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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사등록

감계사가 간도에서 개간하는 주민들의 호구(戶口)및 개간지 면적까지 15일까지 보고를 마칠 것을 각 지역에 하달

  • 발신자
    勘界使
  • 발송일
    1885년 11월 6일(음)(乙酉十一月六日)
□ 11월 8일 도착한 감계사(勘界使) 감(甘)주 517
편자주 517)
감결(甘結). 상사(上司)가 속사(屬司) 등에 공문을 보내어 지시하고 그 일에 대하여 어기거나 거짓이 있으면 중한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뜻으로 서약의 글을 쓰고 착서(着署)하여 내게 하는 것. 또 이 서약의 문서를 감결이라 하며, 감결을 모아 철한 것을 감결책(甘結冊)이라 한다.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편간(編刊)한 [조선어사전]의 풀이에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에 발하는 공문’이라 하였고, 그 뒤 국내에서 간행된 사전류에 거의다 이와같이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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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 각 읍민으로 간도(間島)주 518
편자주 518)
만주의 길림성(吉林省) 동남부지역, 즉 한국의 북단인 함경북도와 접하는 두만강 대안 일대의 땅을 가리킴. 중국에서는 연길도(延吉道)라고 함. 간도라는 지명은 병자호란 뒤에 청(淸)측이 이 지역을 봉금지역(封禁地域 : 이주 및 거주를 금지하는 지역)으로 정하고 청인(淸人)이나 조선인 모두의 입주를 불허하는 공간으로 삼은 뒤, 청과 조선 사이에 놓인 섬[島]과 같은 땅이라는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됨. 그러나 조선 후기에 함경도 백성들이 흉년과 기근을 피해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땅을 개간하면서 ‘간도(墾島)’라고 적기 시작했으며, 또 조선의 정북(正北)과 정동(正東) 사이의 간방(艮方)에 있는 땅이라 하여 ‘간도(艮島)’라고도 하였다.
 이에 대해 감계사 이중하는 “옛날 경성(鏡城), 온성(穩城) 지역 사이의 두만강안에 중주(中洲)인 작은 섬 하나를 고도(古島)라고 칭했는데, 부근의 한국인이 이를 개간하고 간도(間島)라고 칭한 데에서 연유한다. 이것이 간도의 남상(濫觴)이다. 후에 한인은 무산간도(茂山間島), 회령간도(會寧間島), 경성간도(鏡城間島)와 같이 온성, 경원, 경흥지역에서도 그 대안을 각각 간도(間島)라 호칭, 마침내는 강안(江岸) 전부를 간도라 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라고 소개했음. 간도는 서간도와 동간도로 구분되는데, 서간도는 압록강과 송화강(松花江)의 상류 지방인 백두산 일대를, 동간도는 북간도라고도 하며 혼춘(琿春)·왕청(汪淸)·연길(延吉)·화룡(和龍)의 네 현(縣)으로 나누어져 있는 두만강 북부의 만주 땅을 가리키며, 보통 간도라고 하면 이 동간도를 말함. 한다. 즉, 간도는 노야령 산맥(老爺嶺山脈)과 흑산령 산맥(黑山嶺山脈) 사이의 일대 분지와 혼동강(混同江)과 목단령 산맥(牧丹嶺山脈) 사이의 분지를 아우르는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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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개간하는 자는 한 명도 빠짐없이 이름을 지적하여 치보(馳報)하되 매 가정마다 남정(男丁)이 몇이고, 여정(女丁)이 몇이고, 개간하는 밭이 몇일경(日耕)이고, 강과 거리가 몇 리인지 소상히 모두 기록하고 성책(成冊) 2권을 만들어 동일 밤 행도소(行到所)에 올려 보내어 증거로 삼게 하도록 하라. 그리고 두만강[豆江]을 통해 국경을 넘나드는 연류(沿流)의 위, 아래로 수십 리 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는 15일까지 보고를 마쳐서 총계를 내되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할 일이다.
 을유(乙酉 : 1885, 고종 22) 11월 6일 무산(茂山)에서 온성(穩城)주 519
편자주 519)
함경산맥(咸鏡山脈)의 여맥이 이곳까지 뻗어 남고북저의 지형을 이루며, 중앙은 낮고 평평한 분지가 발달하였다. 높은 산지는 없고 낮은 구릉성의 산지로, 영와면에 증산(甑山, 340m)과 남양면에 연대봉(煙臺峰, 365m)이 솟아 있다. 낮은 고개로 정관령(鄭關嶺, 550m)·충동령(忠東嶺, 649m)이 있어 인접 군과의 교통에 큰 역할을 한다.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두만강은 남양면 풍리동 부근에서 곡류하여, 풍서동에서 비교적 넓은 하안평야를 이루고, 온성과 훈융 지역에는 넓은 범람원을 발달시켰다. 이 밖에 남산천(南山川)·월파천(月坡川)·풍천천(淵川川) 등이 북류하여 두만강에 유입한다. 지질은 신생대 제3기 층과 중생대의 화강암층이 발달되었으며, 토양은 하천 퇴적물의 비옥한 사양토이다. 북쪽에 위치하여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며, 겨울에는 삼한사온이 현저하다. 연평균 기온 5.9℃, 1월 평균 기온 -13.4℃, 8월 평균 기온 22.7℃, 연 강수량 547.2mm이다. 첫서리는 9월 상순, 마지막 서리는 4월 중순경에 내린다. 이 군에서 선사 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굴된 바는 없으나 인접지인 종성군 동관진(潼關鎭)에서 포유류 동물의 화석과 함께 적록·거록 등의 뿔 또는 골각기 등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두만강 하구인 경흥군 노서면 해안에서 굴포문화(屈浦文化)라고 부르는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이곳에서도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리라고 본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두만강 유역의 이 지방은 옛날 부족 국가 시대에는 숙신(肅愼)· 읍루(分婁)·예맥(濊貊)·옥저(沃沮)·말갈(靺鞨)·부여(夫餘) 등 여러 민족의 흥망성쇠가 있던 고지(古址)이며,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판도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여 그 땅에 당나라의 군정이 실시되었을 무렵에는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699년(효소왕 8)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웠을 때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하였다. 918년(태조 1) 고려가 건국된 초기의 영역은 신라 시대의 판도에 지나지 아니하여 발해와 북계를 이루었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게 무너진 이후 수세기 동안 이 지방은 요(遼)·금(金)·원(元) 등 여러 이민족의 통치하에 놓여 있었다. 발해 멸망 당시 말갈족 집단인 여진(女眞)의 일부는 차차 남하하여 함흥 지방에까지 세력이 확대되어 고려와의 충돌이 잦았다. 원·명 교체기인 공민왕 말기에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실효를 거두어 지금의 함경남도 갑산에서 함경산맥의 동측을 따라서 두만강 하구 지방까지 수복하였다.
 1410년(태종 10) 두만강 하류의 경원성에 여진이 침공하였으므로 경원부를 경성으로 후퇴시키니 그 이북의 땅은 약 25년 동안 공허가 되었다.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가 육진(六鎭)을 개척하자 1440년(세종 22) 지난날 다온평(多溫平)이라 불리던 이곳에 온성군(穩城郡)이 신설되어 길주 남부와 안변 북부 사이의 여러 고을 백성을 이주시켰다. 1441년에는 도호부로 격상되어 판관을 두고 토관을 설치하였다. 1442년 진(鎭)이 설치되었고, 한때 고을 이름을 전성(氈城)으로 고쳤다가 다시 온성으로 불렀다. 1630년(인조 8) 유원토병(柔遠土兵) 양사복(梁士福)이 유배인과 모반하였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3년 다시 부로 환원되었다. 1895년 지방관제가 바뀌어 온성군으로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종래 경원군에 속하였던 훈융면이 이 군에 편입되었으며, 1937년 유포면을 남양면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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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이 때에 모처에서 강의 거리가 몇 리, 인구가 남정(男丁)주 520
편자주 520)
열 다섯 살이 넘은 사내. 장정이 된 사내. 조선시대에는 세금 납부 및 군역(軍役)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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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몇 명, 여정(女丁)이 몇 명, 밭이 몇일경(日耕)인지 수십 리 범위에서 수록(收錄)하고 수십 리 이외에 깊이 들어간 것은 논하라 말라.

  • 편자주 517)
    감결(甘結). 상사(上司)가 속사(屬司) 등에 공문을 보내어 지시하고 그 일에 대하여 어기거나 거짓이 있으면 중한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뜻으로 서약의 글을 쓰고 착서(着署)하여 내게 하는 것. 또 이 서약의 문서를 감결이라 하며, 감결을 모아 철한 것을 감결책(甘結冊)이라 한다.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편간(編刊)한 [조선어사전]의 풀이에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에 발하는 공문’이라 하였고, 그 뒤 국내에서 간행된 사전류에 거의다 이와같이 풀이하였다.바로가기
  • 편자주 518)
    만주의 길림성(吉林省) 동남부지역, 즉 한국의 북단인 함경북도와 접하는 두만강 대안 일대의 땅을 가리킴. 중국에서는 연길도(延吉道)라고 함. 간도라는 지명은 병자호란 뒤에 청(淸)측이 이 지역을 봉금지역(封禁地域 : 이주 및 거주를 금지하는 지역)으로 정하고 청인(淸人)이나 조선인 모두의 입주를 불허하는 공간으로 삼은 뒤, 청과 조선 사이에 놓인 섬[島]과 같은 땅이라는 데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됨. 그러나 조선 후기에 함경도 백성들이 흉년과 기근을 피해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땅을 개간하면서 ‘간도(墾島)’라고 적기 시작했으며, 또 조선의 정북(正北)과 정동(正東) 사이의 간방(艮方)에 있는 땅이라 하여 ‘간도(艮島)’라고도 하였다.
     이에 대해 감계사 이중하는 “옛날 경성(鏡城), 온성(穩城) 지역 사이의 두만강안에 중주(中洲)인 작은 섬 하나를 고도(古島)라고 칭했는데, 부근의 한국인이 이를 개간하고 간도(間島)라고 칭한 데에서 연유한다. 이것이 간도의 남상(濫觴)이다. 후에 한인은 무산간도(茂山間島), 회령간도(會寧間島), 경성간도(鏡城間島)와 같이 온성, 경원, 경흥지역에서도 그 대안을 각각 간도(間島)라 호칭, 마침내는 강안(江岸) 전부를 간도라 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라고 소개했음. 간도는 서간도와 동간도로 구분되는데, 서간도는 압록강과 송화강(松花江)의 상류 지방인 백두산 일대를, 동간도는 북간도라고도 하며 혼춘(琿春)·왕청(汪淸)·연길(延吉)·화룡(和龍)의 네 현(縣)으로 나누어져 있는 두만강 북부의 만주 땅을 가리키며, 보통 간도라고 하면 이 동간도를 말함. 한다. 즉, 간도는 노야령 산맥(老爺嶺山脈)과 흑산령 산맥(黑山嶺山脈) 사이의 일대 분지와 혼동강(混同江)과 목단령 산맥(牧丹嶺山脈) 사이의 분지를 아우르는 지명.바로가기
  • 편자주 519)
    함경산맥(咸鏡山脈)의 여맥이 이곳까지 뻗어 남고북저의 지형을 이루며, 중앙은 낮고 평평한 분지가 발달하였다. 높은 산지는 없고 낮은 구릉성의 산지로, 영와면에 증산(甑山, 340m)과 남양면에 연대봉(煙臺峰, 365m)이 솟아 있다. 낮은 고개로 정관령(鄭關嶺, 550m)·충동령(忠東嶺, 649m)이 있어 인접 군과의 교통에 큰 역할을 한다.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두만강은 남양면 풍리동 부근에서 곡류하여, 풍서동에서 비교적 넓은 하안평야를 이루고, 온성과 훈융 지역에는 넓은 범람원을 발달시켰다. 이 밖에 남산천(南山川)·월파천(月坡川)·풍천천(淵川川) 등이 북류하여 두만강에 유입한다. 지질은 신생대 제3기 층과 중생대의 화강암층이 발달되었으며, 토양은 하천 퇴적물의 비옥한 사양토이다. 북쪽에 위치하여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며, 겨울에는 삼한사온이 현저하다. 연평균 기온 5.9℃, 1월 평균 기온 -13.4℃, 8월 평균 기온 22.7℃, 연 강수량 547.2mm이다. 첫서리는 9월 상순, 마지막 서리는 4월 중순경에 내린다. 이 군에서 선사 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굴된 바는 없으나 인접지인 종성군 동관진(潼關鎭)에서 포유류 동물의 화석과 함께 적록·거록 등의 뿔 또는 골각기 등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두만강 하구인 경흥군 노서면 해안에서 굴포문화(屈浦文化)라고 부르는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이곳에서도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리라고 본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두만강 유역의 이 지방은 옛날 부족 국가 시대에는 숙신(肅愼)· 읍루(分婁)·예맥(濊貊)·옥저(沃沮)·말갈(靺鞨)·부여(夫餘) 등 여러 민족의 흥망성쇠가 있던 고지(古址)이며,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판도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여 그 땅에 당나라의 군정이 실시되었을 무렵에는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699년(효소왕 8)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웠을 때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하였다. 918년(태조 1) 고려가 건국된 초기의 영역은 신라 시대의 판도에 지나지 아니하여 발해와 북계를 이루었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게 무너진 이후 수세기 동안 이 지방은 요(遼)·금(金)·원(元) 등 여러 이민족의 통치하에 놓여 있었다. 발해 멸망 당시 말갈족 집단인 여진(女眞)의 일부는 차차 남하하여 함흥 지방에까지 세력이 확대되어 고려와의 충돌이 잦았다. 원·명 교체기인 공민왕 말기에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실효를 거두어 지금의 함경남도 갑산에서 함경산맥의 동측을 따라서 두만강 하구 지방까지 수복하였다.
     1410년(태종 10) 두만강 하류의 경원성에 여진이 침공하였으므로 경원부를 경성으로 후퇴시키니 그 이북의 땅은 약 25년 동안 공허가 되었다.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가 육진(六鎭)을 개척하자 1440년(세종 22) 지난날 다온평(多溫平)이라 불리던 이곳에 온성군(穩城郡)이 신설되어 길주 남부와 안변 북부 사이의 여러 고을 백성을 이주시켰다. 1441년에는 도호부로 격상되어 판관을 두고 토관을 설치하였다. 1442년 진(鎭)이 설치되었고, 한때 고을 이름을 전성(氈城)으로 고쳤다가 다시 온성으로 불렀다. 1630년(인조 8) 유원토병(柔遠土兵) 양사복(梁士福)이 유배인과 모반하였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3년 다시 부로 환원되었다. 1895년 지방관제가 바뀌어 온성군으로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종래 경원군에 속하였던 훈융면이 이 군에 편입되었으며, 1937년 유포면을 남양면으로 고쳤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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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다섯 살이 넘은 사내. 장정이 된 사내. 조선시대에는 세금 납부 및 군역(軍役)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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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사가 간도에서 개간하는 주민들의 호구(戶口)및 개간지 면적까지 15일까지 보고를 마칠 것을 각 지역에 하달 자료번호 : gd.k_0001_0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