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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전쟁 발발의 배경과 원인

1. 전쟁 발발의 배경과 원인

1) 광복과 한반도 분단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맺게 되자, 한민족의 자주독립이 실현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종전 후 한반도의 38도선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미·소를 양축으로 하는 동서 냉전구조 속에서 자유세계와 공산진영이 마주하는 최전선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갈등은 국제 냉전이 심화될수록 더욱 고조되어 갔다.
미국은 한반도에 38도선을 설정하여 그 이북지역은 소련군이, 그 이남지역은 미군이 각각 진주하여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담당했다. 일찍이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한반도로 진입하기 시작했으며 22일에 평양에 도달하였다. 8월말 소련군은 북한 전역을 장악하고, 북한의 공산화를 위한 제도개혁에 착수하였다. 1945년 10월 14일 소련군정은 김일성을 대중 앞에 등장시키고, 이듬해 2월 8일에는 이른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여 소위 ‘확보된 지역에서의 사회주의 구축’ 작업에 들어갔다.
한편 남한 지역에는 9월 4일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 휘하의 미 제24군단 선견부대가 김포에 도착하고, 9월 7일에는 더글라스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이 남한에 대한 군정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정책준비 없이 출범한 미군정은 초기부터 상당기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남한의 혼란상은광복과 더불어 조직된 수많은 군소정당의 난립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런 가운데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국 외상회의(1945.12.26.)가 개최되어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협정 문제가 논의되었다. 강대국들 간에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논의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좌익계가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방향으로 선회함에 따라 신탁 찬성 대 반대 세력 간 분열과 대립이 극심해졌다.
모스크바협정에 의거하여 설치된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인사와 정당은 협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남한 측 대표의 참석을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에 미국은 모스크바협정 노선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UN으로 이관하였다. 9월 l7일, 미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UN 제2차 총회에 제기하였다. 한반도에서 소련의 협력 아래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다자적 해결’ 방식으로 한국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UN에서도 한반도에서의 자유선거와 외국군 철군 문제를 둘러싸고 미·소 양국과 주변국들은 대립하였고, 국내에서도 각 정파들마다 입장이 대립하였다. 결국 1947년 11월 14일 UN총회는 한국독립의 절차를 규정하는 미국의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소련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으며, 이로써 미·소 양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동맹관계에서 완전히 결별하였다. UN은 총회의 결의에 따라 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UN한국임시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소련은 UN한국임시위원단이 북한 지역에 입국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로써 1948년 2월 26일 UN 소총회에서 남한 지역에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되었다. 1948년 5월 10일, UN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였다.
한편 소련 군정은 1947년 11월 중순 북한에 공산정권의 수립을 위한 이른바 ‘인민헌법’ 초안을 기초한 후 이를 남한의 ‘5·10 선거’에 때를 맞춰 통과시켰다. 북한은 1948년 8월 하순 북한전역에 걸쳐 공산당의 단일후보만 출마시킨 선거를 실시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같은 날 김일성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내각수상으로 선출되었다.
UN은 대한민국 정부를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였고, 소련과 공산국가들은 북한을 합법정부로 각각 승인하였다. 남한과 북한 양측은 모두 상대를 불법단체로 규정하였고, 수복하거나 적화 통일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하였다. 미·소 강대국과 한반도의 두 정부가 화해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며 충돌할 가능성만 높아져갔다.
2) 한반도 국내외 정세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소련은 유럽에서의 공산세력 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아시아에 있어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때까지 조용히 정세를 관망하면서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위한 시기의 성숙을 기다린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소련의 북한 진주는 처음부터 한반도의 분단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우선 38도선 이북에 장차 한반도의 적화통일과 남진정책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한 강력한 군사기지를 확보하고, 시기가 성숙할 때까지 전력을 비축하려는 공산기지화 정책을 추구하기위한 것이었다. 소련은 북한에 최신 소련장비로 무장한 인민군을 창설하는 등 적화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체제와 무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과 10월의 중국대륙의 공산화는 자연스럽게 한반도의 공산화라는 과제로 이행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스탈린은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함께 회의를 개최하고 북한군의 전력화를 구체화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950년 4월 또다시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과 함께 남침계획을 구체화하였다.
한편, 미국은 종전 후 국방예산의 감축과 미군의 감군으로 지상병력의 부족을 겪게 되자 1947년 5월부터 주한미군의 철수를 검토하기 시작했으며, 남한과 북한 정부 수립 이후 북한과 소련 측이 한반도에서의 외국군 철수를 제기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한반도에서 철군을 이행하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미군 철수 후 남·북한 간의 군사적인 불균형과 북한의 남침징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의 북침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국군의 증강과 군사 원조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북한의 군사력을 현저하게 증강시킨 소련의 군사정책과는 대조적이었다.
당시 미국은 독일과 동유럽 지역에서 소련의 진출을 봉쇄하는 데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우려하는 한편, 소련이나 북한이 한반도에서 전면적인 무력침공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으로 낙관하였다. 미국은 극동지역의 전략적 방위선으로써 일본열도를 더욱 중시하였다. 극동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1950년 1월 12일딘 애치슨(Dean G. Acheson) 미 국무장관이 언급한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확인되었다. 이 선언에서 애치슨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알래스카 알류산 열도 오키나와 류큐 필리핀을 연결하는 태평양방위선의 확보가 미국의 안전에 필수적이라고 밝혔는데, 이때 한국과 타이완이 미국의 전략적인 극동지역 방어선에서 제외되었다. 애치슨은방위선 밖의 지역이 공격을 받을 경우 “우선은 자체적으로 저항을 해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UN헌장 아래에서 전체 문명세계가 개입할 것”이라고 부언하였다. 이를 두고, 북한과 소련, 중국이 미국의 극동지역 방위선, 즉 애치슨라인에서 한국이 배제된 것을 확인하고서 남침을 해도 미군이 사활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오판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지적과, 오히려 미국이 공산 측의 오판을 초래하여 전쟁을 유발시켰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애치슨의 발언은 미국이 40년대 후반부터 소련의 대규모 침략에 대비해 수립한 핀서(PINCER), 문라이즈(MOONRISE), 오프태클(OFF TACKLE)등 일련의 비상전쟁계획(Emergency War Plan)에 투영된 베링해협 동해 황해를 잇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도서방위선 개념을 제시한 데 불과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후일 공개된 미 국방부의 문건에는 1950년 5월말 미국이 한국을 극동방어선에 다시 포함시킨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어쨌든 당시 공산진영은 이를 알지 못한 가운데서 남침을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북한은 정권수립 직후부터 전쟁을 준비하였고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고 토지분배를 실시하였다. 반면에 남한은 거의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만 경제가 유지될 정도로 산업 활동이 미미했으며,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등으로 사회 내부의 이념대립과 갈등이 심각했으며, 잦은 식량부족과 물가폭등으로 혼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최신예 탱크와 장비들을 제공받아 기계화 부대를 편성하였으며, 중국대륙으로부터는 국공내전에 참여했던 5만 명에 가까운 조선족들이 대거 귀환하여 인민군에 배치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약간의 군사고문단을 설치했을 뿐 남한의 북침 가능성을 우려하여 군사원조에 소극적이었고, 그리고 1948년 말 이후 한국군은 국내의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병력을 전국 각 지역에 분산시키고 있었다.
3) 전쟁 원인과 책임에 대한 논의
한국전쟁의 원인과 전쟁발발 책임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쟁이 있어 왔으나 그동안 미국 측 자료만 공개되었다가 점차 소련 측 자료와 관련자들의 증언, 그리고 최근에는 일부 선별적인 중국 측 자료들이 공개됨에 따라, 전쟁발발의 배경과 기본적인 윤곽은 상당 부분 규명되고 있다.
전쟁의 원인을 둘러싸고는 크게 미·소의 냉전과 중국의 개입 등에 주목하는 외인론(外因論)과, 한반도 내의 이념대립과 갈등 그리고 전쟁 발발 직전까지 산발적으로 있어왔던 남북 간 군사적 충돌 등이 전면전으로 폭발했다는 내인론(內因論) 또는 내전설(內戰說)로 대별되며, 최근에는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는 주장이 논리적 설득력을 얻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스탈린이 전쟁을 주도했다는 전통주의적 관점이 서방의 정부와 학계, 언론계를 지배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점차 미·소 간에 진행된 세계적인 대결의 국지적 대리전이었다는 주장으로 발전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한국전쟁의 원인제공자로서 미국을 지목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이 한국전쟁을 초래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러한 초기 전통주의 시각과 제국주의 비판은 모두 남한과 북한이 전쟁 발발을 주도할 만한 능력이 없었으며, 미국과 소련의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만 한국전쟁의 원인을 분석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80년 이후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로 대표되는 수정주의 입장이 등장하였는데,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남북한 간의 대결적 구도와 갈등이 폭발한 내전의 성격을 띤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한반도 내재되어 있던 사회·경제적 모순에서 야기된 계급투쟁적 요인들과 여러 세력들 간의 상호 관련성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였다. 1946년 10월의 대구 폭동으로부터 제주도 4·3사건, 여순사건, 지리산 일대에서 유격대의 공세와 토벌전과 같은 게릴라전이 계속 이어졌고, 1950년 이전까지 38선 근처에서 남북한 간에 수많은 전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내전적 갈등이 전면적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존 메릴(John Merrill)과 나가이 요노스케[永井陽之助] 등은 내인론과 외인론을 균형 있게 조화시켜 한국전쟁의 기원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한국전쟁이 내전의 성격을 갖고 있던 것은 틀림없지만 국제냉전의 복합 속에서 일어난 ‘국제적 내전’이라고 명명하였다.
한편 90년대 이후 구 소련의 몰락과 함께 소련 측 자료가 공개됨에 따라 이전의 전통주의와 스탈린의 전쟁책임론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으며 아울러 김일성이 처음부터 집요하게 스탈린과 중국 측에 대해 전쟁물자와 인력을 요청하고, 개전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관철시켰다는 점도 명확하게 밝혀졌다. 아울러 중국에서 당시 마오쩌둥의 전쟁지휘 전문들이 공개되었다.
국제적 요인으로는 그동안의 소련과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포함시킬 수 있다. 특히 중국은 북한 김일성의 집요한 전쟁 지원 및 개전 요청에 대해 소련의 스탈린과 함께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미·소·중·일이라는 한반도 주변 4대국의 정책과 입장을 국제적 요인으로써 다차원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이상의 주장과 입장들을 분석하고 각국별 최근 자료들을 면밀하게 검토한 이완범은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해방 후 한반도 내에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모순과 갈등이 존재했고 남북한 간의 잦은 군사적 충돌도 있었지만, 이것이 전쟁의 배경과 무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스탈린의 개전 동의와 군사적 지원이 없었더라면 대량살상과 전격적 기습에 의한 전면적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한국전쟁은 국제전적 내전이 아니라 ‘내전적 상황을 이용한 국제전’의 성격으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남한에서의 내전상황에 북한과 소련, 중국이 개입해 결국남북 간의 전면적인 정규전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미·소 간의 세계적 대립인 냉전체제가 한반도에도 침투하여 내전적 상황까지 상승된 국면에서 국제적 전쟁으로 전화되기 위해서는 외세의 개입이 필수적이었다. 종합적으로 (한국전쟁은) 국제적 성격이 우세한 복합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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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의 배경과 원인 자료번호 : edeah.d_0006_002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