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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계사등록

안무영에서 청국 관원들과 감계사 일행들의 접대 준비 및 진행과정에 대해 각 지역에서 신속히 보고할 것을 통보

  • 발신자
    按撫營
  • 발송일
    1885년 9월 18일(음)(乙酉九月十八日)
□ (9월) 19일 도부(到付)한 안영(按營)의 감결(甘結)
 감계사 일행이 금일 경성(鏡城)주 197
편자주 197)
고려 이전에는 우롱이(亐籠耳)이었는데, 윤관(尹瓘)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9성(九城)을 설치하면서 군(郡)이 되었다. 1398년(태조 7)에 비로소 군(郡)을 설치하였다. 경성의 명산(名山)은 백두산이다. 5월이 되어야 눈이 비로소 녹기 시작하고, 7월이 되면 다시 눈이 있다. 용성천(龍城川) 근원이 오음회(吾音會)의 여이현(餘伊峴)에서 나와 남쪽으로 1백 20여를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를 5리, 서쪽으로 야인의 동량북(東良北) 지경인 백산(白山)에 이르기를 90리, 남쪽으로 길주(吉州) 운가위천(雲加委川)에 이르기를 82리, 북쪽으로 경원(慶源) 두롱이현(豆籠耳峴)에 이르기를 58리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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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당도했는데, 처음에는 무산으로 길을 인도했다. 지금 혼춘부도통(琿春副都統)의 조회(照會)를 접하니, 경계를 살피고 판정하는 일을 위하여 길림(吉林)주 198
편자주 198)
중국 지린 성[吉林省]에 있는 도시이다. 쑹화 강[松花江] 상류의 왼쪽 기슭에 있으며 주변은 구릉지대로 둘러싸여 있다. 지린 성의 성도인 창춘[長春]에서는 동쪽으로 100km 떨어져 있다. 지린은 만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본래는 만주의 여진족인 울라부(部)의 영역에 속한 작은 마을이었다. 1651년 청나라는 러시아가 헤이룽 강[黑龍江] 지역으로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이곳에 조선소를 세우고 헤이룽 강의 지류인 쑹화 강의 방어와 운송을 위해 쓸 배를 만들었다. 1973년 지린은 요새화되었으며, 1676년에는 영고탑(寧古塔:지금의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닝안[寧安])에 있던 청군 사령부가 옮겨왔다. 시가지는 1723~1734년에 일시적으로 일반행정구역인 주(州)로 되었으나, 성벽이 둘러지고 부(府)로 승격한 1882년까지는 군사지역이었다. 17세기말 이 지역에 역참(驛站)제도가 세워졌으나, 1913년 창춘으로 가는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육지 교통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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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칙파(飭派)된 독리상무위원(督理商務委員) 진영(秦煐), 혼춘(琿春)에서 간파(揀派)된 승판처(承辦處) 덕옥(德玉), 변황사(邊荒事) 가원계(賈元桂)가 급히 모이기 위하여 본월 11일 길을 떠났다고 한다. 진(秦) 독리(督理)는 이미 화룡골[花龍峪]에 머물고 있고, 덕옥(德玉)과 가원계(賈元桂) 두 관원도 여기에서 일제히 모이기로 했는데, 날짜를 계산해보니 이미 도착했을 것 같다. 일의 형세가 급박하고 갈 길이 아득하니 감계사 일행이 여기에서 급히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회령으로 길을 안내한 연후에 청국 관원들과 더불어 모여 살펴 판정할 것이다. 노문(路文)은 감계사 일행이 도착한 후에 마땅히 발송할 것이므로 해당 읍의 지공영(支供營)주 199
편자주 199)
음식물을 제공하는 군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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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반드시 번거롭게 신칙할 필요는 없으며, 백두산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하고 멀다. 강을 건넌 후의 접대가 가장 중요하고 근심스러운 일인데, 만약 한 두 읍이 전적으로 담당하게 하면 폐해만이 생길 뿐만 아니라 형세가 실로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이에 감결(甘結)을 발급한다. 뒤에 여러 물품 종류를 적어두니 속히 갖추어 준비했다가 감계사의 통지를 기다려 그 도착한 곳에 따라 계속해서 수송함에 지체되거나 생경(生梗)한 폐단이 없도록 할 것이다. 감결이 도착한 일시와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즉시 보고할 일이다.
 을유(1885년, 고종 22) 9월 18일 진시(辰時) 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
 (문서)뒷면
 【회령(會寧)】
백미(白米)주 200
편자주 200)
하얗게 도정한 쌀이며 논에서 수확한 쌀을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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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석
전미(田米)주 201
편자주 201)
밭에서 직파법으로 파종하여 수확한 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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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석
 된장 1석
 소금 10두
 북어 150급(級)주 202
편자주 202)
‘두름’이라 말하며, 물고기 20마리를 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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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린미역 600꼭지(曲之)
 돈 200냥
 말먹이 콩 2석
 귀리 3석
 【종성(鍾城)】
 백미 2석
 전미 10석
 된장 1석
 소금 10두
 돈 300냥
 말먹이 콩 2석
 귀리 3석
 【온성(穩城)주 203
편자주 203)
조선초까지 다온평(多溫平)으로 불리다가 1440년(세종 22)에 처음으로 군(郡)을 설치하고 온성이라고 호칭하였다. 이 때 군을 설치하면서 경원(慶源) 및 길주(吉州) 이남에서 안변(安邊) 이북까지의 각 고을의 민호(民戶)를 옮겨 거주시켰다. 1441년에 도후부(都護府)로 승격시켜 판관(判官)을 두고, 또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1442년에 진(鎭)을 설치하여 절제사(節制使)를 겸하게 하였다. 경내의 사방 경계는 동남쪽으로 경원(慶源)의 경관령(慶關嶺)에 이르며, 서쪽으로 종성(鍾城) 지경에 이르고, 남쪽으로 덕천보(德川堡)에 이르고, 북쪽으로 두만강에 이른다. (『세종실록』, 「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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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미 4석
 전미 5석
 소금 10두
 된장 1석
 돈 300냥
 말먹이 콩 2석
 귀리 3석
 【무산(茂山)】
 전미(田米) 10석
 된장 1석
 돈 300냥
 말먹이 콩 2석
 귀리 3석
 이 중에 인원과 마필은 비록 미리 헤아리기 어려우나, 인원의 경우 감계사 일행 및 해당 읍은 각각 100명을 차비(差備)주 204
편자주 204)
특별한 사무를 맡기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하는 일로서 그 신분에 따라 차비관(差備官), 차비군(差備軍), 차비노(差備奴) 등이 있었다. 각 관사의 최하급 고용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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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말은 20필을 마련하는데 왕복 한 달을 기한으로 한다. 비용의 충족 여부는 임시변통으로 하거니와, 여정(旅程) 중에 사용할 기구(器具) 등은 회령(會寧)에서 담당하고 등산할 때의 유숙(留宿)과 휴식하는 일 등은 무산에서 담당한다. 그 나머지 각 읍은 물품 종류 이외에 솔인(率人) 몇 명과 짐꾼 5~6명씩을 거느려 대기하고 있으되, 여러 날 여행의 고단함으로 음식을 넉넉하게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북어, 콩잎, 소금, 된장 등을 간략히 배정하여 아껴 쓰도록 하라. 돈은 짐꾼과 솔인(率人)의 비용 및 도중에 발생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대비이다. 우선 회령부에 짐을 실어 보내고, 회령부에서는 비용 지출을 소상히 작성하여 보고할 것이며, 차후 기록 중에서 무산조(茂山條) 역시 이러한 모든 사정을 알아야 할 것이다.

  • 편자주 197)
    고려 이전에는 우롱이(亐籠耳)이었는데, 윤관(尹瓘)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9성(九城)을 설치하면서 군(郡)이 되었다. 1398년(태조 7)에 비로소 군(郡)을 설치하였다. 경성의 명산(名山)은 백두산이다. 5월이 되어야 눈이 비로소 녹기 시작하고, 7월이 되면 다시 눈이 있다. 용성천(龍城川) 근원이 오음회(吾音會)의 여이현(餘伊峴)에서 나와 남쪽으로 1백 20여를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를 5리, 서쪽으로 야인의 동량북(東良北) 지경인 백산(白山)에 이르기를 90리, 남쪽으로 길주(吉州) 운가위천(雲加委川)에 이르기를 82리, 북쪽으로 경원(慶源) 두롱이현(豆籠耳峴)에 이르기를 58리이다. (『세종실록』, 「지리지」)바로가기
  • 편자주 198)
    중국 지린 성[吉林省]에 있는 도시이다. 쑹화 강[松花江] 상류의 왼쪽 기슭에 있으며 주변은 구릉지대로 둘러싸여 있다. 지린 성의 성도인 창춘[長春]에서는 동쪽으로 100km 떨어져 있다. 지린은 만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본래는 만주의 여진족인 울라부(部)의 영역에 속한 작은 마을이었다. 1651년 청나라는 러시아가 헤이룽 강[黑龍江] 지역으로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이곳에 조선소를 세우고 헤이룽 강의 지류인 쑹화 강의 방어와 운송을 위해 쓸 배를 만들었다. 1973년 지린은 요새화되었으며, 1676년에는 영고탑(寧古塔:지금의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닝안[寧安])에 있던 청군 사령부가 옮겨왔다. 시가지는 1723~1734년에 일시적으로 일반행정구역인 주(州)로 되었으나, 성벽이 둘러지고 부(府)로 승격한 1882년까지는 군사지역이었다. 17세기말 이 지역에 역참(驛站)제도가 세워졌으나, 1913년 창춘으로 가는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육지 교통이 불편했다.바로가기
  • 편자주 199)
    음식물을 제공하는 군영을 말한다.바로가기
  • 편자주 200)
    하얗게 도정한 쌀이며 논에서 수확한 쌀을 말하기도 한다.바로가기
  • 편자주 201)
    밭에서 직파법으로 파종하여 수확한 쌀이다.바로가기
  • 편자주 202)
    ‘두름’이라 말하며, 물고기 20마리를 엮은 것이다.바로가기
  • 편자주 203)
    조선초까지 다온평(多溫平)으로 불리다가 1440년(세종 22)에 처음으로 군(郡)을 설치하고 온성이라고 호칭하였다. 이 때 군을 설치하면서 경원(慶源) 및 길주(吉州) 이남에서 안변(安邊) 이북까지의 각 고을의 민호(民戶)를 옮겨 거주시켰다. 1441년에 도후부(都護府)로 승격시켜 판관(判官)을 두고, 또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1442년에 진(鎭)을 설치하여 절제사(節制使)를 겸하게 하였다. 경내의 사방 경계는 동남쪽으로 경원(慶源)의 경관령(慶關嶺)에 이르며, 서쪽으로 종성(鍾城) 지경에 이르고, 남쪽으로 덕천보(德川堡)에 이르고, 북쪽으로 두만강에 이른다. (『세종실록』, 「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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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자주 204)
    특별한 사무를 맡기기 위하여 임시로 임명하는 일로서 그 신분에 따라 차비관(差備官), 차비군(差備軍), 차비노(差備奴) 등이 있었다. 각 관사의 최하급 고용인을 의미하기도 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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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영에서 청국 관원들과 감계사 일행들의 접대 준비 및 진행과정에 대해 각 지역에서 신속히 보고할 것을 통보 자료번호 : gd.k_0001_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