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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전해 준 우리문화(교육자료)

고대의 한일교류

1971년 초여름, 아무에게도 도굴되지 않은 아름다운 벽돌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안에서는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찬란한 부장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세밀한 조각기술의 최고봉인 금동신발, 금동관, 단아한 토기들과 금수저, 익살스러운 석수 등, 14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백제의 예술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무덤의 주인은 정치적 다툼의 한가운데서 태어나 왕의 자리에 올랐던 주 002
각주 002) 무령왕
백제의 25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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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무령왕의 것이었다.
이름은 사마(斯摩/斯麻) 혹은 융(隆)이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삼국사기에는 동성왕(東城王)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동성왕의 둘째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두산백과사전〉일본서기에는 문주왕(文周王)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문주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로 동성왕(東城王)과는 이복형제 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신장이 8척이고,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그는 501년(동성왕 23)에 동성왕이 사냥에 나갔다가 좌평(佐平)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칼에 찔려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의 이복형제로, 일본에서 태어난 것으로 등장한다.
무령왕릉실 공주박물관 일본에게 백제란? 유튜브:동북아역사재단>일본에게 백제란?
무령왕 유물_금제관식(출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령왕 유물_금동수저(출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령왕 유물_지석(출전: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 유물_금동신발(출전:국립공주박물관)
새로 발굴된 무령왕릉위치은 무령왕의 생애와 업적이 적힌 지석으로 더욱 유명해졌고, 한반도뿐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관의 목재가 특이했다. 일본에서만 자란다는 금송(金松, 고우야마키: 삼나무의 일종)로 만든 것이었다. 한반도에서는 기후 때문에 재배할 수 없는 수종이다. 또 죽은이의 행적을 자세히 적어둔 지석에는 무령왕의 출생과 사망년도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었다.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461년경, 백제의 개로왕이 남동생 곤지를 왜국에 파견했다. 당시 해산달이었던 자신의 측실을 함께 보내며 도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백제에 돌려보내도록 명했다. 일행이 가쿠라시마에 왔을 때, 부인은 아들을 낳았다. 이 사람이 ‘세마키시’라고 불리던 백제 25대 왕이다. 
경북대 문경현 박사의 연구결과, 일본 가카라섬위치에 전해 내려오는 ‘시마왕’ 탄생지가 바로 무령왕의 탄생지로 추정되었다. 지금 이곳에는 한·일 교류의 상징으로 무령왕탄생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가카라시마_무령왕 탄생지
가카라시마_무령왕 탄생지 기념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항쟁이 극을 향해 달려갈 무렵, 개로왕은 왜 그의 동생을 부인과 함께 일본에 보냈을까? 그것도 막 아이를 낳을 날이 가까운 사람을 말이다. 당시에는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후 백제를 압박하고 있을 때였다.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으나 그 관계란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라도 저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개로왕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개로왕은 근초고왕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근초고왕 이후 전통적인 동맹국인 일본에 믿음을 표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국경을 맞대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하루가 멀다 하고 치르고 있던 백제에게, 일본은 그토록 든든하고 믿음직한, 그리고 마지막으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동맹국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백제와 일본은 굳은 동맹관계를 갖고 있었다.
백제와 일본의 교류 흔적은 양국의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에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특히 일본 구마모토에 있는 전방후원분인 ‘후나야마 고분’위치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온 금귀걸이, 청동거울은 우리나라 삼국 초기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것들과 똑같으며, 전면에 거북껍데기 무늬를 연속으로 찍고 금줄로 유리구슬을 단 의례용 금동신발은 우리나라 나주 입점리에서 나온 것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충남 공주 수촌리에서 발굴된 백제 금동관과 크기만 다를 뿐 똑같은 모양을 지닌 금동관도 출토되었다.
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갔거나, 일본으로 이주한 한반도인들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 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백제의 유물과 유사한 것들을 찾아보자.
 
 
문제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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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금동신발, 금동제 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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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무령왕백제의 25대왕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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