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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유럽의 진출과 교역망의 확대

4-2단원 2차시
  • 저필자
    황지숙(신림고 역사 교사)

유럽의 진출과 교역망의 확대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무역
유럽 상인의 진출
교역망의 확대와 그 결과

유럽의 진출과 교역망의 확대

1.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무역
  1. 14세기 이후 동남아시아 무역
    • 명과 인도 상인의 동남아시아 진출 : 향신료 구입
    • 믈라카 등 동남아시아 섬과 도시들 →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
  2. 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 유럽 상인들의 동남아시아 진출 : 향신료 + 중국의 도자기‧차‧비단 구입 목적
    •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무역 절정(상업의 시대)
주 222
각주 222) 믈라카
도시 국가였던 믈라카는 16세기에 유럽인이 진출하기 전까지,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와 서쪽의 인도양과의 교역을 중개하면서 번영을 누렸다. 믈라카는 페르시아 만에서 명까지 연결되는 항해에서 가장 중요한 체류지로서 세계적인 항구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한 포루투갈인의 여행기에 따르면 이 도시 거리에서 84개 언어가 통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http://ko.wikipedia.org/wiki/믈라카_주http://ko.wikipedia.org/wiki/믈라카_주믈라카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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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진출과 교역망의 확대

2. 유럽 상인의 진출
  1. 포르투갈 상인
    • 유럽 상인의 선두
    • 믈라카 점령 → 마카오 → 일본의 나가사키 진출
    • 교역 방식 : 조총과 화약 및 명의 비단을 일본에 판매 → 결제한 은으로 명의 비단과 도자기 구입 → 믈라카 거쳐 유럽으로 수출
마카오위치
16~17세기 교역망
유럽 상인의 선두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여 아시아 경략의 근거지로 삼은데 이어 중계무역의 중심지인 믈라카를 점령하였다(1511). 일본의 다네가시마에 진출한 포르투갈은 마침내 마카오에 교역지를 설립하였다(1557). 규슈의 다이묘가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할양하자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걸쳐 포르투갈은 중국해의 무역을 장악했다. 명의 해금정책 완화 혜택을 입은 것도 포르투갈 상인이었다. 포르투갈 상인은 조총, 화약, 중국의 생사와 견직물을 일본에 팔고, 일본이 결제한 은으로 중국의 견직물이나 도자기를 사서 말라카를 경유하여 유럽에 수출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교사 출국 조치에도(1587년) 불구하고, 포르투갈 상인은 일본에 남도록 허락되었다. 16세기 말에는 포르투갈의 영향이 일본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예술, 의복, 음식, 의학, 과학,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뒤이어 진출한 에스파냐는 필리핀 제도에 기지를 건설하고 마닐라를 수중에 넣었다(1571). 마닐라는 ‘갈레온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명 상인은 비단, 면, 도자기를 가져와 에스파냐 상인이 아카풀코에서 가져온 은과 교환하였다.
16세기 말부터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이 진출하였다. 네덜란드 상인은 향신료 산지인 말루쿠 제도의 지배권을 포르투갈에서 탈취한 후, 일본에 진출하여 규슈 해안의 히라도 섬에 교역 기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에스파냐를 쫒아내고 타이완 남부를 확보하여 40여 년 동안 근거지로 삼았으며, 마침내 믈라카를 점령하였다(1641년). 가톨릭 선교를 앞세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선박의 기항이 금지되고 영국이 철수하자 네덜란드는 일본에 기항할 수 있는 유일한 유럽 국가가 되었다. 네덜란드인은 데지마에 머물며 중국과 교역하였다. 17세기 중엽 바타비아, 말라카, 그리고 말루쿠 제도 대부분을 장악한 네덜란드는 마침내 동남아시아에서 상업의 지배자가 되었다. 자바인의 제해권은 거의 사라졌고, 후추 산지의 통제권을 잃은 아체도 점차 쇠퇴하였다. 활동 근거지를 자바 섬의 바타비아에 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참고 : 유럽의 아시아 진출과 주요 사건
포르투갈인, 고아 점령(1510)․말라카 점령(1511)
포르투갈인, 광저우 도착(1517)
예수회, 프란시스 사비에르 일본 도착(1549)
포르투갈인, 마카오에 무역 조계지 설립(1557)
에스파냐인, 필리핀에 기지 설립(1565)
포르투갈인 신부, 일본에서 추방됨(1587)
일본, 조선 침공(1592)
네덜란드인, 일본 도래(1600)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자바에 기지 설립(1618)
만주족, 청 황조 선언(1636)
일본, 대 네덜란드 교역 금지(1640)
 
주 223
각주 223) 포르투갈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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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24
각주 224) 나가사키
나가사키
나가사키나가사키나가사키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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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진출과 교역망의 확대

2. 유럽 상인의 진출
  1. 에스파냐 상인
    • 마닐라 : 필리핀 제도에 기지 건설, 갈레온 무역 의 중심지
    • 교역 방식 : 멕시코 아카풀코의 은과 명의 비단‧면직물‧도자기와 교환
마닐라위치 아카풀코위치
16~17세기 교역망
유럽 상인의 선두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여 아시아 경략의 근거지로 삼은데 이어 중계무역의 중심지인 믈라카를 점령하였다(1511). 일본의 다네가시마에 진출한 포르투갈은 마침내 마카오에 교역지를 설립하였다(1557). 규슈의 다이묘가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할양하자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걸쳐 포르투갈은 중국해의 무역을 장악했다. 명의 해금정책 완화 혜택을 입은 것도 포르투갈 상인이었다. 포르투갈 상인은 조총, 화약, 중국의 생사와 견직물을 일본에 팔고, 일본이 결제한 은으로 중국의 견직물이나 도자기를 사서 말라카를 경유하여 유럽에 수출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교사 출국 조치에도(1587년) 불구하고, 포르투갈 상인은 일본에 남도록 허락되었다. 16세기 말에는 포르투갈의 영향이 일본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예술, 의복, 음식, 의학, 과학,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뒤이어 진출한 에스파냐는 필리핀 제도에 기지를 건설하고 마닐라를 수중에 넣었다(1571). 마닐라는 ‘갈레온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명 상인은 비단, 면, 도자기를 가져와 에스파냐 상인이 아카풀코에서 가져온 은과 교환하였다.
16세기 말부터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이 진출하였다. 네덜란드 상인은 향신료 산지인 말루쿠 제도의 지배권을 포르투갈에서 탈취한 후, 일본에 진출하여 규슈 해안의 히라도 섬에 교역 기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에스파냐를 쫒아내고 타이완 남부를 확보하여 40여 년 동안 근거지로 삼았으며, 마침내 믈라카를 점령하였다(1641년). 가톨릭 선교를 앞세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선박의 기항이 금지되고 영국이 철수하자 네덜란드는 일본에 기항할 수 있는 유일한 유럽 국가가 되었다. 네덜란드인은 데지마에 머물며 중국과 교역하였다. 17세기 중엽 바타비아, 말라카, 그리고 말루쿠 제도 대부분을 장악한 네덜란드는 마침내 동남아시아에서 상업의 지배자가 되었다. 자바인의 제해권은 거의 사라졌고, 후추 산지의 통제권을 잃은 아체도 점차 쇠퇴하였다. 활동 근거지를 자바 섬의 바타비아에 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참고 : 유럽의 아시아 진출과 주요 사건
포르투갈인, 고아 점령(1510)․말라카 점령(1511)
포르투갈인, 광저우 도착(1517)
예수회, 프란시스 사비에르 일본 도착(1549)
포르투갈인, 마카오에 무역 조계지 설립(1557)
에스파냐인, 필리핀에 기지 설립(1565)
포르투갈인 신부, 일본에서 추방됨(1587)
일본, 조선 침공(1592)
네덜란드인, 일본 도래(1600)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자바에 기지 설립(1618)
만주족, 청 황조 선언(1636)
일본, 대 네덜란드 교역 금지(1640)

에스파냐 상인의 진출
1565년 에스파냐인은 필리핀 제도에 기지를 세웠고, 1571년에 마닐라를 수중에 넣었다. 마닐라는 중요한 무역 중심지가 되어 동아시아 전역, 특히 중국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마닐라는 갈레온 무역의 중심지로서, 이곳으로 중국 상인은 비단, 면, 도자기를 가져와서 에스파냐 상인이 아카풀코에서 가져온 은과 교환했다. 마닐라 갈레온 선에 의해 동아시아와 연결된 아메리카 대륙도 중국 비단과 도자기의 새로운 시장이자 은의 공급처로서 상업 활동의 폭발적 증대에 기여했다.

갈레온 무역
15∼16세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갈레온선(船)을 이용하여 한 대양(大洋) 무역. 갈레온선은 무역과 군용으로 사용된 대형선의 통칭인데, 모양이 다양하나 3개 이상의 마스트와 몇 문의 대포를 갖추었으며, 선수(般首)와 선미(船尾)가 높고, 무게는 500∼2,000 톤 정도였다. 에스파냐의 갈레온 선단은 무역풍을 이용하여 에스파냐의 영지(領地)와 본국의 세비야·카디스 항구 사이의 대양을 왕래하면서 식민지의 금·은·특산물 등을 운반하였다. 멕시코와 필리핀 사이에서는 아카풀코에서 은을 실어내고, 마닐라에 집결된 중국의 비단 ·도자기 등과 교환하였다. 이 태평양의 갈레온 무역은 필리핀의 경제적 생명선으로서 1749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포르투갈의 갈레온 무역은 고아·호르무즈·말라카·마카오를 중심으로 말루쿠 제도의 향신료를 중계하였다. 17세기로 접어들면서 갈레온 무역은 네덜란드의 동인도 진출로 포르투갈 세력이 후퇴하고 영국·프랑스 등의 경범선(輕帆船)이 출현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주 225
각주 225) 에스파냐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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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26
각주 226) 갈레온 무역
16세기에 에스파냐가 대포를 갖춘 대형 선박을 이용하여 멕시코의 은과 필리핀에 집결된 중국 상품을 교환한 태평양 무역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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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진출과 교역망의 확대

2. 유럽 상인의 진출
  1. 네덜란드 상인
    • 말루쿠 제도 지배 : 향신료 산지, 포르투갈로부터 지배권 뺏음
    • 나가사키에 진출 : 나가사키에서 중국인과 교역
    • 17세기 중엽, 가장 영향력 있는 유럽 국가 : 동남아시아 섬 대부분 장악
16~17세기 교역망
유럽 상인의 선두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여 아시아 경략의 근거지로 삼은데 이어 중계무역의 중심지인 믈라카를 점령하였다(1511). 일본의 다네가시마에 진출한 포르투갈은 마침내 마카오에 교역지를 설립하였다(1557). 규슈의 다이묘가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할양하자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걸쳐 포르투갈은 중국해의 무역을 장악했다. 명의 해금정책 완화 혜택을 입은 것도 포르투갈 상인이었다. 포르투갈 상인은 조총, 화약, 중국의 생사와 견직물을 일본에 팔고, 일본이 결제한 은으로 중국의 견직물이나 도자기를 사서 말라카를 경유하여 유럽에 수출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교사 출국 조치에도(1587년) 불구하고, 포르투갈 상인은 일본에 남도록 허락되었다. 16세기 말에는 포르투갈의 영향이 일본 사회 전반에 퍼지면서 예술, 의복, 음식, 의학, 과학,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뒤이어 진출한 에스파냐는 필리핀 제도에 기지를 건설하고 마닐라를 수중에 넣었다(1571). 마닐라는 ‘갈레온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명 상인은 비단, 면, 도자기를 가져와 에스파냐 상인이 아카풀코에서 가져온 은과 교환하였다.
16세기 말부터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이 진출하였다. 네덜란드 상인은 향신료 산지인 말루쿠 제도의 지배권을 포르투갈에서 탈취한 후, 일본에 진출하여 규슈 해안의 히라도 섬에 교역 기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에스파냐를 쫒아내고 타이완 남부를 확보하여 40여 년 동안 근거지로 삼았으며, 마침내 믈라카를 점령하였다(1641년). 가톨릭 선교를 앞세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선박의 기항이 금지되고 영국이 철수하자 네덜란드는 일본에 기항할 수 있는 유일한 유럽 국가가 되었다. 네덜란드인은 데지마에 머물며 중국과 교역하였다. 17세기 중엽 바타비아, 말라카, 그리고 말루쿠 제도 대부분을 장악한 네덜란드는 마침내 동남아시아에서 상업의 지배자가 되었다. 자바인의 제해권은 거의 사라졌고, 후추 산지의 통제권을 잃은 아체도 점차 쇠퇴하였다. 활동 근거지를 자바 섬의 바타비아에 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참고 : 유럽의 아시아 진출과 주요 사건
포르투갈인, 고아 점령(1510)․말라카 점령(1511)
포르투갈인, 광저우 도착(1517)
예수회, 프란시스 사비에르 일본 도착(1549)
포르투갈인, 마카오에 무역 조계지 설립(1557)
에스파냐인, 필리핀에 기지 설립(1565)
포르투갈인 신부, 일본에서 추방됨(1587)
일본, 조선 침공(1592)
네덜란드인, 일본 도래(1600)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자바에 기지 설립(1618)
만주족, 청 황조 선언(1636)
일본, 대 네덜란드 교역 금지(1640)

네덜란드 상인의 진출
에스파냐의 탄압을 받던 네덜란드는 1579년 북부의 주들이 연합해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하고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네덜란드 상인은 1596년 수마트라에 상점을 개설했고, 1600년에 네덜란드 선박이 최초로 일본 해안에 도착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만나게 되었다. 이 시기 네덜란드 정부와 네덜란드 상인들은 동인도회사(VOC)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아시아에서 네덜란드 무역을 독점하게 될 기업으로서, 평화조약과 동맹조약을 맺고 방어 전쟁을 수행하고 요새를 건설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네덜란드인은 말루쿠 제도의 향신료 산지를 목표로 삼고 1605년 가톨릭교도와 신부들을 몰아내려는 현지 이슬람교도와 협력해 포르투갈 인으로부터 제도의 지배권을 빼앗았다. 1608년이 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에서 엄청난 힘을 쥐게 되었다. 어떤 유럽 세력도 동남아시아 섬 지역에서 네덜란드인과 경쟁할 수 없었다. 1618년 그들은 활동 근거지를 자바 섬의 바타비아에 두기로 결정했고, 이후 십 년간 주로 합법적인 무역업자로서, 이 지역의 국제 통상의 주요 참가자로서 활동했다. 1624년 그들은 타이완에 무역소를 설치했고, 1641년에는 마침내 믈라카를 점령했다.
1639년 이래 네덜란드인은 일본과 직접 무역을 하는 유일한 유럽인이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바타비아, 믈라카 그리고 말루쿠 제도의 대부분을 장악한 네덜란드인은 유럽인과 아시아인을 막론하고 모든 경쟁자를 앞서게 되었다.

나가사키
네덜란드는 1609년, 영국은 1613년 히라도에 상관을 설치했는데,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1623년 히라도의 상관을 폐쇄했다. 에도 막부는 1635년 일본선의 해외 도항을 금지하였고, 시미바라의 난 이후 기독교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강화하면서 1639년 포르투갈 선박의 내항을 금지하고, 1641년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옮겼다. 네덜란드 인과 청 상인에게만 나가사키를 개방하면서 유럽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네덜란드와의 교역만 인정되었다.
 
주 227
각주 227) 네덜란드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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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진출과 교역망의 확대

2. 유럽 상인의 진출
  1. 영국 상인
    • 18세기 중엽 진출 → 청과의 무역에서 주도권 장악
    • 청에 은과 인도산 목화 수출 → 급격한 차 수요로 영국의 은 유출 → 은 대신 아편 수출 → 청의 은이 유럽으로 유출
영국 상인의 진출
영국은 네덜란드보다 일찍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1600), 자바 서부의 반텐, 말레이반도의 파타니, 아유타 등지에 정착지를 만들었다. 일본 히라도에 교역소를 설치하고 교역 기지로 삼으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중국과 직접 무역 관계를 수립하지도 못하였다. 17세기 초에 영국인은 아시아에서 네덜란드의 해상 전력이나 인적 자원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아시아 시장에 적합한 상품군을 적절히 구성할 수 없었다. 특히 그들이 판매하려고 시도한 영국산 옷감은 인도산 옷감의 품질이나 중국산 비단의 매력과 경쟁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영국은 인도로 철수하였다. 이후 18세기 중엽에 진출하여 청과의 무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유럽의 진출과 교역망의 확대

3. 교역망의 확대와 그 결과
  1. 교역망의 확대
    • 유럽인의 동아시아 진출, 아메리카 대륙의 은 공급, 은이 국제 통화로서 기능 → 동아시아 교역망이 세계로 연결
    • 상업의 시대 : 16~17세기 동남아시아의 무역 발달
    • 광저우, 타이완도 세계 교역망에 편입
교역망의 확대
1570년대 후반에는 광저우도 주요 항구로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명의 남부 지역이 세계 교역망에 편입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청에 항복할 때까지는 타이완도 중요한 무역 중심지였다.
 

유럽의 진출과 교역망의 확대

3. 교역망의 확대와 그 결과
  1. 교역망 확대의 결과
    • 여러 나라 사람들이 거주하는 항구 도시 출현
    • 이슬람교의 확산과 크리스트교의 전래
    • 아메리카 작물의 전래 : 고추, 감자, 옥수수, 담배
    • 명‧청과 일본의 도자기가 유럽에 대량 판매
이슬람교의 확산과 크리스트교의 전래
동남아시아인의 과반수가 16세기와 17세기에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 두 종교 가운에 하나로 개종했다. 이슬람교도는 이 지역에 수세기 동안 존재했지만, 16세기에 대부분 인도 출신인 이슬람교도 무역상들이 해양 무역로상의 도시들에 정착하면서 이슬람화가 가속되었다. 1511년 믈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인들은 이슬람교도들 가운데 상당수를 항구에서 쫓아내어 인도네시아 제도의 곳곳으로 흩어지게 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자신들의 종교를 퍼져나가게 했다. 크리스트교는 포르투갈인이나 에스파냐인과 더불어 왔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거주하는 항구 도시
무역 팽창의 결과 동남아시아에 다인종 항구 도시가 출현하였다. 이 도시들에 정주한 도래인은 대부분 아랍인, 중국인, 인도인, 페르시아인이었다. 16세기에는 네덜란드인, 영국인, 일본인, 포르투갈인, 에스파냐 그리고 투르크인 상인과 탐험가들이 이 항구들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리고 지중해 전역에서 온 유대인, 베네치아인, 프랑스인, 덴마크인, 그리스인 등 다른 인종도 일부 존재했다. 이러한 항구 도시에는 수많은 중국인이 있었다. 이 중국인들은 대부분 상인과 장인으로서 독자적인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상업 중심지의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난 경제 이민이었다.

일본의 도자기가 유럽에 판매
에도 시대의 아리타(이마리) 자기는 임진 전쟁 당시 조선의 도공들을 데려가 도자 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마리 자기는 일본의 규슈 지역의 이마리 항구에서 수출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코발트로 그림을 그려 장식하거나 유약 밑에 그림을 그리는 등 다양한 방식을 응용하여 화려한 도자기를 만들었다. 소메스케, 이로에 도자기가 대표적인 예이며 해외 수출 이후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중세에 자기를 중국과 한반도에서 수입해왔던 일본이 1610년대 무렵 조선 도공이 자기 제작에 필요한 도석(陶石·백토)을 사가현 아리타 주변에서 발견한 것을 계기로 카라쓰(唐津) 도기가마에서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조선 자기와 흡사한 기형과 문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명·청 교체기에 내란으로 피해를 입은 징더진(景德鎭) 가마의 장인들이 아리타로 건너오면서 1640년대 들어 조선 자기에는 없는 화려한 색조를 띤 색회자기(色繪磁器)가 수용되는 등 갑자기 중국 스타일로 변모해갔다. 그 후 기술 혁신에 성공한 이마리 자기는 1660년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동남아시아와 유럽으로 연간 수만 점이 수출됐으며, 독일 작센의 황제가 장인들에게 이마리 자기를 모방한 자기 제작을 명해 18세기 초 서구 최초의 자기인 마이센 자기가 탄생하게 되었다.
 

유럽의 진출과 교역망의 확대

유럽 상인의 진출
교역망의 확대와 그 결과
  1. 포르투갈 : 믈라카 점령 → 마카오 거쳐 → 나가사키 진출
  2. 에스파냐 : 마닐라(갈레온 무역 중심지), 아카풀코의 은 유입
  3. 네덜란드 : 말루쿠 제도 차지 → 나가사키 진출 → 17세기 중엽 이후 동남아시아 교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럽 국가
  1. 세계로 연결된 동아시아 : 유럽인의 진출, 아메리카 은 공급, 결제 수단으로 은 사용(국제통화)
  2. 교역망 확대의 결과 : 동남아시아에 항구 도시 출현, 이슬람확산과 크리스트교 전래, 아메리카 작물의 아시아 전래, 명‧청과 일본 도자기 유럽에 판매

  • 각주 222)
    믈라카도시 국가였던 믈라카는 16세기에 유럽인이 진출하기 전까지,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와 서쪽의 인도양과의 교역을 중개하면서 번영을 누렸다. 믈라카는 페르시아 만에서 명까지 연결되는 항해에서 가장 중요한 체류지로서 세계적인 항구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한 포루투갈인의 여행기에 따르면 이 도시 거리에서 84개 언어가 통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http://ko.wikipedia.org/wiki/믈라카_주http://ko.wikipedia.org/wiki/믈라카_주믈라카위치 바로가기
  • 각주 223)
    포르투갈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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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24)
    나가사키나가사키
    나가사키나가사키나가사키위치 바로가기
  • 각주 225)
    에스파냐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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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26)
    갈레온 무역16세기에 에스파냐가 대포를 갖춘 대형 선박을 이용하여 멕시코의 은과 필리핀에 집결된 중국 상품을 교환한 태평양 무역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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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27)
    네덜란드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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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지명
믈라카, 마카오, 나가사키, 마닐라, 아카풀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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