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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16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임진 전쟁

4-1단원 1차시
  • 저필자
    황지숙(신림고 역사 교사)

16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임진 전쟁

명대의 북로남왜
조선의 사림 정치
일본의 전국시대 통일
임진 전쟁의 배경 및 전개
임진 전쟁의 결과

16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임진 전쟁

1. 명대의 북로남왜
  1. 북쪽 몽골
    • 만리장성 넘어 재차 침공
    • 수일 간 베이징을 포위 공격(경술의 변)
  2. 남쪽 왜구
    • 잇따른 동남해안 약탈

→ 북로남왜로 인해 명의 국력 소모
북로남왜 지도
북로남왜 : 몽골의 타타르와 오이라트는 조공 무역을 요구하면서 명을 수시로 침략하였다. 1550년에는 베이징을 며칠 동안 포위하는 등 강력한 위협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523년 일본의 무역선이 영파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왜구의 발호는 더 심해졌다. 두 세력은 16세기 중엽 명이 국력을 소모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 보충 : 타타르부의 알탄 칸이 몽골을 통일했다. 가정 12년(1533)부터 몽골은 거의 매년 명을 침략하였다. 칭기즈 칸의 직계 자손이라고 칭한 알탄의 지휘 아래 몽골은 명을 위협하는 대세력이 되었다.
동남 연해의 왜구도 명을 침략하였다. 왜구는 명 초에도 한반도 연해와 요동반도, 산둥, 절강 등지에서 발호하였다. 명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 요시미쓰에게 왜구를 단속하면 조공 무역을 허락하겠노라고 제안했다. 조공 무역의 이익을 노린 요시미쓰가 단속에 나서자 왜구는 자취를 감추었다(전기 왜구). 그후 16세기 중반에 명의 동남부 연해 지방에서 왜구가 다시 창궐하였다(후기 왜구).
왜구가 다시 등장한 원인은 조공 무역의 제한 때문이었다. 조공 무역하에서 일본은 필요한 만큼의 중국산 동전, 도자기, 비단을 얻기가 어려웠다. 중국도 일본의 은, 구리, 유황을 충분히 얻기 어려웠다. 이런 물품을 거래하면 많은 이익이 남았으므로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왜구로 가장하여 밀무역이나 약탈에 나섰다. 왜구 두목 중에도 중국인도 많았다.
 
주 190
각주 190) 북로남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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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91
각주 191) 경술의 변
알탄은 1550년 8월, 기병대를 이끌고 장성을 넘어 베이징을 포위하고(경술의 변) 공포에 떨고 있는 명 황제에게 “해마다 세폐를 보내고 무역의 길을 열어라. 그렇지 않을 경우 매년 한번 씩 도성을 포위하고 아무 것도 남지 않게 하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명 군대는 이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반격할 기력도 없었다. 알탄은 3일 동안 베이징을 점령하고 마음껏 약탈과 살인, 방화를 저지르고 유유히 철수하였다. 이후 알탄 칸의 손자가 명에 투항하자 이를 계기로 명과 몽골 간의 화의가 이루어졌다.
ko.wikipedia.org/wiki/경술의_변ko.wikipedia.org/wiki/경술의_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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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임진 전쟁

2. 조선의 사림 정치
  1. 사림의 중앙 진출 → 훈구와 대립으로 사화 발생 → 서원, 향약 기반으로 사람의 성장 → 선조 대 사림의 정치 주도
  2. 사림파 정권 이후 동인, 서인의 분당 등 내부 정쟁 → 주변 정세 변화에 대응력 미약, 장기적 평화로 국방력 약화

16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임진 전쟁

3. 일본의 전국시대 통일
  1. 포르투갈 상인을 통한 조총의 전래 → 전국 통일을 촉진
  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책 : 전국적 토지 조사, 무기 회수, 신분 이동 금지와 병농분리 확립

→ 국력 집중의 극대화와 중앙 집권 확립
조총의 전래
1543년 포르투갈 인을 태운 중국 선박이 규슈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것을 계기로 포르투갈과 일본의 무역이 시작되었다. 한편 다네가시마의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는 포르투갈 인이 가지고 있던 화승총을 구입, 가신들에게 그 사용법과 제조법을 배우게 했다. 포르투갈 인들은 화승총과 화약, 중국산 생사, 견직물, 사탕, 약품을 일본산 은과 교환하여 많은 이익을 챙겼다. 화승총은 곧이어 사카이, 네고로 등지에서 대량생산되어 기마전법에서 보병전법으로 전술 변화를 가져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책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약 200만 석에 달하는 직할령과 주요 금광산, 각지의 도시와 호상, 도로를 장악하여 경제적 지배를 강화하는 한편, 토지조사를 실시했다. 전국의 토지를 동일한 자로 직접 측량하여 논, 밭, 집터 등 모든 토지를 4등급으로 분류, 각각의 토지에 기준 생산량을 곱하여 쌀의 생산고인 고쿠다카(石高)를 정했다. 그리고 토지대장에 직접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의 이름과 경작면적을 등재했다. 이것은 한 토지에 여러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던 것을 부정하고 일지일작인제(一地一作人制)를 확립한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농민은 자신의 경작지 보유권을 법으로 인정받고, 세금의 부담자로 자리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고쿠다카를 기준으로 다이묘에게 영지를 주고 군역을 부과했다. 한편 1588년 농민의 저항(잇키)을 봉쇄하고자 농민이 보유하고 있던 도검 등의 무기를 몰수했다(도검 몰수령). 1591년에는 무가에 고용된 무가봉공인이 농민이나 상인이 되는 것을 금지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직업을 바탕으로 한 신분 사회의 기초를 창출하고, 원칙상 농촌에는 농민이, 도시에는 무사와 상공인이 거주하는 병농 분리를 완성했다.
 
주 192
각주 192) 전국 통일을 촉진
나가시노 전투 그림
나가시노 전투는 1575년 나가시노 성을 둘러싼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 3만 8000명과 다케다 가쓰요리군 1만 5000명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당시 최신 병기였던 철포 3000자루를 준비하여 신(新)전법인 3단 발사를 실행한 오다군에게 당시 최강이라 불렸던 다케다 기마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섬멸되었다는 게 통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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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임진 전쟁

4. 임진 전쟁의 배경
  1. 일본의 조선 침략 원인 : 영토 확장, 대외 무역, 과도한 군사력의 배출
  2. 명의 참전 배경
    • 명분 : 조공국을 보호하여 중화 질서 유지
    • 목표 : 베이징의 울타리인 랴오둥 보호
일본의 조선 침략 배경
임진 전쟁의 원인은 대체로 ①무역·상업 등 경제적인 면을 중시하는 견해(감합무역 부활설), ②히데요시 개인의 입장을 강조하는 견해(공명설), ③영주계급의 이익이나 도요토미 정권의 구조적 측면을 강조하는 견해(영토 확장설)로 나눌 수 있다.
①은 일본이 명과 감합무역을 하고자 했는데 조선이 중개를 거절했기 때문에 혹은 명으로 가는 길을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침략했다는 것이다. 명과의 화의 교섭 과정에서 감합무역 부활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 근거이다. 1593년 도요토미 정권은 명에게 화평 조건의 하나로 ‘관박·상박 왕래’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이 당초부터 감합무역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나중에 외교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추가로 제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②의 경우 히데요시는 조선에 문서를 보내 자신의 침략의도를 설명하고 그 이유를 “가명을 삼국에 남기고 싶을 따름”이라 적시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공명심은 히데요시 개인 차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 무사집단의 일반적인 지향이자 그들의 정서가 반영된 구조적인 산물이었다. 공명은 영주들에게 영지(경제)의 축소 또는 확대, 가문의 존속 등과도 관련된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진주성 공략에 즈음하여 가토 기요마사가 부하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 싸움에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공명을 거두는 자에게는 급분을 백 배 이상으로 하겠다”라고 한 것도 공명심과 보상의 상관관계를 잘 말해준다. 따라서 공명설과 ③영토확장설은 별개의 내용이 아니고, 영주계급의 영토확장이란 구체적인 사료로 나타날 때 공명이란 이름으로 표출되고 있다. 요컨대 구조적인 차원의 공명을 임진왜란의 원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최근에는 일본의 국내 상황이라는 맥락과 더 나아가 동아시아 공간에서 그 원인이나 배경을 찾고 있다. 즉 도요토미 정권은 침략전쟁을 통해 다이묘들을 계속 군역에 동원함으로써 권력을 집중시키고, 승리할 경우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고 무역을 장악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명 중심의 국제질서가 변동하는 기회를 틈타 동아시아를 정복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조선 침략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0여 년간 분열되었던 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조선과 명을 정복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과 랴오둥을 지나 베이징 방면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의 조선 침략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주도할 중심 역할을 자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는 곧 명에 의해 주도되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이 무렵에 이르러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명의 참전 배경
임진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 원병 요청을 받은 명은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무도한 침략으로부터 신하의 나라를 보호한다는 명분이 공표되었다. 그러나 명의 파병결정은 자국에 미치는 손익관계를 둘러싼 많은 논란 끝에 가까스로 실현되었다. 명 내부에서는 일본의 정체를 둘러싼 정보와 탐색이 계속되면서 국론이 분열되었고 결국 이것이 상황을 더욱 지연·악화시켰다. 조공국을 보호하여 중화의 예제를 보호한다는 것은 대의명분의 차원일 뿐, 현실의 명은 일본군이 접경지대인 의주까지 진격한 급박한 상태에서야 ‘조공의 명분’을 가동시켰다. 명이 임진전쟁에 참전한 것은 ‘북경의 울타리’인 요동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조선을 구하기 위해’ 참전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고, 더 중요한 목적은 명 자체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순망치한론(脣亡齒寒論)’이 그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이 예상 밖으로 강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명은 이제 조선이 명의 안위와 직결되어 있는 상황을 새삼 인식하였다. 즉 명의 관리들은 본토를 전쟁터로 만드는 것보다 조선을 전쟁터로 삼는 것이 낫고, 평원지대인 랴오둥(요동)보다 산악이 많은 조선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으며 명군이 조선에서 싸우면 군량과 여러 군수 물자를 조선에 요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주 193
각주 193) 일본의 조선 침략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말하기를 ‧‧‧‧‧‧ '나는 귀국의 길을 빌려 산과 바다를 건너 곧장 명으로 쳐들어가 그 4백 주를 모두 우리의 풍속으로 바꾸게 할 것이라.' 또, 장수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 '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내부(內府)에 맡기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을 거쳐 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랴오둥에서 곧장 베이징을 습격하고 제군에게 땅을 나누어줄 것이라.' 하였다.
- "일본외사"
- "일본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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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94
각주 194) 랴오둥 보호
조선은 동쪽 변방에 끼어 있어 우리(명)의 왼쪽 겨드랑이와 가깝습니다. 평양은 서쪽으로 압록강과 인접하고, 진주는 직접 등주와 내주를 맞대고 있습니다. 만일 일본이 조선을 빼앗아 차지하여 랴오둥(요동)을 엿본다면 1년도 안 되어 베이징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을 지켜야만 랴오둥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 왕재진, "해방찬요"
- 왕재진, "해방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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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임진 전쟁

4. 임진 전쟁의 전개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 → 한성과 평양 함락 →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약, 명의 참전 → 조선‧명 연합군의 평양 탈환 → 벽제관 전투, 명의 패배 이후 전쟁의 교착화 → 명과 일본의 협상 전개 → 협상 결렬 → 일본의 재침략(1597, 정유전쟁)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 일본군 철수
벽제관위치
임진 전쟁의 전개
1592년 음력 4월 14일 20여만 명의 일본 병력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 날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이 함락되었고 10일 만에 경상도가 넘어갔다. 음력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일본군의 작전은 육군은 종래 일본 사절단이 조선에서 이용하던 세 길을 따라 북상하고, 수군은 조선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는 것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하여 울산·영천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하여 한양으로 진군하였으며,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상하였다. 일본군이 물밀듯이 북상해 오자 왕실과 조정은 한양을 떠나고 북쪽으로 피신하였다.
음력 5월 2일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여 본거지로 삼았으며, 음력 5월 17일 도원수 김명원을 임진강 전투에서 격파한 뒤, 다시 군을 나눠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쳐들어갔다. 음력 6월 13일에 평양이 함락되었다. 다급해진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고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고 명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명의 조정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자국의 영토에까지 전쟁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적을 막는 것이 상책이라는 판단 아래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때 명은 일본의 의도가 중국을 도모함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요양부총병 조승훈은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자 명에서는 심유경을 평양에 파견하여 화의를 제창하게 하는 한편, 1593년 음력 1월 이여송 등이 이끄는 4만여 명군은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하여 일시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한양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은 권율이 배수진을 치고 있던 곳으로 일본군을 맞아 격전 끝에 이를 무찔렀다. 행주산성 전투는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 전쟁의 3대첩의 하나이다.
1592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탁월한 전술을 앞세워 일본 수군을 음력 5월 사천 해전에서, 음력 6월 당포 해전에서, 음력 7월 한산도 대첩 등지에서 승리하며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보충 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약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단숨에 뒤집는 원동력이 되었다.
 
주 195
각주 195) 임진 전쟁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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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96
각주 196) 명과 일본의 협상 전개
일본이 요구한 강화 조건

  1. 명 황제의 딸을 천황과 결혼시킬 것
  2. 조선의 남도 4도(경상, 전라, 충청, 경기)를 일본에 할양할 것
  3. 일본과 명의 무역을 재개할 것
  4. 조선 왕자 한 명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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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임진 전쟁

5. 임진 전쟁의 결과 - 조선, 일본
  1. 조선
    • 지배층의 사대 의식 강화 : 재조지은
    • 일본에 대한 적개심 증대
    • 국토의 황폐화, 인구 격감, 각종 문화재 피해 등
  2. 일본
    • 군사 강국으로 성장
    • 사회‧문화 발전의 토대 마련
    • 에도 막부의 성립
재조지은
<재조번방지>는 선조 25년 임진 전쟁으로 무너진 우리나라를 명의 구원으로 재조 재건한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위 사료는 만력제가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선조에게 보낸 칙서이다. 사료에서는 아시아 내륙지방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그것이 야기할 거시적 결과에 대해 당시 명 제국이 생각하고 있던 단면을 잘 보여준다. 또한 만력제 개인의 생각과 복안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만력제가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을 오히려 반긴 면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력제로 하여금 진정한 천자(天子)처럼 행동할 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저자 신경(申炅)의 설명에 따르면, 선조가 대신들을 강둑에 모이게 하고 만력제의 서신을 읽도록 명했을 때 그들은 모두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주 197
각주 197) 재조지은
그대는 오랫동안 우리의 이웃이었고 귀국은 늘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다. ‧‧‧‧‧‧ 짐은 귀국의 영토가 야만적인 일본 도당에게 침탈당하고 귀국의 수도를 빼앗기고 평양마저 점령당해 양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웠다. ‧‧‧‧‧‧ 짐은 어제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대를 돕기 위한 군대를 모집하라고 변경의 관리들에게 명하였으니 귀국의 군사들과 힘을 합해 도당들을 쫓아 전멸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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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임진 전쟁

5. 임진 전쟁의 결과 - 명, 여진
    • 임진전쟁으로 막대한 재정 소모
    • 농민의 세금 부담 증가, 광세의 폐
    • 각지에서 반란 발생
  1. 여진
    • 누르하치, 만주 일대에서 여진 부족 통합
    • 임진 전쟁 때 조선에 원군 파견 제의
    • 랴오둥을 제외한 만주 전역 지배

16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임진 전쟁

1. 6세기 동아시아
임진 전쟁의 전개
전쟁의 결과
  • 명 : 불고남왜로 국력 소모
  • 조선 : 사림의 정권 장악과 내부 정쟁, 국력 약화
  • 일본 : 전국시대 통일과 중앙 집권 강화

  • 일본의 조선 침략 → 수군, 의병의 활약과 명의 참전 → 강화 협상 결렬 → 재침략(정유전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일본군 철수

  • 조선 : 재조지은 인식, 인적‧물적 피해
  • 일본 : 군사 강국 성장, 에도 막부 성립
  • 명 : 재정 소모와 광세의 폐, 반란 발생
  • 여진 : 부족 통합, 만주 지배(랴오둥 제외)


  • 각주 190)
    북로남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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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91)
    경술의 변알탄은 1550년 8월, 기병대를 이끌고 장성을 넘어 베이징을 포위하고(경술의 변) 공포에 떨고 있는 명 황제에게 “해마다 세폐를 보내고 무역의 길을 열어라. 그렇지 않을 경우 매년 한번 씩 도성을 포위하고 아무 것도 남지 않게 하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명 군대는 이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반격할 기력도 없었다. 알탄은 3일 동안 베이징을 점령하고 마음껏 약탈과 살인, 방화를 저지르고 유유히 철수하였다. 이후 알탄 칸의 손자가 명에 투항하자 이를 계기로 명과 몽골 간의 화의가 이루어졌다.
    ko.wikipedia.org/wiki/경술의_변ko.wikipedia.org/wiki/경술의_변 바로가기
  • 각주 192)
    전국 통일을 촉진나가시노 전투 그림
    나가시노 전투는 1575년 나가시노 성을 둘러싼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 3만 8000명과 다케다 가쓰요리군 1만 5000명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당시 최신 병기였던 철포 3000자루를 준비하여 신(新)전법인 3단 발사를 실행한 오다군에게 당시 최강이라 불렸던 다케다 기마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섬멸되었다는 게 통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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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93)
    일본의 조선 침략 원인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말하기를 ‧‧‧‧‧‧ '나는 귀국의 길을 빌려 산과 바다를 건너 곧장 명으로 쳐들어가 그 4백 주를 모두 우리의 풍속으로 바꾸게 할 것이라.' 또, 장수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 '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내부(內府)에 맡기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을 거쳐 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랴오둥에서 곧장 베이징을 습격하고 제군에게 땅을 나누어줄 것이라.' 하였다.
    - "일본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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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94)
    랴오둥 보호조선은 동쪽 변방에 끼어 있어 우리(명)의 왼쪽 겨드랑이와 가깝습니다. 평양은 서쪽으로 압록강과 인접하고, 진주는 직접 등주와 내주를 맞대고 있습니다. 만일 일본이 조선을 빼앗아 차지하여 랴오둥(요동)을 엿본다면 1년도 안 되어 베이징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을 지켜야만 랴오둥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 왕재진, "해방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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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95)
    임진 전쟁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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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96)
    명과 일본의 협상 전개일본이 요구한 강화 조건

    1. 명 황제의 딸을 천황과 결혼시킬 것
    2. 조선의 남도 4도(경상, 전라, 충청, 경기)를 일본에 할양할 것
    3. 일본과 명의 무역을 재개할 것
    4. 조선 왕자 한 명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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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97)
    재조지은그대는 오랫동안 우리의 이웃이었고 귀국은 늘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다. ‧‧‧‧‧‧ 짐은 귀국의 영토가 야만적인 일본 도당에게 침탈당하고 귀국의 수도를 빼앗기고 평양마저 점령당해 양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웠다. ‧‧‧‧‧‧ 짐은 어제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대를 돕기 위한 군대를 모집하라고 변경의 관리들에게 명하였으니 귀국의 군사들과 힘을 합해 도당들을 쫓아 전멸시킬 것이다.
    - "재조번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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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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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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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임진 전쟁 자료번호 : edeao.d_0004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