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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2. 베트남

1) 1975년 이전 베트남 사회주의 경제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이 결정적 패배를 당한 뒤 열린 제네바회의에서 베트남은 통일선거가 시행될 때까지 남북으로 분단되도록 결정되었다. 그리고 통일이 이루어진 것은 1975년이었다. 이 사이 남쪽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사이공 정부가, 북쪽에서는 1975년 베트남을 통일하는 베트남공산당 정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따라서 1955년부터 통일이 완수된 1976년까지 20년 동안 베트남 북부에서는 사회주의식 계획경제가 실시되었다.
우선 북베트남 정부는 소련 및 많은 사회주의 제국(諸國)의 경로를 따라 연속적인 5개년 경제계획과 통제를 실시하였다. 사회주의 경제발전 이론에따라 집단화와 생산수단의 공유화가 농업과 공업에 모두 실행되었는데, 발전 전략은 농촌의 집단화에 의한 농업생산성의 향상과 식량 가격의 저수준안정, 농업 이익과 노동력의 공업에의 이전 투입, 중화학공업 우선의 공업 발전을 통한 사회주의식 경제의 우월성 과시라는 전형적인 신흥 사회주의 국가의 루트였다. 따라서 베트남은 이와 유사한 경로를 걸었던 중국이 건국 초기에 조우한 문제들을 만났으나, 그 피해는 더욱 컸다. 전쟁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가 경제의 상당 부분이 원조에 의해 해결되었다. 베트남 정부의 비공식 추계에 따르면, 1965~75년의 전쟁 기간 동안 매년 2억 7천만 불에서 10억불 규모의 증여 원조가 사회주의 제국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또한 코메콘(CMEA)에 의하면 매년 약 7억불의 원조가 소련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이로 인해 원조총액은 1960~64년에 북베트남 정부 세입의 1/4 정도였으나, 전시기에는 45%로 올랐고, 1970년대 초기는 실로 60%에 달하게 되었다.이 중 3/4 이상이 자본재였다고 추정되는데, 이것은 베트남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수공업을 유지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외 의존적인생산 시스템과 중공업우선의 경제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경공업과 농업의 발전은 이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연평균 2.5%에 달했던 인구증가에 적합한 소비재와 식량생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농업에서의합작사 운영은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저하시켜, 1959~75년의 17년간 1인당식량생산량은 370㎏에서 212㎏로 감소하면서 총식량 생산량은 답보상태에 놓였고(표 18 참조), 공업부문에서도 인프라 건설, 금속공업, 화학공업에 투자가 집중되면서 경공업은 물론 농기계 생산을 위한 기계공업에조차 투자가 거의 배분되지 않은 불균형 정책 끝에 심각한 물자 부족과 생산 불균형을 낳았다.
이러한 사태는 1986년 새로이 당서기장에 취임한 쯔엉찐(Trùóng Chinh)에 의해 ‘물질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국민경제의 능력을 크게 벗어난 규모로 중공업에 편중한 것은, 당 지도부의 중대한 과오였다’라고 비판되었다.
표 18 북베트남의 농업생산량(식량총생산 : 100만t, 1인당 생산량 : ㎏)
1959196019611963196419651966
식량총생산5.84.75.25.05.65.65.1
1인당식량생산370293314283302294262
1967196816919701972197319741975
5.44.64.76.35.75.26.35.5
269224222242250221261212
이와 같이 집중적인 중공업 육성노력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쯔엉찐의 비판에 나온 ‘국민경제의 능력’ 한계에 의해 1975년에도 농업이 국민소득의50%이상이고, 공업은 28%에 불과한 명백한 농업 중심국가였다.
2) 사회주의 공업화와 시장경제로 이행 (1975~85년)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통일국가 재건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1976년에 제4회 전당대회를 개최, 첫 장기 국가 재건계획인 제2차 5개년 계획(1976~80)을 책정했다. 이 계획은 소련을 모범 삼아 베트남을 20년 이내에 근대적인 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국가로 변화시킨다는 목표가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총생산 증가율은 목표치인연평균 14~15%크게 못 미치는 1.4%에 그쳤다. 여기에는 자연재해로 인한 농업 감퇴, 서방 원조의 중지, 1978년 12월의 캄보디아 침공과 79년 2월의 중월전쟁으로 인한 전시체제에의 회귀와 중국 원조의 중단, 농업의 집단화로 인한 남부의 쌀 생산 및 유통 기능 저하 등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베트남 경제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였고, 어떻게든 문제 해결을 이루어야 했다. 이에 당은 1979년에 ‘신(新)경제정책(NEP)’을 도입했다. NEP는 국민생활의 안정화를 꾀하기 위해 국영기업이나 합작회사에 계획 외의 생산이나 유통을 용인함으로써 생산의욕을 자극하고, 중공업중시의 산업정책을 농업·경공업 중시로 바꾸는 한편, 부분적이기는 하나 시장원리의 도입이 도모되었다.
NEP에 의한 생산의욕 자극으로 제3차 5개년계획(1981~85) 중의 국민소득 평균 신장률은 목표치인 4.5~5%를 상회하는 6.5%에 달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병존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그것이었다. 베트남 정부는 다른 많은 사회주의 국가가 그러했듯이 농가로부터 저가로 쌀을 수매한 뒤 국영기업의 취업자나 공무원에게 배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업 집단화에 의한 생산량 감소로 배급에 충당할 쌀이 부족해지고, 정부는 농가의 생산의욕을 자극하기 위해서 계획 외의 생산과 유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결과 증가한 생산량에 대해 베트남 정부는 파악 및 통제할 방법이 없었고, 농가는 쌀을 높은 가격으로 시장에 공급하였다. 결과적으로 배급 부족이 미해결인 상태에서 국영기업의 취업자나 공무원은 부족분을 시장에서 조달해야 했지만, 이 경우의 쌀값은 그들의 급여 수준에서 볼 때 너무나 고가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베트남 정부가 급여 인상을 실시하자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되자 해결 방법은 궁극적으로 경제 구조의 조정과 생산 증가 외에는 없게 되었고, 결국 이것이 해결책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혁을 위한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주변국들, 특히 개방 후 중국의 경제적 성공은 개혁의 절대적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5년 6월, 공산당 제8회 당 중앙위원회 총회는 가격, 임금, 통화에 대해 획기적인 결정(8중 총결의)를 내렸다. 배급제 폐지와 생활비로 적합한 수준의 급여 지급(임금의 인하), 이중 가격 제도의 재고, 화폐의 평가절하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되돌릴 수 없는 기정노선으로 선택한 사회주의식 공업화의 포기를 의미했다. 쇄신이라는 의미의 ‘도이모이’라 불린 베트남식 경제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3) 시장 경제화의 전개 과정(1986~2000년)
언급한 대로 ‘8중 총결의’는 1986년 말의 제6회 당대회에서 채택된 ‘도이모이’의 출발점이었다. ‘도이모이’는 ‘개발경제학의 제(諸) 이론에서 추출된 다양한 장점을 적절히 조합하고, 기존의 경제학 이론도 취사선택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노동을 포함한 생산요소가 효율적 활용에 기초하여 자유롭게 유동하는 것을 인정’하는 시장개발 모델이다. 이 개혁의 근간은 크게 시장경제의 도입과 대외 개방으로 나눌 수 있으며, 정부 계획으로 결정되던 자원 배분과 가격 결정을 시장에 맡기는 것, 적대 관계였던 자본주의 제국(諸國)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무역 개시와 해외 직접 투자의 도입을 촉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
도이모이의 성과는 ‘제4차 5개년계획’(1986~90년)중의 국민소득 신장에 의해 나타났다.
그림18 베트남과 중국의 실질 경제성장률(%)
목표치인 연평균 3.9%를 대폭 상회하는 신장이 나타난 것이다. 그림 18에서 보이듯 이 기간 베트남의 실질경제 성장률은 일시적으로 중국을 능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작용도 컸다. 우선 ‘8중 총결의’의 실행으로 단기간에 물가가 급상승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닥쳤다. 임금의 반을 차지하고 있던 실물 배급이 현금화되고, 화폐 평가 절하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진 데에 가뭄에 의한 농업 생산의 침체가 더해져 1987년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700%를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계획경제로의 회귀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농업국인 베트남에서 시도한 급진적인 사회주의 공업화와 이를 위한 통제 경제의 비현실성을 공산당 자신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8년 코메콘 가입 이래 받아온 거액의 소련 원조가 1987년을 정점으로 감소, 1990년에는 1987년의 1/3으로 줄어들었는데, 이것은 소련 경제의 피폐에 따른 것으로 회복 가능성이 없는 축소였다. 따라서 소련 원조에 크게 의존하던 구체제로의 회귀는 확실한 곤란이 보장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여기에 주변 제국(諸國)의 경제발전이 주는 불안감이 작용하였다.1980년대 후반 ASEAN(동남아시아 제국연합) 제국은 외자를 지렛대로 삼아 일제히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사회주의국가의 건설을 표방하던 베트남은 반공연맹으로 탄생한 ASEAN 여러 국가와는 적대관계에 있었는데, 너무나도 선명한 경제발전의 대비에 공산당 지도부는 미래에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윽고 1990년대에 들어 도이모이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9년에 식량자급 가능성에 도달한 뒤 쌀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는데, 2010년 현재 베트남은 세계 3위의 쌀 생산국(2위의 수출국)이다. 아직 1990년대 초에는 현재와 같은 규모로 증가한 것은 아니나, 식량생산의 증가는 물가 안정에 기여했다. 인플레이션이 종식되고 경제가 성장국면에 들어선 것이다. 1991년 코메콘의 붕괴는 베트남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나 그 영향은 동유럽 제국보다는 경미했다. 베트남이 1980년대 후반부터 전방위 외교를 전개하고 주변 제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 무역의 아시아 시프트를 진행하고 있었고, 1988년의 농가 청부제(농가에 장기 경작권을 주고 자유롭게 생산하게 하는 제도)의 도입에 의해 1989년에는 쌀 수출을 실현한 것 등 농업 생산이 비약적인 증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전반의 경제 성장률은 공산당의 예상을 웃도는 기세였다. 제7회 당대회의 목표는 1991~95년에 GDP의 연평균 5.5~6.5% 증가였지만, 실제로는 이것을 웃도는 8.2%를 달성했다. 도이모이가 궤도에 들어서면서 일본정부나 IMF 등 국제기관으로부터 자금 공여가 개시되고, 해외 직접 투자가 증가했으며, 원유의 수출 증가로 의해 외화 획득량이 증가한 것이 긍정적인효과를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로 개혁에 대한 동기가 저하되면서, 1996년의 제8회 당대회의 정치 보도 초안에 국영 섹터의 비율을 경제 전체의 60%로 인상하는 목표를 넣는 등 전회와는 크게 다른 방침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시장 경제화의 후퇴를 걱정하는 국제 금융 기관의 반발을 받아 최종적으로 삭제되었지만, 베트남 정부는 국영기업이 주도하는 경제체제의 구축을 계획하였다.
이 문제는 1998년의 아시아 통화 위기에 의해 표면화되었다. 1995년의ASEAN 가맹과 동시에 무역 자유화를 받아들여, 경제를 주도해야 할 국영기업의 업적은 점차 악화되어 갔다. 여기에 해외 직접 투자의 주역이었던NIES(신흥공업경제지역)의 투자 감소가 겹쳐 경제는 속도를 잃게 되었다. 제8회 당대회에서 채택된 5개년 계획(1996~2000년)은 GDP의 연평균 성장률을9~10%로 설정했으나, 실제로는 6.9%에 머물렀다. 베트남의 정책 변화에 관망세로 돌아선 해외직접투자액이 감소하고, 국영기업의 경영능력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위기감이 조성되면서 베트남정부는 다시 시장 경제화의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1997년 말의 제4회 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는 민영 기업을 국영기업과 동등하게 취급하고, 사업 환경의 개선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당시까지‘용인’에 지나지 않았던 민영기업을 ‘장려’의 대상으로 하여 투자의 견인 역할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2000년의 신 기업법 제정으로 이어졌는데, 이후 민영기업의 설립 러쉬가 계속되어 민간 투자는 투자와 고용의 양면에서 경제를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민영 기업의 존재감은 해를 거듭할수록 강해져서 2001~2005년의 5개년계획의 GDP 연평균 목표 성장률 7.5%가 달성된 것은 민간 투자에 의한 부분이 컸다. 2006년 제10회 당대회에서 채택된 5개년 계획(2006~2010)이 GDP성장률을 연평균 7.5~8.0%라는 높은 수준으로 설정한 것은 이러한 민간과 해외 투자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였다. 특히 해외직접투자에서 ‘세계의 공장’으로 오랜 기간 군림했던 중국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2005년을 경계로 베트남에로의 투자가 증가하였다. 2005~2007년의 GDP 성장률은 8%를 넘었고, 2006년에는 WTO가맹도 실현되면서 이제 베트남은 BRICs의 뒤를 잇는 시장으로서 위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8년에 들어 국내적으로 인플레이션, 주가 하락, 무역 적자의 확대 등으로 위기감이 조성되는 가운데,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경제의 불황 여파로 수출과 해외직접투자가 모두가 침체 상태로 돌아섰다. 내부적으로는 행정 집단의 부정부패로 인한 경제효율성 저하, 경제 시스템의 충격에 대한 취약성, 장기적인 인력 공급의 문제 등이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지적받고 있다. 더 이상 가능한 부분부터 개혁을 추진하는 정책 설계보다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이야기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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