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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불교의 지역적 발전

2-2단원 2차시
  • 저필자
    박성기(하남고 역사 교사)

불교의 지역별 발전

중원 지역
한반도
일본과 베트남
동아시아 불교의 특징

불교의 지역별 발전

1. 중원 지역
  1. 전래 초기
    • 도교와 연관하여 주술적 의미로 수용.
  2. 남북조 시대
    • 북조 왕실의 적극적 후원 아래 발전
    • 불교의 장점:
      유교와 달리 민족 차별 의식 없음.
      황제를 부처와 동일시 → 왕권 강화에 유리
    • 석굴 사원 조성 활발:둔황,윈강,룽먼 등
둔황위치 윈강위치 룽먼위치
민족 차별 의식이 없이 때문에 왕의 적극적 후원 아래 통치에 이용
불교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 이미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원왕조에 전해졌다. 처음에는 일부 귀족이나 지식 계층 사이에 보급되었으나, 후한 말부터 위.서진 시대에 이르러 인도 및 서역에서 건너 온 승려들이 불경을 번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후한이 멸망한 후에 5호 16국 시대에 들면서 불교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다. 후조의 석호(334~349)는 불도징의 감화를 받아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며 335년에는 한족의 출가를 용인하였다. 이를 계기로 비로서 한족에 의한 불교 교단이 성립되었다.
중원 지역의 불교는 중원의 문화와 타협한 결과 인도 불교와는 다른 특징을 보였다. 중원 지역을 지배하였던 유목민족들은 한족의 유교를 대신하는 지배 사상으로 채택한 것이 불교였기 때문에 일반 대중의 구제보다는 鎭護를 목적으로 한 호국불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조형된 대형불상들이 당시 지배자의 얼굴을 본 떠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주 073
각주 073) 민족 차별 의식 없음
5호 16국 시대 후조의 왕은 승려를 초빙하여 많은 사원을 세웠다. 한족 출신의 여러 신하가 “불교는 외국신을 섬기므로 중화의 천자가 받들어서는 안된다.”라고 하자, 왕은 “짐은 이민족 출신으로 중화에 군림하였으므로 외국신을 모시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반론하였다.
“양고승전”
“양고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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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74
각주 074) 석굴 사원
사서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 장건이 중앙아시아 大夏에 갔을 때 천축국의 浮屠之敎(불교)에 대해 처음으로 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의 존재가 이미 기원전부터 중앙아시아와의 접촉을 통해 중국에 알려지고 있었으나 석굴사원이 조성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의 흐름이 요구되었다. 원래 석굴사원은 인도의 아잔타석굴의 영향으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한편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와 같이 나무가 부족한 데에서는 석굴이 사원의 형태로 안성맞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권영필 “실크로드 대탐사 4” 동아일보 1990.10.08.
권영필 “실크로드 대탐사 4” 동아일보 1990.10.08.동아일보 1990.10.08.동아일보 199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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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지역별 발전

2. 한반도
  1. 삼국시대
    • 왕실의 후원 → 중앙집권강황에 이용
    • 토착 신앙과의 갈등하였으나, 결합함.
  2. 통일 신라 시대
    • 불교의 대중화(원효)
    • 말기:지방 세력(호족)과 결합
三國遺事 권 3,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신라의 불교 공인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본기에 이르기를, " 법흥대왕 즉위 14년 에 소신 이차돈이 불법을 위하여 제몸을 없앴다"고 하였으니, 바로 소량 보통 8년 정미(527년)로 서천축의 달마가 금릉에 왔던 해이다. 이 해에 낭지 법사가 역시 처음으로 영취산에서 불법을 열었으니, 大敎의 흥하고 쇠하는 것은 반드시 원근이 동시에 서로 감응한다는 것을 여기서 믿을 수 있다.
三國遺事 권 3,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厭髑滅身)
한편,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해는 법흥왕 14년(527)이다. 이 해에 서인도의 달마가 금릉(남경)에 와서 양무제를 만난 해라고도 한다. 양 무제는 황제의 신분으로 출가하였을 정도로 불교를 장려하였던 인물이었다. 또한 주변 나라에 대해서도 불교를 전파하려고 노력하였던 인물이었다. 고구려에서 온 승려 묵호자가 선산 지역에 머물렀을 때 당시 조정에서는 양나라에서 향을 보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중원 지역에서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 고구려를 통한 북방의 루트 뿐만 아니라 양나라를 통해 바다를 건너오는 남방의 루트 역시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진흥왕 63년(563) 황룡사를 지을 때 17년에 걸친 공사 끝에 담장을 두르는 완성 단계에 있을 때 울산 앞바다에 큰 배가 나타났는데 이 배에는 서인도 아육왕이 보내는 구리와 황금이 실려있었고, 이를 가지고 황룡사의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중국으로부터 바다를 통해 많은 양의 구리와 금을 가지고 들어온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 075
각주 075) 토착 신앙과의 갈등
왕도 또한 불교를 일으키려 하나, 여러 신하들은 믿지 아니하고 입으로 떠들기만 하므로 왕은 주저하였다. 가까운 신하인 이차돈이 말하기를, "청컨대 신의 목을 베어 신하들의 뜻을 정하소서" 하니, 왕은 말하기를 "본시 도(道)를 일으키자는 것이 근본인데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하였다. 이차돈이 대답하기를, "만일 도를 행할 수 있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하였다....이차돈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차돈이 말하기를,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으니 부처가 만일 신령스럽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으리라" 하였다. 그를 베자, 잘라진 데서 피가 용솟음치는데 핏빛이 젖과 같이 희었다. 여러 사람이 보고 괴이히 여겨 다시는 불교를 반대하지 아니하였다.
“삼국사기”
“삼국사기”“삼국사기”“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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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76
각주 076) 원효
원효가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갖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이름을 무애라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트렸다. 일찍이 이것으로 여러 촌을 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까지도 모두 부처라는 이름을 알게되었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외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삼국유사”
“삼국유사”“삼국유사”“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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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지역별 발전

3. 일본과 베트남
  1. 일본
    • 귀족 세력의 권위를 나타내는 사찰 건립
    • 왕권강화에 이용:국분사 건립
    • 토착신앙(신도)와 결합:신불습합
  2. 베트남
    • 각 왕실의 보호
    • 승려는 ‘국사’로서 정치적 영향력
일본 지역의 불교 보급
일본 지역 역시 조정의 보호를 받아 불교는 발전하였다. 당시 궁궐이 위치한 飛鳥(아스카)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대륙 및 한반도 형식의 사찰이 황족이나 호족의 발원에 의해 건립되었다. 소아씨의 발원에 의해 飛鳥寺, 성덕태자의 발원에 의해 法隆寺가 건립되었다. 각 씨족들은 자기 씨족의 사찰인 氏寺를 건립하였다. 지금까지 권위의 상징이었던 고분을 대신하여 사찰은 호족의 권위를 나타내게 되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불교를 주술의 일종으로 받아들였으며 조상의 명복을 빌고 질병이 낫기를 기원하기 위하여 불상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를 중심으로 한 이 시대의 문화를 아스카 문화라고 한다.
한편, 불교를 국가에서 장악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645년 다이카 개신 이후 전국 사원과 승려에 대한 통제를 천황이 관장하게 되었다. 율령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불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 발전하였으나, 동시에 사원 및 승려는 국가의 감독 하에 놓이게도 되었다. 이후 각 國을 통치하는 國司가 거주하는 관아마다 불경과 불상을 안치할 수 있는 시설인 國分寺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정책은 현재 일본 관동지역에서부터 규슈 중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사원의 증가는 일본 고대 국가의 체제 확립. 율령의 보급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다.

* 베트남의 불교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부에 위치해 있다.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은 상좌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1세기 베트남의 남진정책이 실시되기 전 베트남의 정치의 중심지는 베트남 북부 홍강의 델타지역이었다. 한에 의해 정복당한 후 베트남 지역은 중원왕조의 직간접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중국에서 파견된 관료 혹은 현지에서 중국왕조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이 베트남 북부지역을 통치하였다. 따라서, 지리적으로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속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베트남에서는 대승불교가 유행하였다.

일본의 神佛習合
불교와 일본 재래의 신사신앙이 융합,조화한 상황. 불교는 6세기 공식적으로 전래되기 이전 이미 대륙으로부터 온 이주자들에 의해 각지에서 전래되었었다. 초기의 불교는 客神.佛神.他國神.大唐神 등 외국의 신으로 생각되었었다. 나 자신과 남의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가 일본 열도에서는 토착적인 원시신앙와 마찬가지로 보다 효험있는 새로운 주술로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부처나 보살이 중생 구제를 위하여 잠시 신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보는 인식에서 일본의 전통 신과 부처를 하나의 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신격화 작업의 일환으로 전통신과 부처는 분리되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제국의 성립을 목표로 하였던 메이지 정부는 따라서 神道에 의해 국민을 교화하고 국가의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신도와 불교를 구분하는 정책을 취했던 것이다. 사진은 일본 도치기현 日光(닛코)市에 있는 후타라산(二荒山) 신사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이 있는 東照宮 옆에 있는 이 신사에서는 후타라산의 신을 모시고 있다. 신사 입구에는 鳥井(도리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신사의 정문에 해당하는 건물로 신이 거주하는 신사의 구역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주 077
각주 077) 신불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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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지역별 발전

4. 동아시아 불교의 특징
  1. 지배층(왕실 혹은 귀족)이 먼저 수용
  2. 호국불교적 성격,군주와 부처를 동일시하여 현생의 신분차별 인정 → 왕권 강화,사회 안정에 기여
  3. 유교 및 토착신앙과 결합.
  4. 현세구복적인 성격.
  5. 각국의 문화 발전에 기여.
주 078
각주 078) 호국불교
<진호국가>
‘호국불교’의 ‘호국’은 ‘진호국가’라는 말에서 나왔다. 진호국가란 천재지변이나 내란, 외적 침입 시에 불교경전을 강독하고 기원하는 행위에 의해 국가를 수호한다는 의미이다. 널리 불법으로 국가를 지킨다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진국(鎭國)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국사. 사직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킨다는 의미에서, 그 외부의 위협은 다른 국가인 경우도 있지만, 자신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백성들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배자가 인식하고 있는 불교는 백성들을 위압하고 복종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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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지역별 발전

중원지역
한반도,일본
동아시아 불교의 특징
  1. 남북조 시대에 북조 왕실의 후원 아래 발전, 둔황.윈강.룽먼등 석굴사원 건립
  1. 한반도
    • 토착신앙과 결합
    • 통일신라 후 대중화
  2. 일본
    • 신불습합
  1. 지배층이 먼저 수용
    • 호국불교적 성격,신분차별인정
  2. 유교 및 토착신앙과 결합
  3. 현세구복적 성격

  • 각주 073)
    민족 차별 의식 없음5호 16국 시대 후조의 왕은 승려를 초빙하여 많은 사원을 세웠다. 한족 출신의 여러 신하가 “불교는 외국신을 섬기므로 중화의 천자가 받들어서는 안된다.”라고 하자, 왕은 “짐은 이민족 출신으로 중화에 군림하였으므로 외국신을 모시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반론하였다.
    “양고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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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4)
    석굴 사원사서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 장건이 중앙아시아 大夏에 갔을 때 천축국의 浮屠之敎(불교)에 대해 처음으로 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의 존재가 이미 기원전부터 중앙아시아와의 접촉을 통해 중국에 알려지고 있었으나 석굴사원이 조성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의 흐름이 요구되었다. 원래 석굴사원은 인도의 아잔타석굴의 영향으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한편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와 같이 나무가 부족한 데에서는 석굴이 사원의 형태로 안성맞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권영필 “실크로드 대탐사 4” 동아일보 1990.10.08.
    권영필 “실크로드 대탐사 4” 동아일보 1990.10.08.동아일보 1990.10.08.동아일보 1990.10.08. 바로가기
  • 각주 075)
    토착 신앙과의 갈등왕도 또한 불교를 일으키려 하나, 여러 신하들은 믿지 아니하고 입으로 떠들기만 하므로 왕은 주저하였다. 가까운 신하인 이차돈이 말하기를, "청컨대 신의 목을 베어 신하들의 뜻을 정하소서" 하니, 왕은 말하기를 "본시 도(道)를 일으키자는 것이 근본인데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하였다. 이차돈이 대답하기를, "만일 도를 행할 수 있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하였다....이차돈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차돈이 말하기를,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으니 부처가 만일 신령스럽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으리라" 하였다. 그를 베자, 잘라진 데서 피가 용솟음치는데 핏빛이 젖과 같이 희었다. 여러 사람이 보고 괴이히 여겨 다시는 불교를 반대하지 아니하였다.
    “삼국사기”
    “삼국사기”“삼국사기”“삼국사기” 바로가기
  • 각주 076)
    원효원효가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갖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이름을 무애라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트렸다. 일찍이 이것으로 여러 촌을 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까지도 모두 부처라는 이름을 알게되었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외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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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불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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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78)
    호국불교<진호국가>
    ‘호국불교’의 ‘호국’은 ‘진호국가’라는 말에서 나왔다. 진호국가란 천재지변이나 내란, 외적 침입 시에 불교경전을 강독하고 기원하는 행위에 의해 국가를 수호한다는 의미이다. 널리 불법으로 국가를 지킨다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진국(鎭國)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국사. 사직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킨다는 의미에서, 그 외부의 위협은 다른 국가인 경우도 있지만, 자신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백성들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배자가 인식하고 있는 불교는 백성들을 위압하고 복종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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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둔황, 윈강, 룽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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