 매년 정월 초하루에 하정사(賀正使), 황제의 탄신일에 성절사(聖節使), 동지날 보내는 동지사(冬至使) 등을 정기적으로 중국에 보냈으며, 이 밖에 고마운 일에 대한 답사인 사은사(謝恩使), 임시로 보고할 일이 있을 때 주청사(奏請使), 황실에 경사가 있을 진하사(進賀使), 황실에 불행이 있을 때 진위사(陳慰使)를 파견하였다.

가 이러합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귀방(貴邦, 조선)은 어떻게 먼저는 해란강(海蘭江) [주265]
편자주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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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성 연길시를 가로 흐르는 강이다.

을 가리켜 도문강이라고 하더니 이어서는 도문강을 두만강이라고 하고 끝내는 또 송화강원(松花江源) [주266]
편자주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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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강원 황하송구자(松花江源黃河松溝子) : 백두산정계비 동쪽의 도랑을 말하며, 조선에서는 이카루카이[伊戛力蓋]라고 하였다(시노다 지사쿠, 신영길 역, 「간도는 조선땅이다-백두산정계비와 국경」, 지선당, 2005, 201쪽).

를 도문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강의 근원은 하나인데 오류는 한두 번, 오류가 하나가 아니라면 그 오류는 어찌 되는대로 떠들고 제멋대로 꾸며내며 사심을 갖고 기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내온 문서에서 말한 것과 같이 꿈에서도 생각 못할 말이라는 것은 진실로 허탄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 총서(總署)가 조정에 장주(章奏)하여 말하기를 “귀방이 봉산(封山)의 금지 [주267]
편자주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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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이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청국의 발상지인 만주에 대한 한족의 출입을 금지한 일을 말한다.

를 드러내놓고 어기면서 몰래 척지(拓地) [주268]
편자주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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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개척한다는 말로 조선이 청국의 영토를 침범하여 자신의 영토로 삼으려한다는 말이다.

를 도모한다”고 하는데, 말은 엄하고 뜻은 바른데, 이것이 무슨 책비(責備) [주269]
편자주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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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잘해 나가도록 꾸짖는 것을 말한다.

입니까? 귀 정부의 과거 문서를 보면 과오를 뉘우치고 잘못을 깨달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문서의 말을 살펴보니 부사가 끝내 한 터럭의 경외(敬畏)나 깨달음의 마음이 없습니다. 이 어찌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겠습니까? 종래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몸소 중임(重任)을 맡아 반드시 먼저 이해(利害)의 소재를 밝히고, 권변(權變) [주270]
편자주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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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변하는 형편에 따라 처리하는 수단을 말한다.

에 통달하여 사전에 화를 막고 사후에 임금의 잘못을 기워야 하는 것입니다. 위로는 임금과 부모를 위하여 아름다운 명성을 이뤄내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위하여 구원(久遠) [주271]
편자주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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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오래도록 유지되는 것을 말한다.

함을 도모하여, 국가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순리(循吏)가 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미 이르기를, 국가를 사랑함은 반드시 국가가 믿고 의지할 바를 생각하여 두려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니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또 이르기를, 백성을 사랑함은 반드시 백성들이 기댈 곳을 생각하여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니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한갓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고 사사로운 마음을 쓰면서, 겨우 눈앞의 이익만 바라보고 뒷일을 도모함을 구하지 않으면, 마땅히 국가에는 끝없는 환란이 있게 되고 백성들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우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명목상으로는 나라를 사랑함이나 실제로는 나라를 그르침이요, 백성을 사랑한다 외치지만 사실은 백성을 해치는 것이니, 이는 군자가 취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 부사가 강계(江界)를 조사하러 와서 먼저 비퇴(碑堆)를 얘기하면서, 때로는 복류(伏流)로써 강변하고 때로는 홍토산을 강원(江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옛 지혜가 다시 싹튼 것이니 그 속셈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는 명백하게 정해져 있는 땅[有定之地]을 정해져 있지 않은 입[無定之口]으로 불성실하게 옮기는 것입니다. 또 강류를 따라서 강원을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강원을 선택하고서 강류를 정하는 것이니, 이런 이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총서가 복감(覆勘)을 주청한 뜻과 크게 서로 상반되지 않습니까? 이른바 비계(碑界) [주272]
편자주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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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에서 지시하는 경계를 의미한다.

를 가리켜 증명하고서 숨김이 없는 마음[無隱之心]을 밝히겠다는 것은, 사변지비(査邊之碑) [주273]
편자주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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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 변방을 조사하여 그 영역을 표시한 비석이라는 의미로 조선과 국경의 경계선을 조사하여 양국의 경계를 설정한 비석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를 분계지비(分界之碑) [주274]
편자주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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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청국이 양국의 접경 지역을 조사하여 국경선을 설정한 비석이라는 주장이다.

로 여기고, 오히려 숨김이 없는 것[無隱]이라 이르는 것입니다. 귀 정부에서 승문원(承文院) [주275]
편자주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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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국에 보내던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관서로 일명 괴원(槐院)이라고도 하였다. 성균관, 교서관과 합칭하여 삼관이라고도 했다. 조선 초기 태조대에는 제조칙(諸詔勅)과 사대교린 문서를 담당하던 문서(文書) 응봉사(應奉司)였으며, 태종대 승문원(承文院)으로 개정하였다. 당시 승문원에는 판사(判事) 1명 정 3품, 지사(知事) 1명 종 3품, 첨지사(僉知事) 2명 종 4품, 교리(校理) 2명 종 5품, 부교리(副校理) 2명 정 6품, 정자(正字) 2명 종 7품, 부정자(副正字) 2명 정 8품을 두었다. 이보다 앞서 응봉사(應奉司)에서는 오로지 사대문서(事大文書)만을 관장하게 하여, 시산(時散)을 물론(勿論)하고 그 직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임명하였다가, 그 연수(年數)가 오래 되면 전선(銓選)의 후보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녹관(祿官)으로 삼았다. 그리고 승녕부(承寧府)를 혁파하여 전농시(典農寺)에 합하고, 종부 령(宗簿令)⋅경승부 소윤(敬承府少尹) 1명, 사재 주부(司宰注簿)⋅교서 부교리(校書副校理)⋅공정고 주부(供正庫注簿)⋅성균 순유 박사(成均諄諭博士)⋅경시 주부(京市注簿)를 혁파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녹관(祿官)을 두었다(「태종실록」 권21, 태종 11년, 6월 19일(무신)). 사대문서를 위한 이문(吏文)과 한어(漢語)의 습독(習讀)이나 주본(奏本), 자문(咨文), 표전(表箋), 방물장(方物狀) 등의 서사(書寫) 임무가 막중하여 오탈자가 생기면 사헌부의 추국을 받기도 했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5년마다 이문등록(吏文謄錄), 일본도서계(日本圖書契), 조칙(詔勅), 중조방문(中朝榜文) 등이 찬집(撰集) 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에 사신이 지참할 문서는 한 달 전에 작성하여 승문원에서 충분히 검토하도록 하였다(「역주 경국대전」 주석편, 1986).

고실(故實)을 뽑아 우리 예부(禮部) [주276]
편자주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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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의 외교를 담당하는 관서를 말한다.

에 자문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강희 50년[1711, 숙종 37] 8월 초4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목극등을 파견했는데 장백산에 변경(邊境) [주277]
편자주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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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간 경계가 되는 국경선 부근의 지역을 말한다.

을 조사했으며 조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내용의 유시(諭示)”입니다. 이미 귀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글자가 있으므로 목극등이 세운 비석은 사변지비이지 분계지비(分界之碑)가 아님에 의심이 없습니다. 하물며 총서의 장주(章奏)에 또한 이르기를, 목극등이 세운 비문은 단지 “황제의 명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한다[奉旨査邊]. 이에 이르러 살펴보니[至此審視]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도문(東爲圖們)”이라고만 하고 비문 중에 분계(分界)라는 글자가 없습니다. 이는 당일 비석을 세운 곳[立碑之處]이 꼭 당일 경계를 나눈 곳[分界之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줄기가 가다가 끊긴 것으로써 더욱 명백합니다. 이를 통해 비와 분계는 서로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진실로 뚜렷하게 고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끝내 전에 가서 보았던 송화강 장상지비(掌上之碑) [주278]
편자주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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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상 백두산정계비로 추정된다.

를 근거로 삼는다면, 다만 총서의 장주에 합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 승문원 고실(故實)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른바 홍단수 상류에서 정계(定界)했다는 말이 꿈속에서도 생각 못할 말[夢外之言]이라면, 내가 꿈속에서도 생각 못할 말을 한 것이고, 또한 반드시 총서도 꿈속에서도 생각 못할 말을 한 것입니다.
 총서의 장주에서는 명백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압록강의 상원(上源)은 압록이라 부르지 않고 건천구(建川溝) [주279]
편자주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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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하천으로 비가 오거나 장마일 때만 물이 흐르는 곳이다.

라 부르니, 도문강의 상원 역시 반드시 도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례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중국 제수(濟水) [주280]
편자주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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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의 하류 지역인 산동성의 제수를 말한다.

의 상원(上源)은 연(沇) [주281]
편자주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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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구천(九川)의 하나이며, 「서경」 우공(禹貢)에 “윤수를 인도하되 동쪽으로 흘러 제수가 되어[導沇水 東流爲濟]”라는 구절에서 제수의 상원(上源)임을 알 수 있다.

이라 부르며, 한수(漢水) [주282]
편자주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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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의 하류 지역인 산동성의 한수를 말한다.

의 상원은 양(漾) [주283]
편자주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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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우공(禹貢)에 “파총산(嶓冢山)으로부터 양수(漾水)를 인도하여 동쪽 방향으로 흘러서 한수(漢水)를 이룬다[嶓冢導漾 東流爲漢]”라는 구절에서 한수의 상원(上源)임을 알 수 있다.

이라 부릅니다. 이에 연과 양은 곧 제수, 한수와 같은 대천(大川)에서 이름을 얻은 것이니, 이는 대천이 소천(小川)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홍단소수(紅丹小水)가 거느리는 물이 없이 홀로 도문강의 상원이 될 수는 없으니, 통틀어서 봐야합니다. 이상이 총서 장주에서 말했던 것입니다.
 부사가 우리를 보고 꿈에서도 생각 못할 말이라고 하는 것은 심히 무리한 말입니다. 서두수를 반드시 앞서 가서 고증하고자 하는 이유는, 비유하자면 여러 경전을 고증할 때 반드시 휘집(彙集) [주284]
편자주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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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종류의 설명과 자료를 모은 책이다.

과 제가(諸家) [주285]
편자주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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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諸子百家)의 준말로 백가는 수많은 학파이며, 제자는 여러 학자들을 말한다. 한나라 이후 일반적으로 제자백가를 유가, 묵가, 법가, 도가, 명가, 병가, 종횡가, 농가, 음양가, 잡가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활동도 단지 사회 정치사상만이 아니라 지리나 농업, 문학 등의 학술 활동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제자백가란 이처럼 춘추전국시대의 학자, 사상가들. 공자, 노자, 맹자, 장자, 묵자, 열자, 한비자, 손자 등의 학파와 학자들을 의미한다.

의 학설을 얻어서 서로 고증 참조해야 비로소 절충 정론(定論)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 『성경통지(盛京通志)』 [주286]
편자주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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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4년(강희 23)에 찬수한 지리지이며, 옹정제와 건륭제를 거치면서 4차례에 걸쳐 속찬(續撰)하였다.

에 실려있는 것을 조사해보니, 분명 장백산은 여러 강의 발원지로서 작은 것은 하(河)라 하고 큰 것은 강(江)이라 하여 대소(大小)로써 구별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강원을 확심(確尋)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른바 서두수는 『여도(輿圖)』의 주석에서 ‘어윤하(魚潤河)’라고 밝히고 있으며, 홍단수는 주석에서 ‘홍단하(洪丹河)’라고 밝히고 있다고 했는데, 삼지(三池)는 물론 명목(名目)이 부합하지 않아 신빙성이 부족합니다. 또 제시한 지도는 시사(市肆) [주287]
편자주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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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市廛)과 같은 의미로 시장의 가게를 말한다.

에서 펴낸 방각본(坊刻本) [주288]
편자주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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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상업적 이윤을 목표로 출간된 책을 뜻한다. 원래 방각본은 한글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으며, 일반 민중의 문학적 욕구를 일정 부분 수용한 형태이며 군담소설이나 애정소설 등이 주 내용이었고, 영조와 정조시대에 활성화되었다.

이고, 도기(圖記) 또한 서술과 설명이 상세하거나 넉넉하지 못합니다. 어찌 부사와 나와, 청국과 조선 인원(人員)들이 목도(目睹)하고 조사하고 밝혀 회인(會印) [주289]
편자주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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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 감계회담에서 합의하고 날인한 지도를 말한다.

한 지도는 믿을 수가 없고 도리어 방각본을 증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른바 황하는 그 발원이 하나가 아니고 반드시 곤륜산으로부터 나온 연후에 황하라 칭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매우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곤륜산의 산세는 실처럼 이어짐이 넓고 멀지만, 황하의 수원(水源)은 곧 성수해(星宿海) [주290]
편자주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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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의 발원지며 근원수를 말한다(「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성수해(星宿海)).

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백산은 이어지고 이어짐이 실처럼 길지만, 도문강은 반드시 그 수원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먼저 강원을 탐사하고자 하는 까닭이니, 바로 부사의 의견과 서로 동일한 것입니다. 금번 총서가 도문강계의 복감을 주청하며 말하기를, 전번에는 변석과 고증을 거치지 않고서, 계산한 리수(里數)를 겨우 토착민의 말에 근거했기 때문에 믿기에 부족하니, 모름지기 도수(度數)를 측량해야 믿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이르기를, 분계의 설은 혹 산세(山勢)를 따르거나 혹 수세(水勢)를 따르기도 하나, 총체적으로 강원을 확심(確尋)하는 것을 위주로 하지, 동서로 먹줄처럼 명쾌하고 가지런하게 하는 데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복감(覆勘)은 다만 총서가 주의(奏議)를 준수(遵守)하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부사와 같이 만나 무산 이서(以西)로 가서 혹은 산세에 따라 혹은 수세에 따라, 강류를 따라서 강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곳에 따라 측량하여 리수(里數)를 기록하여 밝히고, 길 따라 증거를 보여 확실함을 기약하고, 세세하게 조사하고 밝혀 다시 서로 협의하여 정계(定界)하는 것, 이것이 분계(分界)의 요령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총서가 복감을 주청한 본뜻입니다. 강의 흐름에 3로(三路)가 있다는 것은 이미 조사하여 알았습니다. 물갈래에 의거하여 측량하는 위원이 먼저 출발하여 길을 따라 측량할 것이, 본국처(本局處) [주291]
편자주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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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 감계대표인 진독리와 그 일행을 말한다.

와 부사가 일면 안배하면서 길을 나서 곳곳에서 고구(考究)해야 합니다. 일의 형세가 여러 날, 때를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부사가 어느 관원을 파견하여 먼저 가는 것에 대한 기일을 약정할지, 어느 길을 따라 전진할 것인지, 피차 조회(照會)하여 신속하게 일일이 교복(敎覆) [주292]
편자주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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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 조회(照會)와 그에 대한 답변이 조복(照覆)을 말할 것이다.

할 일입니다.

 
주 249
어떤 요구나 문제에 대해서 회답하거나 답변함을 말한다.
주 250
몇 년 전 회동 : 1885년인 을유년 감계회담 때 같이 만나 회담한 일을 말한다.
주 251
후한 무제(武帝)의 명을 받고 흉노를 협공하는 방안으로 대월지(大月氏)와 동맹하고자 기원전 139년경 장안을 출발하여 서역으로 파견된 무제의 외교 밀사였다. 그런데 장건은 대월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흉노에게 붙잡혀 10년 동안이나 억류되었다. 그는 흉노여자와 결혼하여 자식까지 두었음에도 결국 흉노를 탈출하여 험난한 파미르 고원 저편의 대완(大宛)에 다다랐고, 한나라와 교역하기를 원했던 대완(大宛)의 왕은 장건에게 사람을 붙여 대월지로 보내주었다. 하지만, 대월지의 왕은 무제의 동맹제의를 거절했다. 한나라는 너무 멀리 있어 흉노의 공격을 받아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건은 바로 한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주변 여러 나라들의 지리와 정세, 물산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자신이 취합한 정보를 한무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흉노를 피하는 방법으로 타림분지의 남쪽 실크로드(서역남도)를 택했다. 귀국 중 또 다시 흉노의 포로가 되기도 했던 장건이 우여곡절 끝에 장안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126년이었다. 처음 한나라를 떠날 때 100명이었던 장건의 일행은 단 2사람으로 줄어있었다. 장건은 황제의 명으로 양마(良馬)를 구하기 위해 재차 서역길에 나섰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후 기원전 121년 장건은 3차로 황제의 명에 의해 오손(烏孫)으로 파견되었다. 그 곳에서 장건은 그의 부사(副使)들을 페르시아를 비롯한 인근나라들로 보냈고 그들은 서역제국의 사절과 대상(隊商)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한나라는 서북쪽의 각 나라들과 통교하기 시작했다.
주 252
서두수(西頭水)와 두만강이 합쳐지는 지점을 말하며 삼하강구(三河江口)라고도 한다(박영철, 「백두산유람록」, 장서각, B15HB 14).
주 253
을유년 감계시의 답사를 말한다. 당시 답사는 조선측 이중하와 청국의 진영, 가항계(賈亢桂) 등이 홍토수의 근원과 정계비를 조사하는 여정, 조선측 오원정(吳元貞)과 청국의 회도관(繪圖官) 염영(廉榮)등이 서두수의 근원을 조사하는 여정, 조선측 조창식(趙昌植)과 청국의 덕옥 등이 홍단수 근원을 조사하는 여정 등의 3가지 답사로가 있었다.
주 254
을유년 감계회담에서 이중하가 조선과 청국의 경계를 백두산정계비를 시작으로 세워졌던 석퇴(石堆), 토퇴(土堆), 목책(木柵)의 존재를 조사하자는 의견을 말한다. 당시 이중하의 주장에 따라 비퇴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백두산을 답사하기도 하였다.
주 255
백두산 등반을 말한다.
주 256
원래는 포고리산(布庫里山)이었으며, 산 아래에는 포극호리(布勒瑚里)라는 연못이 있는데, 삼천여욕궁지(三天女浴躬池)라고 한다. 지역민들은 원지(圓池)라고 한다(외교안보연구원, 「간도에 관한 역사지리자료」 1, 1991, 74쪽).
주 257
백두산정계비 동쪽의 물 이름으로 황화송구자(黃花松溝子, 伊戞力蓋) 동쪽 사을수(斜乙水)와 그 동쪽 이 물이 합해져 낭낭고(娘娘庫)로 들어간다고 한다(이왕무 외 역, 「역주 감계사등록」, 동북아역사재단, 2008, 202쪽).
주 258
문서의 작성을 마치고 서압(署押)인 싸인을 하고 인장을 날인하는 것을 말한다.
주 259
토문강의 원류(原流)가 토퇴 밑으로 40리에 걸쳐 흐른다는 말이다.
주 260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서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맺은 청국과의 사대관계를 말한다.
주 261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말한다. 조선에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참모인 오장경과 병력을 파견하여 명성황후 세력과 함께 반란군을 진압한다. 이때 22세의 원세개(袁世凱, 1860~1916)가 삼촌의 추천으로 이홍장의 휘하에 들어가 오장경(吳長慶)과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원세개는 경군전적영무처차석(慶軍前敵營務處次席)이라는 신분으로 한성 방위 책임자로 머물며 고종과 조선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원세개는 청국에서 정식으로 파견한 외교관이 아니었으며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본국으로 도주할 때까지 북양대신의 파견원 신분이었다.
주 262
국왕과 왕실의 재산을 정부 기구와 관련 없이 보관하는 것을 말한다. 내탕에는 왕실에서 직접 경영하는 농지와 산림, 어장 등에서 산출된 이익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국왕이 한나라의 주인이면서도 사적인 재물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으로 인해 내탕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주요한 비판 대상이었다. 내탕은 주나라 이래로 존재하던 제왕의 사고(私庫)로 당나라는 대영고(大盈庫), 송나라는 봉춘고(封樁庫) 등이 있었다(「우서(迂書)」 권10, 「논내탕(論內帑)」).
주 263
조선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내정간섭이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사태수습을 위해 청국에서 파견한 원세개는 조선 정세를 논함[朝鮮大局論]이라는 글을 써서 의정부(議政府)에 보내 고종과 정부를 압박하였다. 원세개는 조선대국론에서 “조선은 본래 중국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 중국을 버리고 다른 데로 향하려 한다면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에게서 떨어져서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특히 중국을 배반하고 자주(自主)를 하자면, 형세로 보아 반드시 구주의 나라들을 끌어들여다 원조를 받게 될 것인데, 구주의 나라들의 본성이 잔인하여 남을 침략할 것을 꾀하므로 많은 선물과 달콤한 말로 백방으로 회유하여 틈을 타서 들어와서는 반드시 먼저 그 이권을 빼앗고 그 다음에는 중요한 지역을 점령할 것”이라면서 중국의 보호를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이외에 원세개는 대신 임명에 대한 문제[任大臣], 간사한 신하들을 멀리 하는 문제[屛細臣], 여러 관청을 이용하는 문제[用庶司], 민심을 얻는 문제[收民心], 시기심과 의심을 푸는 문제[釋猜疑], 재정을 절약하는 문제[節財用], 신하들의 말을 신중히 듣는 문제[愼聽問], 상과 벌을 정확히 주는 문제[明賞罰], 친할 사람을 가까이 하는 문제[親所親], 외교를 조심하는 문제[審外交] 등의 10가지 대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고종실록」 권23, 고종 23년, 7월 29일(경신)).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 이중하는 을유년 감계회담 때와 달리 청국의 적극적인 외교적 압박 하에 회담에 임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으며, 결국 을유년에 주장한 감계 내용을 수정하여 회담에 임하였다.
주 264
조선시대 외교정책인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사대를 말한다. 사대는 중국, 교린은 일본과 여진, 유구 등에 대한 외교정책이었다. 사대는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는 것이며, 교린은 이웃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외교 방침이었다. 조선에서는 매년 정월 초하루에 하정사(賀正使), 황제의 탄신일에 성절사(聖節使), 동지날 보내는 동지사(冬至使) 등을 정기적으로 중국에 보냈으며, 이 밖에 고마운 일에 대한 답사인 사은사(謝恩使), 임시로 보고할 일이 있을 때 주청사(奏請使), 황실에 경사가 있을 진하사(進賀使), 황실에 불행이 있을 때 진위사(陳慰使)를 파견하였다.
주 265
중국 길림성 연길시를 가로 흐르는 강이다.
주 266
송화강원 황하송구자(松花江源黃河松溝子) : 백두산정계비 동쪽의 도랑을 말하며, 조선에서는 이카루카이[伊戛力蓋]라고 하였다(시노다 지사쿠, 신영길 역, 「간도는 조선땅이다-백두산정계비와 국경」, 지선당, 2005, 201쪽).
주 267
만주족이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청국의 발상지인 만주에 대한 한족의 출입을 금지한 일을 말한다.
주 268
땅을 개척한다는 말로 조선이 청국의 영토를 침범하여 자신의 영토로 삼으려한다는 말이다.
주 269
모든 일을 잘해 나가도록 꾸짖는 것을 말한다.
주 270
수시로 변하는 형편에 따라 처리하는 수단을 말한다.
주 271
멀리 오래도록 유지되는 것을 말한다.
주 272
백두산정계비에서 지시하는 경계를 의미한다.
주 273
청국 변방을 조사하여 그 영역을 표시한 비석이라는 의미로 조선과 국경의 경계선을 조사하여 양국의 경계를 설정한 비석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주 274
조선과 청국이 양국의 접경 지역을 조사하여 국경선을 설정한 비석이라는 주장이다.
주 275
조선시대 중국에 보내던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관서로 일명 괴원(槐院)이라고도 하였다. 성균관, 교서관과 합칭하여 삼관이라고도 했다. 조선 초기 태조대에는 제조칙(諸詔勅)과 사대교린 문서를 담당하던 문서(文書) 응봉사(應奉司)였으며, 태종대 승문원(承文院)으로 개정하였다. 당시 승문원에는 판사(判事) 1명 정 3품, 지사(知事) 1명 종 3품, 첨지사(僉知事) 2명 종 4품, 교리(校理) 2명 종 5품, 부교리(副校理) 2명 정 6품, 정자(正字) 2명 종 7품, 부정자(副正字) 2명 정 8품을 두었다. 이보다 앞서 응봉사(應奉司)에서는 오로지 사대문서(事大文書)만을 관장하게 하여, 시산(時散)을 물론(勿論)하고 그 직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임명하였다가, 그 연수(年數)가 오래 되면 전선(銓選)의 후보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녹관(祿官)으로 삼았다. 그리고 승녕부(承寧府)를 혁파하여 전농시(典農寺)에 합하고, 종부 령(宗簿令)⋅경승부 소윤(敬承府少尹) 1명, 사재 주부(司宰注簿)⋅교서 부교리(校書副校理)⋅공정고 주부(供正庫注簿)⋅성균 순유 박사(成均諄諭博士)⋅경시 주부(京市注簿)를 혁파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녹관(祿官)을 두었다(「태종실록」 권21, 태종 11년, 6월 19일(무신)). 사대문서를 위한 이문(吏文)과 한어(漢語)의 습독(習讀)이나 주본(奏本), 자문(咨文), 표전(表箋), 방물장(方物狀) 등의 서사(書寫) 임무가 막중하여 오탈자가 생기면 사헌부의 추국을 받기도 했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5년마다 이문등록(吏文謄錄), 일본도서계(日本圖書契), 조칙(詔勅), 중조방문(中朝榜文) 등이 찬집(撰集) 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에 사신이 지참할 문서는 한 달 전에 작성하여 승문원에서 충분히 검토하도록 하였다(「역주 경국대전」 주석편, 1986).
주 276
청국의 외교를 담당하는 관서를 말한다.
주 277
국가 간 경계가 되는 국경선 부근의 지역을 말한다.
주 278
문맥상 백두산정계비로 추정된다.
주 279
마른 하천으로 비가 오거나 장마일 때만 물이 흐르는 곳이다.
주 280
황하의 하류 지역인 산동성의 제수를 말한다.
주 281
중국 구천(九川)의 하나이며, 「서경」 우공(禹貢)에 “윤수를 인도하되 동쪽으로 흘러 제수가 되어[導沇水 東流爲濟]”라는 구절에서 제수의 상원(上源)임을 알 수 있다.
주 282
황하의 하류 지역인 산동성의 한수를 말한다.
주 283
「서경」 우공(禹貢)에 “파총산(嶓冢山)으로부터 양수(漾水)를 인도하여 동쪽 방향으로 흘러서 한수(漢水)를 이룬다[嶓冢導漾 東流爲漢]”라는 구절에서 한수의 상원(上源)임을 알 수 있다.
주 284
여러 종류의 설명과 자료를 모은 책이다.
주 285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준말로 백가는 수많은 학파이며, 제자는 여러 학자들을 말한다. 한나라 이후 일반적으로 제자백가를 유가, 묵가, 법가, 도가, 명가, 병가, 종횡가, 농가, 음양가, 잡가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활동도 단지 사회 정치사상만이 아니라 지리나 농업, 문학 등의 학술 활동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제자백가란 이처럼 춘추전국시대의 학자, 사상가들. 공자, 노자, 맹자, 장자, 묵자, 열자, 한비자, 손자 등의 학파와 학자들을 의미한다.
주 286
1684년(강희 23)에 찬수한 지리지이며, 옹정제와 건륭제를 거치면서 4차례에 걸쳐 속찬(續撰)하였다.
주 287
시전(市廛)과 같은 의미로 시장의 가게를 말한다.
주 288
17세기에 상업적 이윤을 목표로 출간된 책을 뜻한다. 원래 방각본은 한글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으며, 일반 민중의 문학적 욕구를 일정 부분 수용한 형태이며 군담소설이나 애정소설 등이 주 내용이었고, 영조와 정조시대에 활성화되었다.
주 289
을유년 감계회담에서 합의하고 날인한 지도를 말한다.
주 290
황하의 발원지며 근원수를 말한다(「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성수해(星宿海)).
주 291
청국 감계대표인 진독리와 그 일행을 말한다.
주 292
쌍방 조회(照會)와 그에 대한 답변이 조복(照覆)을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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