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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전해 준 우리문화(교육자료)

조선통신사

에도 막부는 쇼군이 바뀔 때마다 통신사의 파견을 요구하였다. 통신사는 정사와 부사를 비롯하여 수백여 명의 사절단으로 구성되었으며, 단순한 외교 사절을 넘어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통신사가 올 때마다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국빈으로 대접하였다. 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19세기 초까지 모두 12회 파견되었다. 통신사는 전란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하는 한·일 양국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이었다.
말 그대로 믿음으로 교류하는 것을 목적으로, 일본과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소하면서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았다.
조선통신사 사절은 일본으로 가 선진 문물과 학문적 성과를 전달하였고, 그로써 일본의 약탈과 침략을 예방하였다. 반면 일본은 조선통신사에 대한 보답으로 국왕사를 파견하여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통신사가 부산을 출발해 시모노세키위치를 거쳤는데, 시모노세키는 일본 국내 교통요지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교류하는 중요한 창구였다. 1718년 통신사 신유한은 ‘이곳은 바닷길의 요새로 백성들은 소금을 팔아먹고 살며, 아침저녁으로 조수가 있다. 서해도의 목줄기에 해당되므로 해군 수만명을 배치하여 외곽을 정찰하고 방어하면 천연의 기지가 된다’고 적었다.
조선통신사 행렬은 그 자체로 대규모의 문화공연이었다. 앞에는 조선의 악대가 장엄한 곡을 연주하고 뒤에는 조선의 명물인 마상재 공연이 펼쳐졌다. 조선의 복색을 차려입은 사절단이 행진하면 양쪽 길로는 일본인 구경꾼들이 빼곡히 들어찼고, 일본의 세력가들은 사절단의 일원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글씨나 시를 받는 것을 영광된 일로 여겼다. 지금도 당시 통신사들이 남기고 온 시문들은 일본 각 지방의 문화재로 보존되거나 집안의 가보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400여 명의 사절단을 대접하는 것이 일본의 입장에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나, 이 과정을 통해 전해지는 문물의 교류나 조선과의 평화적 관계는 다른 것과는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1655년 통신사 385명 하루식사량
  - 쌀 20섬, 간장 1말반, 초 1말반, 된장 5말, 소금 3말, 기름 7말
  - 닭 100마리, 기러기 10마리, 비둘기 100마리
  - 도미 20마리, 정어리 50마리, 연어 10마리, 달걀 4000개, 파 100단,
  - 무 2000개, 토란 5말 , 후식: 포도 300송이, 떡 100근
 
조선통신사 연표
조선통신사가 지나간 길
시즈오카현의 세이겐지(淸見寺)
- 통신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세이겐지에는 당대 유명한 문인들이었던 통신사들의 휘호와 시문들이 남아 있다.
조선통신사 행렬과 구경을 나온 일본인들(ⓒ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 29권)
강호도병풍 부분, 에도성(ⓒ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 29권)
국서 교환
2014년 조선통신사 재현 동영상:MBC, 조선통신사 재현
조선과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 왕래를 재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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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조선의 입장에서는 평화를 보장받는 것이 나라 발전을 이루고 백성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길이었으며,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을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농산물을 수입하는 것이 일본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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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관련 읽기 자료
조엄(趙曮),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고구마를 들여오다
 
1763년 8월 3일 영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영조 임금은 好往好來(잘 갔다 잘 돌아오라)의 글을 써서 통신사행의 정사인 조엄(1719~1777)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엄에게 하사하였다. 험한 바닷길, 수개월의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오라는 임금의 마음이었다.
 
조엄의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이다. 그의 맏손자인 조만영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만영은 신정왕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정왕후의 아버지로 풍은부원군이 되는 분이다. 신정왕후는 24대 임금 헌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헌종의 어머니로 흔히 조대비로 불리는 분이다. 그의 자손들은 왕의 외척으로 19세기 최고의 세도가문의 영화를 누렸다.
 
조엄은 1757년 7월 동래부사로 임명되어 1년 6개월간 동래부를 다스렸다. 동래부사를 역임하면서 왜관의 일본인과의 접촉이 빈번하였다. 동래부사는 일본사절이 오면 그들을 맞이하고 연회를 주관하였다. 또한 양국의 외교문제를 교섭하고 해결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인, 일본인 사이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자주 발생하여, 동래부사는 일본관련 업무로 늘 분주하였다.
 
그는 9개월에 가까운 긴 여정을 『해사일기(海槎日記)』한국고전종합DB〉해사일기로 남겼다. 1763년 10월 6일 부산을 출발하여 일본의 수도인 에도에 갔다가 다음해 6월 22일 다시 부산에 도착하였다.
 
『해사일기』는 매일 쓴 일기, 여행 중에 지은 시, 일본에 가져간 외교문서와 예물, 일본 문인들과 교류할 글, 조선 국왕에게 보낸 보고서, 사행 구성원 내부의 생활규칙, 구성원 명단 등이 실려 있다.
 
일기에는 여정과, 자신이 본 일본의 문물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였다. 접대를 받은 일본음식이나 그릇들에 대한 느낌도 기록하였다. 이키 섬위치에 머물 때 ‘스키야키’를 대접받았는데 ‘도주가 승기악은 삼자(杉煮)인데 생선과 나물을 뒤섞어서 끓인 것이다. 저들은 일미(一味)라 하여 승기악이라고 이름하였으나, 그 맛이 어찌 감히 우리나라의 열구자탕(悅口子湯, 신선로)을 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미 동래부사 재임 시절 일본 음식, 일본 접대 문화 등은 경험해보았지만 이렇게 처음 본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느낌을 기록하였다. 조엄은 스키야키가 열구자탕보다 못하다고 하였지만 당시 일본인과 접촉이 많았던 역관이나 일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부호가들은 이 음식을 상당히 즐겼다고 한다.
 
1763년 10월 쓰시마 사스나(佐須浦)에 도착했을 때 조엄은 지금까지 보지 못하였던 식물을 보았다. 『해사일기』에 ‘이 섬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감저(甘藷) 또는 효자마(孝子麻)라 부른다. 일본어로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하는 이것은 생김새가 산약과 같고 무뿌리와 같으며 오이나 토란과도 같다.…그것은 날 것으로 먹을 수 있고 구워서 먹을 수도 있고, 삶아서도 먹을 수 있다. 떡을 만들거나 밥에 섞는지,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가히 흉년을 지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본 것은 곧 고구마였다.
 
그는 바로 고구마의 종자 몇 말을 구해 부산진으로 보내 심도록 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고구마 종자를 구해 와서 직접 동래부 아전들에게 나누어주고 재배하도록 하였다.
 
조엄의 애민정신은 고구마에 그치지 않았다. 1764년 1월 27일 요도(淀浦)를 지나다가 일본의 수차(水車) 두 대를 보았다. 허규·변박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변박에게 그 제작방법을 알아보고 상세히 그리게 하였다. 수차를 이용하면 논에 물대기가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또한 배를 가로로 이어 만든 배다리(舟橋)를 보고 우리나라 서남해안 제언(堤堰)에서 응용할 방법을 구상하였다.
 
그는 여느 수행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시문(詩文)을 남겼다. 『해사일기』의 부록인 ‘수창록(酬唱錄)’에는 일본 각 지역을 지날 때마다 지은 시들로 가득하고, 일본 문인들과 주고 받은 시들이 많다. 조엄이 이끄는 통신사행은 2월 교토(京都)를 지나 에도(현 東京)를 가는 도중에 세이겐지(淸見寺)에 들렀다. 세이겐지위치는 그 풍광이 뛰어나 앞서 파견된 통신사행들의 작품이 많이 남겨져 있었다. 1655년 통신사행의 종사관으로 파견된 남용익(南龍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용익이 쓴 시가 눈에 띄었다. 남용익은 세이겐지의 풍광을 양양 낙산사위치에 비교하여 시를 남겼다. 조엄은 3월 20일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세이겐지에 들렀다. 이때 남용익 시의 「다(多)」 자에 차운(次韻)하여 쓴 「차남호곡운(次南壺谷韻)」를 세이겐지에 남겼다. 호곡(壺谷)은 남용익의 호이다. 시는 아름다운 세이겐지의 경치는 낙산사와 다를 바가 없는데, 풍광 외의 다른 말을 하고 싶지만, 말이 달라서 어쩔 수 없다는 내용이다.
 
무사히 험한 여정을 마치고 6월 13일 쓰시마에 도착했다. 니시도마리(西泊)위치에 머물 때 전 쓰시마도주인 소 요시시게(宗義番)가 삼사(三使)들에게 주는 예물을 보내자 조엄은 답례로 이백 등 중국 시인들의 시를 써서 그에게 선물하였다. 「세갑신 유월하완 조선국 통신정사 조엄 서증 일본국대마주구태수 평공합하(歲甲申 六月下浣 朝鮮國 通信正使 趙曮書贈 日本國對馬州舊太守 平公閤下)」라는 글은 여러 편의 시를 쓴 후에 통신사행의 정사인 조엄이 전 쓰시마도주에게 증정한다고 한 내용이다.
 
조엄은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로서 풍부한 대일교류의 경험을 바탕으로 통신사행 정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외교문제와 우발적 사고가 연이은 힘든 여정이었지만, 그는 일본 파견을 이국문물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고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적극 실천하였다. 거의 실천적인 정신이 후세의 큰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출전: 〈조선통신사소식지〉 2004 vol. 4 p.14~p.15 『 梁興淑(부산대학교 사학과)』
조엄이 통신사로 파견되어 일본에 다녀온 기록을 남긴 책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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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해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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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엄의 이야기 속에서 조선과 일본이 각각 교류한 것을 모두 적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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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조선은 고구마와 수차를, 일본은 조선 유학자들의 시와 글씨 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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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자료번호 : edkj.d_0002_003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