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의 수용과 적용
1. 아나키즘의 수용과 적용
동아시아에서 아나키즘은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시대조류인 사회진화론을 극복하기 위해 제기된 상호부조론을 중심으로,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서 먼저 활발히 전파되었다.주 917반전론자인 고토쿠 슈스이가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이후, 그의 영향으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중국인과 한국인 아나키스트들도 등장하였다. 중국인 아나키스트들은 1907년 일본에서 단체를 결성하였으며, 잡지 『천의(天義)』를 발간하여 ‘천의’ 파로 불린다.주 918‘천의’ 파의 대표는 류스페이[劉師培, 1884~1919]이며, 이들의 사상은 중국의 전통가치와 서구적 아나키즘이 결합된 또는 국학과 혁명이 결합된 특징을 보인다. 이들은 노자(老子)를 아나키즘의 창시자로 보았으며, 공동체 내에서의 자발성과 상호부조라는 중국의 전통적 가치와 서구의 근대적인 평등사상을 결합한 중국식 아나키즘을 만들어 내었다.주 919
※자료
※자료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유학중인 중국인 아나키스트들도 단체를 결성하고 잡지 『신세기(新世紀)』를 발간하였다. ‘신세기’ 파의 대표는 리스쩡[李石曾]이다. 이 들은 중국에서 아나키즘이 일찍이 존재했다고 보지 않고 사회진화의 산물로 보았는데, 이들의 사상은 크로포트킨(1842~1921)의 ‘상호부조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상호부조론’은 제국주의 위협에 대항하는 국제적 민중연대라는 반제의 논리를 제공하여,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이론이었다.주 920신세기파는 중국의 봉건적 반식민지 상태를 아나키즘으로 해결하기 위해, 기존 중국의 모든 가치와 제도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새 질서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급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는데, 이들 과 교류한 한인 아나키스트들도 이러한 성향을 보였다.주 921
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은 상호부조론 이념과 더불어 한국 전통사상의 공동체의식도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는 토양이 되었다(구승회 외, 2004: 83~86). 동양의 공동체주의의 이념인 대동(大同)사상은 인간애의 관심과 반패권주의적 이념, 평화주의, 권력욕을 배격한 측면에서 아나키즘과 유사했다. 한인 아나키스트들도 전통사상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이회영(李會榮)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대동사상을 결합해 이해하였다(조세현, 2005: 254). 주체성을 강조했던 신채호의 아나키즘 수용은 민족해방운동과 대동사상의 사상적 기반위에서 이루어졌는데, 상호부조론이 사회진화론의 생존경쟁론을 극복하는데 가장 적합한 논리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박난영, 2008: 58). 또한 조국이 식민지화 위기에 처하자, 민족해방을 위한 모색의 일환으로 당시 중일 양국에서 혁명사상으로 급성장하고 있던 아나키즘에 주목하게 되었다. 즉 아나키즘이 국권회복과 민족해방을 위해 실천적이고 이념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일본정부가 한국병합을 비판했던 아나키스트들을 탄압하고주 922한국과 중국을 침략하는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감에 따라,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식민지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중국의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인들이 언제부터 아나키즘을 수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많은 한인들이 중국에 건너가 혁명 운동에 참가했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가 1910년대 중국사회에 풍미한 아나키즘을 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컨대 1913년 8월 신규식의 초청으로 상해로 간 신채호는 류스페이의 논설을 탐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이해할 정도로 아나키즘에 풍부한 지식을 습득하였다(이호룡, 2003: 77). 중국내 한인들이 아나키즘을 수용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중국인 아나키스트와 직접 교류한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신채호는 1921년 1월 북경에서 잡지 『천고(天敲)』를 발행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비판하고 한·중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때 중국인 아나키스트 리스쩡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조세현, 2001: 105).
3.1운동 이후 아나키즘의 조직과 이론이 체계화되면서, 아나키즘에 의거하여 민족해방 문제에 접근하는 한인들이 늘어났다. 원래 아나키스트들은 강권을 타파한 다는 측면에서 일체의 권력과 국가를 부정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국가와 정부를 부정하는 것은 곧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권력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호룡, 2003: 91).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 운동의 목적은 민족주의자들이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과 달리, 식민지 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민중(민족)의 해방을 위해 식민지 권력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한국 아나키즘은 제국주의 식민지 상태에 처한 한국적 상황에서 국가와 사회제도를 부정하는 아나키즘과 민족해방이라는 당면한 과제를 모순되지 않게 결합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논거를 확보하였다(구승회, 2004: 85). 일본·한국·중국 사회에 아나키즘이 수용되어 한때 광범위한 세력을 형성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대사회 내부의 절박한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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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유학중인 중국인 아나키스트들도 단체를 결성하고 잡지 『신세기(新世紀)』를 발간하였다. ‘신세기’ 파의 대표는 리스쩡[李石曾]이다. 이 들은 중국에서 아나키즘이 일찍이 존재했다고 보지 않고 사회진화의 산물로 보았는데, 이들의 사상은 크로포트킨(1842~1921)의 ‘상호부조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상호부조론’은 제국주의 위협에 대항하는 국제적 민중연대라는 반제의 논리를 제공하여,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이론이었다.주 920신세기파는 중국의 봉건적 반식민지 상태를 아나키즘으로 해결하기 위해, 기존 중국의 모든 가치와 제도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새 질서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급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는데, 이들 과 교류한 한인 아나키스트들도 이러한 성향을 보였다.주 921
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은 상호부조론 이념과 더불어 한국 전통사상의 공동체의식도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는 토양이 되었다(구승회 외, 2004: 83~86). 동양의 공동체주의의 이념인 대동(大同)사상은 인간애의 관심과 반패권주의적 이념, 평화주의, 권력욕을 배격한 측면에서 아나키즘과 유사했다. 한인 아나키스트들도 전통사상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이회영(李會榮)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대동사상을 결합해 이해하였다(조세현, 2005: 254). 주체성을 강조했던 신채호의 아나키즘 수용은 민족해방운동과 대동사상의 사상적 기반위에서 이루어졌는데, 상호부조론이 사회진화론의 생존경쟁론을 극복하는데 가장 적합한 논리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박난영, 2008: 58). 또한 조국이 식민지화 위기에 처하자, 민족해방을 위한 모색의 일환으로 당시 중일 양국에서 혁명사상으로 급성장하고 있던 아나키즘에 주목하게 되었다. 즉 아나키즘이 국권회복과 민족해방을 위해 실천적이고 이념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일본정부가 한국병합을 비판했던 아나키스트들을 탄압하고주 922한국과 중국을 침략하는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감에 따라,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식민지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중국의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인들이 언제부터 아나키즘을 수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많은 한인들이 중국에 건너가 혁명 운동에 참가했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가 1910년대 중국사회에 풍미한 아나키즘을 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컨대 1913년 8월 신규식의 초청으로 상해로 간 신채호는 류스페이의 논설을 탐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이해할 정도로 아나키즘에 풍부한 지식을 습득하였다(이호룡, 2003: 77). 중국내 한인들이 아나키즘을 수용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중국인 아나키스트와 직접 교류한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신채호는 1921년 1월 북경에서 잡지 『천고(天敲)』를 발행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비판하고 한·중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때 중국인 아나키스트 리스쩡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조세현, 2001: 105).
3.1운동 이후 아나키즘의 조직과 이론이 체계화되면서, 아나키즘에 의거하여 민족해방 문제에 접근하는 한인들이 늘어났다. 원래 아나키스트들은 강권을 타파한 다는 측면에서 일체의 권력과 국가를 부정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국가와 정부를 부정하는 것은 곧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권력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호룡, 2003: 91).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 운동의 목적은 민족주의자들이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과 달리, 식민지 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민중(민족)의 해방을 위해 식민지 권력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한국 아나키즘은 제국주의 식민지 상태에 처한 한국적 상황에서 국가와 사회제도를 부정하는 아나키즘과 민족해방이라는 당면한 과제를 모순되지 않게 결합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논거를 확보하였다(구승회, 2004: 85). 일본·한국·중국 사회에 아나키즘이 수용되어 한때 광범위한 세력을 형성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대사회 내부의 절박한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자료
- 각주 917)
- 각주 918)
- 각주 919)
- 각주 920)
- 각주 921)
- 각주 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