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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은 유통의 활성화

4-2단원 3차시
  • 저필자
    황지숙(신림고 역사 교사)

은 유통의 활성화

중국의 은 유통
일본의 은 유통
조선의 은 유통

은 유통의 활성화

1. 중국의 은 유통
  1. 전 세계 은의 중국 유입
    • 유럽‧일본 상인과 무역 → 아메리카‧일본에서 생산된 은의 중국 유입
    • 16세기 은의 가치가 유럽보다 2배 높음
전 세계 은의 중국 유입
- 본래 중국의 은 생산량은 많지 않았는데, 유럽 상인들과의 무역을 통해 엄청난 양의 은이 명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에스파냐가 아메리카에서 생산한 은이 갈레온 무역을 통해 필리핀을 거쳐 들어왔다. 일본에서 채굴된 은도 명으로 유입되었다. 1630년대까지 해마다 250여톤 정도의 외국 은이 들어오면서 중국은 ‘외국 은의 무덤’이라 불릴 정도였다.
* 보충 : 15세기 중엽 유럽에서의 은 생산 증가와 은 채굴에 대한 붐은 일차적으로 경제를 활성화시켜 유럽인들로 하여금 “동양의 사치품”에 대한 열망과 구매력을 강화시켰고, 더 나아가 신대륙의 은광 개발을 야기할 항해의 시대를 촉진시켰다. 16세기 중엽에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의 대규모 은광 개발 및 은 제련기술(수은 아말감 기법)이 개발됨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다시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하는 은 유통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1570년대 이후 신세계의 은광과 중국을 연결하는 무역의 루트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하나는 마닐라를 거점으로 하는 스페인의 갈레온 무역이고, 둘째는 마카오로 들어오는 포르투갈 인들의 무역이며, 셋째는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를 통해 이루어지는 네덜란드와의 무역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마닐라를 통해 이루어지는 스페인과의 무역으로, 당시 많은 경우 한 해에 약 2-3백만 페소(약 57,500-86,250kg)의 은이 아메리카에서 중국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 은의 가치를 보면, 명‧청의 은값은 유럽보다 훨씬 비쌌다. 16세기를 기준으로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을 보면, 명에서는 은의 가치가 유럽보다 2배 가량 높았다. 그러므로 유럽인들은 단순하게 명‧청에 은을 가져가기만 해도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 보충 : 16세기 중국에서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1 대 6이었다. 곧 금 한 단위를 가지고 은 6단위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는 그 비율이 1 대 12였다. 금 한 단위로 은 12단위를 얻을 수 있으니, 중국과 유럽을 비교하면 유럽에서는 금 가치가 중국의 2배이고, 거꾸로 이야기하면 중국에서는 유럽에 비해 은 가치가 2배였다. 만일 유럽 상인이 중국에 가서 거래를 할 일이 있으면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싼 은을 구입하여 중국에 가져가면 그것만으로도 100퍼센트의 환차익을 누리게 된다. 이처럼 중국에서 은 가치가 높은 것이 유럽과 중동,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은이 밀려오도록 만든 기본 동인이었다.
 
주 228
각주 228) 전 세계 은의 중국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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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유통의 활성화

1. 중국의 은 유통
  1. 은 경제권의 형성
    • 상품 거래에서 화폐보다 은이 활발하게 유통
    • 중국 내 상업 발달로 은에 대한 수요 증가
    • 조세의 은납화 : 농촌에서도 농산물을 팔아 은으로 세금 납부 → 명의 일조편법, 청의 지정은제
    • 북방 민족의 은 경제권 편입
    • 은광 개발 재개
    • 조선에 공물로 은 요구
마제은
마제은은 원대 말부터 명대 초 사이에 주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종의 은괴(銀塊)로서 말굽과 비슷하다고 하여 ‘말굽은’이라고도 불렸으며 서양인들 사이에서는 사이시(sycee)로 통했다.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들어온 막대 형태의 은괴는 통화로서 사용되지 않고 녹여서 중국의 독자적인 형태로 다시 주조되었다.
정부는 은의 시스템 운용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제은을 주조한 것은 관에서 허가받은 곳으로, 은의 감정과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민간의 교환소였다. 마제은은 여러 가지 중량으로 다양하게 주조되었는데, 감정기관으로부터 중량과 품위(品位)에 대해 철저한 검사를 받은 후에 유통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은 마제은은 실질가치를 지닌 금속화폐로서 수요가 꾸준히 늘어 청대에 가장 많이 주조되었다. 특히 50냥(1,875g) 내외의 마제은이 많이 유통되었는데 주로 거액의 거래나 자산가치 보존을 위한 비축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보충 : 16세기 이래 중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은은 계수(計數) 화폐인 은화가 아니라 계량(計量) 화폐인 은괴(銀塊), 즉 은덩어리였다. 여기서 중국 은경제의 특징을 볼 수 있는데, 정부가 은화 발행이나 유통에 일체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무게로 가치가 정해지는 은이 중심 통화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러하다. 또한 지역에서 통용되는 은의 가치는 단순히 무게 하나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平; 중량), 색(色; 순도), 태(兌; 나누는 단위, 혹은 수)까지 함께 고려하여 결정되었으므로, 사실상 지역마다 사용되는 은량의 기준은 전혀 통일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한 도시에서 수십 가지의 은량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일본에서도 은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무게로 계산하는 칭량 화폐였다.

은 경제권의 형성
- 화폐보다 은이 활발하게 유통 : 원 말에 교초의 가치가 폭락하자 은의 가치가 급등하였으나, 명은 오히려 은의 사용을 금지하고 지폐인 보초와 동전을 유통시켰다. 그러나 화폐에 대한 불신으로 베이징 등지의 도시에서는 은이 민간 거래에서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 보충 : 중국 화폐제도에서 은이 중요하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원말부터이다. 몰락하는 원조는 종이지폐인 교초(交鈔)에 관한 새로운 통화 개혁을 추진했지만, 태환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과 함께 남발되는 교초의 가치는 급속하게 떨어져 사실상 종이조각이나 다름없어졌다. 이에 사람들은 양질의 동전이나 은 덩어리를 소장하려고 하였고, 동전 주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은의 가치가 급속하게 올라갔던 것이다. 명조가 개창되면서 태조 홍무제는 종이지폐인 보초(寶鈔)를 주된 화폐로 사용하는 정책을 고수했지만, 보초에 대한 태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은광 개발을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하지만 14세기 후반 국내 은 생산은 매년 10만량(약 3,750kg)을 넘지 못했다. 영락제가 집권한 이후 은광 개발에 대한 일시적인 허용이 증가하고, 15세기 초반부터 은광에서 거두는 세금 역시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 상업 발달 : 견직업과 면직업 등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했는데, 직물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조세로 내는 은을 확보하여 조세를 납부하였다.
- 베이징과 강남 등 정치, 경제의 중심지는 물론 농촌에서도 농산물을 팔아 반은 은으로 세금을 납부하였다. 나아가 몽골, 여진 등 북방 민족도 점차 명의 은 경제권으로 편입되었다. 이처럼 은이 널리 유통되면서 조세 제도 역시 16세기 후반 세금과 요역을 은으로 납부하는 일조편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사실상 은이 공식 화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8세기 초 청에서는 정세(인두세)를 토지세에 합쳐 은으로 징수하는 지정은제를 실시하였다.
* 보충 : 1436년에 드디어 양자강 하류의 일부에서 실시되던 절납(折納, 현물로 납부하는 세금을 은으로 환산하여 납부하는 방식)이 동남 지역의 6개성으로 확대되었다. 이른바 금화은(金花銀)이라 불리는 절납이 허용되자 그 액수는 대략 100만 량 정도가 되었다. 은납화의 경향은 이로부터 확대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무관의 봉급지급 문제나 납세호의 불편을 해결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은에 대한 수요가 증가된 궁중과 중앙정부에게도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1570년대가 되면 복잡했던 조세와 요역을 은으로 일괄 납부하게 했던 일조편법(一條鞭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중국은 본격적인 은 경제시대를 열게 되었다.
- 은의 수요가 늘어나자 명은 은광 개발을 재개하였고, 조선에 공물로 은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조선은 세종 대 명에 보내는 공물에서 금, 은을 면제받았다. 이후 조선의 은광 개발에 대한 관심은 약화되었다.

명의 배금주의 사료 - 김육, “조경일록”
1637년 베이징에 사신으로 갔던 김육은 명 의원 육국상을 만나 명 관리들 사이에 퍼진 탐욕스런 풍조를 비판하였다. 육국상은 김육에게 ‘은이 있어야 의가 있고 기가 있다.’고 하여 명의 배금주의를 풍자하였다.
 
주 229
각주 229) 중국의 은
마제은
명과 청에서 유통되던 은의 모습으로, 은은 무게와 순도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은덩어리였다. 말 발굽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마제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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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30
각주 230) 조선에 공물로 은 요구
조양문에 이르니 환관이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뇌물로 준 은이 적다는 이유로 들어갔다가 도로 쫓겨나, 은 10냥을 써 보인 뒤에야 들어가도록 허락 받았다. …… 내가 말하기를, 은 100냥으로 인삼 14근을 구하기에 거두어 보냈더니, 그 은마저 도로 가지고 갔소. …… 어떻게 생각하오? 하니, 육 의원이 그런 일쯤은 본디 있습니다. …… 의라는 것은 기운이니, 은자가 있으면 기운이 있다 하였다.
- 김육, "조경일록"
- 김육, "조경일록""조경일록""조경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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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유통의 활성화

1. 중국의 은 유통
  1. 명의 은 의존도 심화
    • 외국 은에 대한 의존도 높아짐 → 은 유입량의 변화에 민감
    • 17세기 후금의 위협 → 국방비로 은 지출의 급격한 증가
    • 에스파냐의 쇠퇴 → 은 유입 감소 → 경제적 위기 심화
명 경제의 위기 사료 - 황종희, “명이대방록”
명말청초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황종희는 사회 개혁사상을 담은 명이대방록을 저술했다. 그 가운데 「재계(財計)」편은 경제문제, 특히 세금의 은납화 이후 전개된 명말의 사회변화를 부정적으로 파악하며, 다시금 동전과 지폐가 유통되던 명초의 상황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러한 황종희의 저술을 통해, 16세기부터 일본과 아메리카에서 막대한 은이 중국으로 유입된 이후, 즉 명 중기 이후로 은납화의 결과 중국 내부에서 얼마나 막대한 은을 필요로 했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주 231
각주 231) 명의 은 의존도 심화
모든 조세 업무를 은 하나로 아우르니 은이 부족하게 되었다.…… 재정 지출이 많아진 이래로 북경에 모인 은이 모두 변경 밖으로 빠져 나가고, 부유한 상인‧고관‧교활한 관리들은 북방에서 남방까지 모두 자신의 힘을 가지고 천하의 금은을 모두 거두어갔다.…… 무릇 은이 부족해지는데도 부세는 옛날 그대로이고 교역도 변함이 없다. 허둥지둥 은을 구하고자 해도 장차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 황종희, "명이대방록"
- 황종희, "명이대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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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유통의 활성화

2. 일본의 은 유통
  1. 은 생산의 비약적 증가
    • 16세기 초 조선에서 은 정련법 도입
    • 본격적인 은광 개발(이와미 은광)
  2. 은 유통의 활성화와 정부의 대책
    • 조세를 화폐(금‧은‧동전)로 납부
    • 무역 결제 수단으로 은 사용 → 일본 내 귀금속의 유통량 부족 → 수입 억제, 수출 장려
은 생산의 비약적 증가
일본에서는 16세기 중반에 금광과 은광이 많이 개발되었다. 대표적인 광산이 일본 혼슈 시마네현에 위치한 이와미 은광이다. 이 광산은 일찍이 14세기 초에 발견됐지만, 1526년부터 본격적으로 채굴이 시작되어 20세기에 가서야 폐광되었다. 현재 이 지역에는 대규모 채광과 제련, 수송이 이루어진 흔적이 잘 남아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전성기인 17세기 전반기에는 이곳은 생산량이 4만 킬로그램까지 이르렀고 이중 많은 양이 멀리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수출되었다.
광산 개발은 원래 다이묘들의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곧 상업 목적이 더 중요해졌다. 특히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던 중국 비단을 수입하고 그 대금을 결제하는 데에 은이 많이 필요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교역은 처음에 중국 푸젠성 상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이 담당했다가, 기독교 전도 문제로 말썽을 빚어 포르투갈인들이 축출되고 난 다음에는 네덜란드인들이 이 사업을 물려받았다. 한 연구자는 17세기 초 일본의 은 수출량이 연 20만 킬로그램에 달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당시 전 세계 은 생산의 1/4~1/3에 해당하는 양이다. 일반적으로 근대 초 일본은 멕시코에 이어 세계 2위의 은 수출국으로 자리매김 된다. 일본의 은 생산 증대에서 중요한 핵심 기술이었던 연은분리법은 조선에서 개발되었다.

연은 분리법
1503년(연산군 9) 함경도 단천에서는 세계 광업사상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었다. 은광석에서 납을 제거하여 순은을 추출하는 제련 기술이었다.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재를 두르고 은광석을 채운 다음, 깨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불을 피워 녹이는 것이 핵심이었다. 연은 분리법 또는 회취법이라 불렸던 그 기술은 당시로는 최첨단의 제련술이었다. 기술 개발의 주인공은 양인 김감불과 장예원의 노비 김검동이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이 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16세기 중엽에 조선을 드나들던 일본 상인들이 조선 장인을 초빙하여 관련 기술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16세기판 첨단 기술 유출이었던 셈이다. 한편, 이 무렵 시마네 현의 이와미에서 은광이 발견되자, 전국 시대를 맞아 재정 확보에 열을 올리던 일본의 다이묘들이 경쟁적으로 이 기술을 활용하였다. 조선 침략을 자행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된 수입원도 은광 개발이었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이와미 은광이 명성을 얻은 배경에는 조선의 은 정련법이 있었다.

은 유통과 정부의 대책
에도 시대 후반에 이르러 재정 부담에 시달리고 있던 지방의 번들은 귀금속이 번 바깥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막부도 마찬가지였다. 해외 수입품의 수량을 제한하여 귀금속의 유출을 줄이거나 은화의 순도를 낮추는 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조선 인삼을 국산화하려고 했던 것처럼, 수입은 억제하고 수출은 늘리는 일종의 보호 무역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나아가 자기 영내에서만 통용되는 동전이나 지폐를 발행함으로써 교환 수단을 독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에도 시대의 화폐
에도 시대에는 금과 은, 동전 세 가지 화폐가 주조되어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따라서 금, 은, 동을 교환하는 환전이 중요하였고, 교환 비율을 놓고 예민한 대립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환전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상인이 등장하여 전국적으로 금융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환전의 실제 교환 비율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주 232
각주 232) 정련법
연은 분리법
1503년 조선에서 개발된 것으로 회를 사용하기 때문에 회취법이라고도 한다. 이 첨단 제련 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의 은광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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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33
각주 233) 금‧은‧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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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유통의 활성화

2. 일본의 은 유통
  1. 은의 길 등장
    • 16세기 중반 일본의 은이 조선의 사행로를 통해 랴오둥과 베이징까지 유통
    • 이 길을 통해 중국의 비단‧생사, 조선의 인삼 등이 일본으로 유입
조선의 인삼
17세기 후반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 인삼이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 인삼을 전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했던 쓰시마는 인삼을 수입하기 위해 은화를 특별히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일본의 은 유출을 줄이기 위해 조선 인삼을 국산화하고자 하였다.
* 보충 : 은 유통에서 조선의 위치
일본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자체의 은 수요가 증가하면서 은의 해외 유출이 금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1688년부터 일본 막부가 은 수출을 금지하고 대신 구리를 수출했다. 그런데 일본의 한 연구자의 견해에 따르면, 나가사키를 통해서는 은이 수출되지 못했지만 ‘쓰시마-조선’ 루트를 통해 일본에서 중국으로 약 60년 정도 더 은이 수출됐다는 것이다.
이 거래에서 조선은 세계 최대 은 수요자(중국)와 세계 2위의 은 공급자(일본) 사이에서 중개인 역할을 했다. 이때 조선은 단지 중개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점은 일본에서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가 상상 외로 컸으며, 인삼 수입의 대가로 상당액의 은이 조선에도 유입되었다는 점이다.17세기 초부터 일본에서는 거의 미신에 가까울 정도로 인삼의 효능을 굳게 믿었다. 인삼은 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래낼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병든 아버지를 살려내기 위해 어린 소녀가 유곽에서 몸을 판 돈으로 인삼을 샀다는 식의 이야기가 생겨났다. 그런 만큼 인삼 가격 또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비싸서, 인삼을 먹고 살아난 사람이 인삼 사느라고 진 빚을 못 갚아 목을 맸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이다. 심지어 일본 막부에서는 인삼 수입을 위해 특수 화폐를 주조하기도 하였다. 1601년에 은 함유량 80%의 게이초 은화를 발행하여 이것으로 조선과 교역을 했지만 차차 은 공급이 딸리자 1697년에 64퍼센트짜리 겐로쿠 은화를 발행했다. 이 화폐는 양국 간 경제외교상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조선 관리들은 이 화폐의 은 함유량을 60~62%라고 주장했고 일본 쪽은 64%라고 주장해서 결국 63%로 타협했다는 것이다.
 

은 유통의 활성화

3. 조선의 은 유통
  1. 은 유통의 부진
    • 16세기 후반까지 쌀‧면포 등 현물을 화폐로 사용 → 면포의 유통 활발, 금속 화폐의 유통은 명‧일본에 비해 부진
    • 은 생산량 저조
    • 은광 개발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 태도 : 명의 금‧은 공물 요구 부담 → 세종 때 공물에서 금과 은 면제 → 이후 은광 개발에 대한 관심 약화

은 유통의 활성화

3. 조선의 은 유통
  1. 은 유통의 확대
    • 임진 전쟁 시기 명군의 참전 → 명의 은이 조선으로 유입, 명군과의 접촉으로 은 거래 활성화
    • 명 장수의 은광 개발 관심 , 조선에서 중상론 강조
  2. 동전‧은 유통 구조의 확립
    • 18세기 대동법의 전국 시행 → 상업화‧도시화 진전
    • 이원적 구조 형성 : 동전 유통(국내 거래, 소액 거래), 은 사용(대외 무역, 고액 거래)
은 거래 활성화 사료 - “선조실록”
임진 전쟁 초기에 은 사용에 익숙하지 않았던 조선 사람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은 사용의 편리함을 깨닫고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이익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처럼 임진 전쟁은 조선에서 은 유통이 활발해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명 장수의 은광 개발 사료 - “경략복국요편”
임진 전쟁이 일어난 초반까지만 해도 조선 사람들은 은을 사용하여 거래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명군 사령관 송응창은 조선에서 은광을 개발할 경우 도둑맞을 염려가 없다고 하였다. 중국의 광부는 은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채굴한 은을 도둑질 하는데, 조선의 광부는 은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도둑질 하지 않으므로 조선의 광부에게는 노임만 지급하면 된다는 의미이다.

조선의 중상론 사료 - 유몽인, “어우집”
유몽인은 조선이 상업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은이나 동전 등을 화폐로 쓰지 않고 곡식과 포로써 대신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상업과 유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주 234
각주 234) 은 거래 활성화
근래 술과 고기, 두부, 땔감 등 소소한 물건의 값을 치르는 데 모두 은을 사용하는데, 서울과 지방 백성들이 그 덕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명군과 거래할 때 시험삼아 해보다가 시일이 오래 지나자 이미 습속으로 굳어졌습니다. 술이나 땔감을 파는 사람들이 사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은을 갖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본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이익이 있음을 알고 그러는 것입니다.
- "선조실록"
- "선조실록""선조실록""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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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35
각주 235) 명 장수의 은광 개발 관심
조선을 방문해 보니 은광이 아주 많아 개발할 수 있을 듯합니다. 더욱이 조선에서는 은전을 일절 사용하지 않아서 비록 은의 이익이 생겨도 백성들이 그것을 실행할 줄도 모르고 또 그 이익을 다툴 줄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광도(은을 채굴하는 광부)들이 은을 훔쳐갈 걱정은 족히 우려할 것이 못됩니다.
- "경략복국요편"
- "경략복국요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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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36
각주 236) 중상론
사람들이 가난하고 곤궁하게 사는 것은 팔도가 모두 그런데, 그 까닭은 심고 경작하는 것만을 근본으로 알고 상업으로써 그것을 보조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천하의 일 가운데 오로지 근본만 있고 끝이 없는 것은 없다. 커다란 근본이란 무엇인가? 곡식과 포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곡식과 포로써 팔고 사는 수단을 삼으니 이것은 한 가지 근본으로 만 가지 끝을 겸하려는 것으로 참으로 졸렬한 것이다.
- 유몽인, 어우집
- 유몽인, 어우집어우집어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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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유통의 활성화

중국의 은 유통
일본의 은 유통
조선의 은 유통
  • 유럽‧일본 상인과 무역 → 아메리카‧일본의 은 유입
  • 은 경제권의 형성 : 상업 발달로 은 수요 증가, 조세의 은납화, 북방민족의 은 경제권 편입, 은광 개발 재개

  • 은 생산의 비약적 증가 : 조선의 은 정련법 도입, 은광 개발 활발(이와미 은광)
  • 조세의 화폐(금‧은‧동전) 납부, 무역 결제 수단으로 은 사용
  • 은의 길 등장

  • 은 유통의 부진 : 쌀‧면포 등 현물 화폐
  • 은 유통 확대 계기 : 임진전쟁의 명군 참전
  • 18세기 대동법 이후 동전(국내‧소액)과 은(무역‧고액) 유통의 이원적 구조 형성


  • 각주 228)
    전 세계 은의 중국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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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29)
    중국의 은마제은
    명과 청에서 유통되던 은의 모습으로, 은은 무게와 순도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은덩어리였다. 말 발굽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마제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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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30)
    조선에 공물로 은 요구조양문에 이르니 환관이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뇌물로 준 은이 적다는 이유로 들어갔다가 도로 쫓겨나, 은 10냥을 써 보인 뒤에야 들어가도록 허락 받았다. …… 내가 말하기를, 은 100냥으로 인삼 14근을 구하기에 거두어 보냈더니, 그 은마저 도로 가지고 갔소. …… 어떻게 생각하오? 하니, 육 의원이 그런 일쯤은 본디 있습니다. …… 의라는 것은 기운이니, 은자가 있으면 기운이 있다 하였다.
    - 김육, "조경일록"
    - 김육, "조경일록""조경일록""조경일록" 바로가기
  • 각주 231)
    명의 은 의존도 심화모든 조세 업무를 은 하나로 아우르니 은이 부족하게 되었다.…… 재정 지출이 많아진 이래로 북경에 모인 은이 모두 변경 밖으로 빠져 나가고, 부유한 상인‧고관‧교활한 관리들은 북방에서 남방까지 모두 자신의 힘을 가지고 천하의 금은을 모두 거두어갔다.…… 무릇 은이 부족해지는데도 부세는 옛날 그대로이고 교역도 변함이 없다. 허둥지둥 은을 구하고자 해도 장차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 황종희, "명이대방록"
    - 황종희, "명이대방록" 바로가기
  • 각주 232)
    정련법연은 분리법
    1503년 조선에서 개발된 것으로 회를 사용하기 때문에 회취법이라고도 한다. 이 첨단 제련 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되어 일본의 은광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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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33)
    금‧은‧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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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34)
    은 거래 활성화근래 술과 고기, 두부, 땔감 등 소소한 물건의 값을 치르는 데 모두 은을 사용하는데, 서울과 지방 백성들이 그 덕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명군과 거래할 때 시험삼아 해보다가 시일이 오래 지나자 이미 습속으로 굳어졌습니다. 술이나 땔감을 파는 사람들이 사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은을 갖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본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이익이 있음을 알고 그러는 것입니다.
    - "선조실록"
    - "선조실록""선조실록""선조실록" 바로가기
  • 각주 235)
    명 장수의 은광 개발 관심조선을 방문해 보니 은광이 아주 많아 개발할 수 있을 듯합니다. 더욱이 조선에서는 은전을 일절 사용하지 않아서 비록 은의 이익이 생겨도 백성들이 그것을 실행할 줄도 모르고 또 그 이익을 다툴 줄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광도(은을 채굴하는 광부)들이 은을 훔쳐갈 걱정은 족히 우려할 것이 못됩니다.
    - "경략복국요편"
    - "경략복국요편" 바로가기
  • 각주 236)
    중상론사람들이 가난하고 곤궁하게 사는 것은 팔도가 모두 그런데, 그 까닭은 심고 경작하는 것만을 근본으로 알고 상업으로써 그것을 보조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천하의 일 가운데 오로지 근본만 있고 끝이 없는 것은 없다. 커다란 근본이란 무엇인가? 곡식과 포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곡식과 포로써 팔고 사는 수단을 삼으니 이것은 한 가지 근본으로 만 가지 끝을 겸하려는 것으로 참으로 졸렬한 것이다.
    - 유몽인, 어우집
    - 유몽인, 어우집어우집어우집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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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유통의 활성화 자료번호 : edeao.d_0004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