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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맺음말

Ⅴ. 맺음말

19세기 후반에서 1945년까지 동아시아 반전운동, 평화를 지향한 노력과 국제연대는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1900년대 일본에서 먼저 등장한 반전론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등의 평화사상이 제기되었고, 일본에서 전개된 아주화친회 등 반제국주의 독립을 위한 아시아의 연대운동, 1910년 일본의 한국병합 이후 중국에서 한중호조사·한중협회 등 다양한 조직 활동이 전개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한국의 많은 애국지사들이 중국의 혁명활동에 참여하였고, 중국혁명가들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 시기 제국주의 국가의 억압에 저항하고 아시아의 평등한 연대를 추구하기 위한 사상으로 받아들여진 아나키즘은, 1910~20년대 동아시아에서반전과 국제연대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0년대 일본 고토쿠 슈스이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1910년대 중국 리스쩡의 상호부조론, 1920년대 신채호의 민족독립을 위한 민중해방의 논리로 대표되는 한중일 3국의아나키스트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시기의 아나키스트들은 국제연대를 위해 소통과 평화의 언어인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였다.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일본과 중국에서 연대활동을 통해 농촌운동과 노동운동을 하였고, 여러 조직을 만들어 일제에 맞서 대항하였다.
1930년대 일본이 중국대륙을 침략하는 군국주의가 확대되자, 동아시아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아나키스트들은 다양한 형태의 반전 활동을 전개하고 상호 연대하였다. 재일 한인아나키즘운동은 1935~37년경 대부분 해체되었지만, 박열·정철 등 아나키스트들은 해방후 거류민단을 결성하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아나키즘 국제연대는 비록 취약한 조직운영과 현실문제에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운동의 패인이라고 종종 지적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한 민족과 지역을 넘어선 반전·평화를 위한 국제연대의 다양한 활동은 계속 이어져 왔으며, 무(無)강권·무(無)지배의 신사회 건설을 추구한 그들의 자유정신과 공동체 이념은 당시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 확충에 기여하였다(김명섭, 2001:124쪽). 오늘날에도 그들이 제시한 이상주의적 전망은 여전히 새롭게 해석될 가치가 있다.
김산의 명예회복 사례에서 보듯이, 과거 잘못 기술되거나 평가되었던 역사를 올바르게 재해석하기 위한 논의와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동안 중국은 ‘8년 항일투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 1945년까지만을 공산당의 항일투쟁사로 규정하고, 1931년 만주사변발발 후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여 6년간 일제에 항거했던 조선인과 중국인의 연대투쟁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는 중국이 1930년대 중국 동북지역의 한중간 항일연대투쟁에서 한국의 역할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중국이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한국인과 중국인이 손잡고 만주 일대에서 벌였던 6년간의 항일투쟁을 ‘중국의 항일투쟁사’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주 951
각주 951)
지난 30여 년간 “항일투쟁의 역사는 8년이 아니라 14년”이라는 李閔 전 黑龍江省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의 주장을 최근 중국 관영매체들이 인용하기 시작함에 따라, 東北抗日聯軍의 투쟁이 중국의 항일투쟁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흑룡강신문』2010년9월 6일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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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잘못 평가되었던 역사를 재평가한 좋은 사례이다.
이 시기 반전·평화를 위한 국제연대의 경험은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1942년 중경에서 결성된 한중문화협회는 1945년 8월 이후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1965년 한국이 이를 계승하는 한중문화협회를 결성하여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또 1999년 가을 서울에서 열린 NGO대회를 계기로, 국제평화주의자 후세 다쓰지 표창운동이 일어났고, 그의 탄생 120주년기념일인 2000년 11월 13일에는 ‘후세선생 기념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다테노 아키라 편저, 오정환·이정환 옮김, 2006: 217).
중국에서 한중간 항일연대의 역사 유적지 일부는 현재 기념시설로 보존되고 있다. 상해와 항주·장사·중경의 임시정부청사 유적, 남경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회의개최지, 무한의 조선의용대 창설 장소, 쑨원의 호법정부가 세워진 뒤 임시정부와 각별한 관계를 갖게 된 광주, 조선의용대와 관련된 계림 등지의 역사유적을 발굴·연구·보존하기 위해, 오늘날 한중 양국의 협력과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순에는 한국애국지사 안중근이 재판받았던 일본관동지방법원 구지진열관, 그리고 안중근·신채호·이회영 등 한국독립지사들이 순국한 여순 일아(日俄)감옥이 박물관으로 보존·전시되고 있다. 2008년에는 하얼빈의 조선민족예술관 내에 안중근 전시실이 마련되는 등 기념관 건립과 기념행사 등을 통해 반전·평화 사상과 연대의 정신이 계승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한·중·일간 추진되고 있는 공동역사교재 개발은, 삼국 간 불신과 대립을 끊고 평화와 상생의 재생산구조로 바꾸어 나가기 위함이다. 공동교재개발은 동아시아를 평화공동체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기억공동체’를 만드는 교육, 세계시민으로서의 역사 또는 지역사로서의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역사인식 함양을 목표로 한다(김성보, 2007: 834~837). 공동교재 개발과 더불어 이 지역에서 반전·평화를 위해 노력한 인물과 역사 유적들을 발굴·보존·기념하는 사업도 계속 추진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우리의 동아시아사 교육은 반전·평화를 위해 노력한 연대활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편협한 민족주의나 애국주의가 확산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 각주 951)
    지난 30여 년간 “항일투쟁의 역사는 8년이 아니라 14년”이라는 李閔 전 黑龍江省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의 주장을 최근 중국 관영매체들이 인용하기 시작함에 따라, 東北抗日聯軍의 투쟁이 중국의 항일투쟁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흑룡강신문』2010년9월 6일 보도)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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