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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국교수립

4. 중국과 일본의 국교수립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참가하지 못한 중화민국은 중국을 대표하여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고 국교를 수립하고자 했다. 강화조약 체결 직후 일본은 중화민국과의 국교 수립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미국의 적극적인중재로 2국간 수교교섭을 시작하게 되었다. 1952년 2월에 예비회의를 시작한 이래 신속하게 양국간 수교교섭이 진행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내용을 초안으로 하여 추진된 교섭 결과 1952년 4월 28일 양국정부는 평화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를 불과 7시간 앞에 두고 서둘러 중일 양국의 조약 서명식이 열린 것이다. 비준 절차도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되어 그해 8월 양국간 평화조약이 발효되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미국 주도의 냉전 정책에 의해 일본과 중화민국 사이의 외교관계는 대체로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양국관계가 모두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1963년 9월 중국인 통역사 저우홍칭[周鴻慶]이 일본에서 귀국하기 직전에 타이완에 망명을 요구했다가 그 후에 망명의사를 번복하고 이듬해 1월 중국으로 송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중화민국 정부가 일본의 대응을 ‘친중공’ 행위로 비난하면서 양국 관계가 한때 주춤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냉전 체제 아래에서도 일본 사회와 정치권에서 현실적인 정책으로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를 촉구하는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1970년에는 중국대륙과의 국교회복을 촉구하는 국회의원 연맹이 발족되기도 했다. 때마침 1971년 7월 미국의 리처드 닉슨(Richard Milhous Nixon) 대통령이 곧 중국대륙을 방문하겠다고 발표하고 양국간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은 국제사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승인하는 흐름에 가일층 박차를 가했고, UN도 그 해 10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대표권을 인정하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중국대륙 방문은 일본의 외교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일본이 서둘러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결정적인요인이 되었다. 그 해 9월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이 중국대륙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周恩來] 수상과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갖고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때 일본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고 그간 외교관계를 유지해 오던 중화민국 정부와 국교를 단절했다. 일본과 중국은 1973년에 각각 상대국에 대사관을 설치했고 1978년 4월에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그 후 양국은 때때로 역사인식 문제나 영유권 문제로 외교적인 갈등을 빚으면서도 전반적으로 각종 경제협력, 기술협력, 유학생 교류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교류 등을 확대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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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의 국교수립 자료번호 : edeah.d_0006_0010_004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