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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동아시아 세계의 소통

2-2단원 3차시

 
  • 저필자박성기(하남고 역사 교사)
     
     

    불교와 동아시아 세계의 소통

     
     

     교류의 증대

     
     

     불교를 통한 교류

     
     

     동아시아 사회의 변화

     
     

     보편성 속의 특수성

     

     

    불교와 동아시아 세계의 소통

     
     

     1. 교류의 증대

     

    불교와 동아시아 세계의 소통

    • 불법을 통해 국경을 초월한 교류가 가능
        천축국으로 가 불법을 구한 승려:법현.현장.혜초한반도로 불법을 전해준 승려:순도.마라난타.아도일본으로 불법을 전해준 승려:감진.남중국에 불법을 전해준 승려:캉썽후이
    • 불경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한문에 대한 이해 증대
      → 한자를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해 짐.

    현재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구법승의 모습
    고대의 승려들은 참된 깨달음을 추구하는 구도자이자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깨달음과 불교의 전파를 위하여 험준한 길과 거친 바다를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구법승이었던 玄奘三藏像이다. 등에 불경등을 넣은 상자를 지고, 각반, 조리를 하고 여행하고 있는 승려의 모습. 목에는 해골 목걸이를 걸고, 옆에는 칼을 차고 있다. 등에 맨 상자 위에서 향로가 걸려있고, 오른손에는 佛子(불교에서 번뇌를 떨쳐 버리기 위해 쓰는 먼지떨이 비슷한 도구)와 왼손에는 불교 경문을 들고 있다. 서역, 천축국으로 경전을 구하기 위해 가고 있는 현장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현재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혜초(704~787)
    신라 사람 혜초는 당으로 건너가 719년 광주에서 남인도 출신 승려 금강지로부터 밀교를 배웠다. 722년경 다시 바닷길로 인도로 건너갔다. 인도를 여행하고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당으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이라는 기행문을 저술하고, 787년경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저술한 ‘왕오천축국전’에는 당시 인도의 사회풍습이나 불교와 관련한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8세기 이슬람세력이 중앙아시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과 교통이 단절된 인도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필사본. 1권 1책. 신라시대의 승려 혜초가 고대 인도인 천축국을 답사한 뒤 727년(성덕왕 26)에 쓴 책이다. 이 책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P.펠리오가 중국 북서 지방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 천불동 석불에서 발견하였으며 중국의 나옥진(羅玉振)이 출판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에는 당시 인도 및 서역 각국의 종교와 풍속·문화 등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때는 벌써 불타(佛陀)의 유적은 황폐하여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있어서 공양미가 매일 15석이나 소요되어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곳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대·소승(大小乘)이 구행(俱行)하고 있으나 곳에 따라 대승만 행하는 곳도 있고, 소승만 행하는 곳도 있으며, 북방에는 사원과 승려 및 신자가 많아서 조사설재(造寺設齋)할 때에는 아내와 코끼리까지 사시(捨施)하는 독신자(篤信者)도 있다고 하였다. 나체 생활의 풍속, 가봉뇌옥(枷棒牢獄)은 없고 벌전(罰餞)만 있는 법률, 장(醬)은 없고 소금만 있으며, 여러 형제가 아내 한 사람으로 같이 사는 것, 살생하지 않는 것, 흙솥에 밥을 짓는 것 등 여러 색다른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079]
    각주 079법현.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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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둘러보아도 막막하고, 가야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다.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오직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된다…
    “불국기”

    “불국기”

    [주080]
    각주 080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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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081]
    각주 081한반도로 불법을 전해준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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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해동 에서는, 즉 고구려 소수림왕 때에 순도가 평양성에 왔고, 이어서 마라난타가 진 나라에서 백제국으로 들어왔으니 곧 침류왕 (재위 384) 때이다. 그 후 신라 제23대 법홍왕이 즉위한 뒤, 양 나라의 대통 원년(527) 3월 11일에 아도가 와서 일선현에 머물렀는데 신자인 모례가 숨겨 주었다… 이로부터 원광과 자장의 무리들이 서쪽으로 들어가 법을 전해 받아 돌아오니 상하가 믿고 공경하며, 내외가 받들어 행하여 앞에서 부르면 뒤에서 응하니, 불법은 날로 번성하였다.
    “해동고승전”
    “해동고승전”“해동고승전”“해동고승전”

     

    불교와 동아시아 소통

     
     

     2. 불교를 통한 교류

     

    불교와 동아시아 소통

    • 불교를 매개로 한 문화.문물 교류.
        승려를 매개로 한 문화 전파: 거칠부,혜자,관륵담징,보제천나,불철 등
    • 사찰을 매개로 한 건축양식.인적교류
    • 불교의 화장문화를 통한 장례의식 공유.

    김 현구 외.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II)"
    호류사 홈페이지 http://www.horyuji.or.jp/
     
    승려를 통한 문화 교류
    602년 관륵이 백제에서 일본 열도에 오고,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이 일본 열도에 도착한 기록이다. 당시의 승려들은 불법을 연구하는 승려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새로운 선진기술을 소유하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하였다. 삼국 중 왜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던 나라는 백제였다. 그런데, 중원왕조의 정세가 변화하면서 고구려와 일본 열도 세력과의 정치적 관계에도 변화가 온다. 6세기 후반. 고구려는 수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방에 있는 백제나 신라와의 관계에서 안정이 필요했다. 고구려가 왜에 대해 접근하였던 사정은 이러한 정세와 연관이 깊다. 한편 왜가 기대했던 반대급부는 불교 관계 문물을 비롯하여 선진문물의 제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서기 推古朝(588~628)에는 야마토 정권이 직접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한 적이 없지만 고구려에서 간 사절 일행에 관한 기사를 보면 주로 승려 및 불교 관계 문물인 점에서 그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김 현구 외.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II)"

    * 거칠부
    거칠부는 젊었을 때에 사소한 일에 거리끼지 않았고 원대한 뜻을 품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구경하였다. 문득 고구려를 정찰하려고 그 땅에 들어갔다가 법사(法師) 혜량(惠亮)[주석271]이 절을 개창하여 불경을 설법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그 곳에 나아가 강경(講經)을 들었다. 어느 날 혜량이 묻기를 “사미(沙彌)[주석272]는 어디서 왔는가?” 하므로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6세기 말, 신라 진흥왕 대의 장군이다. 진흥왕 8년(547)에 대아찬으로 왕명을 받아 국사를 편찬하였고, 이어 551년에는 소백산맥을 넘어 고구려 영토 10개 군현을 빼앗았다. 이외에 한강 유역과 대가야 복속 등 정복전쟁에서 활약하였던 인물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승려가 되어 고구려 강역에 들어가 혜량에게서 배운 적이 있다. 혜량은 551년 신라에 귀화하여 국통이 되었고, 백고좌강회와 팔관회를 처음으로 주관하였다.

    사찰을 매개로 한 교류
    당시 불교는 동아시아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사상이고 문화였다. 특히, 종교 의식이 행해지는 사찰은 그 자체가 국적을 초월한 공간이었다.

    아스카 절의 가람 배치를 보면 불사리를 안치한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에 금당이 배치된 1탑 3금당이었다. 이것은 고구려 평양에 있는 청암리 폐사지나 정릉사의 가람배치와 같다. 또 건축에 사용된 자가 고구려 자의 기준인 고려척이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또 불사리를 매장한 탑 초석의 주위에는 철제 갑옷, 금동제 귀걸이, 청동제 말방울 이외에 곡옥, 관옥, 작은 유리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작은 유리구슬은 감색, 청색, 녹색, 엷은 보라색, 황색,적색 등 여러 가지 색깔로 2366개나 되었다. ..
    한국 전국역사교사 모임. 일본 역사교육자 협의회 “마주보는 한일사 I"

    또한, 승려는 신분을 따지지 않는 국제인으로 국경을 초월하여 지식과 기술을 전수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신라 거칠부는 고구려의 승려 혜량에게서 배웠고, 일본의 쇼토쿠 태자는 고구려의 승려 혜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당의 감진은 불상.불경.불구.약품등을 가지고 가서 일본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담징은 일본 호류사에 기거하면서 오경과 불법을 강론하고, 종이와 먹의 제조기술을 일본에 전해주었다.
    * 노반박사, 와박사, 화공
    노반은 불탑 상단부의 상륜 부분을 이루는 부분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반은 상륜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노반박사는 그것을 주조하는 전문가를 이르고 있다. 장덕은 백제 16계 관등 가운데 일곱 번째이다. 와박사는 기와를 만드는 전문가이다. 당시 일본 지붕은 궁전의 경우에도 기와 지붕은 드물었다. 일본에 기와 지붕이 보급되는 것은 불교 전래를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화공은 불화를 제작하는 전문가를 말한다. 법흥사는 588년에 완성된 일본 최초의 가람으로서 백제의 기술로 조영되었으며 飛鳥寺라고도 한다. 蘇我씨의 씨사(아스카 시대 고분을 대신하여 유력한 가문에서 만들었던 가문의 사찰)였다.

    호류사
    불교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 이미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원왕조에 전해졌다. 처음에는 일부 귀족이나 지식 계층 사이에 보급되었으나, 후한 말부터 위.서진 시대에 이르러 인도 및 서역에서 건너 온 승려들이 불경을 번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후한이 멸망한 후에 5호 16국 시대에 들면서 불교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다.
    호류사는 아스카 시대 모습을 현재까지 전해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창건 유래는 ‘금당(金堂)’ 동쪽 공간에 안치되어 있는 ‘약사여래상’의 광배나『法隆寺伽藍縁起并流記資財帳』(747)의 기원문에 의해 알 수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用明天皇이 자신의 병의 쾌유를 빌고 절과 불상을 만들 것을 기원하였는데, 그 실현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推古天皇과 聖徳太子가 用明天皇의 유훈을 받아 推古15年(607)에 절과 본존인 「薬師如来」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법륭사(斑鳩寺라고도 합니다. )라고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호류사 홈페이지 http://www.horyuji.or.jp/
    호류사는 그러나, 7세기 말 화재로 불탔고, 현재 건물은 이후 지어진 건물이다. 1993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현재 금당(金堂)과 목조 5층탑을 중심으로 하는 서원(西院)과, 몽전(夢殿)을 중심으로 하는 동원(東院)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여기에는 금당에 약사여래상·석가삼존불상·아미타삼존불상 등이 있고, 벽화에는 금당 4벽의 4불정토도(四佛淨土圖) 등 많은 고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다. 1939년의 발굴 조사에 의하면 670년에 불탔던 원래의 절터에서 백제식 가람배치가 확인되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백제 목조 백제관음상과 고구려 승려인 담징이 그렸다고 하는 금당벽화가 유명하다. 금당벽화는 1949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호류 사 백제관음
    일본에서 대표적인 불상으로 호류사의 백제관음과 쿄토 고류사의 목조반가사유상을 들기도 한다. 이 중 담징의 금당벽화로 유명한 호류사에는 백제관음이라고 하는 늘씬한 목조 관음상이 있다. ‘백제관음상’이라는 명칭에서 흔히들 백제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 이와 다르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오히려 중국의 수와 관례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강우방 전국립경주박물관장은 “이 불상의 이름은 17세기 이후인 에도시대에 붙여진 것으로 ‘백제’라는 이름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설명한다.

    베트남의 불교
    베트남은 인도 차이나 반도의 동부에 위치해 있다.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은 상좌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1세기 베트남의 남진정책이 실시되기 전 베트남의 정치의 중심지는 베트남 북부 홍강의 델타지역이었다. 한에 의해 정복당한 후 베트남 지역은 중원왕조의 직간접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중국에서 파견된 관료 혹은 현지에서 중국왕조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이 베트남 북부지역을 통치하였다. 따라서, 지리적으로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속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베트남에서는 대승불교가 유행하였다.
     
    [주082]
    각주 082불교를 통한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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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083]
    각주 083승려를 매개로 한 문화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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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2년 겨울 10월. 백제에서 승려 관륵이 왔다. 曆本과 천문.지리서 및 遁甲.방술서를 바쳤다. 이 때 서생 3~4명 선발하여 관륵에게 배우게 하였다.

    610년 봄 3월. 고구려왕이 승려 담징과 법정을 바쳤다. 담징은 오경을 알고 또한 채색 및 종이와 먹을 만들 수 있었으며, 아울러 연자방아도 만들었다. 대개 연자방아 만드는 일은 이때 시작된 듯 하다.
    “일본서기”
    “일본서기”602년602년610년610년

    [주084]
    각주 084인적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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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8년. 백제국이 사신과 승려 혜총.영근.혜식 등을 보내어 불사리를 바쳤다….노반박사 장덕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화공 백가를 바쳤다…飛鳥衣縫造의 선조 樹葉의 집을 허물어 비로서 法興寺를 지었다. ..
    “일본서기”
    東大寺에 있는 大佛
    752년 완성된 높이 15m에 달하는 불상을 만들기 위해 목재.기와.금속 기술자 등 백제에서 온 도래인계 기술자들이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불상을 완성하는 기념식에는 천황과 고위관료 외에도 당에서 온 승려 도선. 인도에서 온 승려 보제천나 등 외국의 승려들도 참석하였다.
    “일본서기”588년588년東大寺 지도

    [주085]
    각주 085사찰을 매개로 한 건축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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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와 동아시아 소통

     
     

     3. 불교를 통한 동아시아 사회의 변화

     

    불교와 동아시아 소통

    •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지배체제가 안정되었다.
    • 신분간의 갈등이 완화되었다.
    • 건축.조각.회화 등 고대 문화가 발달되었다.
    • 국경을 넘어서 지식과 기술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불교와 동아시아 소통

     
     

     4. 보편성 속의 특수성

     

    불교와 동아시아 소통

    • 사찰
        불교 의식이 행해지는 곳으로 불경을 읽으며 수행하는 곳.삼국 사원 양식이 일본으로 전래되었음.사람이 교류하고 지식을 교환하는 장소로 역할.
      • 부처님의 사리인 불사리를 보관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스투파에서 유래.
    • 자연환경에 의해 달라지는 모습
      중원지역(전탑), 한반도(석탑), 일본(목탑)

     
    탑(스투파)
    불탑은 고대 인도에서 석가의 유골인 불사리를 보관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기원전 3세기 경부터 만들었던 스투파(stupa)에서 유래하였다. 초기 인도에서 세운 탑들은 반구형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형태였다. 그런데, 불교의 전래와 함께 예불 의식도 함께 전해지면서 탑도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지역마다 고유한 탑의 양식이 나타났다.
    중원 지역에 전해진 탑은 누각건축 양식을 띠었으며 다층으로 고층탑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탑은 공이 많이 들고 작업이 어려웠다. 그런데, 중원 지역은 황토가 풍부하고 인력을 쉽게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어 쌓은 전탑이 많이 나타났다. 한반도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탑의 초기 양식은 목탑이었다. 그러나, 잦은 전란 등으로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목탑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지만 불타 버리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한반도 지역은 예로부터 질 좋은 화강암이 많이 생산되었다. 따라서 초기에는 목탑이 유행했지만 7세기 이후 백제 때부터 화강암을 비롯한 각종 돌을 깎아 만든 석탑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륵사지에 남아있던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가는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은 습기가 많고 땅이 기름져 나무가 잘 자라는 곳이다. 일본에서는 나무로 탑을 만들었다. 특히, 5층탑이 많이 만들어졌다. 중국의 탑과는 달리 내부에는 전체 건축물을 지탱하기 위한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어, 상층부까지 오를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은 지진이 많은 일본의 자연환경에 대비한 장치이기도 하다. 탑을 높이 쌓은 것은 절 내부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인들이 멀리서도 바라보며 예불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益山 彌勒寺址 石塔)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터에 있는 탑으로,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다.
    기단은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반쯤 무너진 곳을 시멘트로 발라놓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 일제 강점기 시대 콘크리트로 메워진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작업이 현재 진행 중이다.
     
    [주086]
    각주 086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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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와 동아시아 소통

     
     

     불교와 교류 증대

     
     

     불교의 역할

     
     

     보편성.특수성

     

    불교와 동아시아 소통

    • 불법,승려를 통한 교류:법현.엔닌.현장.순도.마라난타.아도.감진.혜초.거칠부.담징.혜자.관륵 등
    • 경전을 통한 한문이해 능력 성장.공유:의사소통 가능

    • 왕권강화에 기여
    • 사회갈등완화
    • 문화발달에 기여
    • 사찰은 소통의 장

    • 사원.불경
    • 환경에 따른 특수성
        전탑.석탑.목탑

     

    주 079
    …아무리 둘러보아도 막막하고, 가야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다.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오직 죽은 사람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된다…
    “불국기”
    “불국기”
    주 080
    주 081
    우리 해동 에서는, 즉 고구려 소수림왕 때에 순도가 평양성에 왔고, 이어서 마라난타가 진 나라에서 백제국으로 들어왔으니 곧 침류왕 (재위 384) 때이다. 그 후 신라 제23대 법홍왕이 즉위한 뒤, 양 나라의 대통 원년(527) 3월 11일에 아도가 와서 일선현에 머물렀는데 신자인 모례가 숨겨 주었다… 이로부터 원광과 자장의 무리들이 서쪽으로 들어가 법을 전해 받아 돌아오니 상하가 믿고 공경하며, 내외가 받들어 행하여 앞에서 부르면 뒤에서 응하니, 불법은 날로 번성하였다.
    “해동고승전”
    “해동고승전”“해동고승전”“해동고승전”
    주 082
    주 083
    602년 겨울 10월. 백제에서 승려 관륵이 왔다. 曆本과 천문.지리서 및 遁甲.방술서를 바쳤다. 이 때 서생 3~4명 선발하여 관륵에게 배우게 하였다.

    610년 봄 3월. 고구려왕이 승려 담징과 법정을 바쳤다. 담징은 오경을 알고 또한 채색 및 종이와 먹을 만들 수 있었으며, 아울러 연자방아도 만들었다. 대개 연자방아 만드는 일은 이때 시작된 듯 하다.
    “일본서기”
    “일본서기”602년602년610년610년
    주 084
    588년. 백제국이 사신과 승려 혜총.영근.혜식 등을 보내어 불사리를 바쳤다….노반박사 장덕 백미순, 와박사 마나문노, 화공 백가를 바쳤다…飛鳥衣縫造의 선조 樹葉의 집을 허물어 비로서 法興寺를 지었다. ..
    “일본서기”
    東大寺에 있는 大佛
    752년 완성된 높이 15m에 달하는 불상을 만들기 위해 목재.기와.금속 기술자 등 백제에서 온 도래인계 기술자들이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불상을 완성하는 기념식에는 천황과 고위관료 외에도 당에서 온 승려 도선. 인도에서 온 승려 보제천나 등 외국의 승려들도 참석하였다.
    “일본서기”588년588년東大寺 지도
    주 085
    주 086
     
    지명
    東大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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