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강제동원 피해자의 본국 귀환

4. 강제동원 피해자의 본국 귀환

일본제국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대량의 식민지인과 점령지역 주민들을 군사력과 노동력으로 활용했다. 일부 여성들 가운데는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본제국이 감행한 침략전쟁에 직접 간접으로 관계하다가 패전을 맞이한 것이다. 1944년에 한반도와 타이완에 징병제도가 도입된 이후 일본군 군인과 군속으로 식민지 출신 젊은이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 후생성 자료에 의하면 45만 명 정도의 식민지 출신 청년이 일본군 군인과 군속으로 동원되었다가 40만 명 정도가 제대했거나 살아서 귀환한 것으로 되어있다.
표1. 일본제국 식민지 출신의 군인과 군속
징용 징병제대사망자수사망률
군인116,294명110,116명6,178명53%
군속126,047명110,043명16,004명12.7%
타이완군인80,433명78,287명2,146명2.7%
출신자군속126,750명98,590명28,160명22.2%
449,524명397,036명52,488명11.7%
일본제국 정부와 기업에 의해 한반도나 중국에서 노무자로 동원된 인원은 군인 군속 수에 비해 훨씬 많다. 일본정부의 통계자료에는 1939년 9월부터 1945년 8월까지 72만 5천명의 한반도 출신 노무자가 동원된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2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들이 가장 많이 동원된 곳은 석탄을 캐는 광산이었다. 일본정부의 통계자료를 보면 석탄산업 부문에 동원된 사람이 전체의 47%를 차지했으며, 이 가운데 55%가 석탄 탄광이 많은 규슈[九州]로, 그리고 31%가 홋카이도[北海道]로 동원되었다. 석탄 노동자 가운데는 대부분이 갱내에서 석탄을 채굴하는 위험하고 가혹한 작업장에 배치되었다. 또한 일본정부는 한반도 출신 노무자의 공급원이 점차 부족해짐에 따라 이를 보완하는 방책으로 중국인들을 동원했다.1942년 11월 ‘화인(華人) 노무자 내지 이입에 관한 건’을 결정하고 중국인노무자의 강제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하여 1943년 4월부터 11월까지 시험적으로 동원하여 그 성과를 검토한 후 이듬해 2월부터 본격적으로 동원에 들어갔다. 일본정부의 자료에 의하면 패전 당시까지 중국 대륙에서 동원된 노무자총수가 3만 9천명에 달한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 패전을 계기로 하여 이들을 본국으로 대거 귀환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일본 내무성 통계에 의하면 1944년 말에 한반도 출신 일본 거주자 수가 총 1,936,843명으로 되어 있고 1947년 9월에 총529,907명이었다. 이것을 감안하면 약 140만 명의 사람들이 패전 직후 일본에서 한반도로 귀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해방의 감격을 만끽하며 일본정부의 송환계획 실시를 기다리지 않고 각 항구로 쇄도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귀환을 서두르는 사람들 가운데 소형 선박을 이용하다가 어뢰나 해적풍랑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많다. 그 중에도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선박의 침몰은 단일 사고로 귀환자 피해 가운데 가장 큰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8월 22일 해군특별수송선 우키시마마루는 한반도 출신 노동자와 가족을 태우고 아오모리현[靑森縣]을 출항하여 부산항을 향해 항진하던 중 마이즈루[舞鶴] 항구에 기항하기 직전 폭발 사고를 일으켜 침몰하면서 대형 참사를 발생시켰다. 일본정부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출신자 524명과 일본인 승무원 25명이 사망했다고 하고 있는데 반하여 피해자 단체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강제동원 피해자의 본국 귀환 자료번호 : edeah.d_0006_0010_001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