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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사등록

정계비 기록과 실제 강원(江源)과의 일치 여부

 ○ 정계비(定界碑)는 백두산에서 처음으로 떨어진 남쪽 산기슭 아래 좌우 구학(溝壑)에 있다. 비석의 기록이 말한 바 서쪽은 압록강이 되고, 동쪽은 토문강이 되는 것은 곧 이것을 가르키는 것인데 그 구덩이는 있지만 물이 채워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동쪽 구덩이 기슭 가장자리를 따라 흙과 돌을 쌓아 세워 처음과 끝[首尾]이 90리가 되고 합치면 180여 퇴(堆)가 쌓여 있습니다. 이 구덩이 중간에 양 기슭은 흙벽이 마주보고 있는 것이 문과 같아 토문의 명칭이 이것에서 말해진 것입니다. 토문으로부터 토퇴(土堆)가 끝나는 곳까지의 거리가 10리가 됩니다. 토퇴(土堆)가 끝나는 곳으로부터 도랑길[溝道]이 수십 리를 가면 비로소 물이 나옵니다. 토인(土人)이 이알개(伊戞盖)라고 부르고 또는 삼포(杉浦)라고 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황화송구자(黃花松溝子)라고 말합니다. 이 물은 동쪽으로 흘러서 북쪽으로 꺾어져 송화강으로 들어가 돌아다니다 흑룡강이 된다고 합니다. 지금 상류의 발원처로 말한다면, 동쪽은 토문의 형상이 되니 실로 차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류의 강이 만들어진 곳으로 말한다면, 이내 송화강에 들어가지만 중간에 경계를 표시할 수 없으니 앞으로 무엇으로 근거를 삼을 수 있겠습니까? 비석이 서 있는 곳으로부터 두만강 상류에 이르기까지 여러 물줄기들이 발원하는 곳을 헤아려보면, 곧 하나는 서두수(西頭水)의 발원처와 400~500백리 떨어져 있고, 하나는 홍단수(紅湍水)의 발원처와 130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곳(두만강)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주 648
편자주 648)
원문에는 ‘是近者’이나 『토문감계(土門勘界)』에는 ‘最近者’로 되어 있어 문맥의 의미상 『토문감계』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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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홍토산수(紅土山水)의 발원처이고 서로 100여리 정도 떨어져 있어서 토퇴(土堆) 아래 방향으로주 649
편자주 649)
원문에는 ‘土堆下水’이나 『토문감계(土門勘界)』의 ‘土堆下首’가 의미상 적합하여 이것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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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다면, 넓게 펼쳐져서 내려가다가 막힌 것이 40~50리입니다. 다만 이 비석이 서있는 곳에 언덕(堆)을 만들었는데 이미 두만강의 발원에 이어지지 않으니 곧 반드시 산수(山水) 사이에 별도로 경계를 세우고 도랑길을 따라서 아래로 가면 마침내 송화강과 두만강 하류에 이르고 서로의 거리는 천 여리가 됩니다. 영고(甯古), 길림(吉林) 등지가 모두 그 사이에 있으니 곧 아무 아무의 땅이 교계(交界)가 된다고 정확히 찍어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이 강을 버리고 산줄기를 따라서 말한다면 곧 동남쪽에는 장산령(長山嶺)이 있으며 이어져 북증산(北甑山)이 되며 화인(華人)은 출개타(秫稭垜)라고 부릅니다. 또 동쪽으로 뻗으면 하반령(下盤嶺)이 되는데 하반령 아래에서 물이 나옵니다. 이것이 토문자(土門子)라고 하는 것인데 화인은 박이합통지수(博爾哈通之水)주 650
편자주 650)
원문에는 ‘朴爾哈通之水’이나 『토문감계(土門勘界)』을 따라서 ‘朴’을 ‘博’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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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계강(分界江 : 경계를 나누는 강)이라고 하오나 이상 400~500리는 현재 산으로 경계를 정한 구안(舊案)이 없어서 사실을 밝힐 수 없습니다. 비석 아래에 있는 토문은 실제 비문의 내용과 같아 서로 부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정계비를 답사할 때 중국파원은 또한 단지 비퇴(碑堆)만 보았으니 곧 조선 백성이 월경하여 개간한다는 것을 아마 괴이한 말로 여길 수 없습니다. 종성을 넘어 90리 끝에 모아산(帽兒山)주 651
편자주 651)
원문에는 ‘帽子山’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토문감계(土門勘界)』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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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이 상인들의 물건을 운반해 주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이것으로 여러 번 중국파원에게 말했는데, 그들의 답이 본래 문안으로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200년 동안 무역하고 개시(開市)가 정폐(停廢)한 것은 겨우 4년이 되었는데 양 경계의 백성들에게 자문을 구하면 곧 자세히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파원[彼員]이 끝내 보지도 듣지도 않을 뿐더러 시종 빙자하는 말은 총리아문의 주의(奏議) 속에서 증거로 삼은 각종 책들[各書]을 인용하여 원래 도문강이 경계가 된다고 하니 곧 지금 이 비계(碑界)와 강원(江源)이 서로 부합되지 않습니다. 끝내는 많은 의심스러운 말들을 수십일 동안 서로 붙잡고 있다가 마침내 합치되기 어려웠습니다. 지금 일의 상황으로는 우리 스스로가 의논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 편자주 648)
    원문에는 ‘是近者’이나 『토문감계(土門勘界)』에는 ‘最近者’로 되어 있어 문맥의 의미상 『토문감계』를 따랐다.바로가기
  • 편자주 649)
    원문에는 ‘土堆下水’이나 『토문감계(土門勘界)』의 ‘土堆下首’가 의미상 적합하여 이것을 따랐다.바로가기
  • 편자주 650)
    원문에는 ‘朴爾哈通之水’이나 『토문감계(土門勘界)』을 따라서 ‘朴’을 ‘博’으로 고쳤다.바로가기
  • 편자주 651)
    원문에는 ‘帽子山’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토문감계(土門勘界)』을 따랐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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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비 기록과 실제 강원(江源)과의 일치 여부 자료번호 : gd.k_0001_09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