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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중국

1. 중국

1) 현재 개요와 전쟁이전의 축적
중국경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상이 되어 있다. 인구 13억3천만(2009, world bank)에 달한 거대한 경제권은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경제 개혁노선을 지지한 3중전회(三中全會)이후 평균 9.7%의 성장률을 달성하고, 2010년에는 약 5조 7,451억불의 GDP를 기록하여 일본을 추월하고 세계2위에 올랐다.주 989
각주 989)
OECD 추정치. 같은 해 일본의 추정치는 5조3,909억불이다. 한편 2011년에 발표된중국국가통계국에 의하면 중국의 GDP는 5조8,786억불이고, 일본은 5조4,742억불(내각부 발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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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이 중국은 비록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수백만의절대빈곤층 구제에 성공했으며, 다수의 경공업 분야와 조선, 철강과 같은 중요 중공업분야에서 강자가 되면서 세계경제의 주요 국가로 부상하였다.
이 같은 성과를 거둔 중국 경제가 특히 구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제국(諸國)들의 시장경제 도입이 많은 난관을 겪었던 것에 비해 순조로이 진행되어 왔다는 점은 주목을 끈다. 아직 여러 문제가 산적한 상황이나, 정권 교체, 경제제도의 급격한 변천, 사회적 갈등과 혼란의 과정을 겪었던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 비해 순조로운 경로를 걸어온 중국 경제의 성과를 부인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이러한 20세기 후반의 중국 경제의 성장에 대해 보기 전에, 우선 통계가 허락하는 한도에서 19세기부터의 중국 경제의 위치를 살펴보도록 하자. 메디슨주 990
각주 990)
A. Maddison(1998), Chinese Economic Performance in the Long Run, OECDDevelopment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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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세계 인구와 GDP에 관한 장기 추정치는 대략적인 중국경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중국은 1820년경 세계 GDP의 32%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OECD 통계 잠정치로 2010년 미국이 차지하는 비율인 약 23.6%를 크게 능가하는 수치이다. 또한 이 시기의 중국 인구는 세계인구의 약 1/3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인구 증가율이 감소하고, 서구인구가 증가면서 그 비율은 1/4로 떨어지게 되었다. 동시에 세계 GDP의 점유율은 1913년에는 9%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19세기에 걸쳐 서구의 지속적인 성장에 비해 중국의 발전이 뒤처지고 있었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수치만으로 중국의 위상을 알기는 어렵다. 중국이 주목받는 현재에도 GDP 점유율은 약 9.3%이다(2010, OECD 추정치). 1913년과 현재의 중국의 위상을 볼 때, 단순히 GDP가 국제적 위상은 나타내는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20세기 전반 중국의 문제점은 절대 빈곤선의 인구가 대거 투입된 전근대적 방식의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고, 공업기반이 미약했다는 점에 있었다. 투입된 노동력의 크기 때문에 전체로는 거대한 규모의 GDP를 얻을 수 있었으나, 상당 비율의 생산물 농작물 이 이를 생산한 노동력을 지탱하는데 소모되었거나, 극단적인 산출량 변동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잉여자본축적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국제정세와 맞물려 많은 난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중국 경제의 발전을 위해 공업의 육성이 필수적이었으나, 자본 부족으로 우선은 외세에 의해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1912~37년에 연간 8~9%의 속도로 성장한 공업은 주로 외국인에 의해 태동되었다.
우선 조계지에서는 1912년 이전부터 외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공장이 자리 잡게 되었는데, 곧 이를 모방한 중국인들이 주역으로 떠올랐다. 이 지역에서 발흥한 공업은 주로 상대적으로 대규모 자본이 요구되지 않는 섬유, 식품 등을 중심으로 하는 경공업 소비재산업이었다. 1930년대까지는 공업생산액의 약 78%가 중국인 소유기업에 의해 생산되었고, 상하이[上海], 텐진[天津)], 칭다오[靑島] 등이 주요한 공업도시로 성장하였다. 한편 만주에서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자본에 의해 중공업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현재까지도 중국 유수의 제철공장인 안샨[鞍山]제철소 태평양 전쟁 중의 쇼와제강소[昭和製鋼所]도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이러한 거대규모의 투자는 자본력이 부족한 중국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고, 일본에게도 국가적 정책 제국의 설립과 확장 이라는 배경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1942년에 이르면 만주는 전력, 철, 시멘트의 태반을 생산하며 전체 공업생산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공업시설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투자 규모가 거대했음에도 일본이 의도적으로 중국 기업과 기술제휴 및 거래관계를 제한했기 때문에 당시의 중국 경제에 준 영향은 적었지만, 만주지역에 형성된 중공업기반은 전후 중국의 공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처럼 조계지 인근과 만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업화로 1933년까지 비록 전체 노동력의 0.4%에 불과한 100만 노동자와 GDP의 2% 정도 수준이기는 하나 공업의 기초가 이룩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성과는 전쟁과 내전으로 1949년에 이르러 크게 쇠퇴하지만, 전후 중국의 중요한 유산을 남기었다. 확장된 공업에 의해 경영자, 기술자, 노동자 등이 성장하였으며, 전쟁을 통해 이들이 정부 통제하의 기관에 다수 속하게 된 것이다. 중일전쟁 기간에 국민당 정부는 경제 개입의 필요성을 찾게 되어 천연자원위원회라는 기구를 구성하였고, 언급한 노동력을 포함하여 중국 공업의 상당 부분(일본군 비점령지역 총자본의 70%, 노동력의 32%)을 관리하게 되었다. 게다가 전후에 만주의생산설비와 상하이 점령지구의 공업지대가 국민당 정부에게 넘겨졌기 때문에 1947년에는 국민당 정부는 근대 산업자본의 2/3, 철강생산의 90%, 전력2/3, 시멘트의 45%, 그리고 대부분의 주요 은행과 운수회사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당의 경제통제 기구의 구성원 상당수가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석권하였을 때 그대로 잔류했기 때문에, 공산당 정부는 경제운영에 필요한 제도 및 인적 기반을 이어 받았다. 공업 발전을 위한 설비와 함께, 인적 자원, 제도 및 기구, 그리고 경험이라는 주요한 유산은 이처럼 전전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2)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성립과 동요
전전과 전시에 이루어진 중국경제의 유산, 즉 중화학공업의 시작과 국가기구에 의한 경제 운영 방식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정책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공산당 정부는 국민당의 경제통제 기구의 구성원을 활용하며 비교적 순조롭게 산업의 국유화를 달성하였다. 이로 인해 1949년 이후 사회주의식 통제경제가 점차 자리 잡게 되었고, 중공업 우선의 경제정책이 추진되었다. 중공업 우선의 계획이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소련의 영향이 컸었다. 당시 국방과 경제에서 양호한 실적을 거두며 발전하고 있던 소련의 경험은, 막 냉전이 정착하는 단계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출발하는 중국에게 필히 참고해야 할 모델이었다. 따라서 1949년의 중소우호조약이 설립되면서 소련의 영향이 중국에 침투한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이처럼 전쟁과 내전으로 혼란했던 상황에 점차 질서가 부여되면서, 파괴된 국내기반의 복구를 통해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1952년의 공업과 농업은 모두 공산혁명 이전 최고 수준을 돌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의 이행을 위한 준비가 이 시기에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농촌에서는 급진적인 토지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경작가능토지의 42%가 1950~52년 사이에 재분배되었다. 토지사유제는 아직 남아있었지만, 대체로 균등하게 각 가구에 분배되었다. 이로 인해 중·빈농의 확고한 지지를 중국 정부는 획득할 수 있었고, 질서회복과 함께 영농 의지가상승한 농촌에 의해 자연스럽게 농업 생산력은 회복되었다.
한편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발전도 투자의 대부분을 정부가담당하면서 만주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공산당 정부는 일본인 및 국민당에게서 몰수한 공장을 다수 장악하였고, 이것을 대륙에 잔존한 자본가들이나 국민당의 경제기구에 종사했던 전문가들을 활용하여 운영하였다.
이처럼 질서의 회복과 구체제 유산의 활용, 사유화의 일정 부분 수용에 의해 중국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이윽고 본격적인 경제적 이륙을 계획한 1953년의 제1차 5개년계획은, 동시에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수립을 위한 계획이 되었다. 농촌에서는 농산물을 정부의 통제 밑에 두는 ‘강제공출제’가 시작되는 한편, 토지의 사유권에 제한을 가하는 농업합작사가, 도시에서는 사영 공장 및 상점들을 통제 밑에 두는 협동조합 또는 공사동영공장(公私同營工場)의 설립이 급속히 추진되었다. 또한 도시에의 식량 공급수단으로 배급제가 시작되었다.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강력히 추진된 이 정책으로 농촌에서는 1954년 말에는 2%에 불과하던 조합 및 합작사의 농가점유율이 1956년 말에는 98%에 달하게 되었다. 촌락단위의 ‘공유지’ 설정을 통해 자작농에게서 농지를 몰수한 후 전 토지를 국유화한 뒤 이를 경작시키는 조직인 합작사는, 초기에는 단순히 노동력을 집단화한 합작사와 더욱 광대한 단위를 바탕으로 집단소유, 집단노동, 통일된 경영 방식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고급합작사로 나뉘었다. 이렇게 하여 1956년 초반까지는 공산당 정권 성립 후 잔존하고 있던 사적 소유가 사실상 소멸되었다. 그리고 고급합작사는 1958년의 대약진운동에 의해 인민공사(人民公社)가 재조직되어 생산수단, 노동, 소유의 공동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 같은 농촌의 집단화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농촌 노동력의 집단화를 통해 잉여 농업생산물을 도시부의 중공업 투자를 위한 자본으로 이용하려 한 것이었다. 언급한 대로 사회주의식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중공업의발전이 필요했는데, 아직 초기 단계였던 중국의 중공업 발전을 위해서는 잉여 농산물의 통제를 통한 중공업에의 집중 투자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자본 축적이 빈약했던 중국에게 대규모 투자는 정부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농산물을 정부의 통제권 하에 두려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강제공출제로 인해 납입되는 농산물의 가격은 낮게 책정되었다. 국가 수입과 국영 기업의 이윤 최대화(저물가를 통한 노동자 임금의 저수준 고정)를 노렸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영기업의 공산품 가격은 높게 책정되어 농촌에 판매되었고, 이 또한 결국 정부에게 이득이 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확보된 이윤이 국가 자본으로 중공업에 투자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투자의 대부분이 산업투자, 특히 중공업에 집중되면서 제1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의 기본 건설투자의 약40%가 대형 중공업 프로젝트가 되었다.
그림13 중국의 GDP 성장(1952~79)
- 1. 자료로 작성
2. GDP : 십억 위안(元), 1인당 GDP : 위안(元)
연계

그림14 중국의 GDP 성장(1952~2009)
- 1. 출전 및 단위 : 그림 13과 동일.
이와 같은 경제정책은 어떻게 현실로 나타났을까? 우선 적어도 표면적으로 공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두었다. 1952~78년의 공업 생산량은 연평균11.5%의 성장을 거두었고, 공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에서 44%로 증가하였다(경상가격). 1933년의 공업 비중이 GDP의 2%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급속한 확장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1953~79년 사이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6.7%로 1950~73년 사이의 서유럽 12개국의 평균 성장률인 4.65%를 크게 능가하였다(그림 13, 14 참조). 이것이 단순한 기저효과가 아닌 것은 25년이라는 기간을 보면 명백하다.
농업에 있어서도 인민공사의 설치로 농업생산성 향상의 정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1979년의 곡물생산량은 1952년의 두 배였다. 대약진운동으로 인해 2,000만에서 3,500만에 달하는 아사자가 발생하였지만, 중국의 인구는 1957년의 6억5천만에서 78년에는 9억6천만으로 증가했고, 중국의 농업과 공업은 이들의 생존을 지탱할 수 있었다(표 16 참조).주 991
각주 991)
1960년대부터 중국은 식량의 순수입국이 되므로 이것이 모두 중국 농업의 성장 결과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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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6 중국의 인구 성장(人)
1952195719621965197019751978198019851986
57,48264,65367,29572,53882,99292,42096,25998,705105,851107,507
198719881989199019911992199319941995
109,300111,026112,704114,333115,823117,171118,517119,850121,121
또한 중국은 소련, 인도등과의 대립상황이 계속되면서 국제적 고립에 빠졌던 1964년에 원자폭탄, 1967년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하여 인도적 차원의 문제를 별도로 하면 국방력 강화에도 성공했고, 1970년에는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에도 성공하였다.
따라서 외형적으로는 개혁 이전의 중국 경제가 일정한 성장을 거두었고, 국방과 과학기술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던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한 ‘질’의 희생에 의한 성과였다. 언급한 대약진운동과 이어진 문화대혁명은 중국 전토에 광풍과 같은 혼란을 가져왔다. 급속한 사회주의식 빅 푸쉬(big push)전략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려 했던 대약진운동주 992
각주 992)
당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영국을 15년 이내에 추월하겠다는 것이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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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노동력 및 농산물을 공업과 수출에 집중 투입하고, 인해전술적인 전략으로 공업생산량을 급증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시 초기에는 대단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 대약진운동은 곧 잘못된 보고와 지령으로 붕괴하게 되었다. 공업 생산 및 사회 인프라 건설에 노동력이 지나치게 농촌에서 유출되면서 기후 악화도 원인이 되어 농산물은 격감했다. 농촌 곳곳에 만들어진 소형 용광로로 일급의 철강(鐵鋼)을 생산하려던 계획은 기술을 무시한 철저한 착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지의 책임자들은 경쟁적으로 생산결과를 과장하여 보고, 결국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 농산물조차 수탈되었고, 공업적 용도가 거의 없다시피 한 고철이 방대하게 생산되었다.
마오쩌둥의 복권과 함께 일어난 문화대혁명기에는 강력한 중앙통제를 바탕으로 점진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강제공출제에 기반한 저렴한 농산물과 도시 노동자층의 임금 억제를 배경으로 한 국가자본의 증대로 이루어진 투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생산성이 낮은 인민공사와 국영기업이 주요한 경제 주체였다. 즉, 일차적으로 농민을, 다음으로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희생하면서 얻어진 자본을 바탕으로 비효율적인 투자와 생산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성장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중국이가진 거대한 잠재력에 비교해서 이것은 너무나도 희생이 크고 더디며, 불안정한 성장이었다. 공산주의 혁명이 목표로 한 ‘산업화, 생활수준의 향상, 소득의 평등, 강력한 국방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3) 개혁·개방의 시작과 성과
마오쩌둥의 사망과 사인방의 숙청으로 1978년 정권을 장악한 덩샤오핑과 화궈펑[華國鋒]에게는 앞서 서술한 커다란 문제의 해결이 숙제로 남아 있었다. 중국 경제는 문화대혁명의 10년 기간을 거치면서 깊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인민공사와 같은 대규모 집단농장 체제가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저하시켰고, 강제적으로 할당된 의무 공출은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중공업우선정책이 장기간 지속되었음에도 적합한 기술적 개발이 없었던 탓에 많은 산업에서 낙후된 설비, 비효율적인 생산 방법, 방만한 경영이 일반화 되고 있었다. 사회주의적 경제건설을 위해 중공업에 자원이 편중된 결과, 경공업에 대한 투자가 소홀하여 극도의 소비재 부족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고, 에너지 생산 및 수송, 사회 인프라 구축 상태가 지극히 열악하여, 물자의 축적이 있어도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개혁파가 경제 개혁을 주장한 것은 이처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경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개혁의 방법은 1979년 6월의 전인대(전국인민대회)에서 ‘조정(調停), 개혁(改革), 정돈(整頓), 제고(提高)’의8자의 순서로 압축되어 발표되었으나, 이러한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우선된 것은 조정이라기보다는 개혁이었다.주 993
각주 993)
중국 경제의 개혁과 개방은 대체로 4 단계로 나누어져 진행되어 왔다고 이야기되는데, 제1단계가 1978.12~’84.10에 이르는 시작단계, 2단계가 ’84.10~’88.9의 전면적개화 단계, 3단계가 ’88.9~’91.12의 구조 조정단계, 4단계가 ’91.12~’02.11의 심화 및가속화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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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가장 개혁이 시급한 것은 농업 부문이었다. 1978년 시점에 전인구의 82.1%가 농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모든 취업자의 70.5%가 농림수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농업이 인민공사 제도에 의해 황폐화한 것은 전술하였으나, 이에 인민공사의 기능을 축소시켜(완전 폐지는 1982년), 농민에게는 의무 할당량을 초과하는 농작물의 자유 처분권이 주어졌다. 이것은 생산책임제주 994
각주 994)
‘산쯔이바오[三自一包]’의 산쯔[三自]란 자류지(自留地), 자유시장(自由市場), 자부영휴(自負盈虧:스스로 손익을 책임짐)을 의미하고, 이바오[一包]는 포산도호(包産到戶:가족단위로 청부함)를 의미한다. 가족단위 청부 형태에서 실제로 주류가 된 것은 포산도호가 아니라 ‘포간도호(包干到戶)’인데, 생산량에 비례하여 농작물을 분배받는포산도호에 비해 공출 의무량을 달성 후의 잉여분 전부를 농가의 소득으로 하는제도이다. 따라서 본문중의 생산책임제 설명은 포간도호에 기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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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불리는 제도였는데, 그 전신(前身)은 1960년대 류사오치[劉少奇]가 주장한 ‘산쯔이바오[三自一包]’였다. 류사오치가 이 산쯔이바오로 마오쩌둥에게 공격받고 실각했으므로, 생산책임제의 실행은 마오쩌둥의 농업정책의 오류를 인정한 셈이었다.
우선 1979년에 18년 만에 정부의 농산물 수매가격이 22.1% 인상되었다. 이어서 6만5천에 달하던 인민공사가 5,000~6,000호(최대 20,000호)로 이루어진 관할 구역의 집단소유와 집단노동을 통해 생산된 농작물을 강제 수매하고 잔여물을 ‘균등분배’하던 것과 달리, 생산책임제는 각 농민 가정이 국가와 계약한 할당량만 국가에 매도하고 잉여물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에 농민들은 초과량에 해당되는 작물의 품종을 경제성이 높은 작물로 선택하면서 경제적 환경이 개선되었다. 각 농호(農戶)의 생산 의욕은 향상되었고, 농업생산량은 증가하였다.
그림15 중국의 1인당 식량생산량
- 1. 중국 국가통계국(2000), ‘신중국50년 농업통계자료’ , 同(2002),‘중국통계연감’, 2002 등.
이상의 일련의 조치는 비참한 집단아사 발생 가능성의 저하와 이중 가격제로 인한 실질 소득 감소의 완화를 의미하였다. 도시에서도 농수산물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배급을 통해 지급되던 식량 배분의 증가를 요구하는 폭동이 감소하게 되었다. 더욱이 1985년에는 농산물의 강제공출제가 폐지되면서 농산물시장이 성장하게 되었다. 농업 부분의 이러한 성과는 중국경제의 성장에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의미했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식량 문제가 크게 개선되었다. 1인당 식량생산량은 개혁 이후 뚜렷한 증가세를 보였고(그림 15), 곡물 수입과 함께 중국의 식량 사정은 크게 안정되었다. 생산량 증가에 따라 1인당 식량생산량도 200㎏에 근접하던 1959년에 비해 개혁이 시작된 1979년에는 300㎏를 넘게 되면서 안정적으로 기아선상에서 탈출하였다(1997년부터는 400㎏). 또한 농촌의 실질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앞으로 경제발전에 필요할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이래 20년 동안 진통을 겪어온 중국사회의 안정과 발전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 결과 농수산업이 개혁 초기경제성장에 기여한 역할은 지대했다. 표 17에서 보이듯 제1산업이 경제성장에 기여한 비율은 31.8%에 달했던 것이다. 한편 시기적으로 좀 더 후일이 되지만, 농촌에 기반을 둔향진기업(鄕鎭企業)의 성장도 경제성장에 큰 역할을 하였다. 표 17의 비국유기업 기여도의 대부분은 향진기업에 의한 것인데, 그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향진기업은 원래 인민공사의사대기업(社隊企業)으로 불리던 부속기관의 후신으로, 농촌의 집단경제조직 및 농민이 투자하여 일으킨 농촌지원의무를 지닌 기업이다. 개혁 이후 도시 이전을 노리던 농촌 노동력을 흡수하여 도시의 지나친 팽창을 막으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향진기업은 ‘이토불리향(離土不離鄕 : 농업에서 비농업으로 이동하나, 농촌을 떠나지 않는다)’ 의 슬로건 아래 성장하였다. 방대한 농촌인구를 저렴한 노동력으로 이용하여 성장한 향진기업은 2000년에는 GDP의 30.4%, 국가세입의 27.5%, 총 수출에서는 42.0%(간접수출 포함)을 차지하여 고용 및 부가가치 산출에서 외자계 기업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 비록 비농업분야의 생산을 담당하였지만, 농촌 인력의 활용에 의해 성장한 향진기업은 중국 경제 성장에 농촌이 크게 기여하도록 한 것으로, 농촌 개혁이 개혁 이후 경제성장에 미친 역할을 보여 주고 있다.
표 17 중국의 산업별 경제성장 기여도(%)
1979〜841985〜93
제1차 산업31.811.6
공업 국유기업20.311.7
   비국유기업13.845.5
   집단소유제기업12.828.9
   개인소유기업0.27.7
   기타0.88.9
건설5.25.9
제3차 산업28.925.3
100100
한편 경제특구 설치와 대외개방 역시 광범위하게 추진되었다. 원래 개혁의 계획단계에서는 경제특구 및 외자기업의 유치는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플랜트 도입을 제외한 무역행위는 종속적 위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NIEs, 특히 한국과 타이완의 성장에서 얻은 교훈이 방향을 바꾸게 하였다. 이 결과 중국의 개방은 외국 기술과 자본의 유치에 역량을 기울이는 동시에, 대외 무역의 확대를 노리는 양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외국기술과 자본 유치를 위해 경제특구, 연해개방도시, 연해경제개방구, 고신기술개발구, 경제개발구, 보세구 등 다양한 종류의 개방지역이 1980~90년대에 걸쳐 설치되었다. 이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경제특구는 해외 교류가 유리한 지역을 선정, 여러 규제를 배제 또는 완화하여 교류 활성화와 경제 발전을 노리는 지역으로, 1980년 이래로 선전[深川],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 샤먼[厦門], 하이난다오[海南島]의 5개 지역이 지정되었다. 이러한 개방지구의 경제적 중요성은 외자 도입에 두드러지는데, 경제특구와 연안의 개방도시만으로도 1989년 중국 전체의 40.6%에 다하는 외자도입 계약액을, 53.5%의 직접투자 계약액을 기록하면서 중국경제의 발전을 유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과 기술도입이 도시의 공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농촌과 경제특구에 의한 개혁의 성과와 함께, 반드시 거론해야 할 것이 공업의 성장이다. 1978~84년의 기간 동안 농업 부문은 연평균 8.8%의 성장을 이루며 개혁 초기의 성장을 주도했지만, 1985년 이후 연평균 4% 내외로 안정화되면서 성장률이 감소하였다. 그러나 공업의 거의 매년 10% 이상의 성장을 지속하면서 1985년 이후 경제성장을 주도해나기 시작했다(그림 16).
그림16 개혁 이후 1, 2차 산업의 발전(1억 위안)
- 1. 중국 국가통계국 자료에서 작성.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이러한 공업 성장이 농업 부문에서의 노동력 투입만이 아니라 요소생산성의 향상에도 힘입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약진운동과 같이 생산성 향상보다는 노동력의 집중 투입에 의해 공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려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현상이었다. 그리고 생산성 향상의 배경에는 개방으로 인한 기술도입이 있었던 것이다.
4) 시장경제 발전과 고도성장
1980년대 전반에 성공적인 성과를 이끌어낸 중국은 지속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덩샤오핑이 계획한 중국 경제의 3단계 전략,즉 ‘원바오[溫飽]’, ‘샤오캉[小康]’, ‘따뚱[大同]’주 995
각주 995)
덩샤오핑은 1980년~1990년에 걸쳐 국민소득을 4배 이상 상승시켜 ‘원바오[溫飽: 기본 의식주 해결 단계]’, 2021년까지 다시 2배를 향상시킨 ‘샤오캉[小康: 의식주가 해결된 중등 이상의 복지 생활]’을, 마지막으로 2049년까지 선진국에 진입하는 ‘따뚱[大同: 태평성대]’ 단계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 ‘산바오조우[三步走]’를 87년 밝혔다. 중국은 현재 원바오 단계를 80년대 말에 달성했으며, 2002년에는 장쩌민[江澤民] 총리가 샤오캉 사회에 진입했음을 공식 선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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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한 경제발전으로 세계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는 계획은 아직 갈 길이 멀었던 것이다. 1984년 광둥성[廣東省]과 푸젠성[福建省]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대외 개방 및 개혁정책을 계속해서 밀고 나갈 것을 확실히 하였다.
그림17 중국의 산업구조 변화(대GDP 비율)
- 1. 중국 국가통계국 자료에서 작성.
이로 인해 중국 공산당은 1984년 10월 ‘중국 공산당 중앙의 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을 통해 사회주의 근본 임무는 사회 생산력 발전에 있으며, 사회주의 경제는 ‘공유제를 기초로 한 계획성 있는 상품경제’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시장경제 제도의 선별적 도입과 한정적인 개방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전면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함을 의미했다. 이러한 새로운 도약 단계에서 중국은 농촌에서 거두었던 성과를 바탕으로 도시부문의 개혁을 본격화하였다. 이것은 도시부의 기본 생산 단위인 기업의 개혁을 의미했으며, 그 주요한 방법은 기업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를 기초로 한 ‘경영 청부 책임제’, 주식회사 제도의 도입, 중소기업의 임대 경영, 노동 계약제의 시행, 그리고 개체 및 사영 기업의 허용과 장려였다. 특히 개체 및 사영기업의 허용은 이후 급증하면서 1980년대 말에는 50~80만의 기업이 1천만~1천5백만의 종업원을 고용, 국민경제의 약 3~4%를 차지하게 되었다. 표17의 1985~93년 동안 비국유기업의 폭발적 증가는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비국유기업의 증가가 단순한 수적 증가가 아님은1978년 공업 총생산액의 77.6%를 차지하던 국유기업의 비중이 1985년에는 64.9%, 1991년에는 52.9%, 1999년에는 28.2%로 하락한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개체 및 사영기업과 같은 비국유기업은 중국 공업의 발전에서 주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편 공업 성장의 결과로 중국의 산업구조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림 17에서 보이듯 제1차 산업에 대한 제2차 산업의 1970년대 초반 이래의 우세가 80년대 중반 이래 확대되었다. 특히 2차 산업의 성장과는 대비되게 1차 산업의 지속적인 점유율 하락이 눈이 띄는데, 이것이 중국이 더 이상 농업 중심의 국가가 아님을 의미한다.주 996
각주 996)
2001년의 1차산업 점유율은 15.2%, 2차는 51.1%로, 양자의 차이는 35.9%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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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공업의 급성장 속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제도가 있다. 앞서 언급한 ‘중국 공산당 중앙의 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은 경제 운영에 있어서 쌍궤제(雙軌制)라는 정책을 결정하였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새로운 시장경제적 분야의 확장을 꾀하면서도 기존의 계획경제 부문을 개혁해가면 온존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사영기업과 국영기업이 같은 품종의 상품을 생산하는 경우도 많아서, 동일 제품의 이중 가격제가 시행되었다. 당연히 여기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궤제는 경제전반에 걸친 시장경제의 침투 속도를 정부가 조절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대세는 비국유기업 제품의 증가였지만,주 997
각주 997)
예를 들어 소매상품의 경우 1978년 생산량의 97%가 정부공정가격으로 거래되었으나, 1995년에는 8.8%로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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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에 걸쳐 중국 정부는 물가의 직간접적 조절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점진적인 시장경제 도입으로, 급속한 민영화로 경제적 난관을 맛보았던 동유럽권 구공산국들과 달리 중국 경제는 순조로이 시장경제를 확대시킬 수 있었다. 동시에 중국 정부는 경제에 대한 통제 권한을 일괄적으로 내어 놓은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텐안먼[天安門] 사태에서 보았듯이 중국정부는 개혁 경제의 과정에서 나타난 분배의 문제, 관료 집단의 부패와 같은 경제적 모순에서 기인한 민중의 항의를 텐안먼 사태와 같이 강력히 진압한 것은 중국의 개혁 개방 경제가 무조건적인 민주화나 자본주의화와 연결되는 것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중국이 아직도 국영기업을 유지하고 있고, 공산당 독재의 정치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은 중국 경제가 단순히 다른 동아시아의 경제발전 국가들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경제는 성공적인 개혁 개방을 이룬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도농(都農)간의 격차의 심화, 높은 실업율, 에너지 문제, 아직도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국유기업의 개혁 등이 그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2001년 WTO 가입으로 세계경제로의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정하면서도, 2005년 10월의 공산당 16기 5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을 폐기하고 분배구조의 개선을 목표로 한 균부론(均富論)을 선택하였다. 시장경제의 확대를 통한 경제 성장을 지속하면서도,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도 대처할 것을 천명한 것이다. 개혁과 개방 경제를 통해 현재까지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온 중국이 이 새로운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 각주 989)
    OECD 추정치. 같은 해 일본의 추정치는 5조3,909억불이다. 한편 2011년에 발표된중국국가통계국에 의하면 중국의 GDP는 5조8,786억불이고, 일본은 5조4,742억불(내각부 발표)이다. 바로가기
  • 각주 990)
    A. Maddison(1998), Chinese Economic Performance in the Long Run, OECDDevelopment Center. 바로가기
  • 각주 991)
    1960년대부터 중국은 식량의 순수입국이 되므로 이것이 모두 중국 농업의 성장 결과는 아니다. 바로가기
  • 각주 992)
    당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던 영국을 15년 이내에 추월하겠다는 것이 목표였다. 바로가기
  • 각주 993)
    중국 경제의 개혁과 개방은 대체로 4 단계로 나누어져 진행되어 왔다고 이야기되는데, 제1단계가 1978.12~’84.10에 이르는 시작단계, 2단계가 ’84.10~’88.9의 전면적개화 단계, 3단계가 ’88.9~’91.12의 구조 조정단계, 4단계가 ’91.12~’02.11의 심화 및가속화단계이다. 바로가기
  • 각주 994)
    ‘산쯔이바오[三自一包]’의 산쯔[三自]란 자류지(自留地), 자유시장(自由市場), 자부영휴(自負盈虧:스스로 손익을 책임짐)을 의미하고, 이바오[一包]는 포산도호(包産到戶:가족단위로 청부함)를 의미한다. 가족단위 청부 형태에서 실제로 주류가 된 것은 포산도호가 아니라 ‘포간도호(包干到戶)’인데, 생산량에 비례하여 농작물을 분배받는포산도호에 비해 공출 의무량을 달성 후의 잉여분 전부를 농가의 소득으로 하는제도이다. 따라서 본문중의 생산책임제 설명은 포간도호에 기초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995)
    덩샤오핑은 1980년~1990년에 걸쳐 국민소득을 4배 이상 상승시켜 ‘원바오[溫飽: 기본 의식주 해결 단계]’, 2021년까지 다시 2배를 향상시킨 ‘샤오캉[小康: 의식주가 해결된 중등 이상의 복지 생활]’을, 마지막으로 2049년까지 선진국에 진입하는 ‘따뚱[大同: 태평성대]’ 단계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 ‘산바오조우[三步走]’를 87년 밝혔다. 중국은 현재 원바오 단계를 80년대 말에 달성했으며, 2002년에는 장쩌민[江澤民] 총리가 샤오캉 사회에 진입했음을 공식 선언한 바 있다. 바로가기
  • 각주 996)
    2001년의 1차산업 점유율은 15.2%, 2차는 51.1%로, 양자의 차이는 35.9%에 달했다. 바로가기
  • 각주 997)
    예를 들어 소매상품의 경우 1978년 생산량의 97%가 정부공정가격으로 거래되었으나, 1995년에는 8.8%로 감소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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