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말기의 문화
Ⅰ. 에도 막부 말기의 문화
1854년 개국이 되자 일본은 구미제국의 외압과 내부 통치체제의 동요로 인해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막부는 구미제국과의 교류를 넓히고 대내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강화함과 동시에 국가의 자립을 확보하기 위해 선진 문화와 학문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꾀하고자했다. 이처럼 서구 문물의 수용에 있어서 막부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반면에 막부에 저항했던 서남의 웅번 세력은 존왕양 이론을 내세워 서양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었다. 물론 서남 웅번들의 반서양화 경향은1860년대 초반 서양과의 무력충돌에서 패한 시기를 기점으로 극적인 반전을 보이지만 개국 초기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중심은 막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학(大學)의 탄생
개국한 다음해인 1855년에 막부는 기존의 반쇼와게고요[灣書和解御用]주 952를 독립시켜 양학소(洋學所)를 세우고 곧 이것을 한쇼시라베쇼[番書調所]주 953로 개칭했는데 여기에서는 구미 각국의 어학과 과학에 관한 교육과 연구 및 외교문서의 번역 등이 이루어졌다. 물론 현실적인 필요와 학문 연구, 교육 등이 분리되기도 전이었고 관련된 용어조차 정비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여러가지 기능이 한 곳에 몰려 있기도 하고 기관의 명칭도 수시로 바뀌었다. 1863년 요쇼시라베쇼[洋書調所]에서 가이세이죠[開城所]로 개칭되어 의학, 군사 등 자연과학에 치중해 있던 기존의 서양학이 철학, 정치, 경제 분야로 확대되었다. 또 가이세이죠는 메이지정부 시기에 가이세이 학교가 되었다가 도쿄대학[東京大學]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근대적인 교육기관인 대학도 수차례의 시행착오와 수정을 거쳐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의학 분야에서는 1860년, 천연두 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민간이 만든 종두소(種痘所)를 막부가 직접 관할하고 나아가 의학소로 개칭하여 서양의학의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도록 했다.
이 시기에 막부는 막부의 관료인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長]나 요쇼시라베쇼[洋書調所]의 교관인 니시 아마네[西周], 쓰다 마미치[津田眞道]를 네덜란드로 유학보내고 1866년에는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를 영국으로 유학시켜 구미제국의 정치, 법제, 경제를 공부하게 했다. 조슈[長州]번에서는1863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번의 관리 5명을 영국으로 보냈고 사쓰마번에서도 고다이 도모아쓰(五代友厚),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등 무려 19명을 영국으로 보내는 등, 양이론에서 개항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함에 따라 막부뿐만 아니라 유력한 번들도 적극적으로 유학생을 외국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받아들여 막부는 일본인의 해외도항을 금지시켜왔던 조치를 완화하고 1866년에는 학술과 상업을 위한 외국으로의 도항을 허가했다. 그 외에도 요코하마[横浜]에는 외국인 선교사, 신문기자가 내일하여 그들을 통해 구미의 정치와 문화가 일본인에게 소개되었다.
1857년 통상조약 체결에 의해서 내일한 선교사 중에서 의사이기도한 미국인 헷번(Hepburn)은 진료소와 영학숙(英學塾)을 열고 헷번식이라고 불리는 일영사전을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서양문화를 일본에게 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영국 공사 올코크(Ruterford Alcock)는 일본의 미술공예품을 수집해서 1862년 런던의 세계산업박람회에 출품하기도 했고 막부는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주 954에 우키요에[浮世繪]주 955와 도자기 등을 출품하고 일본문화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를 제고시키고자 힘썼다. 이처럼 양이의 사고방식이 점차 바뀌어지면서 구미를 본받아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소리가 강해졌다
의학 분야에서는 1860년, 천연두 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민간이 만든 종두소(種痘所)를 막부가 직접 관할하고 나아가 의학소로 개칭하여 서양의학의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도록 했다.
이 시기에 막부는 막부의 관료인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長]나 요쇼시라베쇼[洋書調所]의 교관인 니시 아마네[西周], 쓰다 마미치[津田眞道]를 네덜란드로 유학보내고 1866년에는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를 영국으로 유학시켜 구미제국의 정치, 법제, 경제를 공부하게 했다. 조슈[長州]번에서는1863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번의 관리 5명을 영국으로 보냈고 사쓰마번에서도 고다이 도모아쓰(五代友厚),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등 무려 19명을 영국으로 보내는 등, 양이론에서 개항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함에 따라 막부뿐만 아니라 유력한 번들도 적극적으로 유학생을 외국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받아들여 막부는 일본인의 해외도항을 금지시켜왔던 조치를 완화하고 1866년에는 학술과 상업을 위한 외국으로의 도항을 허가했다. 그 외에도 요코하마[横浜]에는 외국인 선교사, 신문기자가 내일하여 그들을 통해 구미의 정치와 문화가 일본인에게 소개되었다.
1857년 통상조약 체결에 의해서 내일한 선교사 중에서 의사이기도한 미국인 헷번(Hepburn)은 진료소와 영학숙(英學塾)을 열고 헷번식이라고 불리는 일영사전을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서양문화를 일본에게 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영국 공사 올코크(Ruterford Alcock)는 일본의 미술공예품을 수집해서 1862년 런던의 세계산업박람회에 출품하기도 했고 막부는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주 954에 우키요에[浮世繪]주 955와 도자기 등을 출품하고 일본문화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를 제고시키고자 힘썼다. 이처럼 양이의 사고방식이 점차 바뀌어지면서 구미를 본받아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소리가 강해졌다
- 각주 952)
- 각주 953)
- 각주 954)
- 각주 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