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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전쟁의 결과와 영향

3. 전쟁의 결과와 영향

한국전쟁의 피해는 남북한 군인과 민간인뿐만 아니라 미국, 소련, 중국, 연합국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 주었다. 25개국 약 150만 명의 군인이 한국전쟁을 치렀다. 그 결과 한국군 62만 명, UN군 16만 명, 북한군 93만 명, 중국군 100만 명, 민간인 피해 250만 명, 이재민 37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전쟁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000만 명 등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을 넘는 1,800여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10만여 명의 전쟁포로들은 중국과 북한으로 귀환한 후 가혹한 처우를 받기도 했으며, 제3국인 인도, 타이완, 브라질 등을 선택한 전쟁포로들 역시 오랜 기간 고통을 당하였다.
이 밖에 남북한 지역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관련국들이 쏟아 부은 전쟁비용도 천문학적인 수준에 달한다. 남북한 전체를 통해서 볼 때 학교·교회·사찰·병원 및 민가를 비롯하여, 공장·도로·교량 등이 무수히 파괴되었다. 북한 지역에서 36만 6,840ha의 농지가 손상되었으며, 60만 채의 민가와 5,000개의 학교 및 1,000개의 병원이 파괴되었다. 남한 지역에서는 약 900개의 공장이 파괴되었으며, 약 60만 채의 가옥이 파손되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휴전 후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김일성은 전쟁의 책임을 국내파, 곧 남로당계열에 돌리고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다. 그 뒤로도 반대파를 끊임없이 숙청하여, 58년 초 김일성 유일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또한 북한은 소련과 중공으로부터의 막대한 원조를 바탕으로 전후복구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주민들을 집단농장과 노력동원에 편입시켜 동원체제사회로 만들었다. 전후에도 북한은 군사력을 더욱 강화시켜 병영국가로의 노선을 추구해 나갔다. 주민들 사이에는 반미주의(反美主義)가 굳게 자리 잡았으며, 전쟁 중 북한이 패배위기에 직면했을 때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회생하였기 때문에 중국과의 혈맹의식이 두터워진 반면, 소련에 대한 불신은 커져갔고 스탈린 사후 소련의 공산주의 노선에 변화가 생기고 중·소 분쟁이 심화됨에 따라 북한은 친중노선을 강화해 나갔다.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의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처참한 전쟁을 경험한 국민들은 우익·반공적 국가질서를 지지하였으며, 진보적 정치이념과 정당, 인사들에 대한 억압과 탄압을 묵인하였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전쟁의 경험을 통해 서방과 미국 주도의 자유경제체제를 압도적으로 선호하고,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국가 안전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였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산업생산 시설과 주택, 사회간접자본 등이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나 미국의 경제원조를 바탕으로 경제활동을 유지시켜나갔다. 50년대에 걸쳐 약 30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의 막대한 원조금액은한국의 산업생산 활동뿐만 아니라, 국민경제생활을 전반적으로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나, 대미의존적 경제구조와 소비재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화는 한국 경제의 자립적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전쟁은 친미의존적 군사동맹체제 속에서 한국의 군부를 급격히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60년대 이후의 군사쿠데타에 이은 오랜 군부독재 정치체제를 경험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한국전쟁은 민족의 대이동을 초래하여 전쟁 발발로부터 휴전 성립 이전에 약 29만 명이 월북하였거나 납북되었고, 약 45∼65만 명이 월남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후 사회가 안정되자 베이비 붐 현상으로 대표되는 출산율 증가와, 농촌의 인구가 대거 도시로 이동하여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현상은 한국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전쟁 이래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남북한의 이질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분단은 고착화되었으며, 상호 간의 적대감정과 이질화현상,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는 다시 평화 통일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한편 한국전쟁은 전쟁에 참여한 해당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 전반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갓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 보면 비록 인명피해가 큰 전쟁이었지만, 이로 인해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의 영향력은 확고해졌고, 국제적으로는 중국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막강한 영향력과 혈맹의식은 한국전쟁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마오쩌둥의 장남인 마오안잉[毛岸英]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였고, 그의 묘가 있는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인민지원군열사묘역은 북중 혈맹관계의 상징이 되었다. 전후 중국에 대한 북한의 의존은 중소 간 분쟁과 ‘주체, 자립’의 강조에 따라 부침을 거듭해 왔지만, 한국전쟁을 통한 혈맹의식을 바탕으로 그 어떤 주변국들과의 관계 보다 확고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통해 중국은 미국과 대등하게 싸웠고 휴전의 주체가 됨으로써 국제적인 입지와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고, 전후 소련 및 중국과 미국사이의 냉전은 더욱 심화됨에 따라 미국의 봉쇄와 견제를 당하기도 했지만, 중국은 북한에 대한 절대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베트남 등 아시아와 제3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이후 소련을 견제할 수준이 되었다. 한편 타이완과의 분단과 갈등은 더욱 극명해졌고,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군사·경제적 지원과 개입을 초래하였다.
타이완의 중화민국정부는 대륙에서 패퇴한 뒤 절치부심하던 상황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하면서 그동안 잃어버렸던 미국의 관심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간주하였고, 심지어 대륙을 탈환할 기회로까지 활용하고자하였다. 타이완은 한국전쟁 기간 중 한국군에 대한 화교군의 지원과 참전을 통해 적극 협력하는 한편,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관심과 지원을 회복하는데 성공했으며, 미국의 개입과 중재로 일본과 국교를 맺고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자유중국의 지위를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최대의 수혜자는 일본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전후 정치체제와 경제적 기초가 한국전쟁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이로써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경제부흥과 보수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한국전쟁 기간 중 미국과 연합군의 후방 병참기지와 전쟁·보급물자 생산의 공장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여 단기간에 수십억 달러의 막대한 전쟁특수 호황을 누리게 되었고, 이로써 패전 상황을 빠르게 복구하고 경제부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서냉전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보수화 점령정책이 확고해졌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반공기지로써의 지위와 역할을 인정받아, 신속한 미군점령정책의 종결, 평화조약 미일안보동맹조약 체결, 국제사회로의 복귀가 결정되고,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급격한 경제성장정책을 추진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의 요청으로 창설된 경찰예비대는 현재의자위대를 가능케 하였고, 이후 일본사회의 전후체제(일명 ‘55년 체제’)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공산국가에 대항하기 위해 대량보복전략개념 아래 상비군을 확대시키고 국방예산을 크게 늘였다. 연간 국방예산이 1950년에는 1백20억 달러였으나 1953년에는 5백억 달러로 뛰었다. 미국은 재래식 무기는 물론 육, 해, 공 3군의 군사력을 급속하게 늘렸는데, 특히 공군은 해외에 전략공군 기지를 확장시켰고 핵무기 보유량도 급증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 미국은 4백기 미만의 핵무기를 갖고 있었으나 휴전 무렵에는 이미 1천기를 초과하였다. 이처럼 군비를 강화하면서 미국은 서유럽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강화해 나가는 한편, 태평양지역에서는 태평양안보체제를 창설하였다.
미국은 우선 소련을 제외한 48개 연합국과 함께 1951년 9월 일본과의 평화조약 및 태평양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였다. 샌프란시스코조약이라고도 불리는 이 미·일 평화조약은 미군의 일본주둔을 합법화했으며 태평양안보조약의 초석이 되었다. 일본과의 평화조약체결 직후 미국은 호주 및 뉴질랜드와 더불어 앤저스조약(ANZUS)을 체결하였고, 필리핀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으며, 동남아조약기구(SEATO)와 바그다드조약기구(CENTO) 등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한국과는 한국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 한미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들 군사동맹체제는 사실상 아시아, 태평양, 중동, 유럽에 이르는 전 지역에서 소련과 중국 등 주요 공산국가를 봉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각국 내공산 세력의 활동을 억제하는 동시에 미국 등 서방의 자유진영 체제에 동조하는 국가들의 안전을 집단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동남아조약기구의 경우,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등 3개국은 1954년베트남에서 체결된 제네바 협정 때문에 정식 회원국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으나 의정서상의 조항에 의해 군사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상 한국전쟁이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을 로버트 저비스(Robert Jervice)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미국이 세계 최강대군사국으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굳혔다.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은 군비를 대폭 증액하고 세계각 지역에 미군의 기지와 핵전력을 대폭 강화하여 이후 세계질서의 최고 강대국으로서의 주도권을 확립해 나갔다. 둘째,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의냉전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두 나라가 냉전관계를 완화하는 데는 한국전쟁 휴전으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을 소비하게 된다. 셋째, 한국전쟁은 서방동맹을 강화시켜 주었다. 한국전쟁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강화된 동맹은 대개 20년 이상 존속했으며, 그 대부분은 오늘날까지 거의 아무런 본질적 수정 없이 유지되어 오고 있다. 서독과 일본의 재무장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넷째, 반면에 한국전쟁은 국제공산주의 진영을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스탈린 사후 중·소대결의 씨앗도, 그리고 북한의 소련으로부터 이탈의 씨앗도 이때부터 심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한국전쟁은 ‘재래식 무기에 의한 마지막 국제전쟁’이라는 인식을 강대국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핵무기의 개발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이를 계기로 국제정치는 본격적인 핵무기 대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한편, 한국전쟁 휴전과 스탈린 사망 이후 잠깐의 군사적 긴장완화, 즉 데탕트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베트남에서의 민족해방 운동과 프랑스 구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해묵은 갈등이 중국, 소련, 미국 등 강대국간의 냉전구도와 상승작용을 일으켜 또 다른 대규모 전쟁을 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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