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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타이완

3. 타이완

1) 초기 혼란과 안정화
타이완은 한국과 유사하게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경험했으며, 사회 인프라가 이 시기에 도입되었다. 특히 농업에 있어서 근대적 소유권 제도와 인프라가 일본에 의해 도입된 점도 같았지만, 재배되는 작물의 종류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한국이 일본의 곡물부족에 대응하여 미작(米作)에 집중된 반면, 타이완은 수출용 농산물을 위한 상업성 농업이 상당 부분 발전되었다. 식량 공급을 위한 미작의 중요성은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상업성 작물인사탕수수의 재배에 기반을 둔 제당산업의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이처럼 한국에 비해 상품작물의 재배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일본과의 무역계정에서 상당한 흑자를 낼 수 있었다. 1910~39년에 한국의 누적무역적자가 약 13억 엔이었던 것에 비해, 타이완의 누적 무역흑자는 약 20억 엔에 달했던 것이다.
상업성 농업이 발달한 결과, 식민기 타이완 경제는 한국보다도 농업 중심적이 되어 ‘농업 타이완, 공업 일본’이라는 구조가 정착되었다. 이것은 당연히 대일 의존적 성격이 강한 경제의 성립을 의미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잠시 ‘공업 타이완 농업 남양(南洋)’ 이라는 정책이 펼쳐졌지만, 전쟁 중의 공습으로 대부분의 공업설비가 파괴되면서 거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다만 농업을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를 유지하고 안정화시키고, 농작물 가공 생산물의 운송을 위해 형성된 사회적 인프라가 남았던 것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의 타이완은 대체적으로 다음의 3단계를 거쳐 경제 발전을 이룬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단계가 1945~52년의 경제체제의 재편, 1953~63년 미당(米糖) 수출과 수입대체공업화를 통한 경제부흥기, 1964~87년경까지의 수출지향형 공업화와 대외무역의 발전을 특징으로 하는 경제성장기이다.
일본의 통치가 끝나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 위해 첫 단계로 시행한 경제체제의 재편은 과거 ‘농업 타이완, 공업 일본’의 구조가 붕괴한 탓에 절실했다. 우선은 공업 생산품의 도입처를 새로 찾아야 했는데, 1949년 이전에는 아직 국민당 정권하에 있었던 대륙 본토의 상하이[上海], 난징[南京]이 그 대상이 되어, 쌀과 설탕을 수출하고, 의료품을 수입해오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생산물 자체가 광대한 중국 본토의 시장을 대상으로 부족 상태였었기 때문에 타이완으로 수입 물가는 급등하였다.
한편 전전부터 발행된 대폐(臺幣)는 대륙에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막고자 전후에도 유지되었는데,주 986
각주 986)
전전 일본의 엔화와 타이완의 원(元)화는 동일 비율로 교환되었는데, 이 원(元)화를대폐(臺幣)라 한다. 전후에도 본토에 비해 안정된 상태였던 타이완의 경제를 지키고자 대륙의 법폐(法幣)를 직접 도입하지 않고 구 대폐를 통용시켜, 당시 대륙에서 일어나던 인플레이션이 직접 상륙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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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이 과소평가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대륙 인플레이션이 상륙하게 되었다. 따라서 수입물가의 급등과 맞물려 1948년부터 급속한 인플레이션 악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1948년 12월에 본토로부터 대량의 피난 자금이 단기간에 유입되면서 인플레이션에 한층 박차가 가해졌다. 이로 인해 1949년부터는 경제적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주 987
각주 987)
본문에서 설명한 이유 등으로 1947~48년의 화폐 발행량은 증가, 타이완의 통화는1947년말 3.2배, 1948년말에는 26.5배, 49년에는 99배 증가했다. 이로 인해 1946~48년 물가는 연평균 500% 상승했으며, 1949년초에는 3,000%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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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응하고자 통화개혁이 실시되었다. 구 대폐 40,000원(元)을 신 대폐 1원(元)의 비율로 화폐를 개혁하고, 대륙 화폐(당시 금원(金圓)이라 불리었다)와의 교환을 금지하였다. 대륙과의 경제적 연계를 끊고자 한 것이다.주 988
각주 988)
이러한 개혁은 아직 국민당 정부가 피난오기 전에 이루어졌으나, 국민당이 임명한 타이완성[臺灣省] 주석 천청[陳誠]에 의해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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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하여 설탕 수출처를 일본으로 바꾸었다. 동시에 1950년 3월 타이완은행이 월 이자율 7%(연리 125%)의 극단적인 고금리 정책을 실시하자, 시중통화가 예금으로 몰려들면서 인플레이션이 수습되기 시작하였다. 1950년의 인플레이션율은 300%로 떨어졌으며, 이후 물가는 장기적으로 안정 기조로 들어섰다(1953~60년의 평균 인플레이션율은 8.8%, 1960년대에는 평균 3% 이하). 그리고 이러한 인플레이션 안정이 한국 등 아시아 신흥공업국과 비교해 타이완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1952년에도 전체 노동인구의 56.1%를 차지했던 농림수산 및 축산업(164만 2천인)의 절대 다수를 이루었던 농업의 개혁도 추진되었다. 1949년 4월, 소작료를 37.5%로 감면(三七五減組)하고, 1951년 6월의 구 일본인 소유지의 불하(公地放領), 1952년 11월의 지주소유 농지의 강제 매입과 농민에게의 매각(耕者有其田)을 실시하였다. 일련의 개혁의 결과, 1952년에 타이완의 농업은 전전 최고 수준을 거의 회복하였다. 이어서 표 13처럼 4.8~5.5%의 안정적인성장이 1973년까지 유지되고 그 이후 성장률이 상승되면서, 타이완 경제의 안정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즉 도시거주자를 포함한 전인구를 부양할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고, 수출을 통해 외화 획득에서 커다란 역할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표 13 타이완의 시기별 경제성장(%. 무역수지액은 억 달러)
1953~631964~731974~85198619871988198919891990
부흥기안정성
장기
불안정
성장기
내수주도수출주도
GNP 성장률7.711.17.712.611.97.87.37.35.3
농업생산 성장률4.85.53.0-0.38.31.5-0.2-0.22.1
공업생산 성장률11.619.48.913.910.74.43.73.7-1
수출 성장률24.629.718.723.213.21.40.90.93.1
소비자물가 상승률8.33.69.80.70.51.34.44.44.1
무역의존도 비율28.757.398.096.497.798.592.992.989.4
국민 저축률10.025.032.038.538.534.431.331.329.7
자본형성(투자)율17.124.528.617.520.423.322.522.522.2
무역수지액-0.7-0.631157144180169169112
2) 경제 부흥과 수입대체 공업화
앞에서 본 것처럼 1953년경까지 일단 타이완 경제는 커다란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이것은 농업 생산물 및 가공품의 수출과 공업제품의 수입이라는 불완전한 경제였다. 주된 무역 상대는 미국과 일본이었는데, 일본에게는 사탕수수, 설탕, 쌀 등을 수출하는 대신 면제품 등 공업제품을 수입하였고, 미국으로부터는 거액의 원조물자와 함께 각종 공산품을 수입하였다. 따라서 농산물 가공업을 제외하고는 특징적인 공업이 없는 상태였으므로, 농업의 발전을 비료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우선은 국내 시장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업화, 즉 수입대체 공업화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간산업의 방대한 관영기업과 경공업의 민간기업으로 구성되는 이중 구조가 만들어졌다. 인플레이션 안정을 위해 설정한 고금리 정책으로 대규모의 대출을 하여 기업규모를 키우려는 민간 기업인이 적었고, 타이완의 자본형성투자의 42%를 차지한 미국의 원조는 정부를 통해 도입되었기 때문에 관영기업 대 민간기업이라는 도식은 대기업대 중소기업이라는 구조로도 정착하였다. 미국의 대 타이완 원조는 1946~62년에 44억 2,800만 달러로 한국에 이어 국가별 2위였으며, 1950~65년까지 연평균 1억불, 합계 15억불 정도의 원조가 이루어졌는데, 원조 삭감과 타이완 경제의 성장에 따라 1964년부터는 GNP의 1%선으로 떨어졌지만, 1951~61년의 기간에는 6%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었다. 이러한 원조 자금을 정부가 거의 독점한 결과, 거대 자본이 필요한 분야에 민간이 진출할 여지가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적, 식품, 자전거, 시멘트, 제지 등의 분야에서 민간 부문이 급성장하면서 일찍부터 타이완의 공업화를 견인하게 되었다. 표13에서 부흥기의 공업성장률이 11.6%인데, 이것은 관업(官業) 분야의 성장률이 8.1%에 대해 민간이 18.1% 성장한 결과였다. 민간 공업이 공업화와 경제성장을 견인한 것은 그림 10과 11에서 알 수 있는데, 수입대체 공업화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 1955년에 이미 민간 제조업의 부가가치 생산액은 관영을 능가하였고, 이후 표 13의 안정성장기에 해당하는 1965년 이후에는 가속도적으로 편차가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림 11에서 알 수 있듯이 내수주도의 경제 부흥기에는 여전히 농업의 역할이 상당했다는 점에는 주목해야 한다.
그림10 제조업 생산의 관민영 비교(%, 부가가치액기준)
그림11 GDP생산의 관민영 비교(%, 부가가치액기준)
결론적으로 타이완 경제의 부흥은 농업이 국내 수요 충족에 의한 물가안정과 외화 획득에 기여하면서, 병행적으로 이루어진 수입대체공업화가 민간에 의해 이끌어진 결과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농지개혁, 고금리 정책, 그리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1953년부터 성장보다 주로 경제 안정을 목표로 한 제1차 경제개발 4개년 계획의 수립 등 적절한 정책을 시행한정부의 역할도 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의 뒤에는 가장 중요한 자본의 제공으로 미국의 원조가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흥기 성과의 한계점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원조가 삭감되는 1950년대 말부터 나타나는 외화부족이 타이완의 경제정책을 크게 전환시키게 되는 것이다.
3) 정책전환과 고도성장
195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자, 수입대체 공업화 정책의 일반적 폐해인 시장 포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섬유, 종이, 고무, 비누 등 비내구성 소비재 분야에 포진하고 있던 민간 기업들은 빠른 성장만큼 빠른 공급초과 현상과 조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GDP 성장률도 이전의 9%대에서 1955년 8.1%, 56년 5.5%, 57년 7.3%, 58년 6.6%로 61년까지 6~7%대에서 등락을 반복하는 상태에 빠졌다. 여기에 미국 원조의 삭감과 국제수지적자의 지속으로 외화 수급 사정이 악화되고 있었다. 설비와 자원의 상당부분을 해외 의존해야 하는 타이완의 입장에서 외화 감소는 중대한 문제였다. 정부와 사회 각 집단은 논의 끝에 이러한 사태를 수출주도 공업화로 극복하기로 결정되었다. 수입대체공업화의 확대를 원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외화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수출의 중요성에 무게가 실린 것이었다.
타이완은 이제 수출 확대를 위해 기존보다 개방적인 경제 체계와 왜곡이적은 가격 체계를 구비해야 했다. 수입대체 공업화의 시기에 타이완은 일반적인 경향인 환율의 과대평가와 복수 환율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해외자본의 직접투자를 약화시키고, 국내시장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일련의 경제개혁과 함께 1달러 25위안이었던 환율을 1960년 40위안=1달러로 수정하는 환율개혁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1960년에 ‘투자장려조례’, 1962년에 ‘기술합작조례’를 발표하고, 시기적으로 다소 뒤처지나 1966년에 가오슝[高雄], 1972년에 타이중[臺中] 등에 수출가공구를 설치했다. 외국 자본을 유치하여, 타이완의 저렴한 노동력과 결합시킨 수출공업을 육성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타이완에는 1950년대에는 100만에 달하는 과잉노동자가 농촌에 있었고, 재정적자의 보전을 위해 수매하는 미가(米價)를 낮게 책정한 저가 정책으로 농민 소득과 일반적인 임금이 낮았다. 당시 타이완의 임금수준은 일본의 1/5, 미국의 1/10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1987년까지 유지된 계엄령으로 노동운동의 제한, 단체교섭 및 쟁의행위의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출하려는 외국 자본의 유인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의도는 적중하여 1960년에는 15백만불였던 외국인(화교 포함) 투자가 1964년에는 20백만 불, 68년에는 90백만 불, 72년에는 127백만 불로 증가하였고, 1980년에는 466백만 불로 확대되었다. 또한 일본과 구미권의 외자는 화학, 전기·전자, 기계, 서비스 등에 진출하여 기존 타이완의 공업과 큰 마찰이 없이 중화학공업에 집중되었다.
이렇게 외국 자본의 도입으로 수출주도 공업화는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표14에서 보듯이 수출에서 공업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 이래 급속히 증가하여 1970년경에는 사실상 대부분이 되었다. 한편 공업발전을 유지할 자본재는 1960년에 급증한 이래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표14 타이완의 수출입 구성 변화(%)
수출수입
농산물농산 가공품공업제품자본재농공원재료
및 연료
소비재
195528.161.510.416.074.78.8
196012.055.732.327.964.08.1
196523.630.446.029.365.65.1
19708.612.878.632.362.84.9
19755.610.883.630.662.66.8
19803.65.690.823.470.85.8
19851.54.793.823.867.78.5
19881.44.194.528.064.47.6
환율 조정과 저렴한 노동력, 안정적인 노사관계, 외자의 자본력과 기술력이 결합되면서 타이완의 공업은 경쟁력을 획득하였다. 이에 따라 표 15에서 알 수 있듯이 수출입 규모가 급증하면서무역수지가 점차 개선되어 1976년부터 안정적으로 흑자 기조가 유지되었다. 이것은 타이완의 오랜 고민이었던 외화 부족이 해결되면서 경제성장과 공업화가 동시에 궤도에 올랐음을 의미했다. 한편 이러한 가운데 이자율은 여전히 고금리를 유지하였다. 1964년의 중앙은행의 재할인율은 11.52%였고, 이후 1960년대에 11.52~10.80% 선을 유지하였다. 이것이 1970년대에도 약9.9%, 1981~85년은 7.75%를 유지하였다. 환율도 1960년 달러당 40위안으로 정해진 이래 1972년까지 40 내지 40.05위안, 1985년까지 36에서 40.27위안 사이에서 안정되었다.
표 15 타이완의 수출입 및 무역수지 (1955~85, 백만불)
수출수입무역수지
1955123201-78
1960164297-133
1965450556-106
19701,4811,524-43
19755,3095,952-643
19768,1667,599567
19779,3618,511850
197812,68711,0271,660
197916,10314,7741,329
198019,81019,73377
198122,61121,1991,412
198222,20418,8883,316
198325,12320,2874,836
198430,45621,9598,497
198530,72320,10210,621
따라서 타이완은 물가와 환율 안정에 힘입어 인플레이션이 없는 상태에서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NIES들이 겪었던 경로와는 다른 성장 방식이었다. 이렇게 하여 타이완의 고도성장은 시작되었고(표 13 참조),그 결과는 그림 12처럼 요약할 수 있다. 1945~50년경 상대적으로 근접한 GDP에서 출발한 한국, 북한, 타이완의 경제는 타이완이 부흥기를 거치면서 격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인구에서 한국의 절반 이하, 북한과 유사한 규모를 가져온 타이완은 비율적으로 한국과 비슷한 성장세를 보이며 북한을 크게 추월해왔다. 1인당 GDP에 있어서는 수출지향 공업화의 개시를 전후하여 북한은 물론 한국에게도 일정한 격차를 두고 지속적으로 능가하게 되었다. 경제 성장을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림12 타이완, 한국, 북한의 장기 GDP 및 1인당 GDP 비교(1945~2000, 상 : 백만달러 하 : 달러)
- 1. 상의 좌는 GDP 1945~73, 우는 1974~2000, 하의 좌는 1인당 GDP 1945~73, 우는 1974~2000.
2. 북한의 1945~1973년의 1인당 GDP는 한국과 유사하거나 약간 낮은 것으로 나오나, 통계수치에 발표치 및 추정치가 많아 제외.
3. Angus Maddison(2006), The World Economy 의 각소에서 작성.
4) 문제점 부상과 개방화
수출지향과 공업화의 달성에 성과를 거둔 타이완의 경제는 1971년 닉슨쇼크에 대응하여 위안화의 평가절하를 단행, 위기를 비교적 순조로이 넘겼다. 그러나 이처럼 성공을 거둔 타이완 경제에도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경제성장으로 국민들의 생활이 향상되면서 내구성 소비재에 대한수요가 증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보다 강력한 중화학공업의 확대를 이루어 내야 했다. 또한 빠른 임금상승으로 단순 조립형 산업의 발전과 유치가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들과 함께,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기존의 사회적 인프라가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 활동이 확대되어 사회적 인프라의 확충이 필요했고, 여전히 수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공업 부분에서도 생산력 확대를 위한 중간재 및 설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1969년에는 타이완 정부도 산업형태의 자본집약화과 본격적인중화학공업화가 필요함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도 석유파동으로 인해 세계경제가 저성장 단계로 접어들었고, 단순 조립형 산업에서는 다른 개발도상국들과의 경쟁이 격화되었기 때문에 타이완의 산업구조 고도화는 필연적인 숙제였다. 이를 위해 우선 사회적 인프라의 확충이 계획되었는데, 1974년에 최종 결정된 장징궈[蔣經國] 총통의 ‘10대사업’이 그것이다. 도로, 항만, 철도, 공항의 건설 및 확충과 석유화학, 철강, 조선 산업의 발전을 목표로 한 10대사업은 계획 기간(1974~78)에 총 70억 달러, 타이완의 전체 투자액의 25%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규모 사업의 추진에 힘입어, 타이완 경제는 다시 한 번 약진하게 되었다. 1975~77년에 타이완 경제는 13.9%, 제조업은 22.5%의 성장을 이룬 것이다.
이어서 금리 인상을 통해 저축률을 상승시키고, 고도성장으로 인해 급증한 재정 수입을 바탕으로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투자 자금을 축적하였다. 타이완의 재정 수입은 약 70%가 국영기업의 이익과 공공채 발행으로 충당되었는데, 이 때문에 낮아진 조세 부담은 민간의 저축과 자본 형성을 촉진시켰고, 조세 저항의 저하로 조세 수입도 순조로이 증가했다. 이와 같은 호조건 아래, 석유파동기의 단기적 위기를 넘기고 중화학공업의 고도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타이완의 중화학공업은 전기, 기계 등 중화학공업에서도 비교적 노동집약적 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한국과 같이 대규모 민간 자본이 축적되지 못한 탓에, 거대 장치 산업보다는 숙련노동에의 의존도가 높은 분야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완성재보다는 중간재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산업 고도화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언급한대로 타이완의 경공업으로부터의 수요와 함께, 당시 선진국들의 타이완에 대한 수요가 단순 조립상품에서 보다 수준 높은 조립 제품이나 부품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타이완의 중화학관련 기업은 OEM방식이나 하청으로 진출한 경우가 많게 되었다. 이 때 주로 국영기업이 포진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전통적으로 받아온 강력한 정부의 보호와 군수산업의 수입대체적 성격 때문에 수출 분야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고, 따라서 중화학공업에 있어서도 수출 분야에 진출한 것은 중소기업이 주류가 되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이완 경제의 변화는 그 뒤로도 이어진다. 이미 높아진 임금과 지속적인 환율의 평가절상 요구, 개방화의 요구는 장래 타이완의 경공업이 지속적으로 수출산업의 주역으로 남아있는 것을 어렵게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980년대부터 타이완은 국가 주도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을 도입하였고, 1980년대 중반 무렵에는 기계기구, 반도체, 컴퓨터, 통신, 로봇공학, 생명공학 등이 새로운 전략산업으로 부상하였다. 이중 특히 성공한 것이 IC산업이었고, 이 결과 PC와 주변기기들이 타이완의 가장 중요한 수출산업으로 1980년대 이후 부상하였다. 이미 이 무렵에는 개방화에 대한 요구와 위안화 절상으로 전통적인 경공업 제품 섬유, 신발 등 은 거의 경쟁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타이완 수출 산업의 주역으로 PC기기가 부상한 것이다.
이처럼 타이완은 1950년대 이래 지속적인 수출 중가와 산업 고도화, 인플레이션의 억제와 고도성장을 달성하여 왔다. 동아시아 외환위기도 비교적 순조로이 극복했으며, 2000년대 초반의 세계 경기 후퇴와 양안(兩岸) 관계 악화에 따른 경기 후퇴도 2003년부터 극복하여 완만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2002년에는 WTO가입에도 성공하여 오랜 기간 중국에 밀려 국제적 고립상태에 빠져있던 외교 상황도 호전될 가능성이 생겼다. 비록 정치적 불안정, 국제시장의 부침, 중국의 견제 등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자본, 기술, 노동력의 풍부함, 높은 노동생산성, 안정적인 노사관계, 중국경제의 성장으로 인한 시장 확보 가능성 등은 타이완의 경제를 비관적으로만 볼 수 없게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있어온 외교상의 국제적 고립에도 불구하고, 산업 고도화와 경제의 성장, 수출의 증대와 기술의 발전 등 실로 다방면에서 걸친 성과를 그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이루어 온 것이 타이완 경제이기 때문이다. 비록 국토와 인구가 작기는 하지만, 내실 있는 성장으로 세계 무역에서 2.5%를차지하는 안정적인 위치까지 성장한 역사에는 주목할 바가 있다고 하겠다.

  • 각주 986)
    전전 일본의 엔화와 타이완의 원(元)화는 동일 비율로 교환되었는데, 이 원(元)화를대폐(臺幣)라 한다. 전후에도 본토에 비해 안정된 상태였던 타이완의 경제를 지키고자 대륙의 법폐(法幣)를 직접 도입하지 않고 구 대폐를 통용시켜, 당시 대륙에서 일어나던 인플레이션이 직접 상륙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987)
    본문에서 설명한 이유 등으로 1947~48년의 화폐 발행량은 증가, 타이완의 통화는1947년말 3.2배, 1948년말에는 26.5배, 49년에는 99배 증가했다. 이로 인해 1946~48년 물가는 연평균 500% 상승했으며, 1949년초에는 3,000% 상승했다. 바로가기
  • 각주 988)
    이러한 개혁은 아직 국민당 정부가 피난오기 전에 이루어졌으나, 국민당이 임명한 타이완성[臺灣省] 주석 천청[陳誠]에 의해 추진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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