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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이동과 국가의 성립

2-1단원 1차시

 
  • 저필자박성기(하남고 역사 교사)
     
     

    인구이동의 전개

     
     

     인구 이동의 원인과 결과

     
     

     인구 이동의 전개

     
     

     한반도 방면으로의 이동

     
     

     일본 열도로의 이동

     
     

     화북.강남 방면으로의 이동

     

     

    인구이동의 전개

     
     

     1. 인구 이동의 원인과 결과

     

    인구이동의 전개

    • 원인
      기후변화,자연재해,인구증가,정치적 갈등,전쟁 등
    • 결과
        새로운 정치 집단이나 국가 형성.
        → 국제 관계의 변화.
        → 문물의 전파와 교류.

     
    인구 이동의 여러 원인들
    인구가 이동하는 데에는 다양한 원인들이 있다. 지금까지 교과서를 통한 인구 이동의 일반적 원인으로는 정치적 갈등과 전쟁을 꼽는 경우가 많았다.
    사료에 등장하는 내용도 주로 정치적인 원인에 대한 것이다.
    5호 16국 시기는 북방민족들이 중원지역을 차지하면서 시작되었다. 북방민족들은 사민 혹은 이민을 통하여 전통적으로 한족이 거주하던 지역에 많은 수가 정착해있었다. 이미 3세기 후반 무렵에는 한족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많은 수의 북방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중원 지역 100만의 인구 중에 절반을 차지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방 민족들이 화북 지역을 차지하게 되자, 이 지역의 한족들은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남제서’ 사료는 화북지역을 유목민족에게 빼앗긴 한족이 양쯔강 남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전체로 북위의 역사를 서술한 위서의 기록은 전투에서 승리한 후 사람들을 이동시켰던 使民에 대한 기록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백제가 멸망하고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에 패배한 후 일본 열도로 이동하였던 백제 유민에 대한 기록이다.
     
    [주041]
    각주 041인구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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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진의 원제가 양쯔강을 건너오고 나서…(동)진을 세운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이 때 백성이 난리를 만나 이 지역으로 흘러들어왔고, 유민 대부분이 권세있는 집에 의지하여 식객이 되었다.
    “남제서”

    413년. 7월 해근 등이 월근배니 부락을 발라산의 서쪽에서 격파하고 말 5만필, 소 20만마리를 획득하고, 2만여호를 대녕으로 옮기게 하였다…농기구를 지급하고, 사람 수에 따라 농토를 나누어 주었다..
    “위서” 태종본기

    665년. 봄 2월, 백제국의 관위와 계급을 비교하였다. 이에 좌평 복신의 공으로 귀실집사에게 ‘소금하’라는 관위를 내렸다. 또한 백제 백성 남녀 400여 인을 근강국 신전군에 살게 하였다.
    “일본서기” 천지기
    “남제서”
    “위서” 태종본기
    “일본서기” 천지기“일본서기” 천지기“일본서기” 천지기

     

    인구이동의 전개

     
     

     2. 인구 이동의 전개

     

    인구이동의 전개

    • 인구 이동의 방향
        만주에서 한반도.일본 방면만주.몽골에서 화북.강남 방면

    <後漢書> 東夷傳 三韓條.
    삼국사기 <신라본기>
    <新撰姓氏錄> 諸藩 未定雜姓
     
    기원전후 ~ 8세기 동아시아 인구 이동 삽화 설명과 사료 설명
    기원을 전후한 진.한 교체기에 동아시아적인 범위에서 인구이동이 있었다. 이 시기 조선땅으로 이동한 秦民들은 한반도 북부와 남부로 이동하였다.

    진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고된 사역을 피해서 韓國으로 갔는데, 馬韓에서는 동쪽 지역을 나누어 주었다. 國을 이름하기를 邦이라고 하고, 弓을 弧라고 하고, 賊을 寇라고 하며, 行酒를 行觴, 서로를 부르기를 徒라고 하는데, 진나라 말과 비슷하다. 그래서 혹은 (辰韓을) 秦韓이라고 한다.
    <後漢書> 東夷傳 三韓條.

    <삼국지>의 기사와 아울러 생각하면, 연 제 조 지역의 진나라사람들이 일단 조선으로 들어왔다가 그 일부는 다시 韓國 즉 三韓 지역으로 남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 지역의 언어 중에는 진나라 말과 같은 것이 있고, 진나라 유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하였다고 해서 秦과의 관련성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진의 난리에 고통을 받고 동쪽으로 오는 자가 많았는데 대부분 마한의 동쪽에 거처하면서 진한과 더불여 섞여 살았다. 이 때에 이르러 점차로 성해지므로, 마한이 이를 꺼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이들은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태진공숙녜(太秦公宿禰)는 진시황제 3세손 효무왕(孝武王)에서 나왔다. 아들 공만왕(功滿王)은 대중언천황(帯仲彦天皇 시호는 仲哀) 8년에 내조하였다. 아들 융통왕(融通王 혹은 弓月王이라고 한다)은 예전천황(譽田天皇, 시호는 應神) 14년에, 27현의 백성을 거느리고 귀화하여, 금은옥백 등의 물품을 바쳤다. 대초료천황(大鷦鷯天皇, 시호는 仁德)의 시대에, 127현의 진씨(秦氏)를 여러 군에 나누어 두었다. 곧 누에를 기르고 비단을 짜서 바치게 하였다. 천황이 명하기를, 진왕이 바친 명주와 각종 비단을 짐이 입어 보니 부드럽고 연하며, 따뜻하기가 마치 피부와 같다. 그래서 성을 내려 파다씨(波多氏)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등려지공(登呂志公)과 진공주가 대박뢰유무천황(大泊瀬幼武天皇, 시호는 雄略)의 시대에, 명주와 비단을 산처럼 쌓았다. 천황이 이를 가상히 여겨 우도만좌(禹都萬佐, 우즈마사)라는 이름을 주었다.
    <新撰姓氏錄> 諸藩 未定雜姓
    일본의 <신찬성씨록>이라는 문헌에 보이는 秦氏에 대한 사료이다. 이들은 진시황제의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좋은 비단을 짜는 기술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秦氏를 波多氏 즉 피부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비단을 짜는 사람으로 인식하였다. 다만 이들이 일본열도로 온 시기가 활동한 시기는 진나라 때와는 크게 동떨어져 있어서, 역사적인 사실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일본열도에서 진 혹은 한나라의 유민임을 자처하는 집단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중원지역에서 대규모로 있었던 인구이동은 오호십육국 시대를 전후로 한 인구이동이었다. 북방민족들은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여 정치세력화하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들의 이동은 연이어 화북 지역의 한족들의 이동을 유발하였다. 한족들은 강남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동으로 산둥반도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한편, 한반도에서 삼국이 건국되면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구이동이 일단락 된 것은 한반도에서의 삼국통일전쟁이 끝난 후였다.
     
    [주042]
    각주 042인구 이동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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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이동의 전개

     
     

     3. 한반도 방면으로의 이동

     

    인구이동의 전개

    • 부여족의 남하
        부여족 일부가 졸본지역으로 남하 → 고구려 건국고구려인 일부가 한강유역으로 남하 → 백제 건국
    • 고조선 유민 일부가 한반도 남부로 남하 → 신라 건국
    • 한사군 유민의 일부가 한반도 남부로 남하
      → 신라. 가야 발전

    [주043]
    각주 043고구려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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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오간, 마리 등 열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자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해 열명의 신하를 보좌로 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로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 백제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

    [주044]
    각주 044신라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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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촌을 이루었다…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 숲 사이에 말이 끓어앉아 울고 있었다. 곧 달려가 보니 홀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자 한 어린아이가 나왔다…6부의 사람들은 그의 출생이 신기하다 하여 받들어 높이더니, 이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사기” 신라본기

     

    인구이동의 전개

     
     

     4. 일본 열도로의 이동

     

    인구이동의 전개

    • 한반도인, 강남지역인의 일부가 정치적 격변기마다 일본 열도로 이동 → 야마토 정권의 성립과 발전에 기여
    • 야마토 정권의 확대에 따라 열도 동쪽으로 이동
    • 도래인
        한반도.강남 지역등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해 온 사람

    石井進 등 『詳說 日本史』 교수자료. 山川出版社 참고
    <<중국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야마토 정권야마토 정권
     
    도래인
    한반도나 중국대륙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도래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보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來歸, 歸化등의 단어가 등장하고, 이전 교과서에서는 ‘귀화인’이라는 명칭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에 대하여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어 귀화하였다는, 일본의 臣民이 되었다는 일본 중심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비판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결국,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도래인’이라는 의미가 적절하다고 생각되어 현재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쓰이고 있다.
    도래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한다. 제 1기는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관련하여 왜가 한반도에 동원되었던 시기인 4세기~5세기이다. 이 시기에 고온의 토기제작 기술, 기마술, 토목관계 기술등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2기는 5세기 후반으로 백제가 한강 유역을 상실하는 정치적 변동기이다. 이 시기 일본 지역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왜가 중국 남조에 보낸 외교관으로 활약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3기인 7세기 중엽에는 백제와 고구려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일본으로 건너 온 이들의 대부분은 귀족.관료들었으며, 일본에서는 그들의 학식. 기능이 높이 평가되어 율령국가 건설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전술한 일본 동부지역의 ‘高麗신사’는 이 지역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들이 농업생산력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던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石井進 등 『詳說 日本史』 교수자료. 山川出版社 참고
    자료에서 설명하고 있는 ‘상설 일본사’는 山川출판사에서 출판하고, 현재 일본에서 고등학교 학생용으로 쓰이고 있는 일본사 교과서이다.

    양쯔강 이남으로 인구이동한 예
    서진 말 동진 초의 시기에 북쪽에서 장강 유역으로 이동해 온 사람들을 위하여 최초로 교군현(僑郡縣)을 설치하였음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회덕현, 낭야군, 임기현이 바로 그러한 군현들이다.
    * 교군현:땅을 상실하여 다른 곳에 관청을 새로 설치하여 설치한 군현.

    참고)복색 중원왕조의 교류
    유목민족들의 생활터전이었던 북쪽 지역은 기온 차에 따라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는 조끼나 숄같은 옷이나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망토와 같은 옷이 발달하였다. 중국인들 사이에 조끼와 같은 형태의 옷이 유행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유목민족의 영향이다. 북조시대에 처음으로 ‘양당’이라고 하는 남녀공용의 조끼 모양 옷이 등장하였다. 수대에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반소매 옷인 ‘반비’를 처음으로 입었으며,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일종의 망토인 ‘피풍’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이런 옷들은 기온차에 적응하고 사막의 바람을 막기 위해 유목민족들이 입던 옷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입는 허리까지 올라오는 바지는 유목민들의 개발품이었다. 치마는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생활해야하는 유목민들에게는 거추장스러웠을테고, 그래서 말타기에 편리한 바지를 개발했을 것이다. 바지는 중국 농경민들과 유목민을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되었다. 이동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에게는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 물건도 많았다. 허리띠에 필요한 물건을 달고 다니기도 했지만, 더 확실한 보관을 위해 이들이 발명한 것이 호주머니였다. 호주머니의 “호”자가 오랑캐 ‘胡’자인 것은 이 때문이다.
    <<중국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주045]
    각주 045발전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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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세기에는 대륙이나 조선반도와의 교류가 진전하고, 조선반도에서부터 많은 도래인이 새로운 기술이나 문화를 전해주었다. 한자 수용도 본격화하였고, 도래인의 일부는 史部로 편성되어 문서 사무나 외교를 담당하였다. 6세기 초기에는 계속하여 불교.醫.曆등 발달한 지식이 전해지고….
    “상설 일본사”

    “상설 일본사”

     

    인구이동의 전개

     
     

     5. 화북. 강남 방면으로의 이동

     

    인구이동의 전개

    • 5호가 만주.몽골등에서 화북 지역으로 남하
      → 5호 16국 시대를 염 → 북위가 통일
    • 한족의 일부가 유목민족에게 화북지역을 빼앗기고 양쯔강 이남으로 이동 → 동진 건국
      → 남북조 시대가 시작됨.

    동진 지도

    [주046]
    각주 046양쯔강 이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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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이 어지러울 때, 낭야국 사람들이 원제를 따라서 장강을 건넌 것이 천여 호였다. 태흥 3년(320)에 회덕현을 세웠다. 단양에 낭야상이 있었지만 토지가 없었다. 성제 함강 원년(335)에 환온이 군을 다스렸는데, 강승의 포주 금성에 진을 두고, 단양의 강승현 경계를 나누어 군을 세울 것을 원하였다. 또한 강승의 땅을 나누어 임기현을 두었다.
    “송서”
    “송서”

     

    인구이동의 전개

     

    위진 남북조 시대의 전개Ⓒ교학사, 43쪽
    •  
      위진 남북조 시대의 전개Ⓒ교학사, 43쪽


    위진 남북조 시대의 전개

     

    인구이동의 전개

     
     

     인구 이동의 원인과 결과

     
     

     인구 이동의 전개

     

    인구이동의 전개

    • 원인
        기후변화,자연재해, 인구증가,정치적 갈등
    • 결과
        전쟁과 새로운 국가 형성국제 관계 변화문물 전파와 교류

    • 만주에서 한반도.일본으로의 이동과 만주.몽골에서 화북.강남으로의 이동
    • 삼국과 가야, 야마토 정권의 성립과 발전, 5호 16국.남북조 시대 성립

     

    주 041
    (동)진의 원제가 양쯔강을 건너오고 나서…(동)진을 세운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이 때 백성이 난리를 만나 이 지역으로 흘러들어왔고, 유민 대부분이 권세있는 집에 의지하여 식객이 되었다.
    “남제서”

    413년. 7월 해근 등이 월근배니 부락을 발라산의 서쪽에서 격파하고 말 5만필, 소 20만마리를 획득하고, 2만여호를 대녕으로 옮기게 하였다…농기구를 지급하고, 사람 수에 따라 농토를 나누어 주었다..
    “위서” 태종본기

    665년. 봄 2월, 백제국의 관위와 계급을 비교하였다. 이에 좌평 복신의 공으로 귀실집사에게 ‘소금하’라는 관위를 내렸다. 또한 백제 백성 남녀 400여 인을 근강국 신전군에 살게 하였다.
    “일본서기” 천지기
    “남제서”
    “위서” 태종본기
    “일본서기” 천지기“일본서기” 천지기“일본서기” 천지기
    주 042
    주 043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오간, 마리 등 열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자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해 열명의 신하를 보좌로 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로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 백제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
    주 044
    (고)조선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촌을 이루었다…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 숲 사이에 말이 끓어앉아 울고 있었다. 곧 달려가 보니 홀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자 한 어린아이가 나왔다…6부의 사람들은 그의 출생이 신기하다 하여 받들어 높이더니, 이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사기” 신라본기“삼국사기” 신라본기
    주 045
    5세기에는 대륙이나 조선반도와의 교류가 진전하고, 조선반도에서부터 많은 도래인이 새로운 기술이나 문화를 전해주었다. 한자 수용도 본격화하였고, 도래인의 일부는 史部로 편성되어 문서 사무나 외교를 담당하였다. 6세기 초기에는 계속하여 불교.醫.曆등 발달한 지식이 전해지고….
    “상설 일본사”
    “상설 일본사”
    주 046
    진이 어지러울 때, 낭야국 사람들이 원제를 따라서 장강을 건넌 것이 천여 호였다. 태흥 3년(320)에 회덕현을 세웠다. 단양에 낭야상이 있었지만 토지가 없었다. 성제 함강 원년(335)에 환온이 군을 다스렸는데, 강승의 포주 금성에 진을 두고, 단양의 강승현 경계를 나누어 군을 세울 것을 원하였다. 또한 강승의 땅을 나누어 임기현을 두었다.
    “송서”
    “송서”
     
    지명
    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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