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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에서 토문강(土門江)과 두만강(豆滿江) 문제와 관련해 청국 관원과 감계사 일행이 논쟁

 
    • 발송일1885년 10월 6일(음)
□ 10월 초 6일 무산(茂山)에서의 필담(筆談)
 ○ 내가 말하기를, “옛날 정계비(定界碑)의 경계를 표한 것(標限)은 즉 비(碑)와 퇴(堆)였습니다. 이번에 먼저 비계(碑界)를 살펴 만약 두만강(豆滿江)이 경계가 되면 다시 조사할 것이 없을 것이고 토문(土們)을 경계로 할 것 같으면 다시 서로 가부를 상의함 타당합니다. 이제 하류(下流)의 지도(圖繪) 작성에 날을 보내 백산(白山 : 白頭山)에 눈이 쌓이게 되면 감계(勘界)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모름지기 사세를 깊이 헤아려서 먼저 비계(碑界)를 조사한 후에 강의 원류(江源)을 그려서 국사(國事 [주423]
편자주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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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事’의 誤字일 것이다.

)를 완수하여 인명(人命)을 상하지 않게 할 것 같으면 매우 다행이고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청국 관원이 말하기를, “토문강(土們江)과 두만강은 실로 하나의 물(一水)이라는 것은 [주424]
편자주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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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년(英祖 33) 조선인 범월사건을 조사하면서 청(淸) 예부(禮部)에서 범인들이 말하는 두만강에 대해 묻는 자문(咨文)을 조선에 보냈는데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두만(豆滿)과 토문(土門)은 같은 것이며 한 강에 두 이름이 있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同文彙考』권57, 犯越編 乾隆 22년 12월 초6일 回咨(국사편찬위원회 편, 『同文彙考』2, 1103~1104쪽). “至於豆滿江土門江之名稱相左 小邦北界一帶水 國俗謂之豆滿江諸囚之 供稱豆滿江卽大國所稱土門江也 (중략) 可知一江而二名也” 이같이 조선후기에 두만(豆滿)과 토문(土門)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것은 백두산 지역에 대한 지리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토문과 도문은 별개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강석화, 앞의 책, 57쪽 참조). 『龍飛御天歌』권7 제53장 註. 태조 이성계에게 귀부한 여진부족장의 이름 ‘土門猛安 古論孛里’에서 토문(土門)에 대해 주에 “토문(土門)은 지명이며 두만강(豆漫江) 북쪽에 있다. 남쪽으로는 경원(慶源)과 60리 떨어져있고 서쪽으로는 상가하(常家下)에서 하룻길이다.” “土門 地名 在豆漫江之北 南距慶源六十里 西距常家下 一日程也”.

총서(總署) 주의(奏議)에서 이미 명확히 했는데 어찌 다시 상량(商量)하는 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본국처(本局處)에서 다행히 저희들을 파견해 토문강 변계(邊界)를 사감(査勘)하게 했고 조선국왕이 우리 예부(禮部)에 자문(咨文)하면서 또한 관원을 파견(派員)해 토문강 구계(舊界)를 사감(査勘)하는 것을 청해서 와서 처리했던 것입니다. 공평하게 모름지기 총서(總署) 공문(公文)을 따를 일이지 감히 달리 이의(異議)를 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회령(會寧)에서 정한 의논을 행하는 것이 며칠도 안됐는데 어찌 중간에 바뀌는 것이 용납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내가 말하기를, “토문(土們)의 지형에 대한 답감(踏勘)은 응당 이를 먼저 알아야합니다. 일 보다 앞서 장황하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국왕 자문(咨文)중에 이르기를, ‘토문강 구계(舊界)를 조사해 명확히 한다(査明)’라는 말이 있고, 총서(總署) 공문(公文) 끄트머리에 있는데 이르기를, ‘해당 장군에게 명을 내려 계지(界址)를 조사해 명확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구계(舊界)를 조사해 명확히 한다고 하는 것은 비를 세운 구지(舊址)입니다. 계지(界址)를 조사해 명확히 한다고 하는 것은 또한 정계(定界)의 구지(舊址)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계(碑界)를 한번 보고 먼저 당초의 정계를 표한것(標定)을 살펴보면 자연히 공정한 판단(公辦)이 있을 것입니다. 두만 하류에 이르게 되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것을 논할 것이 없으니 하필 고되게 먼저 그릴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황공하나 일에는 앞뒤가 있는 것이니 까닭에 충고(忠告)하고 우러러 의논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 청국 관원이 말하기를, “총서(總署) 주의(奏議) 끝부분은 칙명(勅命)을 청하는 것으로서(請旨) 길림장군(吉林將軍)에게 명을 내려 강희년간(康熙年間) 당안(檔案)을 조사하라는 것이었지 관원을 파견해 비석을 조사하는 것을 요청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계지(界址)를 조사해서 밝힌다고 한 것에서 가려진 글 속의 어귀는 토문강 계지(界址)를 조사해 밝힌다는 것입니다. 조선국왕의 자문(咨文)에 이미 있으니 그 안에 이르기를, ‘토문강 계지(界址)를 조사해 명확히 한다’고 하였는데 부사(府使)는 어찌 함부로 고쳐서 ‘먼저 비(碑)와 퇴(堆)를 조사한다’고 합니까? 회령(會寧) 있을 때 이미 의론을 거쳐 명백하니 이번은 토문강 구계(舊界)를 조사하기 위해서이니 강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425]
편자주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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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에 ‘不’자가 결락된 듯하다.

종성부(鍾城府)가 전에 이미 비석을 가지고서 말했으니 비석 또한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토문강(土門江)의 해랑하(駭浪河)라는 주장하는바 또한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부사가 굳게 먼저 비석부터 조사하자고 하고 강을 조사하지 않으니 본국처(本局處)는 아직 공문(公文)을 접수받지 않았습니다. 감히 그대의 명을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순서에 따라 어구(語句)를 배열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함부로 고쳤다(擅改)’고 하는 것은 거의 적절히 가려낸 것에 가까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분수령(分水嶺) 일비(一碑)가 없었다면 즉 다시 어찌 길림과 조선의 표계(標界)가 있었을 것이며 또한 어찌 오늘의 논변(論卞)이 있겠습니까? 경계를 조사하고자 하면 비석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눈앞에 도리가 훤히 드러나서 쉽게 보이는데 매번 비를 조사하고는 나머지 일을 하게 되니 실로 괴이하고 의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비계(碑界)를 조사하면 동쪽과 서쪽의 수원(水源)에 대해서도 저절로 당연히 증험되는 것입니다. 비를 조사하고 강을 조사하는 것은 즉 한 가지 일이면서도 일의 앞과 뒤이니 차례로 마땅히 먼저 비석을 조사해야 하므로 까닭에 이같이 자세하게 의견을 말한 것이니 어찌 살펴 알지 않습니까? 해랑하(駭浪河) 하류는 두만강에 합쳐지고 상원(上源)은 하반령(下盤嶺)으로부터 나옵니다. 처음부터 비석 동쪽 수원(水源)과 서로 맞닿지 않음에 대해서는 앞서 이미 우러러 말씀드렸는데 하필 또 제기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 청국 관원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천자의 재가를 받아 파견되어(奏派) 다 총서(總署) 주의(奏議)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의(奏議)에 이미 이르기를, ‘토문강(土門江) 계지(界址)를 조사한다(査勘) 하였습니다. 강의 상하 원류(源流)를 조사하는 것이고 이것은 이 제목(題)의 정문(正文) [주426]
편자주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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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나 책 따위의 본문을 말한다.

입니다. 비석을 조사하는 것은 이 일의 여파(餘派)로 정문(正文)을 고증하는 것입니다. 부사는 문예(文藝)로써 과거에 급제하고 이름나고 높은 벼슬하기에 세상에 글 지은 것을 거의 보았을 것인데 먼저 정문(正文)을 버리고는 글을 짓지 못하는데 급히 여파를 쓰는 것을 보았습니까? 하물며 이번은 총서(總署)가 의론해 상주(議奏)하고 군기대신(軍機大臣)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조서의 맺음말을 의논한 것에 의한 것이니 우리들이 이 일을 처리하는 데 만약 총서(總署)의 의론(議)에 위배하면 이것은 황제의 명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본국처(本局處)는 부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황제의 명을 어기는 죄를 범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양해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 내가 말하기를, “옛날 성조(聖朝)에서 정계(定界)를 돌에 새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석 [주427]
편자주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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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말한다.

은 즉 경계를 나누는(分界) 근본입니다. 경전(經)에서 비유하면 비석은 정문(正文)이고 강은 각주(註脚)입니다. 어찌 비가 여파(餘派)가 될수 있겠습니까? 합하(閤下)는 경전을 연구하는데 연륜이 있어 정문과 각주의 구별이 어찌 밝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에 이 비유를 한 것입니까. 하물며 비면(碑面)에 봉지(奉旨) 글자는 즉 강희 성조(康熙聖祖)의 성지(聖旨)입니다. 훤히 빛나는 새김(鐫刻 : 비석)은 옛날(千古)을 증거할 수 있는데 지금 논한 바 여파(餘派)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그 옳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릇 피차를 논할 것 없이 이번에 혹 물의 흐름을 찾아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고 혹 원류에서 물 흐름에 따라 내려가더라도 모두 이미 부득이한 일반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눈 앞에 일이 되어가는 형세는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 청국 관원이 말하기를, “경전을 연구하는데 연륜이 있다고 하니 내가 어찌 감히 돌아보아 비석은 정문이고 강은 각주가 된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미안한 일입니다. 비유하면 오경사서(五經四書) [주428]
편자주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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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오경(四書五經) 즉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의 사서(四書)와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오경(五經)을 말한다.

는 반드시 먼저 큰 글자[大字]가 있어서 정문(正文)이 되고 뒤에 작은 글자[小字]가 있어서 각주(註脚 [주429]
편자주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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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脚註)와 같은 말이다.

)가 됩니다. 부사는 생각해 보십시오. 강이 먼저 있었습니까? 비석이 먼저 있었습니까? 먼저 강이 있고서 뒤에 비석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강이 각주가 된다고 하였는데 강 속에 애초에 각주를 붙여 본문(正文)의 뜻을 밝힌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어느 곳에 비석이 있습니까? 비석 위에는 각주를 붙여 본문의 뜻을 밝힌다고 들었는데, 동쪽으로는 토문강(土門江)이 되고 서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렷하고 똑똑히 비석이 강의 각주가 됨입니다. 부사가 강이 각주가 된다는 말씀은 특히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내가 말하기를, “합하(閤下) [주430]
편자주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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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정1품의 벼슬아치를 높이어 이르는 말이나 여기서는 상대방을 높이어 부른는 의미로 보인다.

는 문자(文字)놀이를 잘하셔서 이같이 잘 해학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릇 제왕(帝王)이 처음 일어남에는 강산토지(江山土地)가 다 마름질하는 중에 들어가는 것이니 성지(聖旨)를 받들어 또렷하고 똑똑히 어디로부터 어디까지라고 기록하여 실은 것 이것은 해와 별 같은 경문(經文)이라고 이를만합니다. 산과 물 같은 것은 그 기록하는 바에 따라서 혹은 큰 나라(大邦)에 도 있고 혹은 작은 나라에도 있어 각파(各派)의 주소(註疏) [주431]
편자주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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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이나 고전의 원문(原文)에 후세 사람들이 해석과 관련된 설명 등을 붙이는 일을 말한다.

라고 이르니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 청국 관원이 말하기를, “강의 흐름은 하나가 아니다. 따라서 모름지기 조사해서 밝힌 후에 주소(註疏)에 비로소 증거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번에 강을 조사해 토문강(土門江)의 주부자(朱夫子) [주432]
편자주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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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인 주희(朱熹)를 높이어 이르는 말이다. 주희에 이르러서 유학의 주요 경전에 대한 주소(註疏)가 정리되고 신유학(新儒學)이 시작되었으므로 이를 비유해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

가 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433]
편자주 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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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사문답』의 행간 첨지에는 “두만강 상하 원류를 갖추어 상세하게 그려내서 이로서 定界하고 碑·堆는 등한히 두려는 것이다(豆滿上下源流 備細繪寫 欲以此定界 而寘碑堆於等閒也)”라고 기록했다.



 
주 423
‘圖事’의 誤字일 것이다.
주 424
1757년(英祖 33) 조선인 범월사건을 조사하면서 청(淸) 예부(禮部)에서 범인들이 말하는 두만강에 대해 묻는 자문(咨文)을 조선에 보냈는데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두만(豆滿)과 토문(土門)은 같은 것이며 한 강에 두 이름이 있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同文彙考』권57, 犯越編 乾隆 22년 12월 초6일 回咨(국사편찬위원회 편, 『同文彙考』2, 1103~1104쪽). “至於豆滿江土門江之名稱相左 小邦北界一帶水 國俗謂之豆滿江諸囚之 供稱豆滿江卽大國所稱土門江也 (중략) 可知一江而二名也” 이같이 조선후기에 두만(豆滿)과 토문(土門)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것은 백두산 지역에 대한 지리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토문과 도문은 별개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강석화, 앞의 책, 57쪽 참조). 『龍飛御天歌』권7 제53장 註. 태조 이성계에게 귀부한 여진부족장의 이름 ‘土門猛安 古論孛里’에서 토문(土門)에 대해 주에 “토문(土門)은 지명이며 두만강(豆漫江) 북쪽에 있다. 남쪽으로는 경원(慶源)과 60리 떨어져있고 서쪽으로는 상가하(常家下)에서 하룻길이다.” “土門 地名 在豆漫江之北 南距慶源六十里 西距常家下 一日程也”.
주 425
原文에 ‘不’자가 결락된 듯하다.
주 426
문서나 책 따위의 본문을 말한다.
주 427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말한다.
주 428
사서오경(四書五經) 즉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의 사서(四書)와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오경(五經)을 말한다.
주 429
각주(脚註)와 같은 말이다.
주 430
원래 정1품의 벼슬아치를 높이어 이르는 말이나 여기서는 상대방을 높이어 부른는 의미로 보인다.
주 431
경전이나 고전의 원문(原文)에 후세 사람들이 해석과 관련된 설명 등을 붙이는 일을 말한다.
주 432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인 주희(朱熹)를 높이어 이르는 말이다. 주희에 이르러서 유학의 주요 경전에 대한 주소(註疏)가 정리되고 신유학(新儒學)이 시작되었으므로 이를 비유해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
주 433
『감계사문답』의 행간 첨지에는 “두만강 상하 원류를 갖추어 상세하게 그려내서 이로서 定界하고 碑·堆는 등한히 두려는 것이다(豆滿上下源流 備細繪寫 欲以此定界 而寘碑堆於等閒也)”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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