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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1930년대 이후 한·중의 항일을 위한 국제연대

Ⅳ. 1930년대 이후 한·중의 항일을 위한 국제연대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해 대일전쟁이 본격화되자, 재중 한인의 각항일단체들이 국제연합전선 결성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31년 11월 동방아나키스트 연맹의 간부를 맡았던 중국인(王亞樵·華均實 등) 7명, 한국의 이회영·정화암·백정기 등 7명과 일본인(佐野一郞와 伊藤) 등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연맹은 국제연대의 취지에 맞게 조선인부와 중국인·일본인부를 두었고, 대만인부와 미국인부를 증설하는 등 국제연합기구로의 확장을 꾀하였다.주 942
각주 942)
대만인 林成材와 미국인 존슨 등이 합류하였다. 김명섭, 「한일 아나키스트들의 사상교류와 반제 연대투쟁」 『한국민족운동사연구』49, 2006, 59~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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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아나키스트들의 남화한인연맹 맹원들도 조직을 재편해 적극적인 항일투쟁에 나서, 일제의 밀정으로 활동한 친일분자들을 숙청하는 한편,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해 항일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사건을 계기로, 임시정부와 남경 국민정부의 연대활동도 강화되었다. 국민정부는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재정지원 뿐만 아니라, 김구가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도록 지원하였다.주 943
각주 943)
1933년 5월 민국정부 주석 장제스는 김구와 회담하고, 천궈푸에게 김구 등에게 매월 5,000원의 경상지원비와 필요시 임시사업비를 추가 지출토록 지시하였다. 낙양군관학교는 1933년 북경·천진·상해·남경 등지에서 100여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학적에 올리고 이청천과 이범석을 교장교관으로 임명하였다. 이 군관학교는 겨우 제1기생을 졸업시키고 일본영사의 항의로 남경정부가 폐쇄령을 내렸다. 고영일, 윗책, 4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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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중 연합단체는 더욱 많아졌다. 중한민족항일대동맹(中韓民族抗日大同盟), 아주문화협회(亞洲文化協會), 동방문화협회(東方文化協會), 동방인민반파시스트동지회(東方人民反法西斯同志會),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 등이 조직되어 양국의 우호협력과 혁명활동을 선전하였다. 중국과 한국의 공동 항일투쟁을 위해 수많은 조선인이 항일연군에 참여하였고, 중화민국정부도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 한인 아나키스트들도 항일 민족전선에 참가하는 등 변화가 나타났다. 유림과 유자명 등은 임시정부에 참가해 활동하였고주 944
각주 944)
유자명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임정에 통합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기도하였으나, 임정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의 임정활동은 아나키스트로서 외세침략에 맞서야 하는 저항적 민족주의 의식과 합치한 결과였다. 한상도(2007), 158~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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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아나키스트들은 국민당에 가입해 항일전에 참가했으며, 다른 일부는 공산당의 민족통일전선에 호응해 공산군으로 항일전에 참가하였다. 정화암·유자명·라월환 등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중일전쟁 발발 직전 좌파계열의 연합전선인 조선혁명자연맹주 945
각주 945)
중국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1931년 결성한 남화한인청년연맹은 7년여에 걸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지역에서 결성된 모든 단체와 민족전선을 이루기 위해 조직의 명칭을 조선혁명자연맹으로 개칭하였다. 박난영(2005), 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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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결성하였고, 1938년 항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였다. 이런 행동은 일본과 중국의 아나키스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조세현, 2001: 151~152)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이후 중국에서 국공합작의 기운이 높아지자, 한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인 각 단체들도 한국광복전선과 조선민족전선연맹 등 연합전선을 결성하였다. 1938년 조선민족전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조직하여 중국과 공동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조선의용대 일부는 중국공산당의 항일근거지 연안(延安) 등으로 이전하여 항일투쟁을 벌였고, 일부는 1940년 여름 광복군(光復軍)에 합병되었다. 1940년 한국임시정부가 중경에서 조직한 ‘한국광복군’은 산서(山西)·수원(綏遠)·산동(山東) 등지에서 항일 전투를 벌였다. 1941년 1월 한인아나키스트들도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편입되어, 일제의 강권통치의 파괴와 자유연합적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투쟁하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한국 임시정부는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적 후방 전선에서 팔로군(八路軍)과 신사군(新四軍) 및 조선의용대가 모두 참여해 공동 작전을 펼쳤다(한상도, 2004 : 258). 1942년 10월 11일 중국 국민당정부의 전시수도인 중경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의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지사들과 중국의 국민당·공산당 각계 인사들 400여명은 함께 중한문화협회를 창립하여,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고 동아평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한시준, 2010 : 374).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중국내 일본인의 반전 연대활동도 전개되었다. 일본인 하세가와 데루는 중국 상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대일방송에 종사면서, 일본군인들에게 ‘그릇되게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였다.주 946
각주 946)
하세가와는 1932년 나라 여자고등사범학교 재학중에 에스페란토를 배우다가 체포되어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후 1936년 중국인 유학생인 류런과 결혼하였고, 류런이 항일구국운동을 위해 귀국하자 그를 따라 상해로 건너가서 반전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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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 군대가 일본군 포로를 조선의용대에 인계함으로써, 중국내 일본인 반전운동은 한·중·일의 국제연대 활동이 되었다.주 947
각주 947)
중국국민당 정부의 ‘적극항전’ 노선을 배경으로 조선의용대·대만의용대·재화일본인민반전동맹이라는 3민족의 국제연대조직이 결성되었다. 한상도(2006),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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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군에게는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되며 포로가 되기 전에 자살하라’는 규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전선에서 중국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들이 교육을 받은 후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향해 투항과 전선이탈을 호소하는 반전운동을 벌였다.주 948
각주 948)
중국내 일본군 포로들의 반전운동 지도자인 가지 와타루는 국민정부 쪽에서 활동하면서 일본인민 반전동맹 서남지부(1939년 11월 결성)를 조직하였다. 노사카 산조는 일본 병사 반전동맹 연안지부(1940년 5월 결성)를 조직, 포로가 된 일본병사의교육을 위해 연안에 일본노동학교를 창설하였다. 1942년 8월 개최된 화북 일본인반전단체 대표자대회 및 화북 일본병사 대표자대회를 계기로 ‘재화일본인 반전동맹 화북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944년 2월 화북연합회는 ‘일본인민해방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바꾸고, 전쟁의 즉시 종결, 참전국과의 공정한 강화, 전쟁 주모자의 처벌 등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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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41년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이 충돌한 환남(晥南)사건을 계기로, 조선의용대 주력이 공산당 항일근거지로 옮겨가면서, 일본인 반전활동은 화북의 공산당 관할지역에서 펼쳐졌다(한상도, 2004 : 267).
이 시기 중국에서 활동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주의자거나 공산주의자거나 모두가 중국혁명의 승리여부를, 항일투쟁의 승리여부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중국의 국민당·공산당과 항일통일전선을 맺고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피를 흘렸다. 중국정부는 1949년 신중국 건립 후 중국혁명에 참가하여 희생된 한인들의 위대한 국제주의 정신과 혁명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비문을 설치하여 기리고 있다(광주기의 열사능원에 건조된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 등). 한편 전쟁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례도 있다. 예컨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통해 알려진 한국의 김산(본명 장지락)주 949
각주 949)
김산은 1905년 3월 평양 부근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 후 구국의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자로 변모하였다. 그는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26년 중국에서 분열된 조선 청년들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김원봉·김성숙 등과 조선혁명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는 중국 공산당원들과 광동봉기에 가담하였고, 해륙붕 소비에트에도 참여하였다. 1930년과 1933년두차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가 없어서 석방된 일로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일본 스파이로 의심을 받게 되자, 그는 의심을 풀기 위해 연안으로 가서 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 등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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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던 중,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중국 동북지역에서 유격전쟁에 참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 김산과 님 웨일즈가 이름으로 조직을 바꾸고, 전쟁의 즉시 종결, 참전국과의 공정한 강화, 전쟁 주모자 의 처벌 등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공저한 『아리랑의 노래-어느 조선반역자의 일생』이 미국 뉴욕에서 출판되고, 일본어와 중국어로도 번역되었다. 1983년 1월 27일 중공중앙 조직부는 『장명(장지락) 동지의 명예회복에 관한 결론』에서 “장명 동지의 피살은 특정한 역사 조건하에서 발생한 억울한 사건이다. 우리는 마땅히 오랫동안 억울한 누명을 쓴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당적을 회복시켜야 한다”주 950
각주 950)
「阿里郞之歌 張志樂和中國革命的古事」 『中國人民報』2010年 7月 2日 ; 阿里郎之歌 张志乐和中国革命的故事来源 : 『中国民族报』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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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여 중국공산당과 연대한 그의 항일 활동을 인정하였다.
김산
님웨일즈
※자료 연계

  • 각주 942)
    대만인 林成材와 미국인 존슨 등이 합류하였다. 김명섭, 「한일 아나키스트들의 사상교류와 반제 연대투쟁」 『한국민족운동사연구』49, 2006, 59~60쪽. 바로가기
  • 각주 943)
    1933년 5월 민국정부 주석 장제스는 김구와 회담하고, 천궈푸에게 김구 등에게 매월 5,000원의 경상지원비와 필요시 임시사업비를 추가 지출토록 지시하였다. 낙양군관학교는 1933년 북경·천진·상해·남경 등지에서 100여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학적에 올리고 이청천과 이범석을 교장교관으로 임명하였다. 이 군관학교는 겨우 제1기생을 졸업시키고 일본영사의 항의로 남경정부가 폐쇄령을 내렸다. 고영일, 윗책, 407쪽. 바로가기
  • 각주 944)
    유자명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임정에 통합하면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기도하였으나, 임정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의 임정활동은 아나키스트로서 외세침략에 맞서야 하는 저항적 민족주의 의식과 합치한 결과였다. 한상도(2007), 158~159쪽. 바로가기
  • 각주 945)
    중국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1931년 결성한 남화한인청년연맹은 7년여에 걸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지역에서 결성된 모든 단체와 민족전선을 이루기 위해 조직의 명칭을 조선혁명자연맹으로 개칭하였다. 박난영(2005), 419쪽. 바로가기
  • 각주 946)
    하세가와는 1932년 나라 여자고등사범학교 재학중에 에스페란토를 배우다가 체포되어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후 1936년 중국인 유학생인 류런과 결혼하였고, 류런이 항일구국운동을 위해 귀국하자 그를 따라 상해로 건너가서 반전운동을 전개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947)
    중국국민당 정부의 ‘적극항전’ 노선을 배경으로 조선의용대·대만의용대·재화일본인민반전동맹이라는 3민족의 국제연대조직이 결성되었다. 한상도(2006), 17쪽. 바로가기
  • 각주 948)
    중국내 일본군 포로들의 반전운동 지도자인 가지 와타루는 국민정부 쪽에서 활동하면서 일본인민 반전동맹 서남지부(1939년 11월 결성)를 조직하였다. 노사카 산조는 일본 병사 반전동맹 연안지부(1940년 5월 결성)를 조직, 포로가 된 일본병사의교육을 위해 연안에 일본노동학교를 창설하였다. 1942년 8월 개최된 화북 일본인반전단체 대표자대회 및 화북 일본병사 대표자대회를 계기로 ‘재화일본인 반전동맹 화북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944년 2월 화북연합회는 ‘일본인민해방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바꾸고, 전쟁의 즉시 종결, 참전국과의 공정한 강화, 전쟁 주모자의 처벌 등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949)
    김산은 1905년 3월 평양 부근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 후 구국의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자로 변모하였다. 그는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26년 중국에서 분열된 조선 청년들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김원봉·김성숙 등과 조선혁명청년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는 중국 공산당원들과 광동봉기에 가담하였고, 해륙붕 소비에트에도 참여하였다. 1930년과 1933년두차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가 없어서 석방된 일로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일본 스파이로 의심을 받게 되자, 그는 의심을 풀기 위해 연안으로 가서 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 등을 가르쳤다. 바로가기
  • 각주 950)
    「阿里郞之歌 張志樂和中國革命的古事」 『中國人民報』2010年 7月 2日 ; 阿里郎之歌 张志乐和中国革命的故事来源 : 『中国民族报』연계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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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이후 한·중의 항일을 위한 국제연대 자료번호 : edeah.d_0005_004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