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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대와 평화의 언어, 에스페란토

4. 국제연대와 평화의 언어, 에스페란토

중국에서 한인들은 중국 아나키스트뿐만 아니라 러시아·일본·대만인 등과도 국제적인 연대를 이루어나갔는데, 특히 이들은 세계어(世界語)-에스페란토(Esperanto) 학습을 통하여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사상적으로 교류하였다(박환, 2005: 44). 에스페란토는 1887년 폴란드의 안과의사 자멘호프 박사가 만든 세계 공용문자이다. 이 문자를 발명한 목적은 언어와 문자의 통일을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고 인류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데 있다(조세현, 2007: 233). 에스페란토는 민족 간의 소통의 문제를 방법론적으로 제시하였다.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사람들 개인의 국가는 존재하지만,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그 전체 안에는 국가라는 틀이 존재하지 않으며 민족이라는 개념도 없다. 따라서 에스페란토에는 민족적·국가적 편견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호간의 평등성이 자리잡고 있다(안종수, 2006 : 37,44). 이시기 평화의 언어인 에스페란토는 아나키스트들을 민제적(民際的) 관계 속에서 사상적으로 결성시켰으며,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국제주의를 주장하는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연구·보급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아나키즘이 먼저 전파된 일본에는 에스페란토 역시 빨리 도입되어, 많은 에스페란토 아나키스트들이 배출되었다. 오스기 사카에·사카이 도시히토·이와사 사쿠타로 등 일본 아나키스들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위해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열였는데, 류스페이 등 중국인과 김약수·박열 등 한인들이 이들과 적극 교류하면서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박열·김약수·백무 등 조선고학생동우회 회원들이 1921년 이와사 사쿠타로의 집에 모여 결성한 흑도회의 세계어연구회(에스페란토) 모임 중 해산 명령을 받았다는 신문기사(『동아일보』 1921년 12월 7일)는 일본에서 에스페란토가 아나키스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에서는 1919년 10월 북경대학에 세계어연구회가 발족하여, 『북경대학일간(北京大學日刊)』에 ‘세계어학회’ 모임 안내광고가 정기적으로 실리는 등, 지식인들의 에스페란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북경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가 리스쩡을 생물학 교수로, 우즈후이를 학감으로 초빙하자, 이들의 영향력 아래 아나키즘과 세계어가 북경대에서 유행하였으며, 중국에 유학 온 한인들도 북경대학을 통해 에스페란토를 접하였다. 1922년 2월부터 러시아의 맹인 시인이자 아나키스트인 에로센코(1889~1952)가 북경대에서 에스페란토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루쉰 집에 기거했던 에로센코는 아나키즘을 공부했던 정화암과 이정규·이을규 형제를 비롯하여, 백정기·유림·이회영·유자명·김원봉 등 한인들과도 교류하였다. 특히 리스쩡은 북경의 한인아나키스트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고, 이정규가 아나키스트 조직을 건설하는데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이들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리스쩡·우즈후이 및 일본인 아나키스트인 야마가 타이지와 함께 1923년 북경 세계어 전문학교 설립에도 깊이 관여하였다(안종수, 2006 : 60, 93).
1920년대 중국의 활발한 에스페란토 운동 하에서 바진[巴金, 1904~2005]이라는 걸출한 아나키스트 문학가가 배출되었다.주 937
각주 937)
필명 ‘巴金’은 바쿠닌[巴古寧]과 크로포트킨[克魯泡特金]의 중국어 이름에서 한글자씩 빌려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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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30년대의 중국 아나키즘 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바진은, 성도 외국어전문학교에 들어간 1920년 당시 성도사범학교 영문과 학생이던 한국인 고자성(高自性, 柳華永 또는 柳林)주 938
각주 938)
고자성은 유림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용했던 이름의 하나이다. 유림은 1919년 3・1운동 참가후 중국에서 활동하였고, 1920년 북경에서 신채호가 잡지 『천고』를 발간하는데 관여하였으며,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후 에스페란토어를 보급에 나섰다. 김영천(2007), 171~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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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설한 세계어반에서 에스페란토어를 배웠으며주 939
각주 939)
바진과 한국인의 인연은 소년시기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을 영웅으로 숭배한 것으로 시작하며, 이후 한국인을 솔직하고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라고 느끼게 된 것은 다분히 처음 만난 유림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박난영(2005), 403~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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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북경에 와서도 한인 아나키스트인 심여추(沈茹秋)를 만나 에스페란토를 계속 배웠다. 바진은 1924년 유서·심여추 등 한인 아나키스트들과 연합하여 민국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흑기연맹을 조직하였다.주 940
각주 940)
1926년 유서, 심여추는 1924년에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만든 흑기연맹을 계승하여 조선의 청년조직인 고려청년사를 만들었다. 無政府主義운동사편찬위원회(1978), 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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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바진은 유자명 등 한인과 일본인 아나키스트와 반파시즘 연합전선 활동을 펼치고, 스페인 내란에 관심을 표명하는 등 국가라는 인위적 제도의 장벽을 넘어 온 인류의 의사소통과 보편적 이상을 지향하는 활동을 하였다(박난영, 2008 : 85~86).
루쉰
※ 자료 연계

바진
※ 자료 연계

중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에스페란토를 교육하기 위해, 1927년 건립한 상해 노동대학에 필수과목으로 포함시켜 중국인 및 한인 청년노동자 700여명에게 가르쳤으며, 중국인 외에도 이와사 사쿠타로·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郞]주 941
각주 941)
石川三四郞은 고토쿠 슈스이와 함께 평민사에 참가해 반전론을 주장하였던 기독교사회주의자였다. 『평민신문』에 참가했다가 투옥되고 이후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전후 일본무정부주의연맹의 고문을 지냈다. 조세현(2010),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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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다수의 외국인 아나키스트가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러시아의 아나키스트인 에로센코, 일본의 야마가 타이지[山鹿泰治]와 중국의 후스·루쉰·바진, 한국의 이정규·이을규·정화암·유림·심여추 등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세계의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제국주의 언어가 아닌 에스페란토로 소통하고 연대하였다(안종수,2006 : 118~119쪽). 단재 신채호가 아나키스트 활동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있을 때, 에스페란토어 책과 사전을 차입해 줄 것을 부탁한 것(오장환, 1992 :48)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일본의 대륙침략에 따른 국가적 혼란과 민족주의의 고조는 에스페란토어 전파에 장애물로 등장하였다(조세현, 2007 : 271). 국제주의를 추구하는 아나키스트들의 연대는 이후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한조직으로 불가피하게 재편되었다.

  • 각주 937)
    필명 ‘巴金’은 바쿠닌[巴古寧]과 크로포트킨[克魯泡特金]의 중국어 이름에서 한글자씩 빌려왔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938)
    고자성은 유림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용했던 이름의 하나이다. 유림은 1919년 3・1운동 참가후 중국에서 활동하였고, 1920년 북경에서 신채호가 잡지 『천고』를 발간하는데 관여하였으며,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후 에스페란토어를 보급에 나섰다. 김영천(2007), 171~172쪽. 바로가기
  • 각주 939)
    바진과 한국인의 인연은 소년시기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을 영웅으로 숭배한 것으로 시작하며, 이후 한국인을 솔직하고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라고 느끼게 된 것은 다분히 처음 만난 유림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박난영(2005), 403~410쪽. 바로가기
  • 각주 940)
    1926년 유서, 심여추는 1924년에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만든 흑기연맹을 계승하여 조선의 청년조직인 고려청년사를 만들었다. 無政府主義운동사편찬위원회(1978), 298쪽. 바로가기
  • 각주 941)
    石川三四郞은 고토쿠 슈스이와 함께 평민사에 참가해 반전론을 주장하였던 기독교사회주의자였다. 『평민신문』에 참가했다가 투옥되고 이후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전후 일본무정부주의연맹의 고문을 지냈다. 조세현(2010), 198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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