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시대부터 이루어진 교류는 삼국 시대에는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특히 3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들을 일본에서는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뜻의 ‘도래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고 합니다.
도래인들이 처음 일본에 건너간 이후 여러 가지 기술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본 고대 문화인 아스카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고, 당시 정권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삼국 중 왜의 문화 발전과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나라는 백제였습니다. 또한 두 나라는 동맹을 맺고 왜는 백제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구다라나이’ ‘백제 것이 아니면 하찮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백제는 일본에게 큰 나라였습니다.
백제가 왜왕에게 전한 칠지도
일본 나라 현 텐리 시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에는 국보급 유물이 하나 보관되어 있습니다. 바로 칠지도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입니다. 길이 75cm에, 가운데 칼날을 중심으로 칼날이 나뭇가지처럼 좌우로 세 개씩 솟아있습니다. 칠지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로부터 이와 같은 칼이 없었다.
백제왕이 다스리는 동안에 왕의 명의 받들어 왜왕을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라는 내용입니다.
이를 통해 칠지도는 백제가 왜에 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칠지도에 새겨진 다음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 일본에서 태어난 무령왕
일본 사가현 가카라시마 섬에서는 백제 무령왕의 탄신제가 열립니다. 그런데 왜 일본에서 백제왕의 탄신제가 열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무령왕이 이 섬에 있는 오비야우라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전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역사책인 『일본서기(권16 武烈紀 4年)』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장수왕의 공격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개로왕은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동생 곤지를 자신의 부인과 함께 일본에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으로 가는 도중 임신한 개로왕의 부인이 아기를 낳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곤지 일행은 가카라시마 섬에 배를 세우고, 오비야우라 동굴에서 아기를 낳았다고 합니다. 이후 곤지는 아기를 배 한척에 실어 백제로 보냈고, 아기는 훗날 왕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가 바로 무령왕입니다.
무령왕이 태어난 이후 이 섬은 ‘임금의 섬’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령왕은 이 섬의 이름을 따 ‘시마왕’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백제의 왕족 중 일본에서 자란 사람들도 꽤 많았습니다. 그만큼 백제와 왜의 관계가 깊었던 것입니다.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백제는 왜를 끌어들이기도 했었답니다.
공주 시민들이 모금해 세운 무령왕 탄생 기념비(일본 사가현 가카라시마)
- 공주 시민들이 모금해 세운 무령왕 탄생 기념비(일본 사가현 가카라시마)
○ 가카라시마 섬에서 무령왕 탄신제가 열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유학과 한자를 전한 왕인 박사
오사카에서는 매년 ‘왔소이 축제’가 열립니다. 이는 한반도에서 문화를 전해 받은 것을 기념해 열리는 축제입니다. ‘왔소’는 ‘우리가 왔소‘라는 뜻을 까진 우리말입니다. 축제 행렬에서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백제인들입니다. 그중에는 왕인 박사를 비롯한 백제의 학자들도 있습니다.
왕인은 일본에서 큰 스승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왕인보다 먼저 일본에 건너간 학자는 아직기였습니다. 왜왕이 아직기에게 "너보다 나은 박사가 있는가?" 하고 묻자 ‘왕인박사가 가장 우수하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후 왕인은 왜에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건너가 태자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자의 스승을 넘어 일본인들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치며 일본 학문 발달에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 왕인 박사는 일본에서 어떤 역할을 한 사람입니까?


◆ 화려하게 꽃핀 불교문화, 아스카 문화
일본의 아스카 지역에 도읍이 있던 시대를 아스카 시대(6세기 중엽~7세기 중엽)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꽃핀 고대 문화를 아스카 문화
라고 합니다.
왕인 박사가 유학을 전하고 이후 백제 성왕이 보낸 승려 노리사치계가 불교를 전한 뒤 일본은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었습니다. 왕인 박사와 함께 건너간 백제의 기술자들이 건축과 공예를 가르치면서 일본의 문화 수준은 한층 높아졌습니다.
당시 왜 왕이 머무는 곳도 기와가 아닌 짚이나 풀로 덮어 만들었다고 하니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인의 손길이 닿으면서 왜는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백제인의 혼이 담긴 백제 관음상
일본 나라현에 있는 호류지(법륭사)
두산백과사전
지도
는 일본 고대 문화의 보물 창고와 같은 곳입니다. 이 절은 불교를 일본의 국교로 하고 나라의 기틀을 세운 쇼토쿠 태자(성덕태자)가 세운 절입니다. 법륭사는 백제 기술자들에 의해 세워진 절로 백제인의 숨결이 깃들어 있습니다.
호류지(법륭사)에는 고구려 담징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금당 벽화와 함께 눈에 띄는 문화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백제 관음상입니다. 세계인들이 ‘동양의 비너스’라고 높이 칭찬한 불상입니다. 나무로 만든 것으로 약 2.8m의 키가 무척 큰 불상입니다.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불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우아한 곡선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며, 섬세하게 표현된 두 손을 보고 있노라면 신비스러움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왜 이름이 백제 관음상일까요? 그 이름만으로도 백제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백제인이 만들어 왜 왕실에 선물했거나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답니다.
일본인들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릅니다. ‘큰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백제 관음상을 ‘구다라 관음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 백제 관음상을 보니 어떤 느낌이 드나요? 그리고 이 불상의 이름이 왜 ‘백제 관음상’ 혹은 ‘구다라 관음상’이라고 불리는지 그 이유를 알아봅시다.


호류지(법륭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일본 내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일본에 있는 절인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은 절이라고 합니다. 절 안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치 옛 백제 땅의 절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특히 이런 느낌을 강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호류지(법륭사) 가운데 버티고 서있는 오층탑입니다. 백제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이 가지고 있는 비례감을 가지고 있는 탑입니다. 하지만 일본 만의 느낌도 있습니다. 탑의 1층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과 달리 속지붕이 있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 위의 백제와 일본의 탑을 살펴보고 닮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보세요.


◆ 백촌강 전투에 보내진 일본 원정군
형제와 같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왜는 백제가 위기에 처하자 도움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후 3년 뒤,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부흥군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왜는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800여 척의 배와 27,000여 명의 군대를 보냈습니다. 백제와 힘을 합친 왜의 원정군은 금강 하구에서 운명을 건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투를 백촌강 전투(663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과 왜 연합군은 크게 패하였고 백제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많은 백제인들과 남은 왜군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이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왜를 공격할 것이라는 생각에 백제인들은 왜군과 함께 일본 규슈 다자이후 배후 산성으로 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두 나라는 운명을 함께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