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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수(西頭水)·홍단수(紅短水)·정계비 일대 조사결과를 보고

 
    • 발송일1885년 11월 8일(음)
□ 조회(照會)하는 일 [주494]
편자주 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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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등초(照會謄抄)』에는 제목 앞에 문서의 성격을 나타내는 ‘청국 관원의 조회[華員照會]’라는 제목이 삽입되어 있다.


 지난달(1885년 9월) 13일 부사(府使)의 조복(照覆)을 받았는데 “번잡한 것은 생략할 것” 이외에 말미에 “이번에 정계비(定界碑)와 관련된 퇴(堆) 및 강의 근원을 조사하는 것은 이치상 응당 함께 조사해야 할 것이요, 각기 인원을 착출하여 길을 나누어 나아가서 공동(公同)으로 조사, 증험(證驗)한 후에 다시 가서 함께 상의하여 공(公)에 근거하여 경계를 결정하는 것이 참으로 타당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문건을 받은 즉시 서두수(西頭水)의 강 어구를 경유하여 길을 세 갈래로 나누어 나아가서 각기 조사하여 근거를 확인하였는데, 중국감계관 진영(秦煐)·가원계(賈元桂), 동 조선감계사 이(李) [주495]
편자주 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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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등초(照會謄抄)』에는 ‘이중하(李重夏)’라고 기재되어 있다.

, 수원(隨員) 최두형(崔斗衡)·최오길(崔五吉)은 중국에서 장백산(長白山)이라 부르고 조선에서 백두산(白頭山)이라 부르는 그 산의 남쪽 기슭 아래에 있는 석비(石碑) 한 개를 조사하였습니다. 이곳의 비석에는 새겨지기를 “분수령(分水嶺)”이라 하였습니다. 이 비석을 경유하여 동남쪽으로 가면 학항령(鶴項嶺)에 이릅니다. 중국에서는 황사령(黃沙嶺)이라고 부른다. 조선은 여기에서 고개의 북쪽을 향하면 장백산이란 곳에 가깝다. 분수령이라고 부르는 곳의 중간에는 허항령(虛項嶺) [주496]
편자주 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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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과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사이에 있는 고개. 높이 1,401m.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의 북단에 가까운 소백산(小白山, 2,174m)과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 사이에 위치하는 안부(鞍部)이다. 고개의 북쪽사면은 무산고원(茂山高原)으로 이어져, 두만강의 지류인 소홍만수(小紅滿水)의 상류계곡으로 통하고, 남쪽사면은 개마고원으로 이어지며 압록강의 상류 독산리에서 북쪽으로 분기하는 하곡과 연결된다. 따라서, 도로도 이들 하곡을 따라 개통되어 혜산에서 보천보(普天堡)·포태리(胞胎里)를 지나 이 고개에 이르고 다시 강두수(江頭水)를 거쳐 두만강 중류의 무산에 달한다. 허항령 산정에는 용암류(熔岩流)에 의한 물의 흐름을 막은 삼지연(三池淵)이 있다. 삼지연은 명승지로 알려져 있으며, 또 온천이 분출하므로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이 남쪽으로 학항령을 향해 있다. 비석 서쪽은 몇 무(武) [주497]
편자주 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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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단위. 1무(武)는 여섯 걸음의 거리를 가리킨다.

도 안 되어 도랑[溝] 하나가 있는데 서남쪽으로 가서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비석 동쪽은 몇 무도 안 되어 도랑 하나가 있는데 즉 이알력개(伊戞力蓋)의 상장(上掌)인데 중국어로 번역하면 황화송구자(黃花松溝子)가 된다. 이 도랑 아래가 장백산의 동쪽 기슭을 아우르고 북쪽으로 뻗어가는데, 그 동남쪽 언덕 위 상수(上首)에 석퇴(石堆)가 있고 하수(下首)엔 토퇴(土堆)가 있으며, 총 180여 리(里) [주498]
편자주 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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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등초(照會謄抄)』에 의하면 ‘개(箇)’의 착오이다.

이고 대각봉(大角峰) [주499]
편자주 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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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봉(臙脂峰)의 한 줄기이다.

도랑을 지나면 갑자기 좁아진다. 양쪽 언덕의 토퇴는 높이와 깊이가 수 장(丈)이다. 조선에서 부르기는 토문(土門)이 된다. 퇴(堆)가 끝나는 곳은 비석과의 거리가 90리이다. 이로부터 아래로 수십 리를 가면 이 도랑이 비로소 보인다. 물줄기는 다시 내려가 이 도랑 동쪽의 사을수(斜乙水) [주500]
편자주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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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을수(石乙水)’를 중국어 발음에 맞게 옮긴 것으로 보인다.

, 그 동쪽의 동유와책수(蕫維窩柵水) [주501]
편자주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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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단수(紅丹水)’를 중국어 발음에 맞게 옮긴 것으로 보인다.

와 합류하여 낭낭고(娘娘庫) [주502]
편자주 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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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양냥구(兩兩溝)’라는 지명이 보인다.

로 들어가고, 낭낭고는 서북쪽으로 가서 양 강의 어구에 도착하여 송화강(松花江)으로 들어간다. 또한 석비(石碑)에서 조금 남쪽에 토산(土山) 두 개가 있는 것을 조사하였는데 조선에서 가차을봉(可次乙峯)이라 부르고, 더 남쪽에는 연지봉(聯脂峯) [주503]
편자주 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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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등초(照會謄抄)』에 의하면 ‘연지봉(臙脂峯)’의 착오이다.

이 있으며, 더 남쪽으로는 소백산(小白山) [주504]
편자주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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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과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 2,174m. 마천령 산맥의 북단, 즉 백두산 산지의 남쪽 끝머리 봉우리에 해당된다. 북쪽에는 대연지봉(大密脂峰, 2, 360m)이 있으며, 동남쪽에는 허항령(虛項嶺, 1,401m)을 사이에 두고 북포태산 (北胞胎山, 2,289m) 산지와 대하고 있다. 산지가 높고 준험하여 식생은 동토대(凍土帶)와 비슷한 관목대(灌木帶)를 이루고 있으며, 곳곳에 침엽수림의 군락이 있으나 그 식물상은 빈약하다. 산지의 남쪽 사면은 압록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소백수(小白水)의 계류가 하각침식하여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으며 산지 사면은 황무지에 가깝다. 동남방향의 산지능선은 계속 이어져서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의 도계를 이루고 있으며, 심산유곡이므로 취락도 분포하지 않는다.

이 된다. 석비(石碑)가 있는 곳에서 거리가 40리이다. 그 소백산의 동북쪽 언덕에는 도랑 하나가 있는데, 도랑 바닥이 매우 넓다. 산 언덕을 따라 내려가 동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도랑의 형태가 점차 좁아져 여름에야 비로소 물이 흐릅니다. [주505]
편자주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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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쪽 언덕은 무봉(茂峰)이 된다. 그 북쪽 언덕은 대각봉(大角峯)이 되고 가지를 나누어 동쪽으로 가면 팔봉(八峯)이다. 팔봉에 이르면 동수(東首)가 (蕫維窩柵水)이다. 이 도랑의 물은 겨울이나 여름에 물이 끊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꺾어져 10리를 가서 물줄기가 평평한 산등성이의 난석당(爛石塘) 속으로 들어가면 보이지 않다가 또 수십 리를 가서야 물줄기가 다시 나오는데 이 물줄기 서쪽의 사을수(斜乙水)와 함께 사을수 서쪽의 이알력개수(伊戞力蓋水)가 합류하여 낭낭고(娘娘庫)로 들어가고 아래로 송화강(松花江)으로 들어간다. 또 사을수의 발원처를 조사하였는데, 곧 팔봉의 북쪽 언덕에 있었고 또 소백산 동북쪽 언덕의 분파(分派)가 무봉의 동남쪽 일대를 경유하여 동북쪽으로 가는데 모두 흐트러진 강이어서 오르고 잠복하는 것[起伏]이 보이지 않는다. 봉만(峯巒)에서 동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홍토산(紅土山)에 이른다. 이 산은 장백산과 동서로 서로 마주 바라보는데 떨어진 거리가 120리이다. 홍토산 동쪽은 곧 장산령(長山嶺)의 봉우리가 일어나는 곳이다. 홍토산을 경유해 서북쪽으로 5리를 가면 평평한 산등성이 위에 하나의 둥근 지대가 있는데, 지대의 양 끝은 각 2~3리이고 2개의 물줄기가 있습니다. 흐트러진 언덕을 통해 물이 나오고 홍토산을 감싸서 합류하며 장산령 남쪽면을 경유하여 동남쪽으로 꺾여 흘러 증산(甑山)의 북쪽을 경유하며 장파(長坡)를 거쳐 소홍단(小紅丹) 지방에 이르고 약 총 100여 리를 가서 홍단수(紅丹水)와 합류하여 아래로 도문강(圖們江)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진영 등이 이중하 등과 함께 같은 길을 따라 산, 물줄기, 비석, 퇴(堆)의 실재의 정형을 조사한 것이다. 중국 감계관(勘界官) 덕옥(德玉), 가원계(賈元桂)와 조선 종사관(從事官) 조창식(趙昌植), 수원 이후섭(李垕燮), 김우식(金禹軾)은 소백산 동남쪽을 조사했는데, 황사령은 동쪽으로 치우쳐 삼포(三泡)를 경유하여 해포(該泡)의 순령(順嶺)을 경유하고 서북쪽으로 가서 소백산을 지나 석비(石碑)에 이르니 약 130리이다. 그 포(泡) 서남쪽 15리에 작은 바위가 있는데 조선에선 허항령이라고 부른다. 더 서남쪽으로 약 30리를 가면 물줄기 하나가 있는데 조선에선 이면수(以湎水)라고 부른다. 고개의 언덕을 따라 아래로 서남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綠江)으로 들어간다. 그 포 동쪽은 고개의 언덕을 따라 아래로 동쪽으로 약 30리를 가면 온천이 용출하는데 곧 홍단수의 발원처이다. 이로부터 아래로 남쪽에는 도릉하(刀陵河), 판교하(板橋河), 유동(柳洞)이 있고 세 개 물줄기가 들어가서 꺾여서 동쪽으로 흘러 증산의 남쪽을 경유하여 노인봉(老人峯)을 거쳐 약 200여 리를 가면 소홍단에 이르고 홍토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와 합류하고 또 동남쪽으로 간다. 북쪽에는 홍기하(紅旗河)의 물줄기가 흘러들어가서 강구(江口) 지방에 이르고, 서두수(西頭水)와 합류하여 도문강이 된다. 조선에선 이것을 두만강(豆滿江)이라고 부른다. 이는 덕옥, 가원계가 조창식 등과 같은 길을 따라 산, 물줄기의 실재의 정형을 조사한 것이다. 또 접수하기를 중국 감계회도관(勘界繪圖官) 염영(廉榮)이 조선 수원 오원정(吳元貞)과 함께 조사하였는데, 황사령 위의 삼급포(三汲泡) 동남쪽의 포담산(蒲潭山)은 조선에선 보체산(寶髢山) [주506]
편자주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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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보다산(寶多山)’이란 지명이 보인다.

이라고 부르고 석비가 있는 곳과 거리가 약 180리이다. 이 산은 두 개가 있는데 그 동남쪽의 산 하나는 남보체(南寶髢)가 되고, 서북쪽의 산 하나는 북보체(北寶髢)가 된다. 양 산 중간에 있는 만령(漫嶺)의 서쪽 언덕에는 물줄기 하나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으로 들어가고, 만령의 동쪽 언덕에는 물줄기 하나가 있는데 동쪽으로 흐르니 곧 서두수 지류의 발원처이다. 북보체의 동북쪽 언덕에 물줄기 하나가 있는데 동남쪽으로 흐르고, 서보체 [주507]
편자주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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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등초(照會謄抄)』에 의하면 ‘남보체(南寶髢)’의 착오이다.

의 동쪽 언덕에는 물줄기 하나가 있는데 동쪽으로 흘러 수십 리를 가서 세 개의 물줄기가 합해져 하나가 되는 곳이며 동북쪽을 향해 흐른다. 또한 수십 리를 가서 판교의 아래에 있는 평보평(平甫坪) 상에 이르고 서두수의 경류(經流)와 서로 모여서 곧 동북쪽으로 꺾이고 흘러서 강구 지방에 이르며 홍단수와 함께 소홍단으로부터 홍단수의 홍토산 물줄기로 들어가 합류하여 도문강(圖們江)이 된다. 계산하면 포담산으로부터 강구지방에 이르기까지는 약 총 280여 리이다. 또한 서두수의 경류를 조사하는데 길이 멀고 눈이 깊어 전진할 수 없어 진실로 토인(土人)이 구두로 ‘이 물줄기의 발원처가 길주(吉州) [주508]
편자주 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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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세는 함경산맥(咸鏡山脈)과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의 교차점에 있어 서북부의 반은 산지로 되어 있다. 동쪽은 대소 구릉의 기복은 있으나 비교적 넓은 평원을 이루고 있고, 서북 방향에서 동남 방향으로 점차 낮아진다. 서북쪽 일부 지역은 편마암과 화강암 지질로 되어 있으나, 그 밖의 지역은 퇴적암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산은 설령봉(雪嶺峰, 1,836m)·고두산(高頭山, 1,988m)·두류산(頭流山, 2,309m)·만탑산(萬塔山, 2,205m) 등이다. 토양은 도내에서 비옥한 편에 속한다. 특히, 남대천 하류 이북은 길주·명천지구대를 형성하고, 남대천 유역에는 비교적 넓고 비옥한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서북 산악 지역과 동남 평야 지역의 기온차가 심하며, 연평균 기온 8℃, 1월 평균 기온 -9℃, 8월 평균 기온 21.8℃이다. 연 강수량은 670mm 내외이고,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도내 두만강 연변과 근접지 해안에서 구석기 시대로부터 신석기 시대 말기에 이르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도 선사 시대에 이미 시람이 살았으리라 짐작된다.
 『사기』에 따르면, 이곳은 숙신(肅愼)·읍루(分婁)·예맥(濊貊)·옥저(沃沮)·부여(夫餘) 등 여러 부족 국가가 있었다고 전하며,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699년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웠을 때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소속이었다. 고려 초기의 영역은 신라 시대의 영토를 계승하여 발해와 북계를 이루었다. 926년(태조 9) 발해가 거란(契丹)에 의하여 멸망된 후 수세기 동안 이 지역은 거란·금(金)·원(元)·명(明) 등 여러 이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고려 말에 이 지역에 토착해 있던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그 세력 범위를 두만강 하구에까지 확장하였다. 그리고 1390년(공양왕 2)에 지난날 해양(海洋, 三海洋·弓漢村)이라 불리던 이곳을 길주라 개칭하고, 영주(英州)·선화(宣化) 등의 진과 합쳐 만호부(萬戶府)를 두었다. 1398년(태조 7) 동북면의 주·군·현을 분정할 때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되었다. 1467년(세조 13) 이 고을 출신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킴으로 인하여 1469년(예종 1)에 길주를 길성(吉城)으로 개명하고 목을 현으로 강등시켰으며, 영평령 이북을 경계로 양분하여 명천현(明川縣)을 신설하였다.
 그 뒤 1512년(중종 7) 명천을 다시 길주와 합하고 목사와 판관을 두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명천현을 복귀시켰다. 1605년(선조 38)에 방어사를 두었으며, 1614년(광해군 6)에 목사를 겸직하도록 하였고, 1701년(숙종 27)에는 방어영을 성진으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에는 길주성에 왜군 본진이 주둔하였다. 관내 백탑·석성·모회·임명 등지는 관북 의병이 적을 요격하여 대첩을 거둔 격전지이며, 이 고을 출신 의병장으로는 허진(許珍)·김정국(金定國)·허대성(許大成) 등이 있다. 갑오개혁으로 지방관제가 바뀜에 따라 1895년 부가 군이 되었다. 1898년에 군의 서남쪽 설봉산 이남의 땅이 분리되어 성진군이 신설되었으나, 분군을 둘러싼 찬반 양파의 대립이 심하여 1904년 정부 조정으로 완전 분군이 되기까지 6년 동안 두 번의 합군이 있었다. 본래 7개 면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길성면과 영북면이 통합되어 길주면이 되었다. 혜산선(惠山線)과 백무선(白茂線) 철도가 개통된 이후에 산업·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1938년 길주면은 읍으로 승격하여 1개 읍 5개 면이 되었다. 1945년 당시 호수 2만109호, 인구 10만8317명에 이른다. 근대 인물로는 일찍이 북간도에 이주하여 간민회 분회장, 한족생계회 부회장, 광동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고,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의 외교단장으로 활약하면서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군에게 공급하는 등 항일 투쟁에 일생을 바친 서상용(徐相庸),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 운동을 하면서 항일 투쟁 전단을 국내에 반입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청진형무소에 수감 중 장기 정치범들과 모의하여 탈옥을 기도하였다가 다시 체포되어 중형에 처해진 전일(全一) 등 많은 독립 운동가가 있었다.

북방 경계의 학항령에 있고, 북쪽 언덕에서 흘러 강구 지방에 이르기까지 계산하면 약 400여 리이며, 학항령은 장백산의 석비가 있는 곳을 경유하여 분파와의 거리가 약 4~500리이다.’고 말한 것에 근거할 때 종합하면 황사령 서남쪽의 물줄기는 모두 압록강으로 돌아가고, 황사령 동북쪽의 물줄기는 소백산 이남으로부터 모두 도문강(圖們江)으로 돌아간다. 이는 염영이 오원정과 같은 길을 따라 산수의 실재의 정형을 조사한 것이다. 현재 세 길의 인원은 산, 물, 비석, 퇴(堆)를 가지고 조사하고 조사하여 증명하기를 명확히 할 것이니, 상세히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이설(貽說) [주509]
편자주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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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등초(照會謄抄)』에 의하면 ‘첩설(貼說)’의 착오이다.

하여 회동하고 영인(鈴印) [주510]
편자주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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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등초(照會謄抄)』에 의하면 ‘검인(鈐印)’의 착오이다.

하는 것이 응당 어떠할까. 실수 없이 경계를 정함으로써 분명히 밝히고 거듭 상의하는 것 이외에 응당 글을 갖추어 조회해야 할 일입니다.
 광서(光緖) 11년(1885, 고종 22) 11월 8일

 
주 494
『조회등초(照會謄抄)』에는 제목 앞에 문서의 성격을 나타내는 ‘청국 관원의 조회[華員照會]’라는 제목이 삽입되어 있다.
주 495
『조회등초(照會謄抄)』에는 ‘이중하(李重夏)’라고 기재되어 있다.
주 496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과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사이에 있는 고개. 높이 1,401m.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의 북단에 가까운 소백산(小白山, 2,174m)과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 사이에 위치하는 안부(鞍部)이다. 고개의 북쪽사면은 무산고원(茂山高原)으로 이어져, 두만강의 지류인 소홍만수(小紅滿水)의 상류계곡으로 통하고, 남쪽사면은 개마고원으로 이어지며 압록강의 상류 독산리에서 북쪽으로 분기하는 하곡과 연결된다. 따라서, 도로도 이들 하곡을 따라 개통되어 혜산에서 보천보(普天堡)·포태리(胞胎里)를 지나 이 고개에 이르고 다시 강두수(江頭水)를 거쳐 두만강 중류의 무산에 달한다. 허항령 산정에는 용암류(熔岩流)에 의한 물의 흐름을 막은 삼지연(三池淵)이 있다. 삼지연은 명승지로 알려져 있으며, 또 온천이 분출하므로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주 497
거리의 단위. 1무(武)는 여섯 걸음의 거리를 가리킨다.
주 498
『조회등초(照會謄抄)』에 의하면 ‘개(箇)’의 착오이다.
주 499
연지봉(臙脂峰)의 한 줄기이다.
주 500
‘석을수(石乙水)’를 중국어 발음에 맞게 옮긴 것으로 보인다.
주 501
‘홍단수(紅丹水)’를 중국어 발음에 맞게 옮긴 것으로 보인다.
주 502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양냥구(兩兩溝)’라는 지명이 보인다.
주 503
『조회등초(照會謄抄)』에 의하면 ‘연지봉(臙脂峯)’의 착오이다.
주 504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과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 2,174m. 마천령 산맥의 북단, 즉 백두산 산지의 남쪽 끝머리 봉우리에 해당된다. 북쪽에는 대연지봉(大密脂峰, 2, 360m)이 있으며, 동남쪽에는 허항령(虛項嶺, 1,401m)을 사이에 두고 북포태산 (北胞胎山, 2,289m) 산지와 대하고 있다. 산지가 높고 준험하여 식생은 동토대(凍土帶)와 비슷한 관목대(灌木帶)를 이루고 있으며, 곳곳에 침엽수림의 군락이 있으나 그 식물상은 빈약하다. 산지의 남쪽 사면은 압록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소백수(小白水)의 계류가 하각침식하여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으며 산지 사면은 황무지에 가깝다. 동남방향의 산지능선은 계속 이어져서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의 도계를 이루고 있으며, 심산유곡이므로 취락도 분포하지 않는다.
주 505
주 506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보다산(寶多山)’이란 지명이 보인다.
주 507
『조회등초(照會謄抄)』에 의하면 ‘남보체(南寶髢)’의 착오이다.
주 508
지세는 함경산맥(咸鏡山脈)과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의 교차점에 있어 서북부의 반은 산지로 되어 있다. 동쪽은 대소 구릉의 기복은 있으나 비교적 넓은 평원을 이루고 있고, 서북 방향에서 동남 방향으로 점차 낮아진다. 서북쪽 일부 지역은 편마암과 화강암 지질로 되어 있으나, 그 밖의 지역은 퇴적암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산은 설령봉(雪嶺峰, 1,836m)·고두산(高頭山, 1,988m)·두류산(頭流山, 2,309m)·만탑산(萬塔山, 2,205m) 등이다. 토양은 도내에서 비옥한 편에 속한다. 특히, 남대천 하류 이북은 길주·명천지구대를 형성하고, 남대천 유역에는 비교적 넓고 비옥한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서북 산악 지역과 동남 평야 지역의 기온차가 심하며, 연평균 기온 8℃, 1월 평균 기온 -9℃, 8월 평균 기온 21.8℃이다. 연 강수량은 670mm 내외이고,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도내 두만강 연변과 근접지 해안에서 구석기 시대로부터 신석기 시대 말기에 이르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도 선사 시대에 이미 시람이 살았으리라 짐작된다.
 『사기』에 따르면, 이곳은 숙신(肅愼)·읍루(分婁)·예맥(濊貊)·옥저(沃沮)·부여(夫餘) 등 여러 부족 국가가 있었다고 전하며,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699년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웠을 때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소속이었다. 고려 초기의 영역은 신라 시대의 영토를 계승하여 발해와 북계를 이루었다. 926년(태조 9) 발해가 거란(契丹)에 의하여 멸망된 후 수세기 동안 이 지역은 거란·금(金)·원(元)·명(明) 등 여러 이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고려 말에 이 지역에 토착해 있던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그 세력 범위를 두만강 하구에까지 확장하였다. 그리고 1390년(공양왕 2)에 지난날 해양(海洋, 三海洋·弓漢村)이라 불리던 이곳을 길주라 개칭하고, 영주(英州)·선화(宣化) 등의 진과 합쳐 만호부(萬戶府)를 두었다. 1398년(태조 7) 동북면의 주·군·현을 분정할 때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되었다. 1467년(세조 13) 이 고을 출신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킴으로 인하여 1469년(예종 1)에 길주를 길성(吉城)으로 개명하고 목을 현으로 강등시켰으며, 영평령 이북을 경계로 양분하여 명천현(明川縣)을 신설하였다.
 그 뒤 1512년(중종 7) 명천을 다시 길주와 합하고 목사와 판관을 두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명천현을 복귀시켰다. 1605년(선조 38)에 방어사를 두었으며, 1614년(광해군 6)에 목사를 겸직하도록 하였고, 1701년(숙종 27)에는 방어영을 성진으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에는 길주성에 왜군 본진이 주둔하였다. 관내 백탑·석성·모회·임명 등지는 관북 의병이 적을 요격하여 대첩을 거둔 격전지이며, 이 고을 출신 의병장으로는 허진(許珍)·김정국(金定國)·허대성(許大成) 등이 있다. 갑오개혁으로 지방관제가 바뀜에 따라 1895년 부가 군이 되었다. 1898년에 군의 서남쪽 설봉산 이남의 땅이 분리되어 성진군이 신설되었으나, 분군을 둘러싼 찬반 양파의 대립이 심하여 1904년 정부 조정으로 완전 분군이 되기까지 6년 동안 두 번의 합군이 있었다. 본래 7개 면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길성면과 영북면이 통합되어 길주면이 되었다. 혜산선(惠山線)과 백무선(白茂線) 철도가 개통된 이후에 산업·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1938년 길주면은 읍으로 승격하여 1개 읍 5개 면이 되었다. 1945년 당시 호수 2만109호, 인구 10만8317명에 이른다. 근대 인물로는 일찍이 북간도에 이주하여 간민회 분회장, 한족생계회 부회장, 광동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고,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의 외교단장으로 활약하면서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군에게 공급하는 등 항일 투쟁에 일생을 바친 서상용(徐相庸),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 운동을 하면서 항일 투쟁 전단을 국내에 반입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청진형무소에 수감 중 장기 정치범들과 모의하여 탈옥을 기도하였다가 다시 체포되어 중형에 처해진 전일(全一) 등 많은 독립 운동가가 있었다.
주 509
『조회등초(照會謄抄)』에 의하면 ‘첩설(貼說)’의 착오이다.
주 510
『조회등초(照會謄抄)』에 의하면 ‘검인(鈐印)’의 착오이다.
 
지명
長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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