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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전쟁의 피해와 교류

4-1단원 3차시
  • 저필자
    황지숙(신림고 역사 교사)

전쟁의 피해와 교류

전쟁의 피해
전쟁을 통한 교류
통신사와 연행사

전쟁의 피해와 교류

1. 전쟁의 피해
  1. 임진 전쟁의 피해
    • 일본군의 조선 민가에 대한 약탈과 폭행
    • 조선의 각종 문화재 피해와 약탈 : 왕릉 도굴, 수많은 서적과 구리 활자, 불화 등
    • 귀무덤, 남녀노소 포로로 잡아감
    • 명에서는 심각한 재정 적자, 백성의 저항 운동
    • 일본에서는 병사 징발, 무거운 세금 → 무사‧농민 반란
귀무덤
일본의 교토 국립 박물관 옆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도요쿠니 신사가 있다. 이 도요쿠니 신사의 맞은편에는 귀무덤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 묻힌 것은 대부분 사람의 ‘코’로, 정유 전쟁 때 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목 대신 베어갔던 코를 묻은 무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를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모든 다이묘들은 전공의 증거로서 일본 병사 1인당 조선인의 코 3개를 베어 오도록 할당하였다. 곧 전쟁터에는 무차별 코 베기가 실시되었다. 본래 이름은 코무덤이었으나 이름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으로 바꾸었다.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간양록"은 정유 전쟁 때 일본에 잡혀 갔던 강항이 일본에서 견문한 풍속ㆍ지리ㆍ군사ㆍ정세 등을 기록한 책으로, 위 사료는 그가 포로로 끌려갈 당시의 모습을 적고 있는 것이다. 7년에 걸친 전쟁 동안 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 포로가 된 사람들은 전투원뿐만 아니라 비전투원이었던 농민과 여성, 아이들도 있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 중에는 다시 서양의 노예 상인들에게 팔려 인도, 유럽 등지로 끌려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17세기의 화가 루벤스의 이름으로 알려진 ‘한복을 입은 남자’는 그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사례로 알려져 있다.
 
주 206
각주 206) 귀무덤
귀무덤
귀무덤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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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07
각주 207) 포로로 잡아감
적군의 배(일본 배)에 태워져 순천 앞바다까지 왔을 때 그 곳에는 적군의 배 600~700척이 몇 리에 걸쳐 바다를 메우고 있었다. 이들 배에는 우리나라의 남녀가 일본인과 거의 같은 수로 있고, 배마다 나오는 통곡 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시킬 정도였다.
- 강항, "간양록"
- 강항, "간양록""간양록""간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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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피해와 교류

1. 전쟁의 피해
  1. 병자 전쟁의 피해
    • 청의 침략으로 한양 중심가 파괴, 약탈과 방화
    • 명의 정벌에 사용할 병선 제공, 금‧은 세폐 요구
    • 왕자와 대신이 인질로 보내짐
  2. 두 전쟁의 전쟁터 - 조선
    • 토지 결수 격감, 농지의 황폐화, 국가 질서의 문란 → 조세 제도의 개편
주 208
각주 208) 토지 결수 격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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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피해와 교류

2. 전쟁을 통한 교류
  1. 새로운 작물의 전래
    • 임진 전쟁 중 일본으로부터 담배와 고추 등
  2. 군인 유민을 통한 인적 교류와 정보 교환
    • 투항한 일본 병사들에 의해 조총, 새로운 화약 제조 기술 및 사격 기술의 전래(사야카)
    • 명을 통해 서양식 대포의 도입
    • 참전한 명 군인 지식인들과의 만남 → 새로운 문화와 서적 견문, 은 유통 활성화의 계기
전쟁을 통한 교류
전쟁의 경험은 군사 분야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화약 무기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각종 무기가 개발되었는데, 항왜(항복한 왜군)를 통해 일본의 조총이, 명을 통해 서양식 대포가 도입되었다. 기마병과 활을 중심으로 하던 전통적인 전투 방법도 화약 무기 체제에 적합하도록 변화되었으며, 근접 전투에 필요한 무예서도 새롭게 편찬되었다(조선에 투항한 일본 무장 사야카,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따른 속오법).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담배와 고추 등의 새로운 작물이 전래되었고, 일본에는 조선으로부터 발달된 도자기 문화, 인쇄술과 유학이 전래되었다. 조선 침략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에 머물면서 주변 가마터에서 다기를 굽게 하고 차를 즐겼다. 그로 인해 당연히 차를 만들기 위한 도기와 찻잔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 과정에서 고도의 기술을 지닌 조선인 도공이 중용되었다(도공 이삼평). 연행된 조선인 가운데에는 도공뿐만 아니라 유학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에도 시대 주자학이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일본에 주자학을 전해준 강항). 또 목수, 석공, 직물공, 한지 제작공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규슈 서북지역에 있는 ‘도진마치(唐人町)’라는 곳은 연행된 조선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곳이다. 다이묘들은 이들을 통해 조선의 문화와 기술을 받아들여 영지 개발을 꾀하였다.
명의 참전으로 국제전 양상으로 변모한 임진 전쟁은 장시간에 걸쳐 인적·물적 교류가 다양한 양상으로 일어났다. 원군으로 참여한 명 장수와 다수의 문관들을 비롯한 지식인과 군인들은 조선의 다양한 계층과 만나 접촉하며 교류하게 된다. 일본 역시 한반도에 발을 들여 놓은 시기부터 다양한 계층의 인사와 만나고 새로운 문화와 서적을 견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임진 전쟁을 계기로 많은 서적을 약탈하거나 수집하였음은 물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타문화를 체험하여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였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국고 문헌이 파괴되어 유실된 것도 적지 않았겠으나, 전쟁에 참여한 명나라 지식인들이 가져가거나 수입하여 중국으로 유출한 서적의 규모 또한 상당하였다.
무엇보다 대규모 인적 교류를 통한 서적과 지식 정보의 상호 교류는 임진전쟁 이후 명·청 교체기에 이루어진 명나라 유민의 조선 유입이었다. 명의 다양한 계층이 대규모로 조선으로 유입되었고, 이들 유민들의 유입과 이들과의 교섭은 조선 학인들에게 지식과 정보의 양을 만만치 않게 전해주었으며 새로운 지적 토대를 구축하고 형성시키는데 문화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주 209
각주 209) 사야카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김충선은 가토 기요마사 군대의 선봉에 섰던 사야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1592년 4월, 조선 침략 직후에 부하들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조선 조정은 그에게 김충선이라는 이름과 높은 벼슬을 내려 주었다. 그는 경상도 의병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수 차례 전투를 벌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ko.wikipedia.org/wiki/김충선ko.wikipedia.org/wiki/김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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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피해와 교류

2. 전쟁을 통한 교류
  1. 에도 시대의 사회와 문화 발전의 바탕
    •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 → 발달된 도자기 제작 기술 전래(이삼평 : 아리타 자기의 효시)
    • 조선의 유학자 → 일본의 활발한 성리학 연구에 영향(강항 : 후지와라 세이카와 교류)
주 210
각주 210) 이삼평
이삼평(?~1655)은 조선 출신의 도공으로 아리타 자기 또는 이마리 자기의 모태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아리타 공원에 세워진 이삼평 기념비이다.
ko.wikipedia.org/wiki/이삼평ko.wikipedia.org/wiki/이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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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피해와 교류

3. 통신사와 연행사
  1. 통신사
    • 임진 전쟁 이후 에도 막부에 통신사 파견
    • 1607년에 재개되어 1811년까지 12번 파견
    • 경로 : 한양-동래-쓰시마-아카마가세키(시모노세키)-오사카-교토-나고야-하마마쓰-에도(도쿄)
    • 인원은 300~500여 명, 소요 기간 4~5개월
통신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달리 평화 외교를 표방하고 자유 통상 무역을 전개했다. 우선 1598년 쓰시마의 소씨(宗氏)를 통해 조선과 국교 재개 교섭을 개시, 1607년 조선의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을 방문했다. 이어 양국은 1609년 기유약조를 맺어 외교 관계와 무역을 정상화했다. 이 조약으로 부산에 왜관이 설립되고, 쓰시마는 양국으로부터 외교와 무역의 특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조선은 1811년까지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를 여덟 차례 파견했다(회답겸쇄환사를 포함하면 12회). 명과도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조선에 중재를 요청하고 복건성을 통해 교섭하기도 했으나, 조선의 중재 거절과 명의 해금 정책 그리고 일본의 불신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1609년 사쓰마 번은 류큐가 표류민을 송환한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나 1655년 청이 류큐에 책봉사를 파견하자, 류큐를 둘러싼 일본과 청의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다. 이후 류큐는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청의 책봉을 받는 이원 외교를 전개했다. 류큐는 사쓰마 번에 매년 연하사를 파견하고, 쇼군 취임 시 경하사를 파견했다. 1644년 이후에는 류큐 왕이 새로 취임할 때마다 막부에 사은사를 보냈다.

통신사 행렬도
이 그림은 1711년(숙종37)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기 위하여 사전에 일본 측에서 그린 배치도로서, 에도로 가는 등성(登城) 행렬도 가운데 최고책임자인 정사(正使) 일행을 그린 부분이다.
이 행렬도 전체는 길이 41.72m, 폭 27cm의 크기이며, 299명의 통신사 행원과 1,800여 명의 일본 측 관계 무사와 호위 병졸, 짐꾼, 129필 가량의 말이 묘사되어 있다. 이 행렬도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대마도종가문서에 들어 있으며, 당시 일본 막부의 지시로 대마번이 주관해서 그린 행렬도 가운데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유일본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14세기 중엽부터 1871년까지 대마도 도주 소씨(宗氏)가 생산․보관한 대마도종가문서 총28,783점을 소장하고 있다. 대마도종가문서는 일본 3대 번정(藩政) 문서의 하나로서, 대마도가 양국의 외교창구로서 중개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조일 양국의 다양한 통교․무역 관련 1급 사료가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는 1926년과 1938년의 두 차례에 걸쳐 조선사편수회가 대마도 종가로부터 구입하여 소장하였다가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남겨진 것을 광복 이후 국사편찬위원회가 인수하여 소장하고 있다.
 
주 211
각주 211) 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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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12
각주 212)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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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피해와 교류

3. 통신사와 연행사
  1. 연행사
    • 조공 책봉 관계로 청에 보낸 사신
    • 1637년(인조15)에 시작~청일전쟁 직전인 1893년(고종30)까지 지속
    • 경로 : 한양-평양-책문-성경(선양)-산해관-연경(베이징)
    • 인원은 200~300여 명, 소요 기간 9개월(왕복 4개월+ 베이징에서 5개월 체류)
연행사
청은 명 멸망 이후 수도를 심양에서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겼는데, 청에 사행(使行)가는 길을 ‘연행(燕行)’이라 불렀다. 한편 그 이전에 조선에서 명에 사행 가는 경우는 천자국에 조하하러 간다는 뜻에서 ‘조천(朝天)’이라고 하였다. 이런 호칭의 차별은 명에 대해서는 사대의 예를 적용하지만, 여진족의 청에 대해서는 사대의 예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청에 대한 조선의 외교 사절과 파견은 1637년(인조15)에 시작되어 1893년(고종30)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257년 동안 지속되었다.
정기적인 연행사로는 절행(節行)이 있고, 부정기적인 연행사로는 별행(別行)이 있다. 절행이란 동지에 파견되는 동지사, 정월 초에 파견되는 정조사, 황제의 생일에 파견되는 성절사, 황후와 태자의 생일에 파견되는 천추사를 말한다. 1637년부터는 절행 중에 천추사가 없어지고 대신 조공을 바치기 위한 세폐사(歲幣使)가 생겼다. 그리고 1645년부터는 절행 중에서 정조사․성절사․세폐사를 동지사 하나로 통합하였다. 별행은 조선 국왕의 훙거(薨去, 죽음)․사위(嗣位, 왕위 계승)․책비(冊妃, 결혼)․건저(建儲, 왕세자 책봉)․추숭(追崇,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 왕의 칭호를 올림) 등 중대한 사안이 발생하였거나, 청에 동일한 사안이 발생하였을 때 파견되었다.
 
주 213
각주 213) 연행사
청에 보낸 사신을 연행사라고 불렀다. 사절단은 정기적으로 새해와 황제,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고 연말에는 새해 달력을 받기 위해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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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14
각주 214)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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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피해와 교류

전쟁의 피해
전쟁과 교류
통신사와 연행사
  • 조선 : 인구 감소, 토지 황폐화, 문화재 약탈 피해, 남녀노소 포로로 끌려감
  • 명 : 재정 적자, 백성의 저항 운동
  • 일본 : 병사 징발, 무거운 세금 → 반란

  • 담배, 고추 등 새로운 작물의 전래
  • 항왜와 명군을 통한 군사 기술 전래 및 인적 교류 정보 교환
  • 포로로 간 조선인 도공, 유학자 등으로 에도 시대 문화 발전

  • 통신사 : 임진 전쟁 이후 에도 막부에 파견한 사절단,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번
  • 연행사 : 병자 전쟁 이후 청에 보낸 사절단, 1637년부터 1893년까지 지속


  • 각주 206)
    귀무덤귀무덤
    귀무덤위치 바로가기
  • 각주 207)
    포로로 잡아감적군의 배(일본 배)에 태워져 순천 앞바다까지 왔을 때 그 곳에는 적군의 배 600~700척이 몇 리에 걸쳐 바다를 메우고 있었다. 이들 배에는 우리나라의 남녀가 일본인과 거의 같은 수로 있고, 배마다 나오는 통곡 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시킬 정도였다.
    - 강항, "간양록"
    - 강항, "간양록""간양록""간양록" 바로가기
  • 각주 208)
    토지 결수 격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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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09)
    사야카조선왕조실록에도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김충선은 가토 기요마사 군대의 선봉에 섰던 사야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1592년 4월, 조선 침략 직후에 부하들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조선 조정은 그에게 김충선이라는 이름과 높은 벼슬을 내려 주었다. 그는 경상도 의병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수 차례 전투를 벌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ko.wikipedia.org/wiki/김충선ko.wikipedia.org/wiki/김충선 바로가기
  • 각주 210)
    이삼평이삼평(?~1655)은 조선 출신의 도공으로 아리타 자기 또는 이마리 자기의 모태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아리타 공원에 세워진 이삼평 기념비이다.
    ko.wikipedia.org/wiki/이삼평ko.wikipedia.org/wiki/이삼평 바로가기
  • 각주 211)
    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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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12)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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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13)
    연행사청에 보낸 사신을 연행사라고 불렀다. 사절단은 정기적으로 새해와 황제,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고 연말에는 새해 달력을 받기 위해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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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14)
    경로
    경로경로 바로가기

색인어
지명
귀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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