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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할 때 사용될 석공 징발을 급히 시행할 것을 부령부(富寗府)에 요청

 
  • 수신자富寗府
  • 발송일1887년 3월 4일(음)
□ 1887년 3월 초7일 [부령부(富寧府)에] 도착한 안무영 감결(甘結) [주139]
편자주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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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으로 내려 보내는 공문을 말한다.


 ○ 저번에 화룡골[和龍峪] [주140]
편자주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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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이라는 어원은 우경무구(右警務區)를 개칭하여 화룡이라고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인과 청국인의 매매교환을 위해 개방되었으며, 1902년 화룡진 경무구(和龍鎭警務區)를 연길진(延吉鎭)에 예속시켰다(석미춘잉(釋尾春芿), 「최신 만주지지(最新 滿洲地誌)」 하, 조선급만주사출판부(朝鮮及滿洲社出版部), 1919, 197~198쪽). 오늘날은 길림성 용정시 지신향(智新鄕)을 말한다. 지신향에는 1899년 회령 출신 김약연(金躍淵) 등이 가솔을 이끌고 정착한 명동촌과 명동학교가 있는 곳이며, 목사 문익환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인근의 용정에는 서전서숙이 있던 한국 독립운동사의 한 거점이었다. 화룡골은 길림에서 회령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청국 감계 일행이 임시로 거처를 삼을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1884년 청국 정부는 조선에 대한 변계사무를 위해 화룡골에 통상총국을 두었으며, 서보강(西步江, 혼춘시 삼가자향 고성촌)과 광제욕(光霽峪, 용정시 광개향 광소촌)에 통상분소를 설치하였다. 감계회담에 참여한 독리상무위원(督理常務委員) 진영(秦煐)은 통상총국의 역할에 대해, ① 조선인들을 안치하고 교섭문제를 공정하게 상판(商辦)하였으며, ② 조선인과 청국인들 간의 모순을 공평하게 조정하며 해결하였으며, ③ 혼춘 아문과 돈화현 관서가 500여 리 밖에 있음에도 지역 민심을 안정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이홍장과 길림장군 장순(長順)도 통상총국의 설치목적이 세금을 증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을 안착시키는 것이며, 명목상으로는 세금의 징수라 하지만 실제로는 변계(邊界)의 조사에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통상총국은 세금징수에는 실패하지만 변경을 안돈시키고 조선인을 정착시키는 정책에는 어느 정도 공헌을 하였다. 그 결과 1893년에 서보분강국과 광제욕분국을 폐쇄하고 화룡골 총국을 무간국(撫墾局)으로 개칭하여 양국 간의 교섭과 조선인의 황무지 개척을 관리하는 행정기구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므로 화룡골에 설치되었던 통상총국은 이 지역[북간도]에 지방 행정기구가 없는 실정에서 조선인들의 개간과 조선과의 통상, 조선과의 변계 문제를 관리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윤병석, 「북간도 한인사회와 명동학교」, 「북간도지역 한인민족운동」, 독립기념관, 2008, 48~49쪽 ; 김춘선, 「청조의 북간도 개척정책과 한인」, 「북간도지역 한인민족운동」, 독립기념관, 2008, 323~324쪽). 필진들이 2009년 여름에 간도 현지를 답사한 결과 화룡골 통상총국은 민가로 변해 있으며, 주변 농토에 의해 점차 훼손되고 있었다. 중국인을 비롯한 지역민들은 대부분 총국에 대한 기억이 없었으며 조선족 노인들만이 그 역사를 알고 있었다. 특히 전라남도 광주 출신이라는 70세의 임경환(林慶煥)씨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총국을 찾을 수 있었으므로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오늘날 용정에서 화룡골은 포장도로가 있어서 접근하기가 쉬워졌으나 대중교통의 이용은 여전히 불편하다. 특히 화룡골에서 압록강의 회령 부근까지의 길은 험준한 산세로 인해 오늘날에도 매우 위험하여 청국측 감계 일행의 행차가 생명을 담보로 한 여정이었음을 짐작하게 하였다.

에서 보낸 조회(照會) [주141]
편자주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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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청 간에 질의, 요청, 통지 등을 하기 위해 보내는 공문(公文)을 말한다. 그 외에 관청에서 그런 공문을 보내는 행위 자체를 조회라고 하기도 하였다.

에 따라서, 감계할 때 소용되는 석비(石碑) 15덩이 [주142]
편자주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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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 회령에 도착한 청국 위원들은 양국의 경계를 확정하고 그 경계선에 석비를 세우기로 하여 미리 준비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감계사등록』에는 조선측에서 비석을 마련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 반면, 일제시대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이 백두산을 등반하고 간행한 「백두산유람록」에는 청국측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리고 청국 감계위원이 홍단수(紅湍水)가에 세우고자 한 석비 15개는 조선측 감계위원 이중하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920년대까지 방기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박영철은 백두산 정상의 물을 조선인은 대택(大澤)이라고 하며, 중국인은 천지(天池), 용왕담(龍王潭), 달문담(闥門潭) 등으로 호칭한다고 하였다(박영철, 「백두산유람록(白頭山遊覽錄)」, 장서각, B15HB 14). 박영철은 대한제국기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유학했으며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후 대한제국 고위 군직을 역임했으며, 일제시대에는 고등관과 참여관을 지냈다. 그는 1918년부터 1921년까지 함경북도 참여관(參與官)을 지냈는데, 이때 지역 관원과 경찰의 도움으로 백두산에 등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박영철은 1926~1927년 함경북도 지사를 역임하기도 한다.

를 연마(鍊磨)하여 소홍단묘(小紅丹廟) [주143]
편자주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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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위치한 사당을 말한다. 홍단은 대홍단과 소홍단의 두 곳이 있으며, 소홍단묘는 백두산의 도산령(都山靈)을 모셔놓은 천왕당(天王堂)이다. 일제시대에도 사당에 영험이 많다는 소문에 따라 이곳에 함경도의 민인(民人) 수 천 명이 치성을 드리러 다녔다. 이 사당은 관가에서 제향을 받들던 국가의 신당(神堂)이었으며, 신령함이 많다는 소문이 있어서 일본과 중국 사람들도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사당의 네 기둥에는 ‘백두종기(白頭鐘氣) 홍단영사(紅端靈社) 만고명산(萬古名山) 일국조종(一國祖宗)’이라는 글이 나무 판에 새겨져 주련으로 붙어 있었다(민태원, 「백두산행」, 「잃어버린 풍경2 1920—1940 백두산을 찾아서」, 호미, 2005, 59~61쪽). 백두산 등정에서 입산자가 무사안녕을 기리며 기도하던 사당은 소홍단묘과 함께 대원당(大願堂), 흑산당(黑山堂), 백산당(白山堂) 등의 4사(祠)가 있었다. 그리고 대홍단수(大紅湍水)와 무봉(茂峯) 사이에 대홍단사(大紅湍祠)가 있어서 정상에 오르기 전 기도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박영철, 「백두산유람록」, 장서각, B15HB 14).

로 운반하라는 뜻의 감결을 무산부에 신칙(申飭) [주144]
편자주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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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한다는 말이다.

했었습니다. 지금 해당 부(府)에서 올려 보낸 첩정(牒呈) [주145]
편자주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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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 간의 보고문으로 주로 등급이 낮은 아문에서 높은 아문에 보내는 공문서를 말한다. 원래는 각 도의 관찰사가 병조에 군사에 관계된 공문을 보내던 것을 의미하였다.

을 보니, 석비를 조탁(彫琢)해서 마련하는 것에 석비 1개에 석공(石工) 3명으로도 오히려 부족한데, 해당 읍의 경내에는 단 1명의 석공조차 없어 조성의 방법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 일의 형세를 살펴보니 혹 그럴 수도 있고 괴의할 것이 없으나, 이러다가는 기간을 놓쳐 큰 일이 어긋나게 되고 비단 다른 나라로부터 부끄러움 받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뿐만이 아닙니다. 감계사 일행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에 오로지 기마[專騎 [주146]
편자주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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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專騎) : 기병만을 이용한 연락을 말한다.

]로 감결을 발송하니, 석공 10명을 감결이 도착하는 즉시 기계(器械)를 지참하게 하고, 장교(將校) [주147]
편자주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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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군대의 지휘관급을 말하는 것으로 현대의 하사관급에 해당하는 계급이라고 추정한다.

를 정하여 밤을 새워 그들을 무산부로 압송한 후 일의 전말을 성화(星火) 같이 보고하기 바랍니다. 만약 잠시라도 지체한다면 단연코 크게 어그러짐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삼현령(三懸鈴) [주148]
편자주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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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역참을 이용해 문서를 발송할 때 가장 빠른 단계를 말한다. 국왕이나 상급관청에서 관리나 관청에 매우 급한 공문(公文)을 발송할 때, 문서를 담는 피대(皮袋)에 방울 세 개를 달아 보냈다(「고려사」 권82, 「병지」, 참역(站驛) : 懸鈴傳送, 三急三懸鈴, 二急二懸鈴, 一急一懸鈴, 隨事緩急行之, 津驛皮角傳送).

으로 엄하게 당부하니 거행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정해년[1887, 고종 24] 3월 초4일 [주149]
편자주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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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덕원 부사(德源府使) 이중하(李重夏)는 감계회담을 위한 행차를 앞두고 감계사를 사양하며 감계회담의 어려움을 고종에게 상소하였다. 상소문을 보면, “신이 재작년 겨울에 분에 넘치게도 토문강의 경계를 확인하라는 명을 받고, 중국 관원 진영 등과 함께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가 두만강의 근원을 두루 답사한 다음 달포나 논쟁했으나 끝내 결말을 보지 못하여 치계(馳啓)하고 대죄(待罪)하고 있었는데, 곧 다시 조사하도록 명을 받았습니다. 맡은 일이 중대한 만큼 응당 재촉해서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나야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나라의 일 가운데서도 국경에 관한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세종(世宗) 때와 숙종(肅宗) 때 북쪽의 경계 문제를 처리한 것을 두루 상고하여 보니, 그때에는 중신(重臣)과 도신(道臣)이 함께 변경에 머물렀으며 임금과 신하, 상하 모두가 오랫동안 고생하며 주획(籌劃)한 뒤에야 비로소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신으로 말하면 배운 것이 없고 식견이 얕으며 품계가 낮고 사람이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임을 맡았으니 어찌 소홀하여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착오가 있게 되면 주륙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경계를 확인하는 일은 지난 시기에 비할 것이 못 됩니다. 옛날의 경계를 다시 밝히고 유민들을 찾아다 안착시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경계로 말한다면 수원(水源)이 일치하지 않고 목책(木柵)도 다 썩어서 실제의 장소가 옛 문헌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옳게 확인하기가 오늘날에는 난처합니다. 유민들로 말한다면 강에 대한 단속이 오랫동안 해이해져 넘어간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쇄환할 길이 없으며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전번에 청(淸)에서 온 자문(咨文)에 저들의 국적에 편입시키겠다는 뜻을 보였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토와 백성들에게 관계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 묘당(廟堂)에서 충분히 의논하도록 해야 합니다. 옛날의 경계에 대해서는 도지(圖誌)를 살펴 고증하고 유민들에 대해서는 사리를 잘 헤아려 표획(標劃)할 곳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이고, 안착시킬 곳은 이쪽 땅인가 저쪽 땅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토의하고 확정하여 다시 참작하여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감당할 만한 사람을 새로 차하(差下)하여 다시 분명히 통지하면 나라의 체면도 정중하게 되고 사리에도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고종실록」 권24, 고종 24년, 3월 4일(임진)).

미각(未刻) [주150]
편자주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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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간지(干支)를 시간으로 표시한 12시의 8번째 시간인 미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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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39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으로 내려 보내는 공문을 말한다.
주 140
화룡이라는 어원은 우경무구(右警務區)를 개칭하여 화룡이라고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인과 청국인의 매매교환을 위해 개방되었으며, 1902년 화룡진 경무구(和龍鎭警務區)를 연길진(延吉鎭)에 예속시켰다(석미춘잉(釋尾春芿), 「최신 만주지지(最新 滿洲地誌)」 하, 조선급만주사출판부(朝鮮及滿洲社出版部), 1919, 197~198쪽). 오늘날은 길림성 용정시 지신향(智新鄕)을 말한다. 지신향에는 1899년 회령 출신 김약연(金躍淵) 등이 가솔을 이끌고 정착한 명동촌과 명동학교가 있는 곳이며, 목사 문익환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인근의 용정에는 서전서숙이 있던 한국 독립운동사의 한 거점이었다. 화룡골은 길림에서 회령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청국 감계 일행이 임시로 거처를 삼을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1884년 청국 정부는 조선에 대한 변계사무를 위해 화룡골에 통상총국을 두었으며, 서보강(西步江, 혼춘시 삼가자향 고성촌)과 광제욕(光霽峪, 용정시 광개향 광소촌)에 통상분소를 설치하였다. 감계회담에 참여한 독리상무위원(督理常務委員) 진영(秦煐)은 통상총국의 역할에 대해, ① 조선인들을 안치하고 교섭문제를 공정하게 상판(商辦)하였으며, ② 조선인과 청국인들 간의 모순을 공평하게 조정하며 해결하였으며, ③ 혼춘 아문과 돈화현 관서가 500여 리 밖에 있음에도 지역 민심을 안정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이홍장과 길림장군 장순(長順)도 통상총국의 설치목적이 세금을 증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을 안착시키는 것이며, 명목상으로는 세금의 징수라 하지만 실제로는 변계(邊界)의 조사에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통상총국은 세금징수에는 실패하지만 변경을 안돈시키고 조선인을 정착시키는 정책에는 어느 정도 공헌을 하였다. 그 결과 1893년에 서보분강국과 광제욕분국을 폐쇄하고 화룡골 총국을 무간국(撫墾局)으로 개칭하여 양국 간의 교섭과 조선인의 황무지 개척을 관리하는 행정기구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므로 화룡골에 설치되었던 통상총국은 이 지역[북간도]에 지방 행정기구가 없는 실정에서 조선인들의 개간과 조선과의 통상, 조선과의 변계 문제를 관리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윤병석, 「북간도 한인사회와 명동학교」, 「북간도지역 한인민족운동」, 독립기념관, 2008, 48~49쪽 ; 김춘선, 「청조의 북간도 개척정책과 한인」, 「북간도지역 한인민족운동」, 독립기념관, 2008, 323~324쪽). 필진들이 2009년 여름에 간도 현지를 답사한 결과 화룡골 통상총국은 민가로 변해 있으며, 주변 농토에 의해 점차 훼손되고 있었다. 중국인을 비롯한 지역민들은 대부분 총국에 대한 기억이 없었으며 조선족 노인들만이 그 역사를 알고 있었다. 특히 전라남도 광주 출신이라는 70세의 임경환(林慶煥)씨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총국을 찾을 수 있었으므로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오늘날 용정에서 화룡골은 포장도로가 있어서 접근하기가 쉬워졌으나 대중교통의 이용은 여전히 불편하다. 특히 화룡골에서 압록강의 회령 부근까지의 길은 험준한 산세로 인해 오늘날에도 매우 위험하여 청국측 감계 일행의 행차가 생명을 담보로 한 여정이었음을 짐작하게 하였다.
주 141
조선시대 관청 간에 질의, 요청, 통지 등을 하기 위해 보내는 공문(公文)을 말한다. 그 외에 관청에서 그런 공문을 보내는 행위 자체를 조회라고 하기도 하였다.
주 142
3월 26일 회령에 도착한 청국 위원들은 양국의 경계를 확정하고 그 경계선에 석비를 세우기로 하여 미리 준비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감계사등록』에는 조선측에서 비석을 마련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 반면, 일제시대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이 백두산을 등반하고 간행한 「백두산유람록」에는 청국측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리고 청국 감계위원이 홍단수(紅湍水)가에 세우고자 한 석비 15개는 조선측 감계위원 이중하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920년대까지 방기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박영철은 백두산 정상의 물을 조선인은 대택(大澤)이라고 하며, 중국인은 천지(天池), 용왕담(龍王潭), 달문담(闥門潭) 등으로 호칭한다고 하였다(박영철, 「백두산유람록(白頭山遊覽錄)」, 장서각, B15HB 14). 박영철은 대한제국기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유학했으며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후 대한제국 고위 군직을 역임했으며, 일제시대에는 고등관과 참여관을 지냈다. 그는 1918년부터 1921년까지 함경북도 참여관(參與官)을 지냈는데, 이때 지역 관원과 경찰의 도움으로 백두산에 등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박영철은 1926~1927년 함경북도 지사를 역임하기도 한다.
주 143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위치한 사당을 말한다. 홍단은 대홍단과 소홍단의 두 곳이 있으며, 소홍단묘는 백두산의 도산령(都山靈)을 모셔놓은 천왕당(天王堂)이다. 일제시대에도 사당에 영험이 많다는 소문에 따라 이곳에 함경도의 민인(民人) 수 천 명이 치성을 드리러 다녔다. 이 사당은 관가에서 제향을 받들던 국가의 신당(神堂)이었으며, 신령함이 많다는 소문이 있어서 일본과 중국 사람들도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사당의 네 기둥에는 ‘백두종기(白頭鐘氣) 홍단영사(紅端靈社) 만고명산(萬古名山) 일국조종(一國祖宗)’이라는 글이 나무 판에 새겨져 주련으로 붙어 있었다(민태원, 「백두산행」, 「잃어버린 풍경2 1920—1940 백두산을 찾아서」, 호미, 2005, 59~61쪽). 백두산 등정에서 입산자가 무사안녕을 기리며 기도하던 사당은 소홍단묘과 함께 대원당(大願堂), 흑산당(黑山堂), 백산당(白山堂) 등의 4사(祠)가 있었다. 그리고 대홍단수(大紅湍水)와 무봉(茂峯) 사이에 대홍단사(大紅湍祠)가 있어서 정상에 오르기 전 기도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박영철, 「백두산유람록」, 장서각, B15HB 14).
주 144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한다는 말이다.
주 145
관청 간의 보고문으로 주로 등급이 낮은 아문에서 높은 아문에 보내는 공문서를 말한다. 원래는 각 도의 관찰사가 병조에 군사에 관계된 공문을 보내던 것을 의미하였다.
주 146
전기(專騎) : 기병만을 이용한 연락을 말한다.
주 147
조선시대 군대의 지휘관급을 말하는 것으로 현대의 하사관급에 해당하는 계급이라고 추정한다.
주 148
고려시대부터 역참을 이용해 문서를 발송할 때 가장 빠른 단계를 말한다. 국왕이나 상급관청에서 관리나 관청에 매우 급한 공문(公文)을 발송할 때, 문서를 담는 피대(皮袋)에 방울 세 개를 달아 보냈다(「고려사」 권82, 「병지」, 참역(站驛) : 懸鈴傳送, 三急三懸鈴, 二急二懸鈴, 一急一懸鈴, 隨事緩急行之, 津驛皮角傳送).
주 149
이날 덕원 부사(德源府使) 이중하(李重夏)는 감계회담을 위한 행차를 앞두고 감계사를 사양하며 감계회담의 어려움을 고종에게 상소하였다. 상소문을 보면, “신이 재작년 겨울에 분에 넘치게도 토문강의 경계를 확인하라는 명을 받고, 중국 관원 진영 등과 함께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가 두만강의 근원을 두루 답사한 다음 달포나 논쟁했으나 끝내 결말을 보지 못하여 치계(馳啓)하고 대죄(待罪)하고 있었는데, 곧 다시 조사하도록 명을 받았습니다. 맡은 일이 중대한 만큼 응당 재촉해서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나야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나라의 일 가운데서도 국경에 관한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세종(世宗) 때와 숙종(肅宗) 때 북쪽의 경계 문제를 처리한 것을 두루 상고하여 보니, 그때에는 중신(重臣)과 도신(道臣)이 함께 변경에 머물렀으며 임금과 신하, 상하 모두가 오랫동안 고생하며 주획(籌劃)한 뒤에야 비로소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신으로 말하면 배운 것이 없고 식견이 얕으며 품계가 낮고 사람이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임을 맡았으니 어찌 소홀하여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착오가 있게 되면 주륙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경계를 확인하는 일은 지난 시기에 비할 것이 못 됩니다. 옛날의 경계를 다시 밝히고 유민들을 찾아다 안착시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경계로 말한다면 수원(水源)이 일치하지 않고 목책(木柵)도 다 썩어서 실제의 장소가 옛 문헌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옳게 확인하기가 오늘날에는 난처합니다. 유민들로 말한다면 강에 대한 단속이 오랫동안 해이해져 넘어간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쇄환할 길이 없으며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전번에 청(淸)에서 온 자문(咨文)에 저들의 국적에 편입시키겠다는 뜻을 보였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토와 백성들에게 관계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 묘당(廟堂)에서 충분히 의논하도록 해야 합니다. 옛날의 경계에 대해서는 도지(圖誌)를 살펴 고증하고 유민들에 대해서는 사리를 잘 헤아려 표획(標劃)할 곳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이고, 안착시킬 곳은 이쪽 땅인가 저쪽 땅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토의하고 확정하여 다시 참작하여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감당할 만한 사람을 새로 차하(差下)하여 다시 분명히 통지하면 나라의 체면도 정중하게 되고 사리에도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고종실록」 권24, 고종 24년, 3월 4일(임진)).
주 150
12간지(干支)를 시간으로 표시한 12시의 8번째 시간인 미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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