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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신앙의 자유

3. 신앙의 자유

메이지 초년 신도에 의한 국민교화의 방침은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정부는 국가의 통제 하에 신도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민간의 신도로서 정부의 공인을 받은 것이 교파신도였다. 메이지 연간에 13개파의 교파신도가 공인되었다. 그중에서도 막말에 일어난 천리교(天理敎), 금광교(金光敎) 등은 서민 사이에 널리 펴졌다.
한편 불교는 폐불훼손의 풍조가 약해지면서 세력을 회복하고 이노우에엔료[井上円了]와 같이 국수주의의 입장에서 불교의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默雷]와 같이 신도의 국교화에 반대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고 불교부흥을 꾀한 불교사상가도 나타났다.
기독교는 막말부터 네덜란드인 버벡크(Verbeck), 미국인 헷번, 제인스(Janes), 러시아인 니콜라이(Nikolai) 등의 외국인 선교사가 내일하여 포교했는데 1873년 금지초지가 풀려 구미의 새로운 문화, 사상의 유입과 함께 주로지식인 계층에게 수용되어 갔다. 특히 막말에 새롭게 들어온 개신교의 각파는 외국인 선교사 중심으로 왕성하게 포교활동을 하고 교회와 학교들을 세웠다. 또 일본인 신도들 가운데 니이지마 죠[新導襄], 우치무라 간죠, 우에무라 마사히사[植村正久], 에비나 단죠[海老名彈正]와 같은 뛰어난 기독교 사상가, 교육자가 나타났고 특히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독교의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사회복지와 폐창운동 등의 활동도 나타났다. 또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강해져 1889년에 공포된 메이지 헌법 가운데 ‘안녕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신민으로서의 의무에 위배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에서 ‘신앙의 자유를 갖는다’고 하는 식으로 명문화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서민 사이에서는 그다지 널리 퍼지지 못했다. 또 교육칙어가 발포되고 우치무라 간죠 불경사건이 일어나자 ‘충군애국’을 강조하는 국가주의의 입장에서 기독교가 맞지 않는다는 공격도 일어나고 불교계로부터도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 종교계는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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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유 자료번호 : edeah.d_0005_005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