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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수업자료

중원의 통일과 여러나라의 성립

1-4단원 2차시
  • 저필자
    박성기(하남고 역사 교사)

중원의 통일과 여러나라의 성립

진의 통일과 멸망
한의 발전
흉노의 성장
고조선의 성립과 흥망
그 밖의 여러나라

중원의 통일과 여러나라의 성립

1. 진의 통일과 멸망
  1. 진의 통일:법가적 개혁 을 통해 부국강병 달성 → B.C 221 통일완성
  2. 진시황제의 정책
    • ‘황제’칭호 제정 → ‘시황제’가 됨
    • 도량형.문자.화폐 통일.도로 정비
    • 군현제 실시
    • 흉노 견제:만리장성 축조
  3. 멸망:가혹한 법치(수탈.강제 동원) → 농민 저항 → 멸망
진의 정책-도량형.화폐.문자 통일
진의 통일은 사회경제적으로 극심한 전쟁의 참상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염원의 결과였다. 또한 각국의 경제적 상호의존관계가 더욱 밀접해지면서 인위적인 관세 장벽을 철폐하고 화폐와 도량형의 불일치를 해소하고자 통일의 욕구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한 통일정부의 출현 또한 필요하였다. 이러한 욕구를 바탕으로 진은 상앙의 변법실시와 부국강병책. 지정학적 위치의 이로움등으로 하여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전국을 통일한 후 진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국가 경제기준을 통일하였다.

농민 봉기
통일 후 진은 자신의 권력을 과기하기 위하여 황제라 칭하고, 전국를 군현으로 나누어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진은 시황제가 죽고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의 통일정치는 급격했고, 분서갱유와 아방궁. 진시황릉 등을 축조하였던 과한 요역과 토목공사에 의한 농민의 부담가중으로 상하의 반감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시황제가 죽은 후 胡亥가 2세 황제로 즉위하였다. 진에 대한 불만으로 마침내 陳勝·吳廣에 의한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이후 각지에서 이에 호응하는 저항이 잇달아 일어났다. 중원 왕조 최초의 농민저항은 곧 秦軍에 의해 붕괴되었다. 그러나, 이로 시작된 저항은 유방과 항우로 이어지고, 마침내 진은 항우에 의해 수도 함곡관이 함락됨으로하여 멸망하였다.
한편, 진승과 오광의 기치였던 ‘王侯將相寧有種乎’라는 표현은 고려조에서도 등장한다. 무신정변 후 한동안 하극상의 풍조가 유행했었다. 최씨 무신정권의 실권자였던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면서 천민들을 모아 봉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봉기 모의에 참여했던 노비 순정의 밀고로 봉기에 참여하고자 하였던 사람들이 체포. 사형되었다.
 
주 029
각주 029) 법가적 개혁
법령이 시행되고 한 해가 지나자 법령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자가 수천명에 달했고, 태자도 법을 어기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상앙은 “법령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윗사람이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태자의 스승을 처벌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진인이 모두 법령을 준수하였다…10년이 지나자 진나라에서는 길에 물건이 떨어져있어도 아무도 주우려하지 않았고… 집집이 모두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사기” 상군열전
“사기” 상군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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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30
각주 030) 도량형.문자.화폐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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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31
각주 031) 농민 저항
(진승과 오광은) 때마침 내린 큰 비 때문에 도로가 막혀 발을 멈추고 있는 속에서 기일 내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진의 법률에서는 기일에 늦어지면 모두 참수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기치를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진승이 말했다. “천하의 사람들은 포학한 진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우리가 기치를 들면 반드시 각지에서 응해올 것이다.” 오광도 이론은 없었다. 두 사람은 공모하여 인솔자인 진의 대장을 죽이고 겁먹은 농민들에게 봉기하자고 촉구하였다. “우리는 기한에 늦어버렸다. 어양에 도착하면 참죄를 받는다. 비록 참죄를 면한다 하더라도 변경 수비를 맡는다면 두번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죽는다면 큰일 하나 해서 이름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왕이나 제후, 장군이나 재상이라 해도 모두 우리와 같은 인간에는 틀림없다….
-’진승.오광’이야기-
-’진승·오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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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통일과 여러나라의 성립

2. 한의 발전
  1. 유방(고조)
    • 초 패왕 항우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통일이룩.
    • 군국제(군현제 + 봉건제)로 통치.
    • 유학 장려(법치 완화).
  2. 무제의 대외 정복 정책
    • 비단길 개척
    • 남비엣,고조선 멸망.
주 032
각주 032) 비단길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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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통일과 여러나라의 성립

3. 흉노의 성장
  1. 유목민족의 성장 – 흉노,동호,월지 등
  2. 흉노의 성장 – 묵특선우 시기
    • 만리장성 이북 초원 지대를 통합함.
    • 한 고조와의 대결에서 승리함. → 화친체결(비단등의 공물과 공주를 받음)
흉노와 한의 관계
이 사료는 한 고조가 흉노에게 포위되었다가 풀려난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은 흉노를 압박하면서 황하 북쪽에 만리장성을 쌓아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멸망하였고, 한을 건국한 유방이 항우와 쟁패전 끝에 중원 천하를 차지하여 거대왕조를 탄생시켰다. 한편 진의 북진 정책으로 위축되어 있던 흉노는 중원이 혼한한 틈을 타 세력을 확대하고 남으로 한나라를 압박하였다. 한 고조 유방이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를 응징하는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결과는 황제가 7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다가 가까스로 풀려나는 수모를 겪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중원왕조와 유목왕조가 최초로 벌인 대결에서 중원왕조가 참패했다는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었고, 대외 관계를 설정할 때 교훈이 되었다. 또한 공주를 시집보내고 많은 예물을 주는 것도 선례가 되어 후세에 계속 답습했다. 흉노와 한이 형제의 관계를 맺었다고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흉노가 한으로부터 예물을 받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한이 조공국의 위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은 이런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켜 공격을 시도하지만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중원왕조가 안고 있었던 현실적인 문제였다.
유목민인 흉노는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농경민에 대한 교역과 약탈을 병행하였다. 한 건국 초기에는 유방이 이끄는 군대에 승리하여 한과 화친을 맺고 매년 다량의 공납을 받기도 하였다. 무제는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쳤다. 이 때 장건을 서역에 파견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비단길이 개척되기도 하였다.
 
주 033
각주 033) 한 고조와의 대결
한나라 고조는 손수 가서 흉노를 격파하고자 했다. 겨울의 큰 추위와 눈비를 만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병사가 열 중 둘 셋이나 되었다..(흉노의) 묵특선우는 거짓으로 패주하는 척하며 한나라 군대를 유인하였다. ..묵특선우가 정병 40만기를 풀어 고조를 백등산에서 에워싸기를 7일이나 하니 한나라 군대는 (포위망의) 안팎에서 서로 구원할 수도 식량을 보급할 수도 없었다.
“사기” 흉노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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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통일과 여러나라의 성립

4. 고조선의 성립과 흥망
  1. 성립:만주 일대, 청동기 기반
  2. 위만 집권(B.C 194)
  3. 위만 조선의 발전
    • 철기문화 도입 → 생산력 증대
    • 영토 확장
    • 한과 대립 → 한의 침략으로 멸망 (B.C 108)
위만 조선의 발전
한과 고조선
위만조선
朝鮮王滿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燕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眞番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秦이 燕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燕王 盧綰이 (한을) 배반하고 匈奴 들어가자 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동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공지인 上下鄣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옛 燕·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王이 되었으며, 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
진한 교체기에 혼란기를 피해 고조선 지역으로 넘어온 위만이 변경지역을 차지하면서 성장하는 사료이다. 변경지역에 정착한 위만은 본격적으로 유입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이후 중개무역으로 성장하여 주변의 소국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고, 한과 대립하게 되었다.

* 참고
흉노의 통치
흉노는 초원 지방에 흩어져 살던 여러 부족을 통합한 연맹체적 국가이다. 흉노 최고의 통치자는 선우이며, 그 밑에 좌현왕과 우현왕이 두어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부족의 장은 원래 행정권과 군사권을 가지고 있지만, 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국가의 중간 지배층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흉노 사회는 유목 경제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정치 체계가 비교적 간단하고 느슨하였다.
天高馬肥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 본디 秋高馬肥라 썼고, 가을만 되면 약탈하러 오는 흉노가 두려워 나온 말이라 한다. 漢 무제 때의 장군 이릉이 흉노를 치러 나섰을 때, 나이 적다고 그를 시기하던 장군 路博德은 '지금은 가을이라 흉노의 말이 살졌을 테니 싸울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장군 趙充國도 다른 기회에 '가을이 되어 말이 살졌으니 틀림없이 변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했다.
즉, 가을에 말이 살찐다는 말은 가을이 되어 흉노의 말이 튼실해지면 흉노는 농경민인 중국을 침범하여 가을에 수확한 농산물 등을 약탈할 것이라는 의미로 흉노 등 유목민의 침입을 대비하자는 의미이다.
 
주 034
각주 034) 영토 확장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위만을 외신으로 삼아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였다…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영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
“사기” 조선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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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통일과 여러나라의 성립

5. 그 밖의 여러 나라
  1. 베트남 지역
    • 어우락 왕국 성립(B.C 3C 중반):광둥~베트남 북부
    • 남비엣 성립(B.C 203):농경.해상무역으로 성장
  2. 만주. 한반도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 성립
  3. 일본 열도 – 30여개의 소국으로 통합
남비엣남비엣
베트남 지역
왜 베트남인가. 베트남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동아시아보다는 동남아시아 적 요소가 더 많이 가미되어있다. 베트남 북부 지역은 중국 남쪽에 연해있다. 초기 베트남의 중심지는 베트남 북부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어우락 왕국이 세워졌다. 이후, 진의 장수였던 찌에우 다(趙佗) 남월국을 건국하였다. 이후 베트남 북부 지역은 지속적으로 중원왕조와 관계를 맺으며 성장한다. 베트남 북부가 정치의 중심지였으나, 인구의 과밀등으로 하여 11세기부터 남진정책을 펴 지금의 베트남에 이르게 된다.

일본열도의 왜
일본의 선사시대는 일반적으로 출토유물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
조몬 시대(繩文時代)는 기원전 1만 3천 년 경부터 기원전 300년 정도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시대는 일본 고유의 토기를 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후, 기원전 3세기 경부터 기원후 3세기 경까지를 야요이 시대라고 한다. 대륙에서 벼농사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큐슈 북부로 이주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세기 말 도쿄의 야요이 지역에서 발견된 토기에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벼농사의 도입과 잉여산물의 생산과 축적이 발달하여 계급의 발생하였다. 1세기 중반경에 일정 정도의 정치 권력이 형성되었다. 주어진 사료는 3세기 무렵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가 중국의 위에 사신을 보냈고, ‘왜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권위를 세웠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 035
각주 035) 30여개의 소국
왜인들은 대방군의 동남쪽에 이르는 대해 가운데에 있어, 섬과 산으로 나라를 만들어 살고 있다. 원래는 100여개 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 대가 되어 조공하러 오는 나라가 있었다. 지금 사자나 통역을 위에 사신으로 보내는 나라는 30개국이다.
- “삼국지” 위서왜인전
- “삼국지” 위서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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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의 통일과 여러나라의 성립

베트남 북부의 홍강 델타 지역 - 이 지역의 현재의 수도 하노이가 위치한 지역이다.

중원의 통일과 여러나라의 성립

진한과 흉노
만주,한반도
베트남,일본 열도
    • 법치 → 부국강병 → 통일
    • 시황제
      도량형.화폐.문자 통일,군현제 실시,만리장성 축조
    • 고조:군국제,유학
    • 무제:정복,비단길
  1. 흉노
    • 묵특선우:한과 화친,공물 받음
  1. 고조선
    • 위만집권:철기유입
    • 중계무역으로 성장
  2. 부여,고구려,신라,백제,가야 등 성립
  1. 베트남 지역
    • 어우락 왕국
    • 남비엣으로 성장
      : 농경.해상무역
  2. 일본열도
    : 30여개 소국

  • 각주 029)
    법가적 개혁법령이 시행되고 한 해가 지나자 법령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자가 수천명에 달했고, 태자도 법을 어기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상앙은 “법령이 행해지지 않는 것은 윗사람이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태자의 스승을 처벌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진인이 모두 법령을 준수하였다…10년이 지나자 진나라에서는 길에 물건이 떨어져있어도 아무도 주우려하지 않았고… 집집이 모두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사기” 상군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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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0)
    도량형.문자.화폐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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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1)
    농민 저항(진승과 오광은) 때마침 내린 큰 비 때문에 도로가 막혀 발을 멈추고 있는 속에서 기일 내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진의 법률에서는 기일에 늦어지면 모두 참수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기치를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진승이 말했다. “천하의 사람들은 포학한 진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우리가 기치를 들면 반드시 각지에서 응해올 것이다.” 오광도 이론은 없었다. 두 사람은 공모하여 인솔자인 진의 대장을 죽이고 겁먹은 농민들에게 봉기하자고 촉구하였다. “우리는 기한에 늦어버렸다. 어양에 도착하면 참죄를 받는다. 비록 참죄를 면한다 하더라도 변경 수비를 맡는다면 두번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죽는다면 큰일 하나 해서 이름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왕이나 제후, 장군이나 재상이라 해도 모두 우리와 같은 인간에는 틀림없다….
    -’진승.오광’이야기-
    -’진승·오광’이야기- 바로가기
  • 각주 032)
    비단길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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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3)
    한 고조와의 대결한나라 고조는 손수 가서 흉노를 격파하고자 했다. 겨울의 큰 추위와 눈비를 만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병사가 열 중 둘 셋이나 되었다..(흉노의) 묵특선우는 거짓으로 패주하는 척하며 한나라 군대를 유인하였다. ..묵특선우가 정병 40만기를 풀어 고조를 백등산에서 에워싸기를 7일이나 하니 한나라 군대는 (포위망의) 안팎에서 서로 구원할 수도 식량을 보급할 수도 없었다.
    “사기” 흉노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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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4)
    영토 확장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위만을 외신으로 삼아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였다…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영역이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
    “사기” 조선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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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5)
    30여개의 소국왜인들은 대방군의 동남쪽에 이르는 대해 가운데에 있어, 섬과 산으로 나라를 만들어 살고 있다. 원래는 100여개 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 대가 되어 조공하러 오는 나라가 있었다. 지금 사자나 통역을 위에 사신으로 보내는 나라는 30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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