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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동서 교역망의 통합과 확대

3-1단원 3차시
  • 저필자
    이윤선(동작고 역사 교사)

교역망의 통합과 동서 교류의 확대

몽골 제국의 교역로 정비
교역망의 통합
단일 화폐의 유통
동서 교류의 확대
원의 쇠퇴

교역망의 통합과 동서 교류의 확대

1. 몽골 제국의 교역로 정비
  1. 역참 설치: 중앙과 지방의 빠른 연결, 원활한 통치 등을 위해 전국에 걸쳐 설치
  2. 교역로 안정
    • 초원길, 비단길 등 지배
    • 바닷길 장악 노력: 일본, 대월, 참파, 자와에 원정대 파견
  3. 무역 관리: 항저우, 취안저우 등에 시박사 설치
항저우위치 취안저우위치
역참제도
역참 제도가 제국의 기간 교통망으로 확립된 시기는 오고타이칸 때였다. 과거에는 사신들이 이동할 때 유목민들이 사는 곳을 따라가면서 그들로부터 필요한 말을 공출하고 음식과 숙소를 제공받았는데, 그러한 방식이 유목민들에게 많은 폐해를 끼치기 때문에 오고타이는 별도의 루트를 따라 역참을 설치하고 사신들이 역참을 이용해서 이동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역참 루트를 확장하여 제국 전역을 포괄하는 광역적 교통 네트워크로 변모시켰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오고타이가 새로 건설한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집중되었다. 예를 들어 북중국과 카라코룸 사이에는 30킬로미터마다 역참 하나씩을 설치하여 모두 37개의 역참을 두었고, 이것을 이용하여 매일 500량의 수레가 식량과 음료를 가득 싣고 카라코룸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몽골 제국이 정복전을 통해 영토를 넓혀감에 따라 역참 네트워크의 범위도 더욱 확장되어, 결국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포괄할 정도로 역사상 초유의 거대 교통망이 만들어졌다. 이 거대한 조직은 역참마다 수백 가구의 참호(站戶)를 지정하고, 이들에게 면세혜택을 주는 대신 자신들이 맡은 역참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전담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운영하였는데 중국 지역의 경우 전체 인구의 6% 정도가 되었다.
 
주 138
각주 138) 역참
<역참 제도>
여행자에게는 중국이 가장 안전하고 좋은 고장이다. 한 사람이 단신으로 거금을 소지하고 9개월간이나 돌아다녀도 걱정할 것 없다. 전국의 모든 역참에는 숙소가 있는데, 관리자가 서기와 함께 와서 전체 투숙객의 이름을 등록하고 확인 도장을 찍은 다음 숙소 문을 잠근다. 다음날 아침, 관리자가 서기와 함께 다시 와서 투숙객을 점호하고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다. 그리고는 사람을 파견하여 다음 역참까지안내한다. 안내자는 다음 역참의 관리자로부터 전원이 도착했다는 확인서를 받아 온다. 전국의 모든 역참에서 이렇게 하고 있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
<역참 제도>
<역참 제도>
<이븐 바투타,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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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39
각주 139) 초원길, 비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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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망의 통합과 동서 교류의 확대

2. 교역망의 통합
  1. 동아시아 교역망 형성: 취안저우를 중심으로 고려,일본, 베트남, 동남아시아 섬 지역을 잇는 교역망
  2. 동아시아 교역망은 인도양 교역망, 아라비아 상인의 교역망, 지중해 교역망과 연결

교역망의 통합과 동서 교류의 확대

3. 단일 화폐의 유통
  1. 교역망의 통합으로 단일 화폐 필요성 증가
  2. 교초 발행
    • 지폐(유럽보다 400여년 앞섬)→초기 화폐였던 비단과 은을 대신
    • 유라시아 전역에서 유통
교초
몽골 제국 시기 육․해상을 통한 국제 교역의 증대는 기존의 화폐 제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은 원래 동전을 주된 화폐로 사용하였는데 동전은 무거워서 고액의 광역적인 결제 수단으로서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송대부터는 일종의 약속 어음과 같은 ‘교자(交子)’라는 것이 상인들 사이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남송과 금에서는 교자 혹은 교초(交鈔)라고 불리는 지폐의 사용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동전은 가장 주요한 화폐였다. 그런데 몽골인들은 중국을 정복한 뒤 교초를 유일한 유통 수단으로 정하고 동전을 법적으로 금지함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지폐에만 의존하는 화폐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몽골 제국이 발행한 교초는 원칙적으로 은과의 태환이 가능한 은본위 화폐였다. 그래서 중국도 이미 오래 전부터 은본위 제도를 채택해 왔던 이슬람권과 공통된 기반을 갖게 되었다. 중국,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등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은 이제 모두 은을 근간으로 삼는 화폐 경제 체제 안에 통합된 것이다.
 
주 140
각주 140) 교초 발행
<교초>
중원 왕조가 기존에 사용하던 동전은 무게 때문에 고액의 광역적인 결제수단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몽골 제국은 동전 사용을 금지하고 은 본위에입각한 지폐, 즉 교초를 유일한 유통수단으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은본위제를 채택했던 이슬람권과 공통적인 기반을 갖게 되었다.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은 이제 모두 은 본위 화폐 경제 체제 안에 통합된 것이다.
<교초>
<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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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망의 통합과 동서 교류의 확대

4. 동서 교류의 확대
  1. 문화에 대한 원의 태도
    • 원 왕실은 티베트 불교 신봉, 파스파 문자 공식화
    • 제국 내 여러 민족의 문화에 대해서는 관용적 태도→ 외래 종교 발달(경교, 이슬람교,크리스트교 등)
경교경교
다양한 문화에 대한 관용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풍습을 복속민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몽골 제국의 통치자들은 복속민들이 칭기즈 일족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는 한 각자의 고유한 풍속을 인정해주었다. 법령을 적용할 경우에도 몽골인은 자삭이라는 몽골의 법규에 따라, 중국인은 중국 법규에 따라, 색목인들은 각자 귀속된 집단의 법규에 따라 처리되었다. 만약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각 집단을 대표하는 수령들과 국가를 대표하는 관원이 한자리에 모여 합의를 통해 판결을 내렸다.
색목인은 ‘제색목인(諸色目人)’의 준말로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속하는 집단으로는 티베트, 위구르, 킵차크, 알란 등이 있었고, 이란․아랍 계통의 무슬림들도 많았다. 유럽인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다수는 아니었다. 색목인들의 활동 분야는 매우 다양했다. 킵차크, 알란 출신 사람들은 군사 분야에서 많은 역할을 했고, 위구르인들은 재정과 문서행정 분야에서, 티베트인들은 불교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무슬림들은 정치․경제․문화 각 분야에서 골고루 활동을 보여 주었다. 이들은 이슬람권에서 발달된 의학, 천문학, 지리학 방면의 지식을 전달해 주었다.
이란을 통치했던 몽골인들은 후일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전에는 기독교와 불교를 믿었는데 이러한 종교와 관련된 인물들도 다수 활동했다. 내몽골 출신의 네스토리우스 교도가 서아시아에 있던 교단 본부에서 총주교로 선출되기도 하고, 불교 방면에서도 티베트 출신 승려들이 다수 일 칸의 조정에서 활동했다. 또한 중국 출신의 기술자, 화가, 학자들도 몽골인들에 의해 기용되어 동아시아 문화를 전파하는 게 기여하였다.
또한 몽골 제국 시기의 공식 문자는 파스파 문자였지만,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다 보니 하나의 문서에 여러 개의 언어와 문자가 동시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부의 행정 문서는 궁정의 몽골인 관리와 지방 행정을 맡은 현지인 관리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반드시 여러 번역본을 만들어야 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중국 전체의 관리 중 4.29%가 통․번역 담당 관리들이었다고 한다.
몽골의 종교 정책은 상당히 유연하고 개방적이어서 기독교, 이슬람, 유교, 불교, 도교를 막론하고 성직자들에게는 면세의 혜택을 부여했고, 군주들은 그러한 특권을 명시한 명령문을 내려 주었다. 그것을 받은 사원이나 도관은 지방의 관리나 주민들에게 그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그 내용을 커다란 비석에 새겨두었는데, 위구르 문자(혹은 파스파 문자)와 한문이 비석의 앞뒤 양면에 동시에 새겨져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거용관 과가탑(居庸關 過街塔)에는 다라니경 가운데 여행자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구절이 위구르, 파스파, 한문, 산스크리트, 티베트, 서하 문자로 새겨져 있다.
 
주 141
각주 141) 여러 민족의 문화에 대해서는 관용적 태도
<몽골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
  • 야율초재: 거란족 출신으로 금의 신하였는데 금 멸망시 칭기즈칸에게 발탁되어 몽골의 관료가 되었다. 몽골이 제국으로서의 제도와 정책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몽골 제국은 전체를 단일한 법령으로 다스리려 하지 않았다. 몽골인은 ‘자삭’이라는 몽골의 법규에 따라, 중국인은 중국 법규에 따라, 색목인(티베트,위구르,페르시아 등)은 각자 속해 있는 집단의 법규에 따라 처리되었다.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간의 분쟁은 각 집단을 대표하는 수령들과 국가를 대표하는 관원이 한자리에 모여 합의를 한 다음 판결을 내렸다.
<몽골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
<몽골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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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42
각주 142) 외래 종교 발달
<몽골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
  • 경교: 크리스트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가 당 대에 중국에 들어와 불리우던 명칭. 당 말기 이후 쇠퇴했다가원 대에 일시적으로 세력이 커짐. 그림은 불교의 卍자가 강조된 경교의 십자가이다.
  • 종교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어서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에게는 면세의 특권을 부여하고 그 특권을 명시한 문서를 내려 주었다.
<몽골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
<몽골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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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망의 통합과 동서 교류의 확대

4. 동서 교류의 확대
2. 동서 교류 활발
천문학, 역법, 수학, 지도학 등
→→→→→→→→→→→→→→→→
←←←←←←←←←←←←←←←←
제지술, 인쇄술, 나침반 등

교역망의 통합과 동서 교류의 확대

5. 원의 쇠퇴
  1. 쇠퇴 원인: 왕위 계승 다툼, 왕실의 사치, 교초 남발, 백련교의 난
  2. 결과: 주원장의 명 건국→ 카라코룸으로 천도
  3. 명,청 대의 몽골: 북방에서 강력한 군사력 유지
카라코룸위치
백련교의 난과 원의 멸망
원 말 왕위 계승 다툼, 왕실의 사치, 잇단 자연 재해 등으로 정치․경제적 혼란이 커졌다. 정부는 재정 확보 명목으로 세금을 더 거두고 교초를 남발하여 오히려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혼란이 극도에 달하면 중생을 구제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나타난다는 미륵불의 출현을 고대하였다. 이때 등장한 백련교는 몽골인의 지배에 반감이 있던 민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어 각지에서 일어난 반원 봉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반란군은 몽골인에 저항한다는 표시로 붉은색 두건을 둘렀다. 홍건적이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난을 일으킨 세력 중 하나인 주원장은 강남 지주층의 지원을 바탕으로 다른 세력들을 제거하고 1368년 명을 건국하여 난징에 도읍하고 연호를 홍무라 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 대도에 입성하였다. 원의 순제(토곤 테무르)는 몽골 고원으로 도피하고 카라코룸으로 도읍을 옮겼다. 1370년 토곤 테무르가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1372년 몽골은 명의 원정군을 격파하기도 했으나 장군 나하추가 명에 항복한 뒤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1388년 명군에게 크게 패하고 토곤 테무르의 차남 토구스 테무르마저 피살됨으로서 쿠빌라이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주 143
각주 143) 카라코룸으로 천도
<카라코룸>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이 명을 세우고 대도(베이징)를 점령하자 원의 순제는 몽골초원으로 도망하여 카라코룸에 도읍을 정하였다.이곳은 원 성립 이전 몽골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사진은 16세기 불교사원의 유적이다.
<카라코룸>
<카라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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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망의 통합과 동서 교류의 확대

동서 교역망의 통합
동서 교류
  1. 몽골 제국의 교통로 정비와 무역 관리 등에 힘입어 동아시아 교역망 형성
  2. 단일화폐 유통: 교초
  3. 동·서 교역망 연결
  1. 서→동: 천문학,역법,수학,지도학 등
  2. 동→서: 제지술,인쇄술,나침반,흑사병 등

  • 각주 138)
    역참<역참 제도>
    여행자에게는 중국이 가장 안전하고 좋은 고장이다. 한 사람이 단신으로 거금을 소지하고 9개월간이나 돌아다녀도 걱정할 것 없다. 전국의 모든 역참에는 숙소가 있는데, 관리자가 서기와 함께 와서 전체 투숙객의 이름을 등록하고 확인 도장을 찍은 다음 숙소 문을 잠근다. 다음날 아침, 관리자가 서기와 함께 다시 와서 투숙객을 점호하고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다. 그리고는 사람을 파견하여 다음 역참까지안내한다. 안내자는 다음 역참의 관리자로부터 전원이 도착했다는 확인서를 받아 온다. 전국의 모든 역참에서 이렇게 하고 있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
    <역참 제도>
    <역참 제도>
    <이븐 바투타, 여행기> 바로가기
  • 각주 139)
    초원길, 비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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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40)
    교초 발행<교초>
    중원 왕조가 기존에 사용하던 동전은 무게 때문에 고액의 광역적인 결제수단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몽골 제국은 동전 사용을 금지하고 은 본위에입각한 지폐, 즉 교초를 유일한 유통수단으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은본위제를 채택했던 이슬람권과 공통적인 기반을 갖게 되었다.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은 이제 모두 은 본위 화폐 경제 체제 안에 통합된 것이다.
    <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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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41)
    여러 민족의 문화에 대해서는 관용적 태도<몽골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
    • 야율초재: 거란족 출신으로 금의 신하였는데 금 멸망시 칭기즈칸에게 발탁되어 몽골의 관료가 되었다. 몽골이 제국으로서의 제도와 정책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몽골 제국은 전체를 단일한 법령으로 다스리려 하지 않았다. 몽골인은 ‘자삭’이라는 몽골의 법규에 따라, 중국인은 중국 법규에 따라, 색목인(티베트,위구르,페르시아 등)은 각자 속해 있는 집단의 법규에 따라 처리되었다.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간의 분쟁은 각 집단을 대표하는 수령들과 국가를 대표하는 관원이 한자리에 모여 합의를 한 다음 판결을 내렸다.
    <몽골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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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42)
    외래 종교 발달<몽골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
    • 경교: 크리스트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가 당 대에 중국에 들어와 불리우던 명칭. 당 말기 이후 쇠퇴했다가원 대에 일시적으로 세력이 커짐. 그림은 불교의 卍자가 강조된 경교의 십자가이다.
    • 종교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어서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에게는 면세의 특권을 부여하고 그 특권을 명시한 문서를 내려 주었다.
    <몽골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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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43)
    카라코룸으로 천도<카라코룸>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이 명을 세우고 대도(베이징)를 점령하자 원의 순제는 몽골초원으로 도망하여 카라코룸에 도읍을 정하였다.이곳은 원 성립 이전 몽골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사진은 16세기 불교사원의 유적이다.
    <카라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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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지명
항저우, 취안저우, 카라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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