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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2-4단원 1차시

 
  • 저필자이윤선(동작고 역사 교사)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주대의 조공·책봉 제도

     
     

     한대의 대외관계

     
     

     조공·책봉의 외교 형식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1. 주대의 조공·책봉 제도

     

    1. 주 왕과 제후간의 상하관계
     
    :3
    영토지배를 인정하고
    제후로 임명(冊封)
    주왕
    ↓↑
    ↓↑
    제후
    왕을 뵙고
    예물을 바침(朝貢)

    2. 주의 영역 안에서만 적용됨

     
    주 대의 조공․ 책봉제도와 한 대 이후 조공․ 책봉 제도의 관계
    대개 조공․ 책봉 제도는 서주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주에서 조공․ 책봉 제도가 확실하게 시행되었는지의 여부는 불투명하다. 더구나 이 제도는 주 왕실의 친족과 공신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이민족과는 관계가 없었다. 즉 한 대 이후의 조공․ 책봉 제도는 주의 그것과 외형적인 유사성은 있겠지만 내용적으로나 이념적으로는 서로 무관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2. 한 대의 대외관계

     

    1. 고조때 흉노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뒤 형제관계 맺고 화친
     
    :3
    한(兄)비단, 곡식 등 공물
    →→→→→→→→→
    ←←←←←←←←←
    침략행위 중단
    흉노(弟)
    2. 무제 이후 국력이 강화됨 → 약소국을 침략, 조공·책봉 관계 요구

     
    한 대의 대외관계
    한은 고조때 흉노를 공격하다가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일이 있고, 한나라 장수들은 흉노에 투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흉노는 동으로는 요서의 동호에서 서쪽의 오손과 월지까지 아우른 강국이었다. 흉노의 묵특선우는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약탈을 하였고 결국 한은 종실의 딸을 공주로 삼아 선우에게 출가시키고 많은 세폐를 보내면서 형제 관계를 맺고 화친하였다. 형식적으로는 한나라가 형, 흉노가 아우였으나 내용면에서는 흉노가 우위에 있었다. 한은 문제와 경제때까지 국력을 축적하여 무제 즉위 이후 흉노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벌였다. 이 공격은 서로간에 승패를 가리지도 못하면서 50년 이상 지속되었다. 한나라도 국력이 피폐해졌지만, 흉노는 잇단 자연재해까지 겹쳐 현저하게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한나라는 적극적인 공격 대신 흉노의 일부 부족 군주들에게 왕후(王侯)의 인수(印綬)를 주고 물자를 지원하여 분열을 조장하였고 흉노에 적대적인 다른 유목 정권과 화친관계를 맺으며 흉노를 견제하도록 유도하였다. 결국 흉노는 예전의 강성함을 회복하지 못하고 여러개의 부족으로 분열되어 후한대에 이르면 한나라에 대하여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한편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세운 왕망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주변 정권들의 조공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주 대에 주공이 예악을 정해 천하가 화평하니 멀리서 월상씨가 통역을 거치며 찾아와 조공을 바쳤다’는 고사를 본따 강족(羌族)에게 많을 재물을 주고 회유하여 신에 조공하게 하고, 자신의 정치가 주공만큼 훌륭하다고 선전을 한 것이다. 이후 정통성이 약한 왕조일수록 조공․책봉 관계를 정치적 입지 구축을 위해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남북조 시대 여러 왕조들이 삼국과 다투어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참고 : 왕소군과 한 ․ 흉노 화친
    “왕소군은 영호연지(寧胡閼氏)라 불리고 아들 이도지아사를 낳았는데, 그 아들은 우일축왕(右日逐王)이 되었다. 호한야는 선우 자리에 오른 뒤 28년 후인 건시 2년[기원전 31년]에 죽었다. 호한야가 죽고 (그의 아들) 조도막고가 즉위하여 복주루악제 선우가 되었다. 복주루 선우는 또한 [유목민의 관습인 수혼제(嫂婚制)에 따라]왕소군을 부인으로 맞아 2녀를 얻었다. 장녀는 수복 거차(須卜 居次)라 하고 차녀는 당우 거차(当于 居次)라 불렀다.”
    -<한서> 흉노전-

    위의 기록에는 왕소군을 영호연지, 즉 ‘흉노를 편안하게 하는 왕비’ 로 부르고 그 아들을 우일축왕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후에 좌현왕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좌현왕의 지위는 흉노의 副王으로 호연씨(胡燕氏) 같은 최고귀족 출신 왕비의 아들에게만 주어지는 지위인 것을 감안하면 한나라에 대한 흉노의 배려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왕소군의 딸에게 주어진 거차라는 칭호는 한의 공주에 해당하는 것이고 수복거차라는 호칭은 연제, 호연에 이에 세 번째 귀족가문인 수복씨 집안과 혼인했다는 의미인데, 이런 사실들은 왕소군이 흉노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누렸고 흉노와 한의 관계가 화평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주105]
    각주 105형제관계 맺고 화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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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흉노 화친의 주요 내용>

  •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 한은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흉노에게 바친다
  • 한과 흉노는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
  •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 <한·흉노 화친의 주요 내용>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흉노의 선우와 왕소군Ⓒ교학사, 66쪽
    •  
      흉노의 선우와 왕소군Ⓒ교학사, 66쪽


    왕소군과 한·흉노 화친

    왕소군과 한·흉노 화친
    [주106]
    각주 106왕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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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소군과 한·흉노 화친
    왕소군은 한의 궁녀로 양국간의 화친을 위해 흉노왕(선우)에게 보내졌다. 소군이 대를 이어 두 선우의 왕비(연지)로 살았던 60여년간 두 나라 사이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왕소군과 한·흉노 화친
    왕소군과 한·흉노 화친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3. 조공·책봉의 외교 형식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 주 대에 국내에서 적용되던 조공·책봉 관계가 한 대부터 외교 관계에 적용: 유교적 통치이념과 화이관의 영향을 받음
    • 조공의 절차: 사신 일행 도착→조공품 바침→황제 알현→답례품 전달→귀국

     
    참고 : 예빈도에 관하여
    그림 왼쪽에 조복을 입고 홀을 든 세 사람은 안내를 맡은 당 홍려시(鴻臚寺)의 관원들이다. 뒤에 선 세 사람이 외국에서 온 사신인데 머리가 벗겨진 네 번째 사람은 동로마인,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있는 사람은 동아시아 어느 나라의 사신, 제일 우측은 동북아시아 소수민족으로 보고 있다.
     
    [주107]
    각주 107화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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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사상(화이관,華夷觀)>
    한 대에는 중국을 문명의 중심지, 즉 중화(中華)로 보고, 주변의 국가와 민족을 열등한 ‘오랑캐(夷)’로 보아 차별하였다. 유교 이념에서 보면 하늘이 세워준 황제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므로 중원의 황제는 주변 지역에 대한 통치권도 가지고 있다는 논리가 생겨난다. 이에 따라 한 대에 주변국 왕들이 예를 갖추어 황제를 뵙게 하는 형식의 외교 관계[조공·책봉 관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중화사상(화이관,華夷觀)>
    <중화사상(화이관,華夷觀)>

    [주108]
    각주 108조공의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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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109]
    각주 109사신 일행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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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세계지도Ⓒ천재교육, 79쪽
    •  
      세계지도Ⓒ천재교육, 79쪽


    중화사상을 보여주는 세계지도

    중화사상을 보여주는 세계지도세계지도세계지도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3. 조공·책봉의 외교 형식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 조공·책봉 관계의 실상은 매우 다양
        한반도, 일본 등 정치적으로 긴밀한 나라: 조공과 책봉이 동시에 이루어짐유목국가, 서역 등: 책봉을 받지 않고 교역을 위해 사신을 파견 → 한은 이를 조공사절로 간주
    • 강대국의 직접 지배나 실제적인 간섭은 없음

     
    조공․ 책봉의 외교 형식이 만들어진 배경은?
    중원은 비옥한 평야 지역으로 물산이 풍부하여 주변 지역의 유목민족들이 이를 노리고 침략해 오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중원의 역대 왕조들 가운데는 유목 민족들의 위협에 대하여 우세한 인력과 물자로 굴복시킨 경우도 있었지만, 먼저 유목 민족을 공격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한 무제 때의 흉노에 대한 공격, 수 문제와 양제 때의 돌궐과 고구려에 대한 공격, 당 태종과 고종 때의 돌궐, 백제, 고구려에 대한 공격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한 무제 때 흉노 공격이 장기간 계속되면서 전사자가 늘어나고 과중한 전비 부담 때문에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왕조의 위기를 맞았다. 수 대의 고구려 공격도 결국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공격이 효과를 보였던 때는 당 전기 뿐인 셈이다. 유목 민족에 대한 공격이 어려웠던 이유는 과다한 전비의 부담 때문이었다. 많은 군사를 동원하고 그보다 몇배의 농민이 군수물자 운반을 위해 동원되면 농사를 짓기가 어려워져 결국 농민들의 저항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중원의 역대 왕조들은 이런 위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목 정권의 위협에 대하여 군사적 대응 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물자를 제공하고, 혼인 관계를 맺거나 관작을 주면서 화평 관계를 유지하는 쪽을 선호하였다. 유목 정권도 10세기 전에는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였고, 중원을 위협하는 목적이 물자를 얻는 데 있었으므로 중원 왕조의 화평 정책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즉, 조공․ 책봉 관계는 유목 정권의 경제적 욕구와 중원 왕조의 현실적인 대외 정책이라는 양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만들어진 외교 형식인 것이다.
     
    [주110]
    각주 110직접 지배나 실제적인 간섭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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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가 남제로부터 받은 관직>
    고구려는 남제로부터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제군사정동대장군고려왕낙랑공(使指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麗王樂浪公)이라는 긴 칭호를 받았다. 여기에는 최고 사법권(사지절)과 고위 문관직(산기상시), 영주(요서), 평주(요동)에 대한 최고 군사권(도독 – 제군사), 고위 무관직(정동대장군), 최고 작위(공)을 고구려 왕에게 내리고 그의 고구려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남제가 자신의 지배 영역도 아닌 요서와 요동 땅을 고구려에 책봉해 주는 것을 보면 책봉이 상징적인 행위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남제로부터 받은 관직>
    <고구려가 남제로부터 받은 관직>고구려가 남제로부터 받은 관직고구려가 남제로부터 받은 관직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조공·책봉 관계의 실상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

    • 주 대에 국내에서 적용되던 조공·책봉 관계가, 한 대에 외교 관계로 바뀜

    • 다양한 실상
        한반도, 일본 등: 조공과 책봉이 동시에 이루어짐유목국가, 서역 등: 책봉을 받지 않고 교역을 위해 사신 파견
    • 강대국의 직접 지배나 실제적인 간섭은 없음

     

    주 105
    <한·흉노 화친의 주요 내용>
  •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 한은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흉노에게 바친다
  • 한과 흉노는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
  •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 <한·흉노 화친의 주요 내용>
    주 106
    왕소군과 한·흉노 화친
    왕소군은 한의 궁녀로 양국간의 화친을 위해 흉노왕(선우)에게 보내졌다. 소군이 대를 이어 두 선우의 왕비(연지)로 살았던 60여년간 두 나라 사이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왕소군과 한·흉노 화친
    왕소군과 한·흉노 화친
    주 107
    <중화사상(화이관,華夷觀)>
    한 대에는 중국을 문명의 중심지, 즉 중화(中華)로 보고, 주변의 국가와 민족을 열등한 ‘오랑캐(夷)’로 보아 차별하였다. 유교 이념에서 보면 하늘이 세워준 황제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므로 중원의 황제는 주변 지역에 대한 통치권도 가지고 있다는 논리가 생겨난다. 이에 따라 한 대에 주변국 왕들이 예를 갖추어 황제를 뵙게 하는 형식의 외교 관계[조공·책봉 관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중화사상(화이관,華夷觀)>
    <중화사상(화이관,華夷觀)>
    주 108
    주 109
    주 110
    <고구려가 남제로부터 받은 관직>
    고구려는 남제로부터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제군사정동대장군고려왕낙랑공(使指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麗王樂浪公)이라는 긴 칭호를 받았다. 여기에는 최고 사법권(사지절)과 고위 문관직(산기상시), 영주(요서), 평주(요동)에 대한 최고 군사권(도독 – 제군사), 고위 무관직(정동대장군), 최고 작위(공)을 고구려 왕에게 내리고 그의 고구려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남제가 자신의 지배 영역도 아닌 요서와 요동 땅을 고구려에 책봉해 주는 것을 보면 책봉이 상징적인 행위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남제로부터 받은 관직>
    <고구려가 남제로부터 받은 관직>고구려가 남제로부터 받은 관직고구려가 남제로부터 받은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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