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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저널리즘 발달

6. 저널리즘 발달

메이지 시대를 통해서 새로운 문화는 점차 국민 속으로 파고 들어갔는데 그 때에 큰 역할을 한 것이 교육의 보급, 교통통신의 발달과 더불어 신문, 잡지 등의 저널리즘의 발달이었다.
저널리즘의 선구는 에도 시대 이래, 서민 사이에서 퍼져있던 요미우리 가와라반과 보신전쟁의 와중에 창간된 민간의『모시호쿠사(もしほ草)』『중외신문(中外新聞)』정부의『다죠간일지[太政官日誌]』등이 있는데 그 이후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많은 신문이 창간되었다. 이시기 정치문제를 다루면서 정론을 편 신문들을 대신문이라고 불렀다.주 964
각주 964)
참고로 신문들 중에서 1898년 1년간 발행부수 베스트5를 꼽으면 『오사카아사히』3621만, 『만조보』 3148만, 『오사카마이니치』 3059만, 『중앙』 2072만, 『도쿄마이니치』1548만으로 1일 평균 5~12만 부수가 인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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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흥미본위로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하고 서민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기능이 강한 신문을 소신문이라고 불렀다. 이런 소신문은 1870년대 후반에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890년 전후가 되면 대신문과 소신문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뉴스보도에 비중을 두는 전국적 상업신문이 나타나게 되었다. 오사카 지역의『아사히[朝日]』『마이니치[毎日]』두 신문을 중심으로 청일전쟁에 관련된 뉴스보도를 전기로 삼아 본격적으로 발전을 시작했다. 나아가 1900년대에 들어와 러일전쟁 시기가 되면『만조보(万朝報)』『이륙신보(二六新報)』를 선두로 유력한신문은 점차 대중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발행부수의 증대와 함께 정치문제도 사회면에서 다루고 커다란 표제를 달고 내용도 일반적으로 대중의 정서에 호소하는 기사가 많아졌다.
잡지는『메이로쿠잡지』(1874), 후쿠자와 유키치의『민간잡지』(1874) 등이 일찍 등장했지만 메이지 중기가 되면『국민의 벗(國民之友)』(1887),『일본인』(1888)에 이어서『태양』(1895),『중앙공론』(1899) 등 시사평론을 중심으로 종합잡지가 연이어 창간되어 신문과 나란히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이런 가운데『촌촌진문(寸寸珍聞)』(1877)이나 프랑스인 비고(Georges Ferdinand Bigot)의『도바에[鳥羽繪]』처럼 정치와 사회풍자를 목적으로 풍자만화를 그리는 잡지도 간행되었다. 또『국가학회잡지』(1889),『사학잡지』처럼 각종 학술잡지, 여성교육에서 사회, 문예평론 등 광범위한 분야를 취급한『여학잡지』(1885)와『문학계』(1893),『시가라미소시(しがらみ草紙)』(1889) 등의 문예잡지도 등장했다. 메이지 후기가 되면『노동세계』나『평민신문』과 같이 노동문제를 취급하거나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잡지와 부인잡지가 등장했다. 1911년에는 히라쓰카 하루[平塚明]가 창간한『청답(靑鞜)』은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특색있는 잡지였다.
출판계도 1880년대부터 활자인쇄가 발달하여 이제까지의 목판본을 대신해서 활판의 양장본이 보급되었다. 문학, 예술, 학술 등 각 방면에 걸쳐서 출판물이 간행되어 국민의 문화 향상에 기여했다.

  • 각주 964)
    참고로 신문들 중에서 1898년 1년간 발행부수 베스트5를 꼽으면 『오사카아사히』3621만, 『만조보』 3148만, 『오사카마이니치』 3059만, 『중앙』 2072만, 『도쿄마이니치』1548만으로 1일 평균 5~12만 부수가 인쇄되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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