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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조공‧책봉 관계의 전개

2-4단원 2차시
  • 저필자
    이윤선(동작고 역사 교사)

조공·책봉 관계의 전개

남북조시대의 다원적 외교
당과 동아시아 각국간의 외교
조공·책봉 관계의 확장

조공·책봉 관계의 전개

1. 남북조 시대의 다원적 외교
  1. 조공·책봉 관계의 성격 변화(한 이후)
    • 현실적이고 다원적인 관계로
    • 국가간 우호를 상징하는 의례로
    • 여러 나라와 동시에 체결하기도 함
  2. 남북조 시대의 조공·책봉 관계(계속)
    • 남조: 북조 견제를 위해 선비,토욕혼을 책봉
남북조 시대의 다원적 외교
후한이 무너지고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이 일시적으로 중원을 통일하였으나 흉노족이 서진을 무너뜨린 뒤 화북지방에서는 5호 16국이 흥망을 거듭하고 양쯔강 남쪽에서는 6조가 차례로 이어지는 대 분열기가 나타났다. 반면 중원 이외의 지역에서는 분산되었던 정치 세력들이 점차 몇 개의 큰 국가로 통합되면서 중원 왕조들과 대립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는 고구려가 일어나 한 군현을 밀어내고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한반도 남부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성장하였다. 일본에서도 왜가 점차 주변 세력을 통합하고 있었다. 또 서부 만주의 선비족이나 몽골초원의 유연 등도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원 왕조들은 외교 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변 세력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여러개의 관작을 수여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前燕은 요서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으므로 東晋은 349년 전연의 모용씨에게 “使持節、侍中、大都督、都督河北諸軍事、幽、平二州牧、大將軍、大單于、燕王(사지절 시중 대도독 도독하북제군사 유평2주목 대장군 대선우 연왕”의 관작을 주었다. 그러나 모용씨는 3년 뒤 황제를 자처하면서 동진의 관작을 파기하였다. 한편 모용씨는 고구려와 요동의 지배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는데 결국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였다. 이후 모용씨는 요동 대신 화북지방을 점령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고구려왕에게 “영주제군사 정동대장군으로 삼고 낙랑군공으로 봉하며 고구려왕으로 인정한다”는 국서를 보냈다. 이는 고구려의 요동 지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취한 외교형식이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강성한 나라였기에 중원 왕조들은 다투어 고구려에 관작을 올려주고 호의를 보이며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479년 남조 제나라는 건국 직후 고구려왕의 관품을 장군직 가운데 최고인 표기대장군으로 올렸으나 고구려가 이를 받지 않았고, 북위가 수여하는 관작도 고구려는 강성했으므로 이를 받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도 남북조의 여러 왕조들에게서 “사지절 백제제군사 정동대장군 백제왕”같은 관작을 받고 왜왕도 “사지절 왜등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같은 관작을 받는다. 왜국의 왕은 열도 내부의 수장들에게도 “평서장군”같은 작호를 내려 중국의 작호를 내부 통치에 이용하고 있다.
 

조공·책봉 관계의 전개

1. 남북조 시대의 다원적 외교
  1. 남북조 시대의 조공·책봉 관계
    • 북조: 북주와 북제는 돌궐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서로 경쟁
    • 고구려: 남북조 모두와 조공·책봉관계 맺음
    • 백제: 고구려 견제 위해 남조와 조공·책봉관계 맺음
    • 왜: 대내적 정통성 확보 위해 남조로부터 책봉 받음
    • 건국 초의 수,당: 돌궐에 조공하고 신하라 칭함
남북조 시대의 다원적 외교
후한이 무너지고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이 일시적으로 중원을 통일하였으나 흉노족이 서진을 무너뜨린 뒤 화북지방에서는 5호 16국이 흥망을 거듭하고 양쯔강 남쪽에서는 6조가 차례로 이어지는 대 분열기가 나타났다. 반면 중원 이외의 지역에서는 분산되었던 정치 세력들이 점차 몇 개의 큰 국가로 통합되면서 중원 왕조들과 대립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는 고구려가 일어나 한 군현을 밀어내고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한반도 남부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성장하였다. 일본에서도 왜가 점차 주변 세력을 통합하고 있었다. 또 서부 만주의 선비족이나 몽골초원의 유연 등도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원 왕조들은 외교 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변 세력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여러개의 관작을 수여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前燕은 요서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으므로 東晋은 349년 전연의 모용씨에게 “使持節、侍中、大都督、都督河北諸軍事、幽、平二州牧、大將軍、大單于、燕王(사지절 시중 대도독 도독하북제군사 유평2주목 대장군 대선우 연왕”의 관작을 주었다. 그러나 모용씨는 3년 뒤 황제를 자처하면서 동진의 관작을 파기하였다. 한편 모용씨는 고구려와 요동의 지배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는데 결국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였다. 이후 모용씨는 요동 대신 화북지방을 점령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고구려왕에게 “영주제군사 정동대장군으로 삼고 낙랑군공으로 봉하며 고구려왕으로 인정한다”는 국서를 보냈다. 이는 고구려의 요동 지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취한 외교형식이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강성한 나라였기에 중원 왕조들은 다투어 고구려에 관작을 올려주고 호의를 보이며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479년 남조 제나라는 건국 직후 고구려왕의 관품을 장군직 가운데 최고인 표기대장군으로 올렸으나 고구려가 이를 받지 않았고, 북위가 수여하는 관작도 고구려는 강성했으므로 이를 받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도 남북조의 여러 왕조들에게서 “사지절 백제제군사 정동대장군 백제왕”같은 관작을 받고 왜왕도 “사지절 왜등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같은 관작을 받는다. 왜국의 왕은 열도 내부의 수장들에게도 “평서장군”같은 작호를 내려 중국의 작호를 내부 통치에 이용하고 있다.
 
주 111
각주 111) 남북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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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12
각주 112) 북조
<북조와 돌궐의 관계>
북주의 조정은 가한에게 매년 10만필의 비단을 보냈고, 우호의 표시로 돌궐의 사신들을 후하게 대접해야만 하였다. 북제 역시 물자를 지원하였다. 양국은 돌궐이 상대 국가를 지원할까 두려워하였고, 가한은 주와 제의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을 즐겼다. 이는 돌궐에 엄청난 부를 가져왔다. 돌궐의 가한은 “나의 남쪽 두 아들이 언제나 효순하니 어찌 빈곤함을 걱정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목 제국과 중원>
<북조와 돌궐의 관계>
<북조와 돌궐의 관계>
<유목 제국과 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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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13
각주 113) 고구려
<고구려와 남북조의 관계>
481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남제에) 공물을 바쳤다. 북위에도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의) 세력이 강성하여 통제받지 않았다. 북위는 사신의 숙소를 만들 때 남제 사신의 숙소를 제일 크게 만들고 고구려는 그 다음 크기로 하였다.
489년, 남제의 사신이 북위에 갔을 때 고구려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남제의 사신이 “고구려는 우리 조정에 신하로 따르고 있는데 오늘 감히 우리와 나란히 설 수 있는가?”라고 항의하였다.
<남제서>
<고구려와 남북조의 관계>
<고구려와 남북조의 관계>
<남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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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책봉 관계의 전개

2. 당과 동아시아 각국간의 외교
1. 당과 유목국가
  • 돌궐, 위구르, 토번 등: 중원왕조가 만든 조공·책봉의 형식을 거부, 주로 경제적인 교류에 관심
  • 당: 화번공주 파견 등 적극적인 화친 추진

당과 동아시아 각국간의 외교
수에 이어 당이 중원을 다시 통일할 무렵, 북방 초원 지대에는 돌궐이 큰 세력을 형성하였고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는 고구려가 가장 강성한 나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중원의 서쪽 내륙지역에서는 토번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일본 열도에서도 강력한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수, 당은 먼저 돌궐의 일부 군장에게 작위와 많은 비단을 주어 우호 세력으로 확보하며 내분을 조장하여 제압에 성공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수, 당에 대해 형식적인 조공‧ 책봉 관계를 유지하면서 돌궐 및 말갈과 연대하여 수, 당에 맞섰다. 그리고 남족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는데 백제와 신라는 각기 수, 당에 대한 조공‧ 책봉 관계를 적극 활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결국 신라는 당의 군사적 지원을 얻어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일본은 군사를 보내어 백제의 부흥을 지원했으나 실패하였고,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 세력과 손을 잡고 당의 지배 시도를 막아내었다. 마침 토번이 당의 서부를 공격하여 당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퇴각하였다.
이로써 동아시아는 중원의 당, 서부의 토번, 한반도의 신라, 일본, 재건된 북부 초원의 돌궐로 구성되는 안정적인 구조를 이루었다.
한편 일본은 수 대에 들어서부터 ‘日出處 天子’라 자칭하면서 중원 왕조와 대등하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중국에 조공 사절을 보내기는 하지만 책봉을 받지는 않게 되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책봉체제 밖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16 참조)
8세기 후반 이후는 안사의 난으로 당의 위상이 낮아지고 대신 초원의 위구르와 서부의 토번이 강성하였다. 반면 동쪽의 신라, 일본, 새로 들어선 발해는 당과 형식적인 조공‧ 책봉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조공‧ 책봉 관계는 매우 의례적인 것이었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깨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13의 자료는 신라와 당 사이에 이루어지는 조공‧ 책봉 관계의 실상을 보여준다. 당이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였지만 이는 문무왕의 정통성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신라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다.

당과 유목국가 간의 외교관계
유목 민족 국가는 중원 왕조로부터 물자를 얻어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중원을 공격하였다. 당 대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7-9세기 돌궐, 위구르, 토번 등이 중원을 공격해오자 당은 이들을 무마하기 위해 많은 비단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당 고조때(619년) 동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이 죽자 고조가 애도의 뜻으로 3일동안 정무를 폐하고 내사사인 정덕정을 보내어 조문하고 부물(賦物)로 비단 3만필을 보냈다. 당 고종 때(657년)에는 서역이 평정되자 그 땅을 곤릉(昆陵), 몽지(蒙池) 2도호부로 나누고, 서돌궐의 지배자인 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를 흥석망가한(興昔亡可汗)으로, 아사나보진(阿史那步眞)을 왕절가한(往絶可汗)으로 삼아 각각 10만필을 주었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 밖에도 당 전기에 유목 민족 국가의 군주에게 비단을 지급한 사례가 무수히 많고, 안사의 난 이후 당의 힘이 약해진 이후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유목 민족 국가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경제적인 교류는 활발했으나 문화적 교류의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당과 유목 민족 국가간의 관계이다.
 
주 114
각주 114) 당과 동아시아 각국간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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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15
각주 115) 경제적인 교류
<당과 유목국가의 외교>
중원 백성은 금,은,비단을 어려움 없이 우리에게 준다. 중원 사람은 달콤한 말과 부드러운 비단으로 속여 먼 곳에 사는 백성을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게 한다. 이 백성이 가까이 자리잡은 뒤에 중원 사람은 그때에 악한 생각을 한다.…… “중원 사람의 달콤한 말과 부드러운 비단에 속은 돌궐 백성아! 너희들은 많이 죽었다. 돌궐 백성아! 다시 또 속는다면 너희는 분명히 죽을 것이다.”……
<퀼 테긴 비문>
<당과 유목국가의 외교>
<당과 유목국가의 외교>
<퀼 테긴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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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16
각주 116) 화번공주
  • 주변국 왕과 혼인한 황실의 딸.
  • 토번에 간 문성공주, 돌궐에 간 의성공주, 위구르에 간 함안공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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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과

2. 당과 동아시아 각국간의 외교
2. 당과 농경국가
  • 신라, 발해, 왜 등: 국내 정치세력 통합, 주변국 견제, 선진문물 수용을 위해 조공·책봉 형식 활용
  • 자국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

당과 동아시아 각국간의 외교
수에 이어 당이 중원을 다시 통일할 무렵, 북방 초원 지대에는 돌궐이 큰 세력을 형성하였고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는 고구려가 가장 강성한 나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중원의 서쪽 내륙지역에서는 토번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일본 열도에서도 강력한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수, 당은 먼저 돌궐의 일부 군장에게 작위와 많은 비단을 주어 우호 세력으로 확보하며 내분을 조장하여 제압에 성공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수, 당에 대해 형식적인 조공‧ 책봉 관계를 유지하면서 돌궐 및 말갈과 연대하여 수, 당에 맞섰다. 그리고 남족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는데 백제와 신라는 각기 수, 당에 대한 조공‧ 책봉 관계를 적극 활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결국 신라는 당의 군사적 지원을 얻어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일본은 군사를 보내어 백제의 부흥을 지원했으나 실패하였고,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 세력과 손을 잡고 당의 지배 시도를 막아내었다. 마침 토번이 당의 서부를 공격하여 당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퇴각하였다.
이로써 동아시아는 중원의 당, 서부의 토번, 한반도의 신라, 일본, 재건된 북부 초원의 돌궐로 구성되는 안정적인 구조를 이루었다.
한편 일본은 수 대에 들어서부터 ‘日出處 天子’라 자칭하면서 중원 왕조와 대등하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중국에 조공 사절을 보내기는 하지만 책봉을 받지는 않게 되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책봉체제 밖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16 참조)
8세기 후반 이후는 안사의 난으로 당의 위상이 낮아지고 대신 초원의 위구르와 서부의 토번이 강성하였다. 반면 동쪽의 신라, 일본, 새로 들어선 발해는 당과 형식적인 조공‧ 책봉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조공‧ 책봉 관계는 매우 의례적인 것이었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깨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13의 자료는 신라와 당 사이에 이루어지는 조공‧ 책봉 관계의 실상을 보여준다. 당이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였지만 이는 문무왕의 정통성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신라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다.

당과 유목국가 간의 외교관계
유목 민족 국가는 중원 왕조로부터 물자를 얻어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중원을 공격하였다. 당 대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7-9세기 돌궐, 위구르, 토번 등이 중원을 공격해오자 당은 이들을 무마하기 위해 많은 비단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당 고조때(619년) 동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이 죽자 고조가 애도의 뜻으로 3일동안 정무를 폐하고 내사사인 정덕정을 보내어 조문하고 부물(賦物)로 비단 3만필을 보냈다. 당 고종 때(657년)에는 서역이 평정되자 그 땅을 곤릉(昆陵), 몽지(蒙池) 2도호부로 나누고, 서돌궐의 지배자인 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를 흥석망가한(興昔亡可汗)으로, 아사나보진(阿史那步眞)을 왕절가한(往絶可汗)으로 삼아 각각 10만필을 주었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이 밖에도 당 전기에 유목 민족 국가의 군주에게 비단을 지급한 사례가 무수히 많고, 안사의 난 이후 당의 힘이 약해진 이후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유목 민족 국가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경제적인 교류는 활발했으나 문화적 교류의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당과 유목 민족 국가간의 관계이다.
 
주 117
각주 117) 국내 정치세력 통합
<후한서 왜전>에 왜의 노국왕(奴國王)이 57년 후한에 조공사를 보내어 광무제로부터 인수(印綬)를 받았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물. 큐슈의 하카다(博多)지역에서 발견됨
<왜국왕 금인>
<왜국왕 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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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18
각주 118) 자국의 이익
<신라의 실리적 대당 외교>
  • 648년 신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만약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의 나라와 백성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과 바다를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 674년 새 역법을 고쳐서 사용하였다. 왕(문무왕)이 당에 저항하는 고구려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서 사람을 시켜서 지키게 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라의 실리적 대당 외교>
<신라의 실리적 대당 외교>
<삼국사기>, 신라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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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책봉 관계의 전개

3. 조공·책봉 관계의 확장
  1. 고구려: 독자적 천하관 표명, 연호 사용, 백제와 신라에 조공 요구
  2. 백제: 마한 소국을 남만(南蠻)으로 부름, 탐라에 조공 요구
  3. 신라: 스스로를 대국으로 인식, 일본을 조공국으로 간주
  4. 발해: 독자적 연호 사용, 말갈족에 복속 강요
  5. 일본: 스스로를‘해가 뜨는 곳의 천자’라 함, 신라, 발해를 조공국으로 간주하려다 마찰 빚음
당과 동아시아 각국간의 외교
수에 이어 당이 중원을 다시 통일할 무렵, 북방 초원 지대에는 돌궐이 큰 세력을 형성하였고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는 고구려가 가장 강성한 나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중원의 서쪽 내륙지역에서는 토번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일본 열도에서도 강력한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수, 당은 먼저 돌궐의 일부 군장에게 작위와 많은 비단을 주어 우호 세력으로 확보하며 내분을 조장하여 제압에 성공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수, 당에 대해 형식적인 조공‧ 책봉 관계를 유지하면서 돌궐 및 말갈과 연대하여 수, 당에 맞섰다. 그리고 남족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는데 백제와 신라는 각기 수, 당에 대한 조공‧ 책봉 관계를 적극 활용하여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결국 신라는 당의 군사적 지원을 얻어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일본은 군사를 보내어 백제의 부흥을 지원했으나 실패하였고,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 세력과 손을 잡고 당의 지배 시도를 막아내었다. 마침 토번이 당의 서부를 공격하여 당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퇴각하였다.
이로써 동아시아는 중원의 당, 서부의 토번, 한반도의 신라, 일본, 재건된 북부 초원의 돌궐로 구성되는 안정적인 구조를 이루었다.
한편 일본은 수 대에 들어서부터 ‘日出處 天子’라 자칭하면서 중원 왕조와 대등하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중국에 조공 사절을 보내기는 하지만 책봉을 받지는 않게 되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책봉체제 밖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16 참조)
8세기 후반 이후는 안사의 난으로 당의 위상이 낮아지고 대신 초원의 위구르와 서부의 토번이 강성하였다. 반면 동쪽의 신라, 일본, 새로 들어선 발해는 당과 형식적인 조공‧ 책봉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조공‧ 책봉 관계는 매우 의례적인 것이었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깨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13의 자료는 신라와 당 사이에 이루어지는 조공‧ 책봉 관계의 실상을 보여준다. 당이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였지만 이는 문무왕의 정통성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신라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다.
 
주 119
각주 119) 독자적 천하관
<고구려, 백제의 천하관>
  • (시조)추모왕은 천제의 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데,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났다.……18세에 왕위에 올라 영락태왕이라 일렀는데 그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그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에 떨쳤다.……백잔(백제)과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속민으로 조공을 바쳐 왔다.
    <광개토대왕릉비문>
  • (백제의 동성왕이) 탐라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으므로 그를 직접 치려고 무진주에 이르렀다.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구려, 백제의 천하관>
<고구려, 백제의 천하관>
<광개토대왕릉비문>
<삼국사기>, 백제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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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20
각주 120) 스스로를 대국으로 인식
<신라, 일본의 천하관>
  • 40여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전쟁이 없는 태평성세였다. 그러므로 사방 이웃 나라들이 멀리서 와서 주인으로 섬겼으며 오직 흠모하는 마음만 있을 뿐 일찍이 화살을 겨누고 넘보는 자가 없었다.
    <성덕대왕신종 명문>
  • 신라 사절이 와서 신라를 왕성국이라 자처하므로 (이를 괘씸하게 여겨) 다자이후에서 추방하였다.
    <일본서기>
  • "해가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가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국서를 보냅니다. 건강합니까?"황제는 이를 보고 불쾌해했으며 "야만국의 국서인데 무례하구나. 두 번 다시 상대하지 말라"고 하였다.
    <수서> 왜국조

<신라, 일본의 천하관>>
<신라, 일본의 천하관>
<성덕대왕신종 명문>
<일본서기>
<수서> 왜국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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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책봉 관계의 전개

남북조 시대
당 대
1.각국의 필요에 따라 다원적 외교관계 형성
  1. 돌궐, 위구르,토번
    - 경제적 교류에 집중
    - 당은 화번공주 파견 등 적극적 화친 추진
  2. 신라,발해,왜
    - 국내 세력 통합, 선진 문물 수용 등을 위해조공·책봉 활용

  • 각주 111)
    남북조 시대
     바로가기
  • 각주 112)
    북조<북조와 돌궐의 관계>
    북주의 조정은 가한에게 매년 10만필의 비단을 보냈고, 우호의 표시로 돌궐의 사신들을 후하게 대접해야만 하였다. 북제 역시 물자를 지원하였다. 양국은 돌궐이 상대 국가를 지원할까 두려워하였고, 가한은 주와 제의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을 즐겼다. 이는 돌궐에 엄청난 부를 가져왔다. 돌궐의 가한은 “나의 남쪽 두 아들이 언제나 효순하니 어찌 빈곤함을 걱정하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목 제국과 중원>
    <북조와 돌궐의 관계>
    <북조와 돌궐의 관계>
    <유목 제국과 중원> 바로가기
  • 각주 113)
    고구려<고구려와 남북조의 관계>
    481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남제에) 공물을 바쳤다. 북위에도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의) 세력이 강성하여 통제받지 않았다. 북위는 사신의 숙소를 만들 때 남제 사신의 숙소를 제일 크게 만들고 고구려는 그 다음 크기로 하였다.
    489년, 남제의 사신이 북위에 갔을 때 고구려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남제의 사신이 “고구려는 우리 조정에 신하로 따르고 있는데 오늘 감히 우리와 나란히 설 수 있는가?”라고 항의하였다.
    <남제서>
    <고구려와 남북조의 관계>
    <고구려와 남북조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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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4)
    당과 동아시아 각국간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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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5)
    경제적인 교류<당과 유목국가의 외교>
    중원 백성은 금,은,비단을 어려움 없이 우리에게 준다. 중원 사람은 달콤한 말과 부드러운 비단으로 속여 먼 곳에 사는 백성을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게 한다. 이 백성이 가까이 자리잡은 뒤에 중원 사람은 그때에 악한 생각을 한다.…… “중원 사람의 달콤한 말과 부드러운 비단에 속은 돌궐 백성아! 너희들은 많이 죽었다. 돌궐 백성아! 다시 또 속는다면 너희는 분명히 죽을 것이다.”……
    <퀼 테긴 비문>
    <당과 유목국가의 외교>
    <당과 유목국가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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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6)
    화번공주
    • 주변국 왕과 혼인한 황실의 딸.
    • 토번에 간 문성공주, 돌궐에 간 의성공주, 위구르에 간 함안공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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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7)
    국내 정치세력 통합<후한서 왜전>에 왜의 노국왕(奴國王)이 57년 후한에 조공사를 보내어 광무제로부터 인수(印綬)를 받았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물. 큐슈의 하카다(博多)지역에서 발견됨
    <왜국왕 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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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8)
    자국의 이익<신라의 실리적 대당 외교>
    • 648년 신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만약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의 나라와 백성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과 바다를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 674년 새 역법을 고쳐서 사용하였다. 왕(문무왕)이 당에 저항하는 고구려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서 사람을 시켜서 지키게 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라의 실리적 대당 외교>
    <신라의 실리적 대당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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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19)
    독자적 천하관<고구려, 백제의 천하관>
    • (시조)추모왕은 천제의 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데,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났다.……18세에 왕위에 올라 영락태왕이라 일렀는데 그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그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에 떨쳤다.……백잔(백제)과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속민으로 조공을 바쳐 왔다.
      <광개토대왕릉비문>
    • (백제의 동성왕이) 탐라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으므로 그를 직접 치려고 무진주에 이르렀다.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구려, 백제의 천하관>
    <고구려, 백제의 천하관>
    <광개토대왕릉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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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20)
    스스로를 대국으로 인식<신라, 일본의 천하관>
    • 40여년간 왕위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전쟁이 없는 태평성세였다. 그러므로 사방 이웃 나라들이 멀리서 와서 주인으로 섬겼으며 오직 흠모하는 마음만 있을 뿐 일찍이 화살을 겨누고 넘보는 자가 없었다.
      <성덕대왕신종 명문>
    • 신라 사절이 와서 신라를 왕성국이라 자처하므로 (이를 괘씸하게 여겨) 다자이후에서 추방하였다.
      <일본서기>
    • "해가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가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국서를 보냅니다. 건강합니까?"황제는 이를 보고 불쾌해했으며 "야만국의 국서인데 무례하구나. 두 번 다시 상대하지 말라"고 하였다.
      <수서> 왜국조

    <신라, 일본의 천하관>>
    <신라, 일본의 천하관>
    <성덕대왕신종 명문>
    <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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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책봉 관계의 전개 자료번호 : edeao.d_0002_004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