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넷

상세검색 공유하기 모바일 메뉴 검색 공유
닫기

상세검색

닫기
기사제목
작성·발신·수신자
날짜
~
본문
사료라이브러리 열기
ID :NAHF.gd.k_0001_0100IDURL
사료라이브러리 열기
  • 글씨크게
  • 글씨작게
  • 프린트
  • 텍스트
  • 오류신고

대국인 200명이 넘어온 일과 관련한 통지문

 
    • 발송일1885년 4월 13일(음)
□ (4월) 13일 도부(到付)한 고령(高嶺)의 이문(移文)
 급히 통지하는 일
 당일 진시(辰時)에 본진 북봉(北峯) 연대군(烟臺軍) [주160]
편자주 160
닫기

연대(烟臺)는 1432년(세종 14) 이징옥(李澄玉)이 북방 야인(野人)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세종실록』세종 14년, 2월 10일(기해)) 연대군은 연대에서 근무하는 병사를 말하며, 연대는 봉수대(烽燧臺)와 유사한 말이다. 연대에는 방어시설이 있어서 무기와 생활 용구를 준비하고, 봉화간(烽火干)·화포군(火砲軍)·망군(望軍)· 감고(監考) 등이 거주하였다. 이들은 적이 나타나면 연기(煙氣)와 횃불로 다른 연대에 알리고, 신포(信砲)를 쏘아 인근 주민에게 재빨리 알렸으며, 적이 침입하면 화포와 궁노(弓弩)를 쏘아 적을 방어하는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박명세(朴明世)의 보고에 따르면, 대국인 200여 명이 각각 말을 타고 고라이동(古羅耳洞) [주161]
편자주 161
닫기

조선초기 함길도(咸吉道) 종성도호부(鍾城都護府) 관할 지역에서 여진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요해처(要害處)이다.

으로부터 왔다 하므로 통사(通事) 이덕승(李德承)에게 저 편으로 가서 맞이하고 그들에게 온 이유를 묻게 했더니, 자신들은 무산부에서 도회(都會)하려고 온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무산부로 가야했기 때문에 이 연유를 급히 통지하는 일입니다.
 광서(光緖) [주162]
편자주 162
닫기

청(淸)나라의 제11대 황제인 덕종(德宗, 1874∼1908)의 연호이다. 광서제는 도광제(道光帝)의 제7남인 순친왕(醇親王)의 아들로 시호(諡號)는 경황제(景皇帝)이다. 서태후(西太后)의 옹립으로 4세 때 즉위하여 개혁 정치노선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전개했으나 정권은 서태후가 장악하여 명목상의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광서제의 재위 중에는 러시아·프랑스·영국에 영토를 부분적으로 할양했으며, 1895년 청일전쟁에 패하여 대만을 일본에 내주면서 아시아의 맹주에서 추락하였다. 광서제는 국내외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혁신사상을 가진 캉유웨이(康有爲) 일파의 지지로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본떠 변법자강(變法自氈)인 무술개혁(戊戌改革)을 시도하였으나, 1899년 원세개의 밀고와 변법자강 운동을 반대하던 서태후와 이홍장(李鴻章) 등의 수구파(守舊派)가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킴으로써 실패하고 자금성(紫禁城)에 유폐되었다. 1899년 서구 열강의 북경 함락으로 서태후와 함께 서안으로 피난갔다가 베이징 의정서 체결 후에 자금성으로 돌아왔다. 청실록에는 1908년 38세의 나이로 서태후와 비슷한 시기에 병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중국 당국이 광서제의 능침인 숭릉에서 거둔 시신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다량의 비소를 추출하여 독살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1년(1885년, 고종 22) 4월 13일 진시(辰時)

 
주 160
연대(烟臺)는 1432년(세종 14) 이징옥(李澄玉)이 북방 야인(野人)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세종실록』세종 14년, 2월 10일(기해)) 연대군은 연대에서 근무하는 병사를 말하며, 연대는 봉수대(烽燧臺)와 유사한 말이다. 연대에는 방어시설이 있어서 무기와 생활 용구를 준비하고, 봉화간(烽火干)·화포군(火砲軍)·망군(望軍)· 감고(監考) 등이 거주하였다. 이들은 적이 나타나면 연기(煙氣)와 횃불로 다른 연대에 알리고, 신포(信砲)를 쏘아 인근 주민에게 재빨리 알렸으며, 적이 침입하면 화포와 궁노(弓弩)를 쏘아 적을 방어하는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주 161
조선초기 함길도(咸吉道) 종성도호부(鍾城都護府) 관할 지역에서 여진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요해처(要害處)이다.
주 162
청(淸)나라의 제11대 황제인 덕종(德宗, 1874∼1908)의 연호이다. 광서제는 도광제(道光帝)의 제7남인 순친왕(醇親王)의 아들로 시호(諡號)는 경황제(景皇帝)이다. 서태후(西太后)의 옹립으로 4세 때 즉위하여 개혁 정치노선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전개했으나 정권은 서태후가 장악하여 명목상의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광서제의 재위 중에는 러시아·프랑스·영국에 영토를 부분적으로 할양했으며, 1895년 청일전쟁에 패하여 대만을 일본에 내주면서 아시아의 맹주에서 추락하였다. 광서제는 국내외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혁신사상을 가진 캉유웨이(康有爲) 일파의 지지로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본떠 변법자강(變法自氈)인 무술개혁(戊戌改革)을 시도하였으나, 1899년 원세개의 밀고와 변법자강 운동을 반대하던 서태후와 이홍장(李鴻章) 등의 수구파(守舊派)가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킴으로써 실패하고 자금성(紫禁城)에 유폐되었다. 1899년 서구 열강의 북경 함락으로 서태후와 함께 서안으로 피난갔다가 베이징 의정서 체결 후에 자금성으로 돌아왔다. 청실록에는 1908년 38세의 나이로 서태후와 비슷한 시기에 병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중국 당국이 광서제의 능침인 숭릉에서 거둔 시신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다량의 비소를 추출하여 독살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태그 :

태그등록
이전페이지 리스트보기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