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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일본

1. 일본

1) 전쟁 전후 축적된 경험의 연속성
1945년 8월 15일 패전의 시점에서 일본 경제는 사실상 ‘붕괴’ 상태였다.1941년에 650만 톤에 달했던 보유 선박량은 43년말에는 490만 톤이 되었고, 44년에는 무려 410만 톤의 선박이 격침되어 필사적인 건조 노력에도 불구하고 패전 시 보유선박은 134만 톤, 그 중 운항 가능한 선박은 80만 톤에 불과했다. 이 결과 1945년에는 전시 경제를 총괄하던 물동(物動)계획이 전쟁 수행의 최중요 자재인 석탄과 철광석의 운반을 포기하고 식량인 소금과 곡물 수송에 전력을 기울여야만 하였다. 공업생산에 필요한 중요 물자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유입해야 하는 일본 경제로써 이것은 사실상 경제 활동의 중단을 의미했다.
한편 군수산업의 성장을 통해 획득한 경제적 성과도 대부분 상실되었다. 1935년 국부는 약 1,868억 엔으로 추산되는데, 1945년의 잔존국부는 1,889억 엔에 불과하여 10년간 거의 증가하지 못한 것과 같은 결과였다. 이외에도 장기간 원료공급지와 시장을 겸하였던 식민지와 점령지의 상실, 해외 거주일본인의 유입으로 인한 농공산물의 부족, 파멸적인 인플레이션과 함께 처참하게 파괴된 인프라 등은 일본 경제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표1. 패전시 일본의 피해 상황 (억엔)
피해 합계상정 잔존액종전시 잔존국부피해율(%)
자산적 국부총액64325311,88925
건축물22290468225
공업용기계8023315434
선박74911882
전기가스설비1614913311
가재가구9646436921
생산품7933025124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듯, 일본은 1960년대의 급속한 성장을 거쳐 세계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활했고, 지금까지 기계공업을 비롯한 각종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 일류의 경쟁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장에서 다루고 있는 동아시아 각국이 전후 파멸적인 상황에서 부흥을 이룩한 것은 일본과동일하지만, 2010년 시점까지 1인당 국민소득으로 표현되는 ‘부’, 그리고 근대적인 경제 성장에 필수적인 ‘기술력’과 시장경제의 운용 경험에서 일본에 필적하는 나라는 없다.주 981
각주 981)
GDP에서 중국이 일본을 2010년에 추월하여 제2위에 올라 선 것은 사실이나, 산업기술과 1인당 국민소득에 있어서 뒤지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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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이것은 일본의 출발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후의 일본경제 성장이 자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후 미소대립에 의한 미국의 원조와 한국 전쟁이 없었다면 일본 경제는 그토록 빨리 회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1950~60년대 서방 세계의 경제 성장이 없었다면 일본 경제 역시 고도성장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세계시장의 성장과 일본 엔화의 저평가는 일본 경제의 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인 요소만으로는 일본이 다른 동아시아 국가를 훨씬 뛰어넘는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었던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단순히 외부 요인에 의해 일본이 타국을 능가하는 성장을 이루어졌다고 보는 경제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양한 측면에서 원인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우선 일본이 다른 동아시아국가와 달랐던 것은 20세기의 에토스였던 대량생산 내구제품(耐久製品)에 대해 이미 상당한 기술력을 축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기술력은 두 가지측면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제품의 성능을 결정하는 설계 능력, 또 하나는 경제성과 직결되는 생산 능력이다. 종종 조롱거리로 회자되던 태평양전쟁기의 일제(日製) 병기들은 분명히 구미 제품에 비해 성능에서 열등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4년에 걸친 전쟁에서 군함, 항공기, 전차, 각종 총포류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대량생산해 냈고, 그 상당수가 일정 부분 단순한 구미 제품의 모조가 아니라 자력으로 개발해 낸 것들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아시아의 어떤 국가들도 이러한 일본의 ‘저질 모조 병기’에 필적하는 제작이나 생산을 할 수 없었다.
생산력에서도 일본은 미국은 물론, 소련, 독일, 영국에 뒤졌다. 총력을 기울여 만들어낸 항공기의 숫자는 1944년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도 미국의1/3 이하였다. 항공기만이 아니라 선박, 전차, 총포류, 의복 등 모든 분야에서일본은 미국에 견줄 수 없었고, 독일, 소련, 영국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동아시아 국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성적이었다.
표2. 일본과 세계의 상품 수출액 증가(백만불)
18701913
(성장률)
1929
(성장률)
1950
(성장률)
미국4032,380490.6%5,157116.7%10,28299.4%
영국9712,555163.1%3,55038.9%6,32578.2%
독일4242,454478.8%3,21230.9%1,993-38.0%
프랑스5411,328145.5%1,96548.0%3,08256.8%
캐나다58421625.9%1,141171.0%3,020164.7%
네덜란드158413161.4%80093.7%1,41376.6%
이탈리아208485133.2%78361.4%1,20654.0%
호주98382289.8%59255.0%1,668181.8%
스웬던41219434.1%486121.9%1,103127.0%
소련216783262.5%482-38.4%1,801273.7%
스위스13222671.2%40478.8%894121.3%
인도255786208.2%1,17749.7%1,145-2.7%
일본153152000.0%969207.6%825-14.9%
중국102299193.1%660120.7%550-16.7%
필리핀294865.5%163239.6%331103.1%
조선(남한)015 159960.0%23-85.5%
타이완26 125380.8%73-41.6%
두 번째로 전전(戰前)의 일본 경제는 이미 산업혁명을 완수하고 제도적으로 경험을 축적하면서 성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공업발전에 기초한 수출 확대가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1870~1913년 사이의 경공업에 기반을 둔 상품수출증가는 20배에 달했고, 이 결과 동아시아의 경제적 거인이었던 중국을 능가하게 되었다(1820년경 중국은 세계 GDP의 32%를 차지하는 ‘경제대국’이었다). 1929년에는 일본의 상품 수출액은 9억 6,900백만불로 1913년의 세계 16위에서 7위 규모로 상승하였고, 식민지였던 조선과 타이완, 필리핀(미국) 등을 제외하면 성장률은 주요국 중 수위였다. 이러한 발전을 증명하듯이 일본 경제의 성장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50년까지의 일본 경제의 성장률은 분명히 고도성장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아시아권의 국가 중에서 상위를 유지했다(표 2 참조). 더욱이 1930년부터 전쟁으로 인해 GDP 규모가 축소되기 이전인 1942년까지 13년 동안의 GDP 성장률은 평균 4.2%로 세계 최상위 수준(같은 시기 서구 국가들은 대공황 시대였다)이었고, 여기에서 군수공업을 중심으로 한 중화학공업의 급속한 성장의 역할은 막대했다. 즉 이 시기의 경제성장의 견인차는 기존의 경공업과 전후(戰後) 일본 경제 성장을 이끈 중화학공업이었으며, 이것은 일본의 공업 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중점을 옮겨가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표3. 일본과 세계의 장기 경제성장률(%)
1870~19131913~501950~731973~98
1인GDPGDP1인GDPGDP1인GDPGDP1인GDPGDP
서유럽1.322.10.761.194.04.811.782.11
비유럽권 서구1.813.921.552.812.444.031.942.98
일본1.482.440.892.218.059.292.342.97
아시아(일본제외)0.380.94-0.020.92.925.183.545.46
라틴 아메리카1.813.481.423.432.525.330.993.02
동유럽 및 구소련1.152.371.51.843.494.84-1.1-0.56
아프리카0.641.41.022.692.074.450.012.74
전세계1.32.110.911.852.934.911.333.01
이처럼 경제적 성장이 이어지는 가운데, 일본경제는 제도적으로도 각종경제 관련 제도들을 수정해가며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다. 쇼와[昭和]금융공황(1927년)을 거치면서 소규모 부실은행의 정리가 진행되었고,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와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의 시대를 거치면서 외환과 재정 분야에서 뼈아픈 경험을 얻었다. 이어서 전시경제의 시작으로 자본과 물자의 집중, 배분, 통제의 시스템을 대규모적으로 경영하였고, 이 과정에서 생긴 시스템과 제도는 결국 전후와의 연속성이 강력히 주장될 정도로 일본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기까지 본 것과 같이 전전 일본 경제가 축적한 경험과 실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 수준이 서구의 주요 열강에 뒤진 것은 사실이나, 적어도 그들과 일본 사이의 거리는 일본과 동아시아 제국(諸國)과의 거리보다 훨씬 가까웠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과 ‘자산’은 패전으로 소멸된 것이 아니라, 인적 자원과 제도를 통해 전후에도 전달되었던 것이다.
2) 전후 개혁과 경제구조 변화
패전 이후 일본은 맥아더의 지휘 아래 미군이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연합국사령부(GHQ) 의 점령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다시는 일본이 군국주의적인 정책으로 자신들에게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점령정책의 주안점을 놓았다. 이 결과 일본에서는 전후 3대 개혁이라 불리는 상징 천황제의 신설, 노동운동 및 정치활동의 자유화, 경제개혁이 추진되었고, 이중 경제개혁은 다시 재벌해체, 농지개혁, 노동개혁, 금융 및 재정제도의 개혁으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또한 군대의 보유는 금지되었다. 이러한 개혁이 추진된 이유는 연합국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전전 일본 사회의 지배계급인 재벌, 지주, 정치가, 군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수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거나 호도하여 전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재벌 조사단장인 에드워드(Corwin D. Edwards)는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재벌의 지배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군국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으로서의 중산계급의 발흥을 억눌러 버렸고, 경제적인 면에서는 노동자에 저임금을 강요하여 국내시장을 축소시키고 수출의 중요성을 높여 제국주의적 노동을 강화시켰다…”
 
에드워드의 견해는 사실상 연합국의 일본의 전쟁 도발 원인에 대한 견해였는데, 국민의 대다수를 정책결정의 과정에서 배제하고, 향상된 생산 능력으로 대량생산된 제품의 시장을 국제 경쟁이 아니라 식민지 획득으로 얻으려한 재벌이 지주, 정치가, 군대와 담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고 보고 있는 것이었다. 동시에 재벌과 지주는 일본 국내에서 노동자와 소작농을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하였기 때문에, 이들로 구성될 건전한 내수시장이 축소되어 재벌과 지주의 생산물을 판매할 해외시장을 획득할 목적으로 군부와 정치가를 지원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일본에서는 해외시장의 획득 이유를 1930년대의 블록경제 형성에 따른 수출시장의 축소에서 찾는 세력도 많았지만, 그 진위를 떠나 연합국의 이러한 해석은 당연히 구정치인 및 군인들의 공직 추방, 재벌 및 지주의 해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의 재벌들은 4대 재벌주 982
각주 982)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야스다[安田], 스미토모[住友]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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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하나였던 야스다[安田]가 제출한‘야스다 플랜’에 따라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도는 의도한 바를 이루지 못하였다. 냉전의 진전으로 일본을 강력한 자본주의 우방으로 재건하여 공산권에 대항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미국의 정책이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47년을 경계로 정치활동 및 노동운동의 자유화에는 제한이 가해지게 되고, 구정치인 및 경영인들의 사회복귀도 허락되었다. 이 때문에 결국 거대 재벌은 일단 해체되었으나 사실상 주된 자본 제공자인 주거래은행을 중심으로 하여 다수의 기업이 재결합한 케이레쓰[系列] 집단이 형성되었고, 3개로 나뉘었던 미쓰비시 중공업이 다시 재결합한 것처럼 1960년대까지 구 재벌계의 대표기업이 다시 재건되는 경우도 있었다.
금융 및 재정에 대한 개혁에서도 대장성(大蔵省)의 일본 금융에 대한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던 노력은 결국 동성(同省)의 강력한 저항으로 애매한 형태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경제 개혁의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농지개혁은 상당히 철저히 진행되어 농촌부에 중산계층이라 할 만한 소규모 자작농을 다수 탄생시켰다. 이에 관해 표 4와 그림 1을 살펴보자.
표4. 일본의 산업별 취업자(단위 : 천인(千人))과 점유율(%)
제1차 산업제2차 산업제3차 산업분류불가
192014,672(53.8%)5,598(20.5%)6,464(23.7%)527
193014,711(49.7%)6,002(20.3%)8,836(29.8%)71
194014,392(44.3%)8,443(26.0%)9,429(29.0%)218
195017,478(48.5%)7,838(21.8%)10,671(29.6%)37
195516,291(41.1%)9,247(23.4%)14,051(35.5%)2
196014,389(32.7%)12,804(29.1%)16,841(38.2%)8
196511,857(24.7%)15,115(31.5%)20,969(43.7%)19
197010,146(19.3%)17,897(34.0%)24,511(46.6%)40
19757,347(13.8%)18,106(34.1%)27,521(51.8%)167
19806,102(10.9%)18,737(33.6%)30,911(55.4%)62
19855,412(9.3%)19,334(33.1%)33,444(57.3%)167
19904,391(7.1%)20,548(33.3%)36,421(59.0%)321
19953,820(6.0%)20,247(31.6%)39,642(61.8%)432
1950년 단계에도 아직 일본은 농업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1차산업에 가장 많은 취업자가 있었다(48.5%). 한편 그림 1을 보면 자작농, 자소작농(자작이 주(主)이나 소작을 겸하는 계층), 소자작농(자소작농의 반대)과 같이 자작(自作) 농지를 보유하는 계층이 1941년의 68.5%에서 90.1%로 증가하였고, 특히 자작농이 27.5%에서 55.0%로 두 배가 되었다. 이것은 제1차 산업이 차지하는 취업인구의 비중을 볼 때, 전전에 비해 국내시장의 구매력을 높여줄 중산계층이 급증하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이것이 즉각적인 농촌의 부흥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으나, 전전과는 분명히 다른 현상이었다.
한편 노동개혁으로 노동자들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쟁의권을 인정하는 노동조합법(1945)과 노동관계조정법(1946), 노동기준법(1947)등이 제정되어 전전에 비해 대폭 향상된 권리가 노동자들에게 부여되었다. 이것 역시 노동자의 권리 향상을 통해 향후 경제적 지위의 상승에 일조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이와 같이 전후 개혁은 변형과 반동을 통해 연속과 단절이 공존하는 형태로 일본 경제를 변형시켰다. 식민지와 같은 자원 공급지와 상품시장이 상실된 대신에 국내시장에서는 시장 확대의 가능성이 열린 구조가 만들어진 반면, 기업의 소유와 지배구조가 변형되면서도 기존으로 회귀하는 측면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일본의 경제는 전전과 전후가 완전히 단절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해 일부가 변형되면서 전체적으로는 전전과 다른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림1 농지개혁 이후의 소・자작농 구성 비율 (단위 : 천호(千戶))
- 1. Hitachi Digital Heibonsha(2000)『世界大百科』年鑑·便覧·地図』에서 작성.
3) 전후 부흥과 고도성장
패전 이후 절망적인 상태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폭발적인 인플레이션과 식량을 비롯한 각종 자원의 부족이었다. 패전에서 반년이 지나는 사이에 화폐는 약 2배가 증가했고, 전쟁 중에 계약된 군수물자와 국채에 대한 대금이 시중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인플레이션이 생긴 것이다. 한편 공습으로 인한 주요 생산시설의 해체와 원료 공급의 두절주 983
각주 983)
패전 후 일본으로의 물자 도입은 연합군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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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극단적인 생필품 부족을 일으켜, 화폐가치의 하락과 함께 인플레이션을 더욱 부추겼다. 이로 인해 1945~49년 사이 소비자물가는 79배, 도매물가는 60배 상승하였고, 이를 막고자 실시한 화폐 개혁과 공정물가제는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지하 경제만 키우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국민 경제를 유지 및 활성화할 자원, 자재, 설비의 부족과 지나친 통화 팽창에 있었다. 즉 공급되는 물자가 너무나도 적은 반면, 통화는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공급된 통화량에 맞추어 생산능력을 확장하던가, 아니면 통화량을 생산력이 지탱하는 선으로 축소시켜야 했다. 그러나 화폐개혁 등의 방법으로 강제적으로 통화량을 축소시킬 경우,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기업들이 대규모로 도산하며 대공황이 도래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시도된 첫 번째 부흥정책이 경사생산방식(傾斜生産方式)이었다. 점령당국으로부터 월동용으로 긴급 도입된 중유주 984
각주 984)
당시 일본 정부는 석유 등 중요 원자재를 GHQ의 허가 없이 수입할 수 없었고, 대금으로 지불할 외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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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철강 생산에 투입하고, 이로 인해 생산된 철강을 이번에는 탄광에 집중 투입하여 채탄량을 증가시킨 뒤, 다시 채탄된 석탄을 철강 생산에 투입하여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계획의 요점이었다. 에너지원인 석탄과 공업의 근간인 철강의 생산량을 교차적으로 증가시켜 고용과 공급을 확대, 경제를 활성화시키려했던 것이다. 이 계획은 1947년 하반기까지 채탄량을 3,000만톤까지 회복시키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아직 이것만으로 경제 전체를 활성화시킬 수는 없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자금의 공급원으로 만들어진 정부출자의 부흥금고가 발행한 채권은, 결국 시중의 구입 능력이 약했던 때문에 일본은행이 인수하였고, 이로 인해 다시 강도 높은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게다가 부흥금고의 자금을 대출받아 간신히 경영을 유지하는 기업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산업경쟁력의 악화도 심각하였다.
바로 이때, 즉 1949년에 일본을 자본주의 체제의 일원으로 부활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이 확정되면서 일본의 경제안정을 미국이 직접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이 선택한 수단의 핵심은 고도의 긴축예산이었다. 경제안정을 위해 무엇보다도 긴급한 것이 인플레이션의 종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계획의 실행자인 조셉 돗지(Joseph Morrell Dodge)의 이름을 따서 ‘돗지 라인’이라 불리운 이 정책은 심각한 디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일례로 1948년에는 697건에 불과하던 기업 정리가, 다음해인 1949년에는 무려 10,509건으로 급증하였고 정리해고는 22,829인에서 489,641인으로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 도요타조차도 불황을 넘기기 위해 정리해고를 강행, 노사대립 끝에 해고 노동자와 함께 사장인 도요타 기이치로[豊田喜一郎]도 같이 사직하였다.
그러나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각 분야의 기업들이 한계점에 도달했던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어난 ‘조선특수(朝鮮特需)’는 단숨에 모든 상황을 변화시켰다. 당시 GNP의 3%에 해당하는 1,184억엔(1950.6~51.6)의 특수는 그 금액의 크기도 중요하였지만, 자원 없이 공업 설비만을 갖춘 일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외화를 획득하게 하였다.
획득한 외화로 제품을 생산할 원자재를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일본 경제는 부흥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표 5를 보면 GNP, 개인소비, 광공업 생산, 철강업 등의 주요 지표 및 산업이 조선 특수 기간 중에 회복된 것을 알 수 있다. 전전부터의 유산이 많았던 위에, 파괴된 인프라의 복구를 위해 한 발 먼저 전전의 수준을 넘어선 기계공업과 함께, 일본 경제의 각 분야는 확실히 부활의 조짐을 보이게 되었다. 확고한 신뢰가 있는 외화(달러)의 증가에 기초하여 늘어난 통화는 그 상당 부분이 특수 관련 기업에 흘러들어가 소비 시장의 형성과 설비 개선의 자금으로 사용되게 되었고, 소득이증가한 개인들은 패전 이후 극도로 눌러왔던 소비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출을 늘리기 시작했다(‘소비경기’라 불리었다).
이로 인해 국내 시장이 회복되고 수입이 증대된 기업은 다시 이윤을 장래를 위한 투자로 돌리는 선순환 구조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경기가 살아나고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주권을 되찾은 일본은, 1954년의 짧은 경기 조정을 거쳐 1955~73년까지 연평균15.1%(명목. 실질로는 9.8%)의 경제성장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도성장의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약 20년에 걸친 이 성장은 일본을 ‘경제대국’의 위치로 끌어 올렸다. 표 6에 의해 세분화된 고도성장기는 5번의 경기확장과 수축 국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경기의 이름에 붙은 진무(神武), 이와토(岩戶), 이자나기(いざなぎ)는 일본 신화의 인물이나 장소이다.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은 해당 인물이 태어난 이래 가장 경기가 좋다는 의미로, 다소 과장 섞인 표현에서 당시의분위기를 알 수 있다.
표5. 일본의 전후 부흥 전전 대비율
지표1946년전전 수준을 돌파한 연도
GNP69.3108.8(1951)
(1인당)(63.5)103.4(1953)
개인소비62.5101.0(1951)
(1인당)(57.1)102.4(1953)
민간고정자본87.5102.6(1951)
수출등의 수입2.5109.3(1957)
수입등의 지출13.2116.0(1956)
광공업 생산27.8100.7(1951)
철강업22.3118.7(1950)
기계공업50.5116.2(1949)
섬유공업13.0105.0(1956)
농업생산84.7111.4(1952)
표6. 고도성장기의 일본
경기 순환 명칭연도
진무(神武) 경기55~57
나베조코(鍋底)불황57~58
이와토(岩戸) 경기58~61
62년 불황61~62
올림픽 경기62~64
65년 불황64~65
이자나기(いざなぎ) 경기65~70
70년 불황(엔화 절상)70~71
가격 경기71~73
74년 불황(오일 쇼크)73~75
표 6에서 보이듯 불황 국면은 단기간에 종식된 것에 비해, 호황 국면은 최장의 이자 나기 경기의 경우 57개월 4년 9개월에 이를 정도로 장기간 유지되었다. 이러한 장기 호황 속에 표7처럼 GDP는 급성장하였다(본문의 평균 성장률과 다른 것은 선택된 데이터의 수치 차이에 의함). 이 사이에 일본의 산업구조는 그림 2에서 보이듯 제조업이 압도적인 위치를 유지·확대하였고, 농림수산업은 축소되었다. 또한 그림 3처럼 건설업과 제조업의 성장률은 농림수산업을 크게 능가하면서 산업 전체의 성장을 견인하였다. 즉 고도성장의 견인차는 제조업과 같은 공업 분야이었고, 이중에서도 특히 중화학공업의 발전이 두드러졌는데, 이것은 전전의 중화학공업 성장이 이어진 것을 의미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중화학공업의 성장(제조업 내 비율이 1950년의 50%에서 70년의 67%로 성장)으로 1차 산업생산물이나 경공업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들이 대량생산되면서 막 회복된 국내시장과 수출시장에서 순조로이 판매되었고, 이로 인해 근로자의 소득이 확대되어 소비시장이 재확대 되었으며, 생산자들은 장래의 생산 확대를 노리고 설비투자를 확장하여 경기가 활성화되는 구조였다. 이때 국내 소비시장과 수출, 투자가 고도성장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는데, 1955~70년 사이 경제성장 기여도는 국내 소비시장이 46%, 민간투자설비가 27.6%, 수출이 14.3%로 1~3위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표7. 고도성장기의 국내총생산(GDP)   (단위: 십억엔)
명목(성장률)실질(’90년 기준)(성장률)
19558,371.3 52,271.0
19569,443.3(12.8%)55,512.6(6.2%)
195710,861.3(15.0%)59,580.7(7.3%)
195811,451.0(5.4%)63,391.1(6.4%)
195913,088.1(14.3%)68,679.8(8.3%)
196015,942.1(21.8%)76,414.6(11.3%)
196119,325.8(21.2%)84,054.3(10.0%)
196221,767.6(12.6%)89,699.6(6.7%)
196325,131.0(15.5%)96,618.8(7.7%)
196429,331.9(16.7%)105,541.0(9.2%)
196532,687.6(11.4%)110,946.7(5.1%)`
196637,917.3(16.0%)121,710.5(9.7%)
196744,743.9(18.0%)134,446.8(10.5%)
196852,745.8(17.9%)148,601.1(10.5%)
196961,971.9(17.5%)166,111.1(11.8%)
197073,436.0(18.5%)182,944.3(10.1%)
197180,473.2(9.6%)191,599.9(4.7%)
197292,844.7(15.4%)208,064.3(8.6%)
1973113,807.3(22.6%)225,120.8(8.2%)
연평균 15.7% 8.5%
그림2 고도성장기의 산업구조(점유률)
그림3 고도성장기의 산업 성장률
이 같은 고도성장의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있는데, 같은 시기세계가 동반성장(서구 선진국들도 평균 6~8%)하면서 일본의 수출시장이 되었고, 에너지원인 석유가격이 저렴한 가운데 환율이 저평가(1달러=360엔)되어 있었다는 외부 요건도 컸으나, 국내적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까지 성장한 기술력과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제공되었다는 점과 빈약한 사회복지로 노후를 대비한 국민 저축이 대단히 활성화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교육의 정착으로 이미 우수한 노동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일본은 전쟁으로 생활수준이 극도로 하락한 탓에 저렴한 비용으로 이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교육 확대라는 사회적 비용없이 후진국의 이점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철강업, 조선업과 같이 이미 상당 수준에 올라선 기반산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후 서구로부터의 기술 도입 속도가 빨랐고, 중간재의 국내 조달 역시 빠른 시일 내에 달성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산업 연관성이 높은 고도의 기계·전기공업 대량생산체제가 필요한 자동차, 가전산업 등 의 성장 역시 상대적으로 수월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술하는 일본식 생산시스템이 성립되었다. 아직 자본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일본기업은 향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원가절감형의 대체기술을 찾아냈던 것이다.
한편 노후 대비 등을 위해 선택된 국민의 저축 중시는 투자 자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호송선단 방식 등 정책적 배려에 힘입어 금융적으로 안정된 환경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여기에 수출장려 정책, 기술지도 정책 등 관료집단의 선택도 경제 성장에 기여하면서 고도성장이 지속되었다.
이 결과 1968년에 일본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미국의 뒤를 이어 2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대중소비 사회가 정착되어 이미 1970년에 흑백TV, 냉장고, 세탁기 등의 3종의 ‘신기(神器)’는 보급률이 90%를 넘게 되었다, 자동차 보급율도 23%에 달하였다. 이로 인해 내수 시장은 견실하게 성장을 뒷받침하게 되었고, 일본 자본주의는 성숙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4) 경제대국과 시련
1973년에 일어난 오일 쇼크(oil shock)는 단기적으로는 일본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74년의 실질 경제성장은 1.3%로 떨어졌고, 75년에도 2.5%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러한 타격이 오히려 일본을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하였다는 점은 아이러니라 하겠다. 오일쇼크의 영향은 일본에게만 온 것은 아니었다. 표8에서 보이듯 미국, 영국, 서독 등 주요 국가들의 성장률도 급속히 하락하였고, 이에 비해 오히려 일본은 비교적 단기간에 불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여기에도 많은 원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수출의 성장이었다.
표8. 오일쇼크와 주요국 GDP 성장률(%)
1960~681973~791979~87
일본10.24.04.1
미국4.52.42.6
서독4.12.31.4
영국3.11.51.8
프랑스5.42.81.7
이탈리아5.73.72.2
1974~79년 사이에 일본의 수출은 54,480백만 불에서 101,232백만 불로 연평균 19.6% 증가했다. 원유 가격 상승으로 수입액도 같은 기간 평균 22.4%씩 증가했지만, 에너지 절약과 생산 합리화를 통해 생산된 일본 제품들의 가격경쟁력은 강력하여 무역수지는 같은 기간 평균 51.7%, 2차 오일쇼크 파동이 있었던 79년을 제외하면 무려 80.1%의 평균 성장률을 보였다.
장기간의 경제성장으로 더 이상 낮은 인건비만으로 수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었던 일본이 이처럼 높은 수출 성장을 달성한 사실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단순히 저렴한 인건비로 성장을 달성했다는 이미지는 서서히 불식되었고, 일본의 생산 및 경영 시스템의 장점이 인정되면서 일본 경제의 지위는 재평가되었다. 이것은 생산 공정의 합리화를 통한 철저한 원가 절감과 협조적 노사관계에 따른 생산현장 안정의 결과였다. 노사관계의 경우, 격렬한 국내 경쟁을 거치면서 지나친 노사대립이 기업을 파탄시킬 수 있고, 이것은 사회복지가 빈약하고 유사한 대우를 받는 새로운 직장에 재취업이 쉽지 않은 일본에서 자신에게 커다란 피해가 된다는 점을 노동자들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장기간 고도성장이 지속되면서 노동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급여를 지급 할 수 있는 기업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노사 동반성장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정착된 것이다. 이것은 선진적 노사관계나 민주적 시스템의 정착이라기 보다는, 전쟁과 전후의 혼란 속에 장기간 낮은 생활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일본 노동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생긴 결과라 여겨지나, 결과적으로 산업 생산성의 향상과 연결되었다.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지만, 표 9나 그림 4는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일본의 노동쟁의는 고도성장기에는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나, 이중 직접 쟁의행위(파업, 태업 등)의 발생 비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고, 이에 비해 노동생산성은 1965~80년 사이 급속히 향상되었다.
표9. 일본의 노동쟁의 상황(%)
56~6061~6566~7071~7576~8081~85
노동쟁의연간 평균증가율11.67.610.717.9-11.47.1
쟁의행위 평균 발생비율34.326.719.610.411.211.5
그림4 일본의 노동생산성 상승률(500인 이상 기업)
이처럼 노동현장이 안정되면서 장기근속에 의한 연공서열제, 종신고용제가 대기업을 중심으로 정착되기 시작했고, 사실상 기업이 개인의 복지까지 맡는 일본식 고용시스템이 형성되었다. ‘Japan as No.1’과 같은 일본식 시스템에 대한 호의적 평가가 널리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이러한 가운데 1980년대 중반 일본의 경제적 위치는 다시 한 번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표10에서 알 수 있듯이 1980년대에 일본의 무역수지는 급증했다. 1981년의 이례적인 상승은 예외로 하더라도 1983~86년에 이르는 4개년 사이 평균51.7%의 무역수지 상승은 놀라운 속도였다. 표10의 결과는 수출대상국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결과이므로, 주요 수출대상국이었던 미국의 상황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당시 진행 중이던 인플레이션의 수습을 위해 고금리 정책을 취한 결과 달러 가치가 절상되면서 일어난 면도 컸지만, 이미 1971년 이래 변동환율제로 이행하면서 1980년대 전반 1달러 당220~250엔대에 형성되던 환율이 형성되었으므로, 단순히 환율 격차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1970년대 이래로 에너지 절약형의 일본 자동차를 비롯한 각종 제품들이 우수한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으로 미국 소비자들에게 선택받은 것 역시 커다란 이유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마치 집중호우처럼 일본제품의 수출이 이루어지면서 미국인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달래고자 일본기업의 수출 자주 규제가 시작된 것도 이 시기였다.
표 10 1980년대의 일본의 경상 및 무역수지(단위 : 10억 엔)와 증감률
경상수지무역수지
수출수입
1980-10,746 2,125 126,736 124,644
19814,770-144.4%19,967839.6%149,52218.0%129,5554.0%
19826,85043.6%18,079-9.5%137,663-7.9%119,584-7.7%
198320,799203.6%31,45474.0%145,4685.7%114,014-4.7%
198435,00368.3%44,25740.7%168,29015.7%124,0338.8%
198549,16940.5%55,98626.5%174,0153.4%118,029-4.8%
198685,84574.6%92,82765.8%205,59118.1%112,764-4.5%
198787,0151.4%96,3863.8%224,6059.2%128,21913.7%
198879,631-8.5%95,012-1.4%259,76515.7%164,75328.5%
198957,157-28.2%76,917-19.0%269,5703.8%192,65316.9%
199035,761-37.4%63,528-17.4%280,3744.0%216,84612.6%
연평균 36.2%7.5%5.2%
드디어 고평가된 달러 때문에 막대한 무역적자를 보던 미국이 1985년 주요 무역대상국들에게 달러 평가절하, 즉 자국 통화의 상대적 평가절상의 협조를 요청한 플라자합의가 열린 후 환율은 1985년의 달러 당 239엔에서169엔, 145엔의 순으로 매년 하락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무역수지도 축소되었지만, 수출액 자체는 매년 상승하였고 무역수지가 적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일본 경제의 능력은 다시금 국제사회에서 평가받게 되었고, 명실공히 ‘경제대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식 경영과 생산 시스템에 대한 찬사가 줄을 이으며 일본인들의 자부심이 최고조로 달한 것이 바로 이 1985~90년 대 초반에 걸친 시기였다.
한편 이러한 가운데 일본은행은 엔화 평가절상에 따른 수출 감소로 기업의 자금 경색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저금리 정책을 실시하였다. 확실히 경상 및 무역수지의 하락률은 표9에서 보이듯 경계를 요하는 수치였으나, 이러한 정책이 낳은 결과가 버블이었다. 5회의 기준금리 인하로1987년 2월, 드디어 사상 최저의 2.5% 금리와 내수 시장의 진작이라는 명목으로 대규모의 공공사업(87년 5조엔)이 결정되면서 시중 통화량은 대대적으로 팽창되었다. 1986~90년 사이에 거의 매년 통화량(M2+CD)은 10% 이상 증가했고, 이로 인해 자본 조달이 용이해진 대기업들은 이전과는 달리 재투자를 통한 생산성 향상보다는 조달한 자본 자체를 운용하여 수입을 올리려는 ‘재(財)테크’를 중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개인들도 이러한 상황에 따라 대출 자금을 이용한 부동산 및 주식 투자에 몰리기 시작하면서, 투기적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하였다. 1987년 10월의 블랙먼데이 사건에 일본은행이개입하여 위기를 넘기자, 정책 당국의 주식 및 부동산 시장 유지를 확신한 투기세력의 투자는 절정에 달하였다. 각종 자산의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하면서 황궁(皇宮)의 지가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근접할 정도로 상승했고, 시기적으로 다소 앞서나 1987년 3월경 민영화 단계의 NTT 주가가 320만 엔으로 상승하면서 시가총액이 50조 엔에 달해 당시 독일과 홍콩의 상장기업의 주가 총액을 넘는 규모가 되었다.
지나치게 방만해진 통화량과 투기적 사태, 그리고 이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눈앞에 두고 일본은행과 정부가 정리에 나서기 시작했다. 1989~90년에 걸쳐 일본은행은 기준금리를 4차례 인상하여 6%로 올렸고, ‘총량규제(부동산 투자용 대출의 증가율을 전체 대출 증가율 이하로 억제하는 정책)’의 행정지도를 개시하였다. 이로 인해 투기적 상황이 종료되기 시작하면서 주가와 지가가 급락, 거액의 자산 손실을 입은 막대한 수의 기업과 개인의 파산이 급증하였다. 1994년의 지가는 90년의 1/2 수준으로 하락하였고, 막대한 불량채권이 발생, 1992년 이후 1999년까지 총계 70조 엔에 달하였다. 이처럼 막대한 자산손실과 파산은 그대로 금융기관의 부실로 이어져 1995년에 주택전문 대출기관인 쥬센[住専], 1997년에는 홋카이도[北海道] 척식은행과 창업 100년의 야마이치[山一]증권, 1998년에는 국립인 일본장기신용은행과 일본채권신용은행, 2000년에는 5대 생명보험회사인 치요다[千代田]생명보험 외 다이이치[第一], 교에이[協栄]와 같은 대형 보험사들이 연이어 파산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막고자 다시 금리인하 정책이 시행되면서 실질 금리가 0%로 낮추어졌음에도 경기가 호전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13년(1990~2003)’이라 불리는 장기 불황이 시작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2001년 등장한 고이즈미[小泉] 정권은 우정성(郵政省)개혁, 재정지출 및 불량채권 삭감을 목표로 개혁에 착수하였고, 수출 및 디지털 기기의 판매호조에 힘입어 2002년 1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밀레니엄 경기라 불리는 경기회복 국면에 들어섰으나, 그 기세는 1980~90년대에 비할 수 없었다.
이처럼 버블경기의 종식은 일본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단순한 경제적 손실을 떠나서 종신고용, 연공서열제에 기반을 두며 오랜 기간 일본 경제의 특징으로 여겨졌던 협조적 노사관계, 오랜 기간 산업구조를 지배했던 기업집단 역시 불황 탈출을 위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크게 손상을 입었다. 또한 고도경제 성장시기부터 적합한 정책 판단을 내려 일본의 경제 발전에 정책 결정자들의 신뢰성도 크게 훼손되었다. 고도성장 이래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던 일본의 경제시스템은 다시금 재평가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는 결코 경제 발전을 목표로 하는 정부주도형의 발전도상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전전의 유산 위에 세워진 일본 경제는 이미 1970년대에 세계 경제의 주역으로 도약했었고, 성숙한 시장경제 국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비록 서구권 국가에 비해 관권(官權)이 강했음은 사실이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장의 주역은 수출과 내수시장의 확대를 이루어낸 기업과 개인이었고, 일본 경제의 가장 큰 특징인일본식 생산시스템, 기업집단, 연공서열제, 종신고용을 만들어내 것도 기업과 개인이었다. 일본 경제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도 기업과 개인일 것이다.

  • 각주 981)
    GDP에서 중국이 일본을 2010년에 추월하여 제2위에 올라 선 것은 사실이나, 산업기술과 1인당 국민소득에 있어서 뒤지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바로가기
  • 각주 982)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야스다[安田], 스미토모[住友]를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983)
    패전 후 일본으로의 물자 도입은 연합군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바로가기
  • 각주 984)
    당시 일본 정부는 석유 등 중요 원자재를 GHQ의 허가 없이 수입할 수 없었고, 대금으로 지불할 외화도 없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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