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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베트남전쟁의 전개과정

1. 미국과의 전면전

1) 미국과의 전면전
1965년 이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급속하고도 대규모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공격 혹은 전복에 맞서 싸우는 다른 동맹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점 더 전쟁에 깊이 개입해 들어갔다. 존슨 대통령은 1956년 초 북베트남군의 공격에 따른 미군 사망 직후 북베트남 지역에 대한대규모 폭격을 명령하였다. 하노이와 남베트남 내 베트콩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 대한 더 많은 공중폭격을 명령하였다. 3월에는 다낭(Da Nang)시의 미해군 2개 대대 병력을 구하기 위해 대규모 부대를 해안 지대에 상륙시켰다.6월이 되자 미군 5만 명이 남베트남 정부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 도착하였다.
소규모의 부대로 편성된 북베트남군은 캄보디아 국경 서쪽의 호치민루트를 경유해 남베트남에 도착한 후 베트콩과 연합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다. 베트콩 군대는 갈수록 많은 농촌지역을 장악해갔고, 공산주의자들의 승리는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존슨 대통령은 미국이 남베트남을 지킨다는 약속을 하고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하였다. 1965년 중반 남베트남에 투입된 미군은 18만 명을 넘어섰고 1966년 말에는 50여만 명에 달하였다. 미국의 전쟁전략은‘적에게 승산이 없음을 깨우쳐주는 것’이었는데, 미군 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멀랜드(William C. Westmoreland) 사령관은 1단계로 남베트남에 미군의 전략요충지를 확보해 사이공 정권의 군사적 붕괴를 막고, 2단계로 혁명 세력의 주력 부대를 파괴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1966년 중반 이후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군은 반란군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기 위해 일련의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였다. 예를 들면, 민족해방전선 치하의 농촌마을을 무차별 폭격함으로써 농촌지역에서 베트콩을 몰아내고민간인을 정부군 지역으로 이동시켜 상호 분리하려고 노력하였다. 미군은주로 우세한 화력과 헬리콥터를 이용한 공격 목표지역으로의 신속한 병력이동에 의존한 반면, 베트콩은 은폐·잠복·기습공격·매복공격에 의존하였다. 우세한 무기와 장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교묘하고 결연한 자세로 싸우는 베트콩을 뿌리 뽑을 수 없었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더 많은 군대를 증파하였다.
2) 테트 대공세
1967년 말부터 베트콩은 미군의 소모전에 대한 한계를 일깨우고 전세를 장악하기 위해 주요 도시지역에 대한 기습공격과 베트남 전역에서의 동시다발적 봉기를 계획하였다.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베트남인들의 음력설인 테트(Tet) 축제일을 기해 대규모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남베트남의 36개 지방 중심도시와 5개 주요도시를 공격하였다. 수 주일 동안 도시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민족해방전선의 정예 게릴라 부대 약18만 명이 희생되었을 뿐 기대했던 도시지역에서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테트 대공세는 북베트남과 베트콩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소득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미국인들에게 결코 남베트남의 반군세력을 진압할 수 없으며 전쟁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점을 각인시켜 준 것이다. 1965년경부터 시작된 미국 내 반전운동은 1967년의 흑인민권운동과 연계되어 상승작용을 일으켰으며, 그해 가을 존슨 정권이 주장하는 베트남전쟁 비용 충당을 위한증세 반대여론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당시 존슨 정권은 베트남전쟁이 호전되고 있으며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고 있다’고 강조하였는데, 그런 가운데 전해진 테트 대공세의 소식은 존슨 정권에 대한 불신을 확대시키고, 반전여론에 확실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반전여론은 평화행진, 시위, 그리고 시민불복종 운동으로 표현되었다. 갈수록 많은 수의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미국의 전쟁승리 가능성에 회의적인 입장을 갖기 시작했으며, 베트남 내전에 미국이개입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한편, 웨스트멀랜드 장군은 테트 공세를 계기로 전쟁을 확대하기 위해20만 6천 명의 대규모 증파를 요청하였는데, 이는 기존의 베트남전쟁 방식을 벗어나 미국의 예비역 소집을 포함한 대대적인 군사력 투입으로 바뀐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흑인민권운동에 대처하기 위해 주(州)방위군 뿐만 아니라 연방 병력까지 동원하고 있었고, 1968년 1월에는 미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USS Pueblo, AGER 2)가 북한에 나포되는 사건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병력 요청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예비역 소집이나 군 복무기간 연장이라는 수단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존슨 정권에 대한 반발을 격화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전쟁비용 급증에 따른 달러화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이에 1968년 3월 31일, 존슨 대통령은 체제위기와 사회분열상을 막기 위해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웨스트멀랜드 사령관의 미군 20만 명 증파 요구를 거부하고, 북위 20도선 이북에서의 폭격은 중지될 것이며 가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였다. 아울러 하노이 당국(베트남 민주공화국)에 협상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테트 대공세가 미국으로 하여금 기존의 방법으로 승리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굴복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해도, 최종적 패배를 인정하고 철수를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3) 평화협상
미국의 폭격 축소 및 협상 요구에 하노이측은 반군의 활동을 축소함으로써 응답하였고, 10월에 존슨 대통령은 폭격의 완전 중지를 명령하였다. 그 사이 미국과 하노이 당국은 파리에서 예비 평화회담을 시작하기로 동의하였다.
1969년 당선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은 베트남에서의 철군 여론과 미국의 위신이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는 과제 사이에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베트콩과의 비밀외교와 사이공 정권의 존속을 유지한다는 전략아래 미군의 점진적 철군 정책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미국은 전쟁의 현지화, 즉 사이공이 직접 전투를 주도할 수 있는 군사적 지원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곧 사이공군의 ‘미군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군은 남베트남이 미국의 무기·장비·공군력 지원과 경제원조를 충분하게 받으면서 점차로 자주국방 태세를 확립하도록 ‘베트남화’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파리에서의 평화회담은 지지부진하였는데, 1970년 봄, 미군과 남베트남정부군이 북베트남의 요충지와 부대 집결지역을 파괴하기 위해 캄보디아의 접경지역에 침입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재개되었다. 닉슨 대통령은 협상에서주도권을 회복하고 베트콩의 보급루트(호치민루트)를 단절하기 위해 1973년 캄보디아 군부 내 친미 쿠데타를 허용하여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축출하고 론 놀(Lon Lol) 장군을 후원하였다. 론 놀 정권과 미군은 캄보디아 내에서 베트콩 혁명세력을 공격하였는데, 이로써 베트남전쟁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미국의 전략적 실패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전투가 캄보디아로 확산되자 미국 내 반전운동은 더욱 강력해졌으며, 권좌에서 축출된 시아누크는 오랜 숙적이었던 캄보디아 공산당과 베이징에서 손을 잡고 왕국민족 연합정부를 결성하여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한편 베트남과 라오스의 혁명세력과 공동 투쟁에 나섰다. 이것은 곧 북베트남이 오랫동안 고대했던 결과로써, 미군과의 전쟁을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시켜 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한편, 미국 내의 반전여론을 더욱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더욱이 호치민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1971년 2월부터 사이공과 미군이 대규모로 벌인 합동공격(람손 719작전)을 베트콩이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데 성공하자 베트콩은 전쟁승리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베트콩은 1972년 3월부터 남부 지역에 대대적인 군사 공세를 가하였다(춘계대공세). 그 목적은 사이공군에 큰 타격을 가함으로써 미군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여 다가 올 정전에 대비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닉슨 정권은 줄어든 미군의 전력상 B 52 전략폭격기를 총동원한 대규모 폭격으로 대응하였다. 당시 미국은 중국, 소련과 데탕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72년 중반 이후 베트남전쟁은 마지막 국면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1968년부터 진행된 파리평화회담의 막바지 합의를 향한 양측의치열한 공방으로 전개되었다.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헨리 키신저(HenryA. Kissinger)와 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원인 레 둑 토(Le Duc Tho)는 비밀협상을 진행하였는데, 1972년 여름부터 양측 간에 타협의 실마리가 마련되었다.
즉 키신저는 그해 5월, 남베트남에서 이미 베트콩이 차지한 지역으로부터 베트콩의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으며, 베트콩은 1972년 가을 무렵 정전과 동시에 미군 철수, 포로를 석방하고 그 후 남베트남에서의 정치 문제를 당사자 간에 공동으로 해결한다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곧 군사 문제와 정치 문제를 분리하여 대응할 수 있다는 것으로써, 남베트남 지역에서 ‘두 정부와 두 군대’ 그리고 ‘제3세력’이 함께 정치 문제를 처리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협상안에 대해 양측은 10월 31일 조인하기로 하였으나, 사이공 정권이 강하게 반발하였고 닉슨도 11월의 대통령 선거 이후로 미루면서 협정안의 수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북베트남측이 반발하였고, 닉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을 압박하기 위해 12월 18일부터 12일 간에 걸쳐 이른바 ‘크리스마스 폭격’이라 불리는 대규모 북폭을 단행하고 사이공 측을 무마하기 위해 10억 달러가 넘는 군수물자를 지원하였다. 북베트남은 소련제미사일로 B 52 폭격기에 대항하였으나 10일 만에 미사일이 바닥나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폭격으로 약 1,600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고, 미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여론으로부터도 엄청난 비난을 초래하였고 오히려 닉슨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미 의회는 닉슨 대통령이 계속 전쟁을 강행하려한다면 의회가 전쟁을 중단시키겠다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미국과 북베트남은 1973년 1월 8일부터 협상을 재개하여, 1972년 10월 협정안과거의 같은 내용으로 1월 27일 협정에 조인하였다. 이것이 ‘베트남 전쟁의 종결 및 평화 회복에 관한 협정’ 또는 이른바 ‘파리평화협정’이다.
협정안의 주요내용은 즉각적인 휴전, 포로의 전원 석방, 미국을 비롯한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모든 외국 군대 및 군수물자의 전면 철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회의 개최, 다국적군에 의한 평화감시, 북위 17도선을 통일 때까지 분계선으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전 협정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계속되었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각각 상대방이 정전협정을 수없이 위반한다고 비난하였다. 결국 평화협정은 1973년 3월 포로석방 이후 곧 사문화되었다.
1973년 여름 이후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사면초가에 빠졌고 베트남에 대한 공약을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8월 들어 미 의회는 인도차이나에서 미군의 전투를 금지시켰으며, 1973년 11월 말 ‘전쟁권 법안’(War PowerAct)을 가결하여 대통령이 의회의 허가 없이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73년 말경에는 남베트남에서 미군 병력이 거의 철수하였다.
이때부터 사이공의 티우(Nguyen Van Thieu) 대통령은 제3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남베트남 단독의 전쟁을 강행하였다. 초기에는 사이공의 우세가 확실하였으나 1974년 중반 이후부터 전세가 역전되어갔다. 특히 1974년 8월 닉슨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거의 단절됨으로써 사이공의 전쟁 수행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군의사기는 떨어지고 탈영과 탈출, 피난이 봇물처럼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1974년 남베트남은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는 변경 지역을 포기하기 시작했고, 베트콩은 여러 지방 도시들을 점령해 나갔다. 베트콩은 1975년 1월부터 대규모 공세를 전개하였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미국인들은 베트남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과 함께 비행기나 배를 타고 탈출하였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은 사임하고 타이완으로 도망하였다. 4월 30일 티우 대통령의 뒤를 이은 두옹 반 민(Duong Van Minh)의 남베트남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사이공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점령되었다. 30년 전쟁이 마침내 종료되었다. 남베트남에는 군사정부가 세워졌고, 이듬해인 1976년 7월 2일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되었고, 사이공은 호치민 시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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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의 전개과정 자료번호 : edeah.d_0006_002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