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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상업과 도시의 발달

4-3단원 2차시
  • 저필자
    황지숙(신림고 역사 교사)

상업과 도시의 발달

명‧청 대의 상업과 도시
에도 시대의 상업과 도시
조선 후기의 상업과 도시

상업과 도시의 발달

1. 명‧청 대의 상업과 도시
  1. 상업의 발전
    • 대운하의 활성화 : 강남(곡물과 각종 물자) → 베이징(정치‧군사‧소비의 중심 도시)으로 수송
    • 은 유통의 활발
    • 면‧비단‧농산물 등의 전국적 유통
    • 차‧도자기 생산의 활성화
지도 - 강남 지역의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
명 중기 이후 양쯔강 중류 지역의 ‘호광숙천하족’이란 말을 유행시킨 호광과 청초에 새로운 곡창으로 대두한 쓰촨 지방의 경지가 급증했다. 곡창 지대인 이 지역의 쌀이 한커우에 집산되어 양쯔강 하류 지역으로 운반되어 대운하를 통해 이동되었다. 그리고 양저우와 쑤저우의 소금과 비단 등이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양쯔강 중류에 위치한 한커우와 대운하와 양쯔강이 만나는 접경에 위치한 양저우, 그리고 강남의 중심이자 대운하와 연결된 쑤저우는 명‧청대 상업과 수공업 발달의 대표적인 도시다. 이들 도시는 각각의 도시가 속한 구역 내의 경제중심지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전국적인 시장 유통망에 대한 중개도시로서의 기능을 겸비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도시에는 각지를 왕래하는 객상(客商)과 중개업에 종사하는 아행(牙行)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한커우는 소금과 쌀의 집산지로, 건륭 초에만 해도 인구가 20여만 명이나 되었고, 동서남북 각 성의 상인들은 모두 회관을 세우고 있었다. 업종은 소금업, 전당업, 양곡업, 목재업, 약재업이 제일 많았다. 쑤저우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비단의 생산지였다. 고급 견직물 생산 외에도 농촌에서 생산된 면포 가공과정의 하나인 단포(踹布, 면포의 광택을 내는 업종)와 염색의 중심도시이기도 했다. 18세기의 쑤저우의 번화한 도시상을 그린 <성세자생도(盛世滋生圖)>에서 사천․광동․귀주․운남․복건․강서․절강․강소․산동의 9개 성 출신의 상인이 개설한 점포를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양저우는 대운하와 양자강이 만나는 교차로에 위치했다. 대운하를 이용하여 남북을 왕래하는 선박, 양자강을 이용하여 동서를 왕래하는 선박 이용자들과 운송업자들이 몰려들었다. 양저우는 또한 중국에서 소금 생산량과 세금징수액이 가장 많았던 양회염장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했으므로, 각지에서 소금을 유통하려는 상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베이징으로 물자 수송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1552-1610)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이후, 1610년 베이징에서 사망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보고 듣고 체험한 바를 말년에 기록으로 남겼다. 본 사료는 처음으로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여정으로, 대운하를 왕래하는 곡물 운반선인 조운선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분석을 볼 수 있다. 수도인 베이징에 공급하기 위한 물자 유통을 위해서 조운선 외에 관리들의 선박, 그리고 상선이 더 많다는 관찰은 당시 대운하의 유통 상황을 보여주는 귀한 부분이며, 특히 조운선이 만재되지 않고 빈 공간을 이용해 각종 상업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베이징은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다”는 지적은 당시 수도의 물자공급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주 249
각주 249) 대운하
도대운하는 수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북송 때까지 사용되던 대운하는 남송 대 금의 화북 점령으로 기능이 중단되었다. 13세기 후반 원이 중원 통일 이후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면서 남방의 물자를 수도까지 수송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자 운하를 확장하였다. 명 영락제의 베이징 도읍으로 강남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ko.wikipedia.org/wiki/대운하ko.wikipedia.org/wiki/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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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50
각주 250) 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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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51
각주 251) 베이징(정치‧군사‧소비의 중심 도시)으로 수송
황허에서 베이징으로 왕래하기 위해서는 대운하를 경유해야 하는데, … 진공하는 조운선 외에도 … 사적인 무역에 종사했던 선박이 더 많았다. … 조정으로 운송되는 선박들이 베이징에 도달할 때, 상당수의 선박은 만재되지 않았고 상인들은 이를 이용해서 저렴한 가격으로 선박의 빈 공간을 빌렸다. 따라서 사람들이 말하길 베이징은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한다.
– 마테오 리치
– 마테오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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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과 도시의 발달

1. 명‧청 대의 상업과 도시
  1. 대상인 집단의 활동
    • 전국을 무대로 활발한 상업 활동 : 산시 상인, 휘저우 상인 등
  2. 도시의 발달
    • 양저우(소금), 쑤저우(생사‧견, 면포) 등
    • 강남 지역의 시진 증가 → 강남 전체의 도시화
양저우위치
대상인 집단의 활동
명대 중엽 이후 중국에서는 동향․동족 출신의 상인들이 집단을 조직하여 전국적 규모로 상권을 장악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대상인 집단 중 특히 휘저우 상인과 산시 상인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들은 흔히 명대는 물론 청대 중국의 상업 발전을 주도한 2대 상인 집단으로 일컬어진다. 명초의 상업계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낸 존재는 산시 상인이었다. 이들은 고향이 만리장성에서 가까운 이점을 살려 북변에서 둔전을 경영하였다. 이들은 수확한 곡물을 북변의 군량으로 조달하고 조정으로부터 양회염장의 소금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양회소금을 전매하게 된 산시 상인은 거대한 재부를 쌓았다. 그러나 은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곡물 대신 은을 납부해야 소금 판매권을 얻도록 염법이 변경되었다. 휘저우 상인은 염법의 변화를 기회로 활용하여 산시 상인을 누르고 전국 제일의 상인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휘저우 상인은 양회 소금을 점차 독점적으로 판매하였다. 뿐만 아니라 화북 지역의 면화, 호광 지역의 쌀, 안휘의 목재와 차를 난징, 쑤저우, 항저우 등 강남 지방으로 반입하고 강남의 생사, 견직물, 면제품을 호광, 사천, 화북 지방으로 반출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주 252
각주 252) 휘저우 상인
휘저우 상인들은 소금과 면포, 비단, 차 등을 취급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런 다음 산지에서 물건을 싸게 대량으로 구매하거나 계절 상품을 미리 사놓았다가 적기에 내다 팔고, 다른 지방의 상품을 신속하게 소비지에 연결하는 생산과 유통의 순환 체계를 활용하였다. 이들은 객지에 회관을 건립하여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휘저우 상인들의 근거지였던 양저우에는 이들이 건축한 화려한 저택들이 남아 있다.
ko.wikipedia.org/wiki/신안_상인ko.wikipedia.org/wiki/신안_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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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53
각주 253) 쑤저우
‘성세자생도’에서 ‘자생’이란 ‘인구가 늘어난다’라는 뜻인데, 어떤 사람이 세어 보았더니 그림 속에 4,600여 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쑤저우의 주택은 약 10만 호로, 1호당 4~5명이라고 한다면 인구는 40만~50만 명 정도였다.
쑤저우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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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54
각주 254) 시진
지도는 중국 강남의 쑤저우 지역에서 발달한 시진 분포를 나타낸 것이다. 일찍부터 강남에서는 쑤저우, 항저우 등 대규모의 상업 도시뿐 아니라 시진이라 불리는 중소 규모의 시장 도시들이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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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과 도시의 발달

2. 에도 시대의 상업과 도시
  1. 발달 배경
    • 조카마치의 발전 → 각 번의 거점, 사무라이와 상공업자들의 집중 거주로 급속한 도시화 진행
    • 산킨고타이 제도 → 교통망과 여관업 발달, 전국적 도로망 정비로 상업 발달 촉진
조카마치의 구조
에도 막부 시대의 조카마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히메지 성이 있는 조카마치의 구조도를 보면, 가운데 성은 안쪽 해자로 둘러싸인 곳에 있다. 여기에는 관청, 창고, 마구간, 그리고 다이묘가 살던 저택이 있었다. 이 성을 중심으로 가운데 해자가 둘러싼 지역에는 다이묘를 모시던 가신과 상급 무사가 살았다. 가운데 해자 바깥 구역에는 큰길을 따라 조신이 모여 살았다. 조카마치에 살게 된 조닌은 토지세를 면제받는 대신 무사에게 군수 물자와 생활 물자를 내는 의무를 졌다. 그 바깥 구역에는 신사, 절, 중급 무사가 사는 곳이 있었다. 쇼군과 다이묘는 이런 조카마치를 만들어 영지를 지배하였다. 전국의 250여 개 번이 이런 모습으로 조카마치를 형성하였다.

산킨고타이 제도
산킨고타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이 정복했던 다이묘들에게 교토로 올라와 자신을 알현하라고 지시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1615년 히데요시 세력을 멸망시킨 에도 막부는 다이묘들에게 정기적으로 에도에 와서 쇼군을 알현하도록 하고, 그 처자들을 에도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에도를 기준으로 동서로 나눠진 다이묘들이 번갈아 에도를 방문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감시하려는 목적이었다. 에도로 오는 데 필요한 교통비와 거주하는 데 드는 생활비는 모두 다이묘들이 부담했는데 때로는 그 비용이 번 재정의 40% 이상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주 255
각주 255) 조카마치
히메지성
히메지성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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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과 도시의 발달

2. 에도 시대의 상업과 도시
  1. 도시 발달
    • 에도, 오사카, 교토 등 대도시 발달
    • 나고야, 나가사키, 사카이 등의 상업 도시 발달
    • 18세기에 주민의 약 10%가 도시에 거주
  2. 상인층의 성장
    • 상인층의 다양한 구성 : 대상인-중소상인-고용인들
    • 도시로 모여든 쌀과 특산물을 화폐로 교환, 영주와 무사를 상대로 환전과 대부업 등의 금융업 전개
에도 시대의 도시 발달
에도 시대에 접어들어 수많은 도시가 형성되었다. 특히 삼도(三都)라고 불린 에도, 오사카, 교토는 여러 성격을 두루 갖춘 종합적인 도시로, 전국적인 정치․상공․문화의 중심이었으며 전국 시장권의 형성․확립․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하여 18세기 전반에 접어들어 에도는 인구 50만 명, 오사카는 35만 명, 교토는 40만 명의 대도시로 발전했다.
정치 중심지 에도에는 막부의 각종 시설들과 다이묘의 저택을 필두로 그들의 가신과 무가에 고용된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이들의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상인과 수공업자, 일용노동자가 살고 있었다. 에도 전체를 놓고 보면, 무사 거주지가 70%, 사원 지역이 15%를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 15%의 협소한 지역에 약 50만 명의 상인과 수공업자, 일용노동자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처럼 에도는 정치․군사․경제상 가장 중요 도시이자, 일본 최대의 소비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오사카는 서일본과 호쿠리쿠 등지의 물산이 집산하는 거대한 상업 도시였다. 오사카에는 번이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쌀과 특산품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고, 이를 관리하는 번의 관리들이 거주했다. 전국의 상품이 오사카에 집하된 후, 에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출하되었다. 다이묘 경제는 이러한 오사카에서의 거래를 통해 지탱되었다.
교토는 일본 왕실가와 공가, 유서 깊은 사원의 본산과 전통 있는 신사가 다수 집중된 도시였다. 또한 직물업 등 여러 분야의 고급 기술을 가진 수공업자들이 많이 거주했는데, 이들은 막부나 다이묘들의 주문에 응해 수공업품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교토는 전통을 유지하는 문화․학문의 도시이자 고급 직물 수공업의 중심 도시로 자리 잡았다.

오사카의 발달
신유한(1681-1752)은 1719년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1684-1751, 재직1716-1745)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기해사행(己亥使行)에 제술관으로 발탁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그의 글을 청하는 이들로 거리가 메웠고, 앉은 자리에서 수백 편을 일필휘지로 써 일본 문인들을 놀라게 했다. 수로 5,210리, 육로 1,350리, 소요된 기간은 261일, 인원은 조선인 475인 그리고 통신사행을 수행한 일본인이 1,000여 인이었는데, 신유한은 해유록을 통해 18세기 초 에도와 여러 경유지역의 견문기록을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남겼다.
사료는 에도 시대의 대표적 도시인 오사카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에도 시대에 ‘천하의 부엌’이라고 불린 오사카는 쌀 시장과 생선 시장, 채소 시장 등 전국의 물자가 모여드는 도시였고, 특히 영지에서 막부에 올리는 쌀이 모이는 곳이었다.
 
주 256
각주 256) 오사카
긴 다리 일곱 개를 지나서 비로소 오사카에 당도하니, 곧 모든 배가 정박하는 곳이었다. …… 6∼7리쯤 가서 사관에 이르렀는데, 그 사이에 있는 길 양쪽의 긴 건물들이 층층의 집 아닌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온갖 물건을 파는 점포였다. 구경하는 사람이 길을 가득 메웠고 눈부시게 화려한 것이 강 언덕에 비해 배나 더 많았다.…… 온갖 종류의 장인과 잡화의 거간꾼이 온 나라에 퍼져 있으며 ……
신유한, “해유록”
신유한, “해유록”“해유록”“해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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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과 도시의 발달

3. 조선 후기의 상업과 도시
  1. 상업의 발달
    • 16세기 이후 장시 발달 → 18세기 전국 약1,000곳 (물물 교환, 화폐 사용, 정보 교환 → 상업 발달 주도)
    • 농업 생산력의 증가 → 포구와 도시 시장 번성
    • 사상의 성장 : 강상, 송상, 내상, 만상 등
조선 후기 장시와 포구 상업 발달
- 조선 후기의 장시 : 15세기 말에 전라도 지방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장시도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8세기 중엽에는 1,000여 개소를 헤아리게 되었다. 이는 한 군현에 평균 3-4개의 장시가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장시는 보통 5일마다 열려서 인근 주민들이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 등을 교환하였고, 부보상이라는 행상단이 먼 지방의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팔았다.
그러나 장시는 시장의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음식을 즐기며, 각종 놀이도 구경하는 축제 장소이기도 하였다. 장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부가 상설시장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통·폐합하는 과정을 거쳐서 점차 대형화해 가는 동시에 전국적인 시장권을 확대해 갔다. 특히 항구를 낀 장시에서는 대규모 교역이 행해져서 도고업과 위탁판매업·창고업·운송업·숙박업·은행업 등에 종사하는 객주(客主)·여각(旅閣) 등이 나타나고, 거래를 붙이는 거간(居間)도 생겨났다. 그리고 한양 부근의 송파·칠패·이현 등 시장을 상대로 하는 중간도매상이 나타나 이들을 특히 중도아(中都兒)라고 불렀다.
장시가 발달함에 따라 도로도 많이 개설되었다. 배의 수송 능력이 커지고, 해로가 다시 개척되고 수상 운수도 발달하였다. 조선 후기 장시 가운데서 충청도의 강경,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대구·마산·안동, 황해도의 은파, 함경도의 원산, 강원도의 대화장(평창) 등이 유명하여 새로운 상업 도시로 성장해 갔다.
- 조선 후기 포구 상업의 발달 : 17세기 전반까지 포구의 주된 구실은 조세곡 운송, 해산물 채취, 소금 생산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에 따라 포구도 물류 중심지로 그 성격이 바뀌면서 상업 중심지로 변하였다. 18세기 이후 수상 교통은 주로 남해안과 서해안 그리고 경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대동강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상업 중심지로 발전하였던 포구들은 주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으로, 바닷물이 올라올 수 있었던 포구였다. 대포구는 서울의 마포, 서강, 용산 등 포구가 산재한 경강 외에도 금강 하류에 위치한 은진의 강경포, 그리고 동해안의 원산포, 남해안의 창원 마산포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포구 상업의 발전으로 대포구와 그 주변의 소포구, 그리고 장시를 연결하는 유기적 유통권이 형성되었다. 18세기 소포구의 발전은 매우 두드러졌다. 소포구의 발전은 당시 5일장으로 체계화하고 있었던 장시와 유기적 연계망을 형성함으로써 지역 안 시장권의 토대를 구축하였고, 이러한 지역 안 시장은 대포구를 통해 원격지 시장으로 연결됨으로써 전국적 시장이 형성될 수 있었다. 즉 포구상업의 발달은 농촌장시와 도시의 상업을 자극함으로써 조선사회의 상업발달을 견인하는 구실을 수행했던 것이다.
 
주 257
각주 257) 송상
송상은 국내 상업 뿐 아니라 대청 대청 무역을 통해서도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였다. 한편, 그들은 장부를 철저히 정리할 필요성에서 ‘송도 사개치부법’이라는 독특한 장부 정리 방법을 장만하였다. 사개란 주는 자, 받는 자, 주는 것, 받는 것의 네 가지 거래 요소를 말하며, 일기와 장책을 구분해서 정리하는 복식 부기 방법으로 정리하였다.
ko.wikipedia.org/wiki/개성상인ko.wikipedia.org/wiki/개성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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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과 도시의 발달

3. 조선 후기의 상업과 도시
  1. 한양의 도시화
    • 배경 : 대동법 확산, 국제 무역과 화폐 유통 발달
    • 18세기 이후 인구 20만~30만 명, 다양한 인구 구성
    • 주변 도시의 성장 : 개성, 수원
  2. 미약한 도시화
    • 상업 억제, 오랫동안 유지된 자급자족 체제
    • 최대의 소비자인 양반들의 농촌 거주 → 수도인 한양 이외의 지역에서 도시화 미약
한양의 도시화
인구의 증가와 상업발달에 따라 한양은 차츰 중세적 왕도에서 상업 도시로 그 성격이 변하였다. 도시구조 자체도 궁궐과 관청 중심에서 상업 중심지의 비중이 높아지는 구조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상업 중심지도 확대되었다. 원래 서울의 상가는 종루를 중심으로 건설된 시전행량이 유일한 상가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남대문 밖과 서소문 밖에 칠패 시장이 창설되었고, 1760년(영조36)에는 경모궁 근처인 이현(배오개)에 상가가 조성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종로와 이현, 칠패상가는 한양의 삼대시(三大市)로 불리게 된다.

한양 인구 구성의 다양화
17세기 후반 이후 한양의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의 상업 기능이 늘어나면서 한양의 인구 구성도 크게 변화하였다. 17세기 전반 종실, 부마, 사대부, 의관, 역관, 서리와 시전 상인 등 행정‧군사‧정치 중심지에 걸 맞는 주민 구성을 갖추고 있었지만, 대동법 실시와 확대 이후, 19세기 초에는 직임자, 서리, 공인, 시전 상인, 군병, 상인, 수공업자, 한잡지류(閑雜之類)로 변모하였다. 본 사료는 19세기 초반 한양 주민의 구성을 보여주는데, 특히 ‘농사짓거나 옷감을 짜지 않아도 먹고 살아가는 무리’의 등장이 주목된다. 이른바 상업의 발전을 통해 장사나 품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도시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미약한 도시화
조선왕조의 지배층이었던 양반은 대대로 서울에 사는 친척이나 현직 관료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농촌 거주자였다. 그들은 스스로가 소유하는 농지나 노비로부터 일용물자를 조달하고, 시장 교환을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16세기 이후 경제의 자급자족 체제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국가 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양반층의 존재방식이 보다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도시의 발달이 매우 낮았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수도인 서울은 20~30만 명의 인구를 가진 큰 도시였지만, 그 이외에 1만을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는 아주 적었다. 군이나 현의 관아 소재지를 읍내라고 하는데, 읍내의 주된 거주자는 향리와 공노비들이고 양반은 읍내에 거주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조선의 읍내는 중국의 현성이나 일본의 조카마치와는 그 주민 구성이 전혀 다른 것이다.

수원 화성
정조의 화성 신도시 건설 : 정조는 사도 세자의 묘를 이장하여 현륭원을 조성한 뒤 1794년부터 신도시 건설에 착수하여 화성을 서울 다음가는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만들려 하였다. 축성 과정에서 거중기라는 새로운 기계를 사용하고 동원된 일꾼들에게 일일이 품삯을 지급하였다. 또 건설 사업을 마친 뒤에는 “화성성역의궤”라는 백서를 남겨 공사의 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미지는 “화성성역의궤”의 장안문(북문) 부분이다.
 
주 258
각주 258) 다양한 인구 구성
한양 주민들 중에서 직임자는 봉록을 받아서 살며, 서리는 자질구레한 품으로 살고, 군인들은 군포를 받아서 살고, 영세 소상인들은 조그만 이익에 의지해서 살고, 수공업자는 힘들여 제조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흩어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농사도 짓지 않고, 옷감을 짜지도 않고 먹고 사는 무리가 무려 수십만이나 된다.
- “비변사등록” -
- “비변사등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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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59
각주 259) 수원
수원 화성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것은 1789년 사도 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정조 대 이후 수원은 계획 도시로서 성장하였다.
ko.wikipedia.org/wiki/수원_화성ko.wikipedia.org/wiki/수원_화성수원 화성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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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과 도시의 발달

명‧청 대
에도 시대
조선 후기
  • 상업 : 대운하의 활성화, 은 유통의 활발, 면‧비단‧농산물의 전국적 유통, 차‧도자기 생산 활성화
  • 도시 발달 : 강남 지역 시진의 증가 → 강남 전체의 도시화

  • 급속한 도시화 : 조카마치 형성, 산킨고타이제의 영향 → 대도시(에도‧오사카‧교토), 상업 도시 발달
  • 조닌층 성장 : 영주와 무사 상대로 금융업 전개

  • 상업 : 장시 발달, 포구‧도시 시장 발달
  • 한양의 도시화 : 대동법 확산‧국제 무역‧화폐 유통 발달
  • 한양 이외 도시화 미약 : 최대 소비자인 양반의 농촌 거주


  • 각주 249)
    대운하도대운하는 수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북송 때까지 사용되던 대운하는 남송 대 금의 화북 점령으로 기능이 중단되었다. 13세기 후반 원이 중원 통일 이후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면서 남방의 물자를 수도까지 수송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자 운하를 확장하였다. 명 영락제의 베이징 도읍으로 강남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ko.wikipedia.org/wiki/대운하ko.wikipedia.org/wiki/대운하 바로가기
  • 각주 250)
    대운하
     바로가기
  • 각주 251)
    베이징(정치‧군사‧소비의 중심 도시)으로 수송황허에서 베이징으로 왕래하기 위해서는 대운하를 경유해야 하는데, … 진공하는 조운선 외에도 … 사적인 무역에 종사했던 선박이 더 많았다. … 조정으로 운송되는 선박들이 베이징에 도달할 때, 상당수의 선박은 만재되지 않았고 상인들은 이를 이용해서 저렴한 가격으로 선박의 빈 공간을 빌렸다. 따라서 사람들이 말하길 베이징은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한다.
    – 마테오 리치
    – 마테오 리치 바로가기
  • 각주 252)
    휘저우 상인휘저우 상인들은 소금과 면포, 비단, 차 등을 취급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런 다음 산지에서 물건을 싸게 대량으로 구매하거나 계절 상품을 미리 사놓았다가 적기에 내다 팔고, 다른 지방의 상품을 신속하게 소비지에 연결하는 생산과 유통의 순환 체계를 활용하였다. 이들은 객지에 회관을 건립하여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휘저우 상인들의 근거지였던 양저우에는 이들이 건축한 화려한 저택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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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53)
    쑤저우‘성세자생도’에서 ‘자생’이란 ‘인구가 늘어난다’라는 뜻인데, 어떤 사람이 세어 보았더니 그림 속에 4,600여 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쑤저우의 주택은 약 10만 호로, 1호당 4~5명이라고 한다면 인구는 40만~50만 명 정도였다.
    쑤저우위치 바로가기
  • 각주 254)
    시진지도는 중국 강남의 쑤저우 지역에서 발달한 시진 분포를 나타낸 것이다. 일찍부터 강남에서는 쑤저우, 항저우 등 대규모의 상업 도시뿐 아니라 시진이라 불리는 중소 규모의 시장 도시들이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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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55)
    조카마치히메지성
    히메지성위치 바로가기
  • 각주 256)
    오사카긴 다리 일곱 개를 지나서 비로소 오사카에 당도하니, 곧 모든 배가 정박하는 곳이었다. …… 6∼7리쯤 가서 사관에 이르렀는데, 그 사이에 있는 길 양쪽의 긴 건물들이 층층의 집 아닌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온갖 물건을 파는 점포였다. 구경하는 사람이 길을 가득 메웠고 눈부시게 화려한 것이 강 언덕에 비해 배나 더 많았다.…… 온갖 종류의 장인과 잡화의 거간꾼이 온 나라에 퍼져 있으며 ……
    신유한, “해유록”
    신유한, “해유록”“해유록”“해유록” 바로가기
  • 각주 257)
    송상송상은 국내 상업 뿐 아니라 대청 대청 무역을 통해서도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였다. 한편, 그들은 장부를 철저히 정리할 필요성에서 ‘송도 사개치부법’이라는 독특한 장부 정리 방법을 장만하였다. 사개란 주는 자, 받는 자, 주는 것, 받는 것의 네 가지 거래 요소를 말하며, 일기와 장책을 구분해서 정리하는 복식 부기 방법으로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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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58)
    다양한 인구 구성한양 주민들 중에서 직임자는 봉록을 받아서 살며, 서리는 자질구레한 품으로 살고, 군인들은 군포를 받아서 살고, 영세 소상인들은 조그만 이익에 의지해서 살고, 수공업자는 힘들여 제조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흩어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농사도 짓지 않고, 옷감을 짜지도 않고 먹고 사는 무리가 무려 수십만이나 된다.
    - “비변사등록” -
    - “비변사등록” - 바로가기
  • 각주 259)
    수원수원 화성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것은 1789년 사도 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정조 대 이후 수원은 계획 도시로서 성장하였다.
    ko.wikipedia.org/wiki/수원_화성ko.wikipedia.org/wiki/수원_화성수원 화성위치 바로가기

색인어
지명
양저우, 쑤저우, 히메지성, 수원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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