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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사등록

청국 측에서 양 국 경계를 공동으로 조사할 것을 제의

  • 발송일
    1885년 10월 1일(음)(乙酉十月初一日)
□ 乙酉(1885, 高宗22) 10월 초 1일
 ○ (청국 관원이 말하기를) “서술한 바 각절(各節)은 일일이 자세히 검토했습니다. 본초간국(本招墾局)은 전에 홍남주(洪南周) 부사(府使)주 397
편자주 397)
1869(고종 6), 회령부사(會寧府使) 홍남주(洪南周)는 민생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월강(越江) 개간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주민들을 동원하여 개간청원서를 내게 하고 이를 허용하는 형식을 빌어서 두만강 대안지역을 개간하게 하였다고 한다(강석화, 앞의 책, 281쪽). 지방관이 주민들의 범월과 집단 이주를 조장하는 경우로도 볼수 있으나(강석화, 위의 글), 간도지역에 대한 영토의식의 결과로도 볼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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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처리한 것이 자세합니다. 요컨대 이 일은 총서(總署)가 의논한 바 도문강(圖們江) 상하원류(上下源流)와 소국문강(小國們江주 398
편자주 398)
‘小圖們江’의 오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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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그대로 따를 일이 아니고, 전 종성부사(鍾城府使) 이정래(李正來)가 지적한 바의주 399
편자주 399)
1883년 길림혼춘초간국사무(吉林琿春招墾局事務) 진영(秦煐)은 간도(間島)의 조선인들을 모두 쇄환할 것을 요구하자 당시 간도 조선인들은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름을 그들에게 해명하고 백두산에 가서 정계비 부근과 토문강 원류 일대를 직접 답사하고 그 자료를 가지고 당시 종성부사(鍾城府使) 이정래(李正來)에게 호소한바 있는데 이와 관련된 사실일 것이다. 金魯奎, 『北輿要選』下, 「探界公文攷」. “성상(聖上 : 高宗) 임오(壬午 : 1882) 겨울 청나라 길림장군(吉林將軍)은 우리나라에 공문을 보내 이르기를, ‘유지(諭旨)에 따라 토문강(土門江) 이서(以西) 이북(以北)에서 개간한 조선 빈민(貧民)을 쇄환하라.’고 하였다. 계미(계미 : 1883) 4월, 또 돈화현(敦化縣) 고시(告示)에서 종성(鍾城)·회령(會寧) 두 읍 월변(越邊)에서 백성들은 깨끗이 다 돌아가라하니 이에 변민(邊民)은 비로소 돈화현이 두만강(豆滿江)을 토문강(土門江)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에 백두산에 비석이 세워진 곳에 가서 살펴보니 비 동쪽에 연이어 석퇴(石堆)와 목책(木柵)이 있고 석퇴(石堆)·토퇴(土堆)가 한계가 되었고 아래에는 토문(土門)이 있는데 양쪽 언덕에 문과같이 마주보고 있었는데 돌도 흙도 아니었다. 그 아래에 물이 있는데 발원하는 곳이 별도로 다른 물줄기가 만들어졌고 이물의 합류처는 강 언덕길이 끊어져서 물을 따라서는 돌아올 수가 없었다.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무산(茂山) 4읍의 변민(邊民)은 종성부사(鍾城府使) 이정래(李正來)에게 호소했다.” “聖上壬午冬 淸吉林將軍行文我國云 遵旨令刷還土門江以西以北佔墾之朝鮮貧民 癸未四月 又自敦化縣告示 鍾城會寧兩邑越邊 使民歸回淨盡 於是邊民始知敦化縣之誤認豆滿爲土門 乃往審白頭山立碑處 碑東連置石堆木柵 石堆土堆爲限 下有土門 兩岸對立如門 非石而土 其下有水 發源另作別派 此水之合流處 江岸路絶 不能沿流而歸 鍾城穩城會寧茂山四邑邊民 合訴于鍾城府使李正來” 강석화, 앞의 책, 283쪽 주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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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비와 아울러 그 지도 중에 실린 각 산과 각 물은 일일이 공동(公同)으로 실제 조사(履勘)하고 그림 그리는 도구와 자세한 그림에 상세히 사정을 참작해서 처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론(定論)을 할 수 없으니 다만 종이위에 빈문서를 만든 것이니 무익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주 400
편자주 400)
이하에 대해서 본문에서는 별다른 구분이 없으나, 『감계사문답』이나 『문답기』에서는 ‘我曰’이라고 구분하고 있는데 문맥상으로 보아도 구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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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말하기를) “산과 물과 비석과 퇴(堆) 같은 것은 일일이 공동으로 실지 조사하고 지도를 그리고 문서를 작성해서 처리하고 사리에 맞게 판별하여 밝히고 바르게 처리되는 것을 상의해야 합니다. 지금은 즉 오직 마땅히 산에 오른 날짜를 일찍 정하는 것이 타당하니 이외에는 무슨 다른 의론이 있겠습니까? 해랑하(駭浪河)가 비석 곁의 수원(水源)과 서로 접하지 않는다는 말은 비로소 이미 논하여 깨뜨렸으니 다시 살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편자주 397)
    1869(고종 6), 회령부사(會寧府使) 홍남주(洪南周)는 민생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월강(越江) 개간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주민들을 동원하여 개간청원서를 내게 하고 이를 허용하는 형식을 빌어서 두만강 대안지역을 개간하게 하였다고 한다(강석화, 앞의 책, 281쪽). 지방관이 주민들의 범월과 집단 이주를 조장하는 경우로도 볼수 있으나(강석화, 위의 글), 간도지역에 대한 영토의식의 결과로도 볼수 있겠다.바로가기
  • 편자주 398)
    ‘小圖們江’의 오자일 것이다.바로가기
  • 편자주 399)
    1883년 길림혼춘초간국사무(吉林琿春招墾局事務) 진영(秦煐)은 간도(間島)의 조선인들을 모두 쇄환할 것을 요구하자 당시 간도 조선인들은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름을 그들에게 해명하고 백두산에 가서 정계비 부근과 토문강 원류 일대를 직접 답사하고 그 자료를 가지고 당시 종성부사(鍾城府使) 이정래(李正來)에게 호소한바 있는데 이와 관련된 사실일 것이다. 金魯奎, 『北輿要選』下, 「探界公文攷」. “성상(聖上 : 高宗) 임오(壬午 : 1882) 겨울 청나라 길림장군(吉林將軍)은 우리나라에 공문을 보내 이르기를, ‘유지(諭旨)에 따라 토문강(土門江) 이서(以西) 이북(以北)에서 개간한 조선 빈민(貧民)을 쇄환하라.’고 하였다. 계미(계미 : 1883) 4월, 또 돈화현(敦化縣) 고시(告示)에서 종성(鍾城)·회령(會寧) 두 읍 월변(越邊)에서 백성들은 깨끗이 다 돌아가라하니 이에 변민(邊民)은 비로소 돈화현이 두만강(豆滿江)을 토문강(土門江)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에 백두산에 비석이 세워진 곳에 가서 살펴보니 비 동쪽에 연이어 석퇴(石堆)와 목책(木柵)이 있고 석퇴(石堆)·토퇴(土堆)가 한계가 되었고 아래에는 토문(土門)이 있는데 양쪽 언덕에 문과같이 마주보고 있었는데 돌도 흙도 아니었다. 그 아래에 물이 있는데 발원하는 곳이 별도로 다른 물줄기가 만들어졌고 이물의 합류처는 강 언덕길이 끊어져서 물을 따라서는 돌아올 수가 없었다.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무산(茂山) 4읍의 변민(邊民)은 종성부사(鍾城府使) 이정래(李正來)에게 호소했다.” “聖上壬午冬 淸吉林將軍行文我國云 遵旨令刷還土門江以西以北佔墾之朝鮮貧民 癸未四月 又自敦化縣告示 鍾城會寧兩邑越邊 使民歸回淨盡 於是邊民始知敦化縣之誤認豆滿爲土門 乃往審白頭山立碑處 碑東連置石堆木柵 石堆土堆爲限 下有土門 兩岸對立如門 非石而土 其下有水 發源另作別派 此水之合流處 江岸路絶 不能沿流而歸 鍾城穩城會寧茂山四邑邊民 合訴于鍾城府使李正來” 강석화, 앞의 책, 283쪽 주94 참조.바로가기
  • 편자주 400)
    이하에 대해서 본문에서는 별다른 구분이 없으나, 『감계사문답』이나 『문답기』에서는 ‘我曰’이라고 구분하고 있는데 문맥상으로 보아도 구분해야 할 것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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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 측에서 양 국 경계를 공동으로 조사할 것을 제의 자료번호 : gd.k_0001_0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