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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사상

4. 사상

문명개화의 풍조와 더불어 사상계도 활성화되어 인간의 자유와 권리, 개인의 자립을 존중하는 구미의 새로운 자유주의, 공리주의 사상과 학문이 들어오고 그것에 기초를 둔 정치제도, 경제조직, 법률 등의 신지식이 계몽사상가 들에 의해 소개되고 주창되어 일반에게 수용되어 갔다.
특히 후쿠자와 유키치는『학문을 권함』을 써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귀천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학문을 배워서 봉건적 신분을 타파해야 하고 자주(自主)와 자유의 정신에 기초한 개인의 독립이 국가의 독립을 지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은 초판에서 17판까지 출판되었는데 1880년까지 약70만부가 인쇄되는 경이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후쿠자와는『문명론의 개략』을 저술하여 인간의 지덕의 진보가 문명을 발전시키는 큰 힘이라고 외쳤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사상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청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막부 말기에『인초(隣草)』를 써서 서양의 입헌정치를 소개하고 그것을 채용할 것을 주장한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는 유신 후에도 계속『입헌정체본략』『국체신론』등을 저술하는 한편 입헌정치의 지식을전파하고 천부인권론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1880년대에 들어가자 사회진화론의 입장으로 옮겨가면서 자신의 천부인권론을 부정하게 되었다.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는『서국입지편(西國立志編)』『자유의 이치』를 번역하고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사상을 전했다. 니시 아마네[西周]는 쓰다 마미치[津田眞道] 등과 함께 막부 말기에 막부 유학생의 한사람으로서 유럽에서 공부했는데 메이지 초기에는 철학이나 이론 등에 관련된 저작을 주로 저술하였다. 쓰다는 만국공법과 법률학을 공부하고 이러한 분야의 저작과 함께 출판의 자유, 폐창(廢娼)주 961
각주 961)
공창제도의 폐지를 의미한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여성운동으로 전개되어 공창제도가 폐지되는 국가가 나타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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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 조기 개설 등을 외쳤다. 또 이와쿠라 사절단에 동행하여 프랑스에 유학한 나카에 죠민[中江兆民]은 귀국 후 급진적인 자유주의 사상가 루소의「사회계약론」을 번역하여『민약역해(民約譯解)』라는 제목으로 공간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사상을 전하고 자유민권운동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다구치 우키치[田口卯吉]는 문명의 발전이라는 문명사관의 입장으로부터『일본개화소사(日本開化小史)』를 써서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러한 계몽사상가들이 1873년 서양의 학회를 모방한 메이록샤[明六社]를 결성했다.
메이로쿠샤는 미국에서 귀국한 외교관 모리 아리노리[森有禮]가 1873년 8월 구미제국의 학회를 모델로 학술, 담화의 모임을 설립하려는 뜻으로 니시무라 시게키[西村茂樹] 등과 상의한데서 시작되었다. 정식 발족은 1874년 2월로『메이록쿠잡지[明六雜誌]』(매월 2~3회, 각 4천에서 5천부)와 강연회, 담화회 등을 개최함으로써 새로운 학술, 지식, 사상의 계몽운동을 추진했다. 모리, 니시무라 이외에 후쿠자와 유키치, 가토 히로유키, 나카무라 마사나오, 쓰다 마미치, 니시 아마네, 간다 다카히라[神田孝平] 등 양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들은 모리를 제외하면 서남의 웅번 출신이 아니고 그 대부분은 중, 소번의 출신이면서 막부 말기에 막부의 양학교 기관에서 근무하고 막부의 신하로서 서양학의 연구와 교육, 서양서의 번역 등을 담당했던 인물들이었다. 유신 후 후쿠자와 유키치를 제외하고 대부분 메이지 정부에 들어가서 관료로서 그들의 신지식을 크게 활용했다. 구막부의 인재육성 정책이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875년 6월, 참방률(讒謗律)주 962
각주 962)
명예훼손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법률로서 신문이나 풍속화 등으로 당시의 관리나위정자를 비판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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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조례의 제정과 같이 자유로운 언론활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메이로쿠샤의 활동은 활기를 잃고 1875년 11월에는『메이록쿠잡지[明六雜誌]』도 폐간되었다.
이러한 신사상과 신지식의 보급에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신문, 잡지, 출판 사업의 발달이었다. 신문은 이미 막부 말기에 나왔지만 1870년 일본최초의 일간 신문으로서『요코하마마이니치신문[橫浜每日新聞]』이 발행된 것을 시작으로 1870년대에『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닛신신지지[日新眞事誌]』『죠야신문[朝野新聞]』『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유빙호치신문[郵便報知新聞]』『아사히신문[朝日新聞]』등이 연이어 창간되었다. 그 대부분은 정치문제 등을 논평하고 정치적 주장을 전개하는 등 정론신문의 색채가 강했는데 그 중에는 에도 시대의 요미우리가와라반[讀賣瓦版]주 963
각주 963)
에도시대 대사건, 화재, 괴담 등 시사성이 높은 뉴스를 신속하게 전해준 정보지. 길거리에서 팔기위해 걸어다니면서 읽었다고 해서 요미우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후 현재의 요미우리 신문이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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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전통을 이어서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하는 작은 신문들도 있었다. 이처럼 많은 출판물이 발행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모토키 쇼조[本木昌造]가 연제활자의 활판인쇄술을 발명하여 활판인쇄가 수월해졌기 때문이었다.

  • 각주 961)
    공창제도의 폐지를 의미한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여성운동으로 전개되어 공창제도가 폐지되는 국가가 나타나기도 했다. 바로가기
  • 각주 962)
    명예훼손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법률로서 신문이나 풍속화 등으로 당시의 관리나위정자를 비판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963)
    에도시대 대사건, 화재, 괴담 등 시사성이 높은 뉴스를 신속하게 전해준 정보지. 길거리에서 팔기위해 걸어다니면서 읽었다고 해서 요미우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후 현재의 요미우리 신문이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도 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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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자료번호 : edeah.d_0005_0050_002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