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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하(李重夏)와 청국 관원들 간의 문서 중 이중하의 글

 
  • 발신자李重夏
  • 수신자淸國官員
  • 발송일1887년 4월 7일(음)
□ 정해년[1887년, 고종 24] 4월 초7일 담초(談草) [주207]
편자주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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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감계회담 대표 간에 오고간 대화를 기록한 것을 말한다. 정해회담은 회령에서 2회, 장파(長坡)에서 1회 등의 총 3차례에 걸쳐 거행되었다.


 ○ 일(一)
 감계일사(勘界一事)는 몇 해 전 [주208]
편자주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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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감계회담이 있었던 1885년을 말한다.

에 이미 사정과 이유를 상세하게 진술한 것처럼, 우리나라[敝邦 [주209]
편자주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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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방(敝邦) : 조선을 말한다.

]의 본의가 어찌 처음부터 땅을 넓히고자 하는 것에 있겠습니까? [주210]
편자주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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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감계회담이 이루어지기 1년 전인 1886년, 경성에 주재하고 있던 원세개는 조선 정부가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영토를 확장하려는 의도라고 지적하였다. 이런 원세개의 문제 제기에 따라 조선정부는 청국정부에 감계회담을 재차 개최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정해년 감계회담이었다(천구충(川口忠) 편, 「간도혼춘북선급동해안지방 행각기(間島琿春北鮮及東海岸地方 行脚記)」, 「만몽지리역사풍속지총서(滿蒙地理歷史風俗誌叢書)」, 경인문화사, 1995, 37~38쪽).

직(職 : 이중하)은 민정(民情)의 근심과 절박함 [주211]
편자주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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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민의 개간과 정착을 말한다. 조선인이 대규모로 간도에 이주한 시기는 1869년(기사년) 대기근부터였다. 1869년부터 1871년 사이에 함경도와 평안도를 비롯한 한반도 북쪽 지방에는 유래 없는 대흉년이 발생하였다. 이 지역의 기민들은 초근목피에 영양부족으로 병들고 죽는 상황이었지만 중앙정부에서는 제대로 구휼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지역민들은 생존을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의 비옥한 농지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더욱이 회령부사였던 홍남주(洪南周)는 기민구제 방안으로 두만강 대안의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런 조선인들의 이주는 1880년 대규모로 이루어져 경진개척이라는 말을 낳기도 하였다(윤병석, 「북간도한인사회와 명동학교」, 「북간도지역 한인민족운동」, 독립기념관, 2008, 47~49쪽). 특히 간도의 조선인들은 백두산정계비의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는 문구 해석에 따라 토문강 이남은 조선 땅이라고 믿고서 거주하였다(천구충 편, 「간도혼춘북선급동해안지방 행각기」, 「만몽지리역사풍속지총서」, 경인문화사, 1995, 34쪽). 간도라는 말은 두만강 바깥쪽의 땅을 섬으로 알고 했다는 것, 조선인이 개간한 간지(墾地)의 의미를 가져왔다는 것, 북쪽을 의미하는 간(艮) 방향을 의미하는 것 등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이광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한성도서, 1927, 218~219쪽).

으로 인하여, 우선 백두산정계비[碑 [주212]
편자주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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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碑) : 백두산정계비를 말한다. 백두산정계비는 백두산 정상 호수의 동남쪽 산록(山麓)의 1리쯤에 압록강과 토문강의 강원(江源)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비스듬히 1평 정도의 땅에 비면(碑面)은 남쪽을 향하고 서쪽에서 북쪽으로 30도 방향으로 향해 있다(천구충 편, 「간도혼춘북선급동해안지방 행각기」, 「만몽지리역사풍속지총서」, 경인문화사, 1995, 43쪽). 정계비는 2,150m 지대에 있고, 청색의 자연석이며 높이는 2척 3촌, 넓이는 1척 8촌이다. 비석의 밑에는 자연석을 괴었고 뒤에도 자연석을 버티어 놓아두었다(이광수, 「백두산근참기」, 한성도서, 1927, 207~209쪽).

]의 경계를 가리키고 증명하여 숨김이 없는 마음[無隱之心]을 밝힌 연후에야 경계를 표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니, 오직 황조(皇朝)의 관대한 은혜를 기다릴 따름입니다. 지난 을유년[1885]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 [주213]
편자주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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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청국에서 서양 제국을 상대하는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으로 총리아문(總理衙門)⋅총서(總署)⋅역서(譯署)라고도 하였다. 아문에는 총리아문대신(總理衙門大臣)을 두었고 총판장경(總辦章京)⋅방판장경(幫辦章京)⋅장경(章京)⋅액외장경(額外章京) 등을 수하에 두었다. 조선에서는 이를 참고하여 1880년(고종 17)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두기도 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군국기밀과 일반 행정사무를 관장하였다. 12사(司)를 두어 사무를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장관을 총리대신이라 하고 각 사에는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2사는 사대사(事大司)⋅교린사(交隣司)⋅군무사(軍務司)⋅변정사(邊政司)⋅통상사(通商司)⋅기계사(機械司)⋅선함사(船艦司)⋅군물사(軍物司)⋅기연사(譏沿司)⋅어학사(語學司)⋅전선사(典選司)⋅이용사(理用司)이다. 당상관의 정원은 10명, 낭청은 18명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1881년 1월 낭청을 주사(主事)⋅부주사(副主事)로 나누었다. 1882년 6월 통리기무아문은 폐지되고 그 기능을 삼군부(三軍府)에 이관하였다.

의 주고(奏稿) [주214]
편자주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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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奏藁)로서, 황제에게 올리는 상주문(上奏文)의 초안으로 주안(奏案), 주초(奏草)라고도 한다.

안에 이르기를, “삼가 『흠정황조통전(欽定皇朝通典)』 [주215]
편자주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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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청 태조 천명(天命) 1)부터 1785년(건륭(乾隆) 50)간 각종 전장제도(典章制度)의 연혁(沿革)을 정리한 책이다. 정식 명칭은 「청조통전(淸朝通典)」, 「청통전(淸通典)」이라고도 한다. 대학사(大學士) 혜황(嵇璜)‚ 경연강관(經筵講官) 이부상서(吏部尙書) 유용(劉墉)‚ 병부상서(兵部尙書) 왕걸(王杰)‚ 호부상서(戶部尙書) 조문식(曹文埴) 등이 중심이 되어 칙명(勅命)으로 편찬하였다. 서두의 총목(總目)에 의하면 후손들에게 만년 대대로 밝히고 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찬술되었다고 한다. 완성 직후 무영전(武英殿)에서 간각(刊刻)되었고‚ 1875년(광서 1)에 광동(廣東) 학해당(學海堂)에서 중각(重刻)되었으며‚ 이어 1882년에 절강서국(浙江書局)에서 복간되었다. 이 중 무영전 간본과 절강서국 복간본이 청대와 20세기 초반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변방문(邊防門)」과 『흠정황조사예고(欽定皇朝四裔考)』를 살펴보니 모두 길림 [주216]
편자주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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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의 길림성을 말한다. 백두산 주변과 두만강에 이르는 지역이 인접한 청국 영역이다.

과 조선은 도문(圖們) [주217]
편자주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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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을 말한다.

으로써 경계를 삼는다”고 실어 밝히고 있습니다. 또 이르기를, “『일통여도(一統輿圖)』 [주218]
편자주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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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건륭 54) 제작된 청나라 전도(全圖)이다.

와 『회전지도(會典地圖)』에 실려 있는 「직방(職方)」조에는 도문과 압록의 두 강을 동서 경계로 삼아서 표획(標劃)이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이르기를, “백두산은 중국과 조선의 경계에 있는데, 백두는 장백(長白) [주219]
편자주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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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을 말하며, 백두산을 만주에서 부르는 이칭이다.

의 다른 이름이며 두만 [주220]
편자주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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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豆滿江)을 말한다. 함경북도 무산과 회령 등을 거쳐 동해로 흐르는 강이다. 상류는 서두수(西頭水)라고 불리며, 무산군의 경계에서 지류인 석을수(石乙水)와 합류한 후에 두만강이라고 한다. 두만강의 명칭은 중국 역사에서 고려강(高麗江), 도문강(圖門江 또는 徒們江), 토문강(土們江), 통문강(統們江) 등으로 표기했으며, 한국에서는 대부분 두만강으로 기록하였다.

은 도문의 전음(轉音)이라, 방언(方言)은 서로 다르나 실제로는 같은 강”이라 하고 있습니다. [주221]
편자주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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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淸季中日韓關係史料)』 제4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1980, 1931쪽.

이처럼 모든 경(經) [주222]
편자주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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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규정이 되는 책을 말한다.

에 엄숙히 받들어 실려 있습니다. 지난해 봄[을유년, 1885] 감계도회(勘界圖繪) [주223]
편자주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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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회담의 도중에 답사한 지역을 그린 지도를 말한다.

를 자주(咨奏)한 후에 총리각국사무아문의 자이(咨移) 안에 이르기를, “길림과 조선의 경계지(境界址)는 조선 경계인 무산부 동쪽의 회령, 종성, 온성, 경원 [주224]
편자주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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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慶源) : 함경도의 도호부(都護府)로 동쪽은 경흥부(慶興府) 경계까지 96리, 남쪽은 바다까지 1백 65리, 서쪽은 온성부(穩城府) 경계까지 19리, 북쪽은 두만강까지 16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2천 1백 44리이다. 공주(孔州), 광주(匡州)라고도 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땅을 파다가 동인(銅印)을 발견했는데, 광주방어지인(匡州防禦之印)이라고 새겨져 있었다고도 한다. 오랫동안 여진에게 점령당했다가 고려의 윤관(尹瓘)이 여진을 쫓아내고, 성을 쌓고 공험진내방어소(公險鎭內防禦所)를 만들었다. 1398년(태조 7)에 옛터에다 돌로 성을 쌓았다. 이 지역은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으며, 또한 왕업의 터전을 시작한 땅이기 때문에 경흥이라는 명칭으로 고치고 승격하여 부(府)를 만들고, 경성부(鏡城府)에서 용성(龍城) 이북을 분할하여 여기에 소속시켰다. 1400년(태종 9)에 치소(治所)를 소다로(蘇多老)의 옛 영(營)으로 옮기고 목책(木柵)을 만들어 거주하고 있다가, 다음해에 여진의 침략이 있었기 때문에 거주민을 경성군(鏡城郡)으로 옮기고, 그 땅을 비워두었다. 1417년에 경성(鏡城)의 두룡이현(豆龍耳峴) 이북의 땅을 분할하여 다시 부가참(富家站)에다 읍(邑)을 설치하고 도호부(都護府)로 만들었는데, 이곳은 바로 옛적 부거회유역(富居懷綏驛)이 있던 곳이다. 1428년(세종 10)에 다시 부(府)의 치소를 횟가[會叱家] 지방에 옮기고, 남계(南界)의 백성을 옮겨서 이곳에 채우고 토관(土官)을 두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원도호부」). 1435년(세종 17) 부근에서 민호 300호를 떼어내 소속시키고 따로 현을 설치하여 공성(孔城)이라고 부르면서 첨절제사가 현사(縣事)를 겸임하게 하였다. 1437년 목조가 처음 터전을 닦은 곳이라고 하여 군으로 승격시키고, 다시 1441년(세종 23) 종성도호부(鍾城都護府)로 승격하여 판관(判官)과 토관(土官)을 두었다(김우철 역, 「여지도서 함경도」, 「경원」, 흐름, 2009).

, 경흥의 5부(五府)에서 동쪽 녹둔도(鹿屯島) [주225]
편자주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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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두만강의 섬으로 현재는 러시아 영토와 연결되어 섬의 기능을 상실했다. 녹둔도는 사차마도(沙次麻島)라는 이칭으로도 불렸다. 조선전기부터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의 방비와 여진족의 내륙침입을 막고 견제하는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청·러 양국 간 북경조약에 따라 1861년(철종 12) 8월 1일 경흥부의 대안 5리 지점의 무인지경인 사초봉(莎草峯) 부근 봉우리에 국경비를 세움으로써 국경이 획정되었다. 이때를 시점으로 녹둔도는 국제법상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되게 되었다. 이때 청나라가 녹둔도를 자신들의 영토인양 러시아에게 넘겨준 모습이 되어 조선측의 의사는 물론이고 조선을 자신들의 속방으로 본 청나라의 의도가 나타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러시아는 조선정부와 하등의 사전 협약이나 통고도 없이 양국 간의 협약에 따라 녹둔도를 러시아령으로 삼게 된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청나라를 통해 녹둔도의 반환 협조를 요청했으나 실패했으며, 러시아는 이 섬을 점유한 후 즉시 병영화하고 이 지역의 통행을 통제하여 조선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해구(海口) [주226]
편자주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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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하구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접경지로 두만강 하구를 말한다.

에 이르기까지 자연적인 도문강의 천연계한(天然界限)이 있어서, 이것으로 양국의 경계를 획분(劃分)하는 것에는 한 터럭의 의심도 없습니다. 다만 무산의 서쪽에서부터 목극등(穆克登) [주227]
편자주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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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대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던 인물을 말한다. 1712년(숙종 38) 5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이 국경 획정(劃定)을 위한 회담을 열면서 백두산 지역을 답사한 후 백두산정계비를 세워서 양국의 강역(疆域)을 조정하였던 일이다. 당시 조선측은 만주지역의 지도와 지리지, 함경도 지방관들이 수집한 자료들을 근거로 해서 압록강과 두만강, 백두산을 경계로 그 남쪽을 조선의 영역으로 주장하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측에서는 청국에서 발간한 「성경지(盛京誌)」에 “백두산 남쪽은 조선의 지경(地境)이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로 만주 지역의 지리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발간한 지리서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백두산을 여진(女眞)에 속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이남까지 영토로 주장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 청국의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조선측의 우려와는 달리 목극등은 양국의 국경을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경계로 보았다. 목극등은 양국을 경계하는 ‘분수령(分水嶺)’을 정한 뒤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정한다. 이때 백두산정계비에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에 이르며(西爲鴨綠 東爲土門)’라고 하여 동서 경계를 압록강과 두만강[토문강]을 기준으로 한다는 하였다. 이러한 목극등의 행동은 후일 양국이 감계회담을 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목극등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양국의 국경을 획정할 때 두만강을 ‘토문강’이라고 표기하면서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을 가리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배경은 목극등의 현지 조사가 미비했다는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목극등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이 백두산을 기점으로 시작한다고 보고 그 정상 부근에 수원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으로 조선은 송화강의 원류(源流) 중의 하나인 토문강으로, 청국에서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보려 했던 것이다.

이 돌에 새겨 비석을 세운 분수령까지는 응당 변석(辨析) [주228]
편자주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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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별하고 분석함을 말한다.

하고 고증(考證)해야 하니, 길림에 즉시 관원을 파견하여 회감(會勘)하도록 명령하라”고 했습니다. 폐방(조선)은 처음에 민정(民情)으로 인하여 의견을 내고 [주229]
편자주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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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청국은 길림 남부의 봉금지대를 개방하여 이곳에 거주하던 조선인 개척자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청국은 지역의 개간에 착수하고 지방 관청을 세운 뒤 조선인의 본국 송환 내지는 청국인으로 귀화할 것을 강요했다. 특히 1883년 돈화현에서는 간도 지역의 조선인들에게 1년 이내에 추방한다는 고시를 하였다. 이에 간도의 조선인들은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의 강원을 조사하여 간도 지역이 조선의 영토임을 확신한 뒤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청국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본문에서의 민정은 이때의 호소를 말한다. 마침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파견된 어윤중이 이들의 소식을 듣고 종성사람 김우식(金禹軾)과 오원정(吳元貞)에게 토문강과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게 하여 그 내용을 토대로 종성부사에게 돈화현에 양국의 경계를 조사하자는 공문을 발송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윤중은 고종에게 간도문제를 청국과의 외교문제로 해결할 것을 요청했다. 청국에서는 이홍장을 통해 1885년 회답 공문을 보내 마침내 을유 감계회담을 개최하게 되었다.

전후의 총서(總署) [주230]
편자주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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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의 약칭이다.

의주(議奏) [주231]
편자주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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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하여 얻은 의견을 황제에게 아뢰는 것을 말한다. 「문답기」에서는 ‘奏議’라고 한 것을 보면 주의일 것이다.

를 받들어 논변한 바 있습니다. 만약 이처럼 정중히 도문과 두만이 곧 같은 강이고 도문의 천한(天限) [주232]
편자주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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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말한다.

이 도전(圖典)에 실려 있다면, 폐방 또한 어찌 감히 이 일에 전념하고 강변하며 오랫동안 상국(上國) [주233]
편자주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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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을 말하며, 조선시대에 통상 상국은 중국을 의미하였다. 중국의 사대외교선상에서 조선은 제후국이었으므로 그 위의 나라인 상국은 황제국인 중국이었다.

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오직 비퇴(碑堆) [주234]
편자주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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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숙종 38, 강희 51) 목극등 일행이 세운 백두산정계비와 돌무더기를 말한다.

를 구하여 도문과 서로 조응(照應) [주235]
편자주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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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 또는 말과 글 등이 서로 일치하여 잘 어울림을 이르는 말이다.

하여 고증 변석(卞晰)하고, 옛것을 따라 준수하며 사대의 의리를 힘써 다하는 것이 또한 일을 끝마치는 방법일 것입니다. 지금 귀(貴) 독리(督理) [주236]
편자주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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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통상총국(吉林通商總局)의 독리상무위원(督理常務委員)인 진영(秦煐)으로 진독리(秦督理)를 말한다.

가 논한 홍단수(紅丹水) [주237]
편자주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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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아래 허항령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두수(西豆水)와 석을수(石乙水) 사이에 흐르는 천으로 석을수와 합해져 두만강으로 흐르다가 서두수와 합쳐진 뒤 두만강에 합류된다.

의 상류에서 경계를 획정하고자 한다 하는데, 이는 진실로 꿈에서도 생각 못할 말입니다. 홍단수는 소백산 [주238]
편자주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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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小白山) : 소백산은 백두산의 갈래이다. 백두산의 줄기가 분수령에 이르러 삼원봉이 되고 북쪽과 서쪽 사이의 방향에서 따라 내려와 소백산이 되는데 내 천(川)자 모양으로 연원봉이 되고 위에는 중중첩첩 뭇 산들이 이루어져 있다. 그 지류가 뻗어 침봉이 되고 평지로 내려가며 허항령이 된다.

이남에 있는데, 원래 폐방의 내지(內地)에 속해 있어서 처음에는 경계를 논함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무산의 장파(長坡) [주239]
편자주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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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홍단묘(小紅湍廟)에서 60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 백두산 등정 길에서 마지막으로 인가를 볼 수 있는 마을이다. 일제시대에는 헌병주재소가 있었으며 농사동(農事洞)이라고 불렸다. 강 건너는 조선인이 많이 사는 서간도 안도현(安圖縣)이며 가교가 설치되어 사람의 왕래가 가능했다(박영철, 「백두산유람록」, 장서각, B15HB 14).

지역이 그 밖에 있는데, 어찌 이런 이치가 있습니까? 총리아문이 저번에 복주(覆奏)한 후에 또 목극등이 돌에 새겨 비석을 세운 분수령을 변석 고증해야 한다는 뜻을 이미 자회(咨會)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귀국과 우리나라가 복감(覆勘)하는 방법은 오직 마땅히 도문강의 옛 경계와 목총관(穆總管)이 비석 [주240]
편자주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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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를 말한다. 1921년 7월 24일 백두산을 오른 민태원은 “구한말에 한국인으로 백두산에 오르는 자 중에서 힘쓰는 자들은 비석을 메고 산 정상에 세워 놓았으며, 마적들이 그 비석을 발견하면 다시 뽑아서 산 아래에 세워두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민태원, 「백두산행」, 「잃어버린 풍경2 1920–1940 백두산을 찾아서」, 호미, 2005, 77쪽).

을 세운 한계를 다시 살핀 후, 『황청지도(皇淸地圖)』와 대조하여 서로 합치점을 찾는 것입니다. 이래야만 복감이 완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귀 독리께서 마음대로 홍단수와 서두수(西豆水) [주241]
편자주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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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으로 합쳐지는 물줄기이다.

를 지목하는 것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처사로 그 까닭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장백의 여러 산과 크고 작은 도문강 그리고 서변(西邊)의 압록강에 대한 회획(繪劃) [주242]
편자주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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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과 구역을 구분한 그림을 말한다.

과 주명(註明) [주243]
편자주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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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주석을 달아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은 모두 『황청일통지도(皇淸一統地圖)』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다른 말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일전에 귀 독리가 주장하기를, 도문강 상원(上源)의 여러 갈래 중 곧고 긴 것을 강원(江源)으로 하자 하면서, 가장 긴 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서두수라고 했습니다. 서두수는 『여도(輿圖)』의 주석에서 ‘어윤하(魚潤河) [주244]
편자주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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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 회령, 종성을 흐르는 강을 말하는 것으로 어이후강(於伊後江)이라고도 한다(정약용, 이민수 역, 「아방강역고」 백두산정계비고, 범우사, 2007, 466~467쪽). 만수(滿水)라고도 하며 시대에 따라 금나라 때는 통문수(統門水)와 도문수(徒門水), 명나라때는 아야고강(阿也苦江), 청대에는 토문강(土門江), 애호강(愛滹江), 두만강(豆滿江) 등으로 불렸다(「여유당전서」 제6집 「地理集」 권6 大東水經 其二 : “滿水. 出白山之東南陬. 此卽豆滿河也, 水有六名, 金時稱統門水, 亦稱徒門水, 明時稱阿也苦江, 今稱土門江, 亦稱愛滹江, 我邦稱豆滿江, 譯語之變也, 蓋長白之山, 出八條大水, 出其東陬曰分界河, 見下潼關條, 出其東南陬曰魚潤河, 是滿水之源也.”).

’라고 밝히고 있으며, 홍단수는 ‘홍단하삼지(홍단하삼지(洪丹河三池) [주245]
편자주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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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단수와 합해지는 세 물줄기를 말한다.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 주석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크고 작은 도문강을 버리고 폐방의 내지에서 다른 강을 별도로 구하고자 한다면, 이 감계가 어찌 맑고 완전하겠으며, 또한 어찌 황조(皇朝)에서 명한 복감의 뜻이겠습니까. 황하(黃河) [주246]
편자주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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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의 청해성(靑海省) 파안랍산맥(巴顔拉山脈)의 아합랍달택산(雅合拉達澤山)에서 발원하여 사천(四川), 감숙(甘肅), 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 내몽골자치구, 산서(山西), 섬서(陝西), 하남(河南), 산동(山東) 등 7개 성과 2개 자치구를 거쳐 발해(渤海)만으로 흘러가는 강이다. 원류(源流)는 티베트어로 공작하(孔雀河)를 뜻하는 마추로 불린다. 강 유역의 풍부한 퇴적토로 인해 중국 문명형성의 무대가 되었으며 난류(亂流)로 생긴 많은 수로(水路)는 중국의 남북을 잇는 수운로(水運路)로 이용되었다.

는 그 발원이 하나가 아니지만 반드시 곤륜산(崑崙山) [주247]
편자주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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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서쪽 파미르 고원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청해성(靑海省)과 사천성(四川省) 서북부를 거쳐 신강(新疆)과 티베트를 관통하는 산맥이다. 그리고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성산(聖山)으로 곤륜산(昆侖山)이라고도 한다. 중국 고대에는 황하가 이 산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하였다.

에서 발원한 후에야 황하라 칭할 수 있습니다. 도문강은 여러 전적(典籍) [주248]
편자주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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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과 문서를 통칭하는 말이다.

에 기록된 이래로 모두 장백산 발원으로써 도문이라 했습니다. 이는 몇 년 전 귀 독리가 주장한 것으로서, 장백산에서 발원한 도문강을 경계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갑자기 소백산 이하의 수원(水源)을 가리키는 것은 도저히 생각이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누누이 다시 논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일일이 답변을 보여 일찍 결정짓고 공무(公務)에 힘쓰는 방법이 타당하겠습니다.

 
주 207
양국 감계회담 대표 간에 오고간 대화를 기록한 것을 말한다. 정해회담은 회령에서 2회, 장파(長坡)에서 1회 등의 총 3차례에 걸쳐 거행되었다.
주 208
을유감계회담이 있었던 1885년을 말한다.
주 209
폐방(敝邦) : 조선을 말한다.
주 210
정해감계회담이 이루어지기 1년 전인 1886년, 경성에 주재하고 있던 원세개는 조선 정부가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영토를 확장하려는 의도라고 지적하였다. 이런 원세개의 문제 제기에 따라 조선정부는 청국정부에 감계회담을 재차 개최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정해년 감계회담이었다(천구충(川口忠) 편, 「간도혼춘북선급동해안지방 행각기(間島琿春北鮮及東海岸地方 行脚記)」, 「만몽지리역사풍속지총서(滿蒙地理歷史風俗誌叢書)」, 경인문화사, 1995, 37~38쪽).
주 211
월경민의 개간과 정착을 말한다. 조선인이 대규모로 간도에 이주한 시기는 1869년(기사년) 대기근부터였다. 1869년부터 1871년 사이에 함경도와 평안도를 비롯한 한반도 북쪽 지방에는 유래 없는 대흉년이 발생하였다. 이 지역의 기민들은 초근목피에 영양부족으로 병들고 죽는 상황이었지만 중앙정부에서는 제대로 구휼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지역민들은 생존을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의 비옥한 농지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더욱이 회령부사였던 홍남주(洪南周)는 기민구제 방안으로 두만강 대안의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런 조선인들의 이주는 1880년 대규모로 이루어져 경진개척이라는 말을 낳기도 하였다(윤병석, 「북간도한인사회와 명동학교」, 「북간도지역 한인민족운동」, 독립기념관, 2008, 47~49쪽). 특히 간도의 조선인들은 백두산정계비의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는 문구 해석에 따라 토문강 이남은 조선 땅이라고 믿고서 거주하였다(천구충 편, 「간도혼춘북선급동해안지방 행각기」, 「만몽지리역사풍속지총서」, 경인문화사, 1995, 34쪽). 간도라는 말은 두만강 바깥쪽의 땅을 섬으로 알고 했다는 것, 조선인이 개간한 간지(墾地)의 의미를 가져왔다는 것, 북쪽을 의미하는 간(艮) 방향을 의미하는 것 등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이광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한성도서, 1927, 218~219쪽).
주 212
비(碑) : 백두산정계비를 말한다. 백두산정계비는 백두산 정상 호수의 동남쪽 산록(山麓)의 1리쯤에 압록강과 토문강의 강원(江源)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비스듬히 1평 정도의 땅에 비면(碑面)은 남쪽을 향하고 서쪽에서 북쪽으로 30도 방향으로 향해 있다(천구충 편, 「간도혼춘북선급동해안지방 행각기」, 「만몽지리역사풍속지총서」, 경인문화사, 1995, 43쪽). 정계비는 2,150m 지대에 있고, 청색의 자연석이며 높이는 2척 3촌, 넓이는 1척 8촌이다. 비석의 밑에는 자연석을 괴었고 뒤에도 자연석을 버티어 놓아두었다(이광수, 「백두산근참기」, 한성도서, 1927, 207~209쪽).
주 213
1861년 청국에서 서양 제국을 상대하는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으로 총리아문(總理衙門)⋅총서(總署)⋅역서(譯署)라고도 하였다. 아문에는 총리아문대신(總理衙門大臣)을 두었고 총판장경(總辦章京)⋅방판장경(幫辦章京)⋅장경(章京)⋅액외장경(額外章京) 등을 수하에 두었다. 조선에서는 이를 참고하여 1880년(고종 17)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두기도 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군국기밀과 일반 행정사무를 관장하였다. 12사(司)를 두어 사무를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장관을 총리대신이라 하고 각 사에는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2사는 사대사(事大司)⋅교린사(交隣司)⋅군무사(軍務司)⋅변정사(邊政司)⋅통상사(通商司)⋅기계사(機械司)⋅선함사(船艦司)⋅군물사(軍物司)⋅기연사(譏沿司)⋅어학사(語學司)⋅전선사(典選司)⋅이용사(理用司)이다. 당상관의 정원은 10명, 낭청은 18명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1881년 1월 낭청을 주사(主事)⋅부주사(副主事)로 나누었다. 1882년 6월 통리기무아문은 폐지되고 그 기능을 삼군부(三軍府)에 이관하였다.
주 214
주고(奏藁)로서, 황제에게 올리는 상주문(上奏文)의 초안으로 주안(奏案), 주초(奏草)라고도 한다.
주 215
1616년(청 태조 천명(天命) 1)부터 1785년(건륭(乾隆) 50)간 각종 전장제도(典章制度)의 연혁(沿革)을 정리한 책이다. 정식 명칭은 「청조통전(淸朝通典)」, 「청통전(淸通典)」이라고도 한다. 대학사(大學士) 혜황(嵇璜)‚ 경연강관(經筵講官) 이부상서(吏部尙書) 유용(劉墉)‚ 병부상서(兵部尙書) 왕걸(王杰)‚ 호부상서(戶部尙書) 조문식(曹文埴) 등이 중심이 되어 칙명(勅命)으로 편찬하였다. 서두의 총목(總目)에 의하면 후손들에게 만년 대대로 밝히고 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찬술되었다고 한다. 완성 직후 무영전(武英殿)에서 간각(刊刻)되었고‚ 1875년(광서 1)에 광동(廣東) 학해당(學海堂)에서 중각(重刻)되었으며‚ 이어 1882년에 절강서국(浙江書局)에서 복간되었다. 이 중 무영전 간본과 절강서국 복간본이 청대와 20세기 초반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주 216
청국의 길림성을 말한다. 백두산 주변과 두만강에 이르는 지역이 인접한 청국 영역이다.
주 217
두만강을 말한다.
주 218
1789년(건륭 54) 제작된 청나라 전도(全圖)이다.
주 219
장백산을 말하며, 백두산을 만주에서 부르는 이칭이다.
주 220
두만강(豆滿江)을 말한다. 함경북도 무산과 회령 등을 거쳐 동해로 흐르는 강이다. 상류는 서두수(西頭水)라고 불리며, 무산군의 경계에서 지류인 석을수(石乙水)와 합류한 후에 두만강이라고 한다. 두만강의 명칭은 중국 역사에서 고려강(高麗江), 도문강(圖門江 또는 徒們江), 토문강(土們江), 통문강(統們江) 등으로 표기했으며, 한국에서는 대부분 두만강으로 기록하였다.
주 221
『청계중일한관계사료(淸季中日韓關係史料)』 제4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1980, 1931쪽.
주 222
법과 규정이 되는 책을 말한다.
주 223
감계회담의 도중에 답사한 지역을 그린 지도를 말한다.
주 224
경원(慶源) : 함경도의 도호부(都護府)로 동쪽은 경흥부(慶興府) 경계까지 96리, 남쪽은 바다까지 1백 65리, 서쪽은 온성부(穩城府) 경계까지 19리, 북쪽은 두만강까지 16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2천 1백 44리이다. 공주(孔州), 광주(匡州)라고도 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땅을 파다가 동인(銅印)을 발견했는데, 광주방어지인(匡州防禦之印)이라고 새겨져 있었다고도 한다. 오랫동안 여진에게 점령당했다가 고려의 윤관(尹瓘)이 여진을 쫓아내고, 성을 쌓고 공험진내방어소(公險鎭內防禦所)를 만들었다. 1398년(태조 7)에 옛터에다 돌로 성을 쌓았다. 이 지역은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으며, 또한 왕업의 터전을 시작한 땅이기 때문에 경흥이라는 명칭으로 고치고 승격하여 부(府)를 만들고, 경성부(鏡城府)에서 용성(龍城) 이북을 분할하여 여기에 소속시켰다. 1400년(태종 9)에 치소(治所)를 소다로(蘇多老)의 옛 영(營)으로 옮기고 목책(木柵)을 만들어 거주하고 있다가, 다음해에 여진의 침략이 있었기 때문에 거주민을 경성군(鏡城郡)으로 옮기고, 그 땅을 비워두었다. 1417년에 경성(鏡城)의 두룡이현(豆龍耳峴) 이북의 땅을 분할하여 다시 부가참(富家站)에다 읍(邑)을 설치하고 도호부(都護府)로 만들었는데, 이곳은 바로 옛적 부거회유역(富居懷綏驛)이 있던 곳이다. 1428년(세종 10)에 다시 부(府)의 치소를 횟가[會叱家] 지방에 옮기고, 남계(南界)의 백성을 옮겨서 이곳에 채우고 토관(土官)을 두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원도호부」). 1435년(세종 17) 부근에서 민호 300호를 떼어내 소속시키고 따로 현을 설치하여 공성(孔城)이라고 부르면서 첨절제사가 현사(縣事)를 겸임하게 하였다. 1437년 목조가 처음 터전을 닦은 곳이라고 하여 군으로 승격시키고, 다시 1441년(세종 23) 종성도호부(鍾城都護府)로 승격하여 판관(判官)과 토관(土官)을 두었다(김우철 역, 「여지도서 함경도」, 「경원」, 흐름, 2009).
주 225
함경북도 두만강의 섬으로 현재는 러시아 영토와 연결되어 섬의 기능을 상실했다. 녹둔도는 사차마도(沙次麻島)라는 이칭으로도 불렸다. 조선전기부터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의 방비와 여진족의 내륙침입을 막고 견제하는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청·러 양국 간 북경조약에 따라 1861년(철종 12) 8월 1일 경흥부의 대안 5리 지점의 무인지경인 사초봉(莎草峯) 부근 봉우리에 국경비를 세움으로써 국경이 획정되었다. 이때를 시점으로 녹둔도는 국제법상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되게 되었다. 이때 청나라가 녹둔도를 자신들의 영토인양 러시아에게 넘겨준 모습이 되어 조선측의 의사는 물론이고 조선을 자신들의 속방으로 본 청나라의 의도가 나타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러시아는 조선정부와 하등의 사전 협약이나 통고도 없이 양국 간의 협약에 따라 녹둔도를 러시아령으로 삼게 된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청나라를 통해 녹둔도의 반환 협조를 요청했으나 실패했으며, 러시아는 이 섬을 점유한 후 즉시 병영화하고 이 지역의 통행을 통제하여 조선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주 226
강의 하구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접경지로 두만강 하구를 말한다.
주 227
숙종대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던 인물을 말한다. 1712년(숙종 38) 5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이 국경 획정(劃定)을 위한 회담을 열면서 백두산 지역을 답사한 후 백두산정계비를 세워서 양국의 강역(疆域)을 조정하였던 일이다. 당시 조선측은 만주지역의 지도와 지리지, 함경도 지방관들이 수집한 자료들을 근거로 해서 압록강과 두만강, 백두산을 경계로 그 남쪽을 조선의 영역으로 주장하고자 하였다. 특히 조선측에서는 청국에서 발간한 「성경지(盛京誌)」에 “백두산 남쪽은 조선의 지경(地境)이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로 만주 지역의 지리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발간한 지리서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백두산을 여진(女眞)에 속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이남까지 영토로 주장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 청국의 국경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조선측의 우려와는 달리 목극등은 양국의 국경을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경계로 보았다. 목극등은 양국을 경계하는 ‘분수령(分水嶺)’을 정한 뒤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정한다. 이때 백두산정계비에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에 이르며(西爲鴨綠 東爲土門)’라고 하여 동서 경계를 압록강과 두만강[토문강]을 기준으로 한다는 하였다. 이러한 목극등의 행동은 후일 양국이 감계회담을 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목극등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양국의 국경을 획정할 때 두만강을 ‘토문강’이라고 표기하면서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을 가리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배경은 목극등의 현지 조사가 미비했다는 점이 주요 원인이었다. 목극등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이 백두산을 기점으로 시작한다고 보고 그 정상 부근에 수원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으로 조선은 송화강의 원류(源流) 중의 하나인 토문강으로, 청국에서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보려 했던 것이다.
주 228
판별하고 분석함을 말한다.
주 229
1881년 청국은 길림 남부의 봉금지대를 개방하여 이곳에 거주하던 조선인 개척자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청국은 지역의 개간에 착수하고 지방 관청을 세운 뒤 조선인의 본국 송환 내지는 청국인으로 귀화할 것을 강요했다. 특히 1883년 돈화현에서는 간도 지역의 조선인들에게 1년 이내에 추방한다는 고시를 하였다. 이에 간도의 조선인들은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의 강원을 조사하여 간도 지역이 조선의 영토임을 확신한 뒤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청국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본문에서의 민정은 이때의 호소를 말한다. 마침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파견된 어윤중이 이들의 소식을 듣고 종성사람 김우식(金禹軾)과 오원정(吳元貞)에게 토문강과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게 하여 그 내용을 토대로 종성부사에게 돈화현에 양국의 경계를 조사하자는 공문을 발송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윤중은 고종에게 간도문제를 청국과의 외교문제로 해결할 것을 요청했다. 청국에서는 이홍장을 통해 1885년 회답 공문을 보내 마침내 을유 감계회담을 개최하게 되었다.
주 230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의 약칭이다.
주 231
논의하여 얻은 의견을 황제에게 아뢰는 것을 말한다. 「문답기」에서는 ‘奏議’라고 한 것을 보면 주의일 것이다.
주 232
경계를 말한다.
주 233
청국을 말하며, 조선시대에 통상 상국은 중국을 의미하였다. 중국의 사대외교선상에서 조선은 제후국이었으므로 그 위의 나라인 상국은 황제국인 중국이었다.
주 234
1712년(숙종 38, 강희 51) 목극등 일행이 세운 백두산정계비와 돌무더기를 말한다.
주 235
둘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 또는 말과 글 등이 서로 일치하여 잘 어울림을 이르는 말이다.
주 236
길림통상총국(吉林通商總局)의 독리상무위원(督理常務委員)인 진영(秦煐)으로 진독리(秦督理)를 말한다.
주 237
소백산 아래 허항령 동쪽에서 발원하여 서두수(西豆水)와 석을수(石乙水) 사이에 흐르는 천으로 석을수와 합해져 두만강으로 흐르다가 서두수와 합쳐진 뒤 두만강에 합류된다.
주 238
소백산(小白山) : 소백산은 백두산의 갈래이다. 백두산의 줄기가 분수령에 이르러 삼원봉이 되고 북쪽과 서쪽 사이의 방향에서 따라 내려와 소백산이 되는데 내 천(川)자 모양으로 연원봉이 되고 위에는 중중첩첩 뭇 산들이 이루어져 있다. 그 지류가 뻗어 침봉이 되고 평지로 내려가며 허항령이 된다.
주 239
소홍단묘(小紅湍廟)에서 60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 백두산 등정 길에서 마지막으로 인가를 볼 수 있는 마을이다. 일제시대에는 헌병주재소가 있었으며 농사동(農事洞)이라고 불렸다. 강 건너는 조선인이 많이 사는 서간도 안도현(安圖縣)이며 가교가 설치되어 사람의 왕래가 가능했다(박영철, 「백두산유람록」, 장서각, B15HB 14).
주 240
백두산정계비를 말한다. 1921년 7월 24일 백두산을 오른 민태원은 “구한말에 한국인으로 백두산에 오르는 자 중에서 힘쓰는 자들은 비석을 메고 산 정상에 세워 놓았으며, 마적들이 그 비석을 발견하면 다시 뽑아서 산 아래에 세워두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민태원, 「백두산행」, 「잃어버린 풍경2 1920–1940 백두산을 찾아서」, 호미, 2005, 77쪽).
주 241
함경북도에서 발원하여 두만강으로 합쳐지는 물줄기이다.
주 242
강물과 구역을 구분한 그림을 말한다.
주 243
본문에 주석을 달아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주 244
무산, 회령, 종성을 흐르는 강을 말하는 것으로 어이후강(於伊後江)이라고도 한다(정약용, 이민수 역, 「아방강역고」 백두산정계비고, 범우사, 2007, 466~467쪽). 만수(滿水)라고도 하며 시대에 따라 금나라 때는 통문수(統門水)와 도문수(徒門水), 명나라때는 아야고강(阿也苦江), 청대에는 토문강(土門江), 애호강(愛滹江), 두만강(豆滿江) 등으로 불렸다(「여유당전서」 제6집 「地理集」 권6 大東水經 其二 : “滿水. 出白山之東南陬. 此卽豆滿河也, 水有六名, 金時稱統門水, 亦稱徒門水, 明時稱阿也苦江, 今稱土門江, 亦稱愛滹江, 我邦稱豆滿江, 譯語之變也, 蓋長白之山, 出八條大水, 出其東陬曰分界河, 見下潼關條, 出其東南陬曰魚潤河, 是滿水之源也.”).
주 245
홍단수와 합해지는 세 물줄기를 말한다.
주 246
중국 대륙의 청해성(靑海省) 파안랍산맥(巴顔拉山脈)의 아합랍달택산(雅合拉達澤山)에서 발원하여 사천(四川), 감숙(甘肅), 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 내몽골자치구, 산서(山西), 섬서(陝西), 하남(河南), 산동(山東) 등 7개 성과 2개 자치구를 거쳐 발해(渤海)만으로 흘러가는 강이다. 원류(源流)는 티베트어로 공작하(孔雀河)를 뜻하는 마추로 불린다. 강 유역의 풍부한 퇴적토로 인해 중국 문명형성의 무대가 되었으며 난류(亂流)로 생긴 많은 수로(水路)는 중국의 남북을 잇는 수운로(水運路)로 이용되었다.
주 247
중국의 서쪽 파미르 고원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청해성(靑海省)과 사천성(四川省) 서북부를 거쳐 신강(新疆)과 티베트를 관통하는 산맥이다. 그리고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성산(聖山)으로 곤륜산(昆侖山)이라고도 한다. 중국 고대에는 황하가 이 산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하였다.
주 248
서적과 문서를 통칭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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