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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국민생활

3. 국민생활

문명개화의 풍조는 도쿄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국민의 생활양식에 있어서도 여러가지로 나타났다. 1872년에 발생한 긴자[銀座] 일대의 화재를 계기로 정부는 방화와 미관을 고려하여 긴자 거리에 벽돌식의 서양식 건축을 나란히 세웠다. 1871년에는 산발탈도령(散髮脫刀令)이 나왔고 짧은 머리와 양복 착용이 첨차 퍼져나갔다. 거리에는 가스등과 램프가 켜지고 인력거, 마차 등이 달리게 되었다. 식사에 있어서도 육식의 습관이 서양으로부터 전해졌는데 특히 소고기를 좋아했다. 또 정부는 서양제국의 예에 따라 지금까지의 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채용하기로 하고 1872년 12월 3일을 양력으로1873년 1월 1일로 삼았다. 그 후에 일요일을 휴일로 삼아 쉬는 제도도 만들었다.
문명개화의 풍조 속에서 일본 고래의 전통적인 예술이나 미술공예품이 홀대를 받고 유서 깊은 사찰이나 고성이 파괴되는 등 수많은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어 갔다. 나라의 흥복사(興福寺)의 오층탑이 겨우 25엔(현재 30~40만엔 정도)에 팔려 나가기도 했다.
메이지 초기에 내일한 독일 의사 베르츠(Erwin von Bälz)는 일본의 젊은 지식인이 일본의 전통적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고 오래된 것을 모두 부정하려는 모습에 놀랐다. 그는 자국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지 않으면 외국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의 풍속, 습관이 퍼진 것은 도쿄, 요코하마 등의 대도시, 개항장, 관청, 학교, 군대 등으로 농촌에까지는 깊이 확산되지 않아 지방의 농촌에서는 여전히 음력에 의해 연중행사가 이루어지는 등, 에도시대 이래 전통적인 생활 습관이 계속되었다. 문화 생활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차이가 여전히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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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생활 자료번호 : edeah.d_0005_0050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