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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정묘‧병자 전쟁과 새로운 질서의 형성

4-1단원 2차시
  • 저필자
    황지숙(신림고 역사 교사)

정묘‧병자 전쟁과 새로운 질서의 형성

여진의 성장과 조선의 정권 교체
정묘 전쟁
병자 전쟁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형성

정묘‧병자 전쟁과 새로운 질서의 형성

1. 여진의 성장과 조선의 정권 교체
  1. 여진의 성장
    • 누르하치의 팔기제 완성 → 후금 건국(1616) → 명에 선전 포고
    • 명의 대응 : 후금에 대한 원정 준비, 조선에 출병 요구(→ 광해군의 중립 외교)
팔기제
팔기제의 구조 : 팔기는 만주족의 군사 조직이자 행정 조직이다. 만주족이 사냥할 때 역할에 따라 각기 다른 깃발을 세워 구분했던 데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최소 단위인 니루는 300명, 5개의 니루가 1자란, 5개의 자란이 1쿠사(기)가 된다. 정황기‧정백기‧정홍기‧정남기 4개의 있다가 양황기‧양백기‧양홍기‧양남기가 추가되었다.
1614년 누르하치는 여러 부족을 통일하면서 팔기군으로 군제를 개편하였다. 뒤에 몽골 8기, 한인 8기도 만들어 모두 24기가 되었다. 각 기에 소속된 성인 남자들은 평상시에는 민간인으로 생활하다가 전쟁이 나면 군인으로 징집되었다. 후금‧청의 주력군이 되었던 이들을 팔기병이라고 한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재조지은의 명분보다 실리를 취했던 광해군이 원병 파견을 반대하며 한 이야기다.
명은 후금이 1618년에 공략하자 재조지은에 보답하라며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광해군은 명의 압력과 신하들의 독촉을 견디지 못해 강홍립을 5도도원수로 삼아 군사를 파병하였다. 그러나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패전한 이후에는 명의 추가 파병 요구를 묵살하였다. 후금에 대해서도 조선군 파병의 불가피함을 설득하여 양해를 구했다. 서인들은 광해군의 이러한 대외 정책을 재조지은에 대한 배신 행위로 낙인찍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이용하였다.
 
주 198
각주 198) 팔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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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99
각주 199) 광해군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의리와 신의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의리와 신의를 지키는 과정에서 나라의 존망까지 걸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피해야 한다.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데 의리 때문에 모험을 할 수는 없다."
- 광해군일기
- 광해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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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병자 전쟁과 새로운 질서의 형성

1. 여진의 성장과 조선의 정권 교체
  1. 조선의 정권 교체
    •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둘러싼 갈등 → 인조반정(1623), 광해군 폐위
    • 친명 배금 정책 → 명 장수 모문룡에 대한 원조 강화
인조의 친명 배금 정책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광해군의 외교 정책에 대한 평가를 기록한 내용이다. 광해군이 ‘망해가는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재조지은)’를 배신하고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배은망덕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서인 정권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면서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친명 배금 정책은 조선을 다시금 후금과의 대결 구도 속으로 끌어들이는 고삐가 되었다. 명은 인조반정을 묵인하는 대가로 조선이 모문룡과 연합하여 후금을 공격하도록 요구하였다. 인조는 반정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속셈으로 이를 수용하였다. 모문룡이 후금 정벌과 랴오둥 수복을 기치로 랴오둥의 피난민들을 받아들이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후금은 1627년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였다(정묘 전쟁).
 
주 200
각주 200) 친명 배금 정책
우리 나라가 명을 섬겨온 것이 2백여 년이다. 의리로는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임진년(1592)에 입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다. ‧‧‧‧‧‧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기미년(1619)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장수를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였다.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쳐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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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병자 전쟁과 새로운 질서의 형성

2. 정묘 전쟁
  1. 후금의 조선 침략 배경
    • 인조의 친명 배금 정책
    • 명 장수 모문룡의 제거
    • 조선과의 무역을 통한 식량‧물자 확보
  2. 강화 체결
    • 후금의 형제 관계 요구 수용
    • 후금과의 무역 개방
    • 해마다 목면 1만 5천 필 등 제공 약속
후금의 조선 침략 배경
누르하치 사후 즉위한 태종 홍타이지는 즉위 직후 곧 영원성 공격을 시도했고, 이어서 1627년 1차 조선침략을 단행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출병의 이유를 제시한 사료로, 명과의 관계와 모문룡의 문제 등을 문제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적인 동기에 앞서, 국내 문제에서 그 동기를 정치권력 구조나 군사 또는 사회, 경제의 부분에서도 찾아야 한다. 경제적 이유로서 후금은 명과 적대관계에 놓임에 따라 생활 물자의 곤란이 생겼다. 이에 1621년 랴오둥 점령 이후 수렵과 약탈로 생활물자를 조달하던 형태에서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농민의 중요성이 재고되었다. 그러면서 만주족보다 수준 높은 농업기술을 가진 한인(漢人)이 다수 포로로 잡혀 노예의 신분으로 후금 사회의 최하층을 구성하여 농경과 각종 세금을 부담하는 생산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들이 도망하거나 반란을 일으키고, 모문룡과 조선이 이들을 수용하고 조선이 직간접으로 그들이 후금으로부터 이반하는 것을 부채질하였다. 또 직전에 후금 내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각지에 도적이 일어나고 사람을 살상하거나 잡아먹는 참상이 일어났다. 그래서 후금으로서는 식량조달과 물자 공급원을 확보하고 한인의 이반을 막기 위해 침공의 길을 택하였다.
 
주 201
각주 201) 후금의 조선 침략 배경
여진은 조선과 원수도 아닌데 기미년 원병을 내어 명을 도왔다. ‧‧‧‧‧‧ 여진이 랴오둥을 점령한 후 도망간 모문룡이 조선 영내에 머물러 잡아 보내기를 요청하였는데 거절하였다. ‧‧‧‧‧‧ 모문룡에게는 명황제가 군량을 주는데, 조선이 토지를 제공하고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고 돈과 양식 등을 주었다. ‧‧‧‧‧‧ 여진의 황제가 붕어하였을 때, 또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였을 때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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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병자 전쟁과 새로운 질서의 형성

3. 병자 전쟁
  1. 배경
    • 명에 대한 후금의 군사적 우위 지속
    • 1636년 홍타이지, 후금의 국호를 '대청'으로 고치고 황제 칭함 → 청 중심의 국제 질서 구축
  2. 계기
    • 청의 칭제건원에 대한 조선의 반발과 친명 정책
    • 청의 군신 관계 요구에 대한 조선의 거부 → 청의 침략

정묘‧병자 전쟁과 새로운 질서의 형성

3. 병자 전쟁
  1. 결과
    • 조선의 항복, 명과의 국교 단절
    • 청의 군신 관계 수용(조공‧책봉 관계), 대청황제공덕비(삼전도비) 세움
    • 청의 명 공격 지원 : 식량‧병선‧자금‧군대 제공
    • 왕자‧대신‧백성들이 끌려감
조선의 항복
병자 전쟁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서울 잠실에 있는 삼전도로 불려나왔다. 이곳에서 세 번 큰 절을 하고 그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항복의 예를 올리며 청과 군신 관계를 맺고, 명과의 국교를 끊게 되었다. 그리고 소현세자, 봉림대군, 3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청으로 끌려갔다.

병자 전쟁의 결과
1637년 1월 청은 조선의 항복을 받고 신하의 나라로 예속시키고 명과 조선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명을 도와 후금과 대항하던 조선은 이제 청을 도와 명과의 전쟁에 동원되었다. 청은 조선에서 징발한 전함과 수군을 동원하여 모문룡이 주둔하던 가도를 점령하였다.
 
주 202
각주 202) 조선의 항복
인조 15년 1월 30일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왕에게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였다. 왕이 남색 옷에 백마를 타고 의장도 없이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나갔다. 뒤따르던 백관들이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 용골대 등이 데리고 들어가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왕에게 나가기를 청하였다. 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 "인조실록"
- "인조실록""인조실록""인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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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03
각주 203) 삼전도비
삼전도비의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이다. 병자 전쟁에서 승리한 청 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세우도록 한 것이다.
ko.wikipedia.org/wiki/삼전도비ko.wikipedia.org/wiki/삼전도비삼전도비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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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병자 전쟁과 새로운 질서의 형성

4.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형성
  1. 중원지역
    • 이자성의 난으로 명 멸망(1644) → 명의 장수 오삼계가 청에 투항 → 청의 베이징 점령 → 각 지역의 반청 세력 진압 → 삼번의 난 과 타이완의 정성공 세력 진압 → 청의 확고한 지배 체제 → 청 중심의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 질서 형성
주 204
각주 204) 삼번의 난
삼번이란 ‘세 개의 울타리’란 뜻으로 운남의 오삼계, 광동의 상지신, 복건의 경정충을 각각 가리킨다. 이들은 한인으로서 청에 귀순한 공을 인정받아 각 지역을 다스리는 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강희제가 이들 세력의 확대를 우려하여 삼번의 폐지를 시도하자, 오삼계의 난을 시작으로 삼번의 난이 일어났다. 1681년 반란은 진압되었다.
ko.wikipedia.org/wiki/섬번의_난ko.wikipedia.org/wiki/섬번의_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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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병자 전쟁과 새로운 질서의 형성

4.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형성
  1. 조선
    • 북벌론 등장 : 효종의 주도, 삼번의 난을 계기로 다시 대두했지만 난의 진압 이후 수그러듦
    • 조선 중화주의 등장 : 명의 멸망 이후, 조선이야말로 유일한 중화라고 자부
  2. 일본
    • 명‧청 중심의 조공‧책봉 관계 벗어남(국교 맺지 않음)
    • 조선‧류큐와 국교 유지
주 205
각주 205) 북벌론
우리는 사신을 왕래하여 저들(청)과 한편이 되었으니, 오삼계가 이것을 알면 분개하여 ‧‧‧‧‧‧ 우리와 저들이 교통하는 길을 끊게 하고 ‧‧‧‧‧‧ 중국의 병력이 날로 강성해지는데 혹시 광복했을 때 사신을 보내 우리가 저들의 편이 된 실정을 따져 물을 경우 우리는 대답할 말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 사람을 대할 면목이 없게 되고, 또한 천지 사이에 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 윤휴, "백호전서"
- 윤휴, "백호전서"백호전서백호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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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병자 전쟁과 새로운 질서의 형성

여진‧조선의 정세
정묘‧병자 전쟁
새로운 질서 형성
  • 후금 건국 → 명에 선전 포고 → 명, 조선에 출병 요구(광해군의 중립 외교)
  • 조선의 정권 교체 : 인조반정 → 광해군 폐위, 모문룡에 대한 원조 강화, 친명배금

  • 정묘 전쟁 : 모문룡 제거, 조선과 무역으로 물자 확보 목적 → 형제 관계, 무역 개방
  • 병자 전쟁 : 청의 군신 관계 요구 → 조선의 거절로 침략 → 조선 항복, 군신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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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 멸망 → 오삼계 투항, 베이징 점령 → 삼번의 난과 정성공 진압 → 청 중심 질서
  • 조선 : 북벌론, 조선 중화주의 등장
  • 일본 : 명‧청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남


  • 각주 198)
    팔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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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99)
    광해군"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의리와 신의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의리와 신의를 지키는 과정에서 나라의 존망까지 걸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피해야 한다.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데 의리 때문에 모험을 할 수는 없다."
    - 광해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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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00)
    친명 배금 정책우리 나라가 명을 섬겨온 것이 2백여 년이다. 의리로는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임진년(1592)에 입은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다. ‧‧‧‧‧‧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기미년(1619)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장수를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였다.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쳐지게 하였다.
    - "인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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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01)
    후금의 조선 침략 배경여진은 조선과 원수도 아닌데 기미년 원병을 내어 명을 도왔다. ‧‧‧‧‧‧ 여진이 랴오둥을 점령한 후 도망간 모문룡이 조선 영내에 머물러 잡아 보내기를 요청하였는데 거절하였다. ‧‧‧‧‧‧ 모문룡에게는 명황제가 군량을 주는데, 조선이 토지를 제공하고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고 돈과 양식 등을 주었다. ‧‧‧‧‧‧ 여진의 황제가 붕어하였을 때, 또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였을 때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 "만문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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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02)
    조선의 항복인조 15년 1월 30일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왕에게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였다. 왕이 남색 옷에 백마를 타고 의장도 없이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나갔다. 뒤따르던 백관들이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 용골대 등이 데리고 들어가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왕에게 나가기를 청하였다. 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 "인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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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203)
    삼전도비삼전도비의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이다. 병자 전쟁에서 승리한 청 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세우도록 한 것이다.
    ko.wikipedia.org/wiki/삼전도비ko.wikipedia.org/wiki/삼전도비삼전도비위치 바로가기
  • 각주 204)
    삼번의 난삼번이란 ‘세 개의 울타리’란 뜻으로 운남의 오삼계, 광동의 상지신, 복건의 경정충을 각각 가리킨다. 이들은 한인으로서 청에 귀순한 공을 인정받아 각 지역을 다스리는 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강희제가 이들 세력의 확대를 우려하여 삼번의 폐지를 시도하자, 오삼계의 난을 시작으로 삼번의 난이 일어났다. 1681년 반란은 진압되었다.
    ko.wikipedia.org/wiki/섬번의_난ko.wikipedia.org/wiki/섬번의_난 바로가기
  • 각주 205)
    북벌론우리는 사신을 왕래하여 저들(청)과 한편이 되었으니, 오삼계가 이것을 알면 분개하여 ‧‧‧‧‧‧ 우리와 저들이 교통하는 길을 끊게 하고 ‧‧‧‧‧‧ 중국의 병력이 날로 강성해지는데 혹시 광복했을 때 사신을 보내 우리가 저들의 편이 된 실정을 따져 물을 경우 우리는 대답할 말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 사람을 대할 면목이 없게 되고, 또한 천지 사이에 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 윤휴, "백호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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