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3.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한·중·일의 항구적 평화를 역설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역시 이러한 국제적인 반전·평화 운동의 이념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당시 일본은 ‘동양평화’ 라는 구호를 동아시아로의 팽창과 전면적 침략과정에 이용하였다. 러일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1905년 2월 한국을 압박하여 맺은 ‘한일의정서’ 는 “한일 양 정부는 영원한 친교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확립한다”(제1조) “대일본제국의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한다”(제3조)고 되어 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 한국에 통감부를 세우고 12월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통감으로 임명하였다. 안중근은 이 조약의 체결에 분개해 애국계몽 운동에 합류하고 각지에 사립학교를 건립하였다. 하지만 1907년 7월 제3차 한일협약으로 한국군이 해산되자, 안중근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력투쟁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의병투쟁에 몸을 던졌다. 한편 안중근은 일본의 지도층과 인민을 분리하여 사고하였고, 부하 의병에게 일본인이라도 양민을 살해하여 서로 감정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였다. 실제로 그는 의병부대 지휘관으로 활약했던 1908년 7월 교전 끝에 생포된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였다.주 903
각주 903)
여기에는 일본군 포로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강력히 비난한 것도 일정 부분 작용했다. 현광호(2010), 385쪽.
닫기

안중근
※자료 연계

안중근은 1909년 하얼빈에서 조선 식민지화 정책의 책임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검거되어 여순(旅順) 감옥에 투옥되었다. 안중근은 일본인 검찰관의 심문에서, 이토를 사살한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함이며, 절대 사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이토의 15가지 죄주 904
각주 904)
이토의 죄상 15가지는 한국의 황제를 폐위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살해한 죄, 한국정권을 빼앗아 통감 정치로 바꾼 죄,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킨 죄,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등이다.
닫기
를 열거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양평화는 각국이 자주독립하고 있는 상태이며, 동양의 한 나라라도 자주독립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동양 평화라고 말할 수 없고,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자주독립이 동양평화의 조건’ 이라고 동양평화를 강조하였다. 안중근이 여순(旅順) 감옥에서 저술한「동양평화론」에는, 반제국주의 평화사상과 일본·한국·중국의 협력에 근거한 동아시아 평화의 발전구상이 들어 있다. 그는 지역적으로 인접한 같은 황색인종인 동아시아 3국이 대등·평등한 관계로 제휴하고, 서구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에 대항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안중근은 당시 한국에서 활발하게 거론되었던 ‘동아시아 협력론’주 905
각주 905)
‘동아시아 협력론’은 논자에 따라 ‘삼국제휴론’ ‘삼국공영론’ ‘동양주의’ ‘동양평화론’등으로 불린다. 예를 들면, 김도형(2000), 「대한제국기 계몽주의계열 지식층의 ‘삼국제휴론’」 『한국근현대사연구』13; 김신재(1990), 「독립신문에 나타난 ‘삼국공영론’의성격」 『경주사학』9; 백동현(2001), 「대한제국기 언론에 나타난 동양주의 논리와 그극복」 『한국사상사학』17, 등과 같이 그동안 연구에서는 대한제국기 한·중·일 삼국의 협력을 통한 서구 열강의 침략을 저지하는 논의에 대해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현광호(2010), 389쪽.
닫기
에 공감하고 그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19세기말 20세기 초에 걸쳐 모색된 아시아 연대론이 결국 공허한 논리로 변질주 906
각주 906)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은 궁극적으로 아시아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대 서구와의관계 설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김경일·강창일(2000), 참조.
닫기
되어 갔던 반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이 중심이 되어 주창한 아시아 연대주의와 구조적으로는 동일하지만 반침략주의라는 점이 다른 특징이다(강동국, 2009: 400). 안중근은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은 일본 지도층의 일부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지도층과 인민을 분리하여 사고하였으며, 일본 인민들 다수는 평화를 희망한다고 확신하였다(현광호, 2010: 391).
안중근은 한국과 중국의 긴밀한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한국과 중국의 상황이 유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역시 일본의 침략정책의 피해자라고 인식하고, 일본은 한국에 대해서는 국권을 반환해야 하며, 중국에 대해서는 여순을 반환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나아가 여순을 한중일이 공동으로 관리하기 위한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이곳을 평화의 근거지로 삼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주 907
각주 907)
안중근은 여순이 러시아·일본·청등의 분쟁 지점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순을 영세 중립지대로서 대립의 위험을 제거할 것, 아시아 각국이 여순에 대표를 파견해 항상 평화위원회를 마련할 것, 평화위원회는 각국 군대를 공동 관리하고, 분쟁 방지와 지역의 안전보장에 노력하는 것, 각국이 자금을 제공해서 개발 은행을 설립하고, 지역개발이나 원조가 필요한 나라에 자금을 제공하는 것, 로마교황청도 평화위원회에 대표를 보내고, 서구 제국의 관여없이 국제적인 승인과 영향력을 얻는 것 등을 주장하였다. 안중근, 「동양평화론」, 국가보훈처 편, 『21세기와 동양평화론』, 55쪽.
닫기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민족주의와 지역주의를 결합하면서 제국주의와 대결한 사상이었다는 점에 독보적인 역사적 의의가 있다(강동국, 2009:434). 그의 반전·평화 주장은 일본제국의 야만성을 드러내 일본의 평화 민중을 포함한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시켰으며,주 908
각주 908)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사건에 고무되어 베트남에서도 1912년 프랑스 총독의암살이 기도되었고, 1913년에는 친프랑스파 관료와 프랑스 군 대령 등이 살해되었다. 유인선(2004), 202~203쪽.
닫기
안중근 사후 15년 후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같은 논조의 대아시아 주의를 주장하였다.주 909
각주 909)
쑨원은 1924년 말 ‘대아시아주의’를 골자로 한 연설에서 ‘일본이 열강 침략의 주구가 아닌 동아시아 평화를 지키는 방패와 성벽으로 기능하기를 바란다’는 점을 밝히면서 안중근과 동일한 논조를 이야기 하였다. 徐勇(2009), 64쪽.
닫기


  • 각주 903)
    여기에는 일본군 포로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강력히 비난한 것도 일정 부분 작용했다. 현광호(2010), 385쪽. 바로가기
  • 각주 904)
    이토의 죄상 15가지는 한국의 황제를 폐위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살해한 죄, 한국정권을 빼앗아 통감 정치로 바꾼 죄,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킨 죄,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등이다. 바로가기
  • 각주 905)
    ‘동아시아 협력론’은 논자에 따라 ‘삼국제휴론’ ‘삼국공영론’ ‘동양주의’ ‘동양평화론’등으로 불린다. 예를 들면, 김도형(2000), 「대한제국기 계몽주의계열 지식층의 ‘삼국제휴론’」 『한국근현대사연구』13; 김신재(1990), 「독립신문에 나타난 ‘삼국공영론’의성격」 『경주사학』9; 백동현(2001), 「대한제국기 언론에 나타난 동양주의 논리와 그극복」 『한국사상사학』17, 등과 같이 그동안 연구에서는 대한제국기 한·중·일 삼국의 협력을 통한 서구 열강의 침략을 저지하는 논의에 대해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현광호(2010), 389쪽. 바로가기
  • 각주 906)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은 궁극적으로 아시아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대 서구와의관계 설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김경일·강창일(2000), 참조. 바로가기
  • 각주 907)
    안중근은 여순이 러시아·일본·청등의 분쟁 지점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순을 영세 중립지대로서 대립의 위험을 제거할 것, 아시아 각국이 여순에 대표를 파견해 항상 평화위원회를 마련할 것, 평화위원회는 각국 군대를 공동 관리하고, 분쟁 방지와 지역의 안전보장에 노력하는 것, 각국이 자금을 제공해서 개발 은행을 설립하고, 지역개발이나 원조가 필요한 나라에 자금을 제공하는 것, 로마교황청도 평화위원회에 대표를 보내고, 서구 제국의 관여없이 국제적인 승인과 영향력을 얻는 것 등을 주장하였다. 안중근, 「동양평화론」, 국가보훈처 편, 『21세기와 동양평화론』, 55쪽. 바로가기
  • 각주 908)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사건에 고무되어 베트남에서도 1912년 프랑스 총독의암살이 기도되었고, 1913년에는 친프랑스파 관료와 프랑스 군 대령 등이 살해되었다. 유인선(2004), 202~203쪽. 바로가기
  • 각주 909)
    쑨원은 1924년 말 ‘대아시아주의’를 골자로 한 연설에서 ‘일본이 열강 침략의 주구가 아닌 동아시아 평화를 지키는 방패와 성벽으로 기능하기를 바란다’는 점을 밝히면서 안중근과 동일한 논조를 이야기 하였다. 徐勇(2009), 64쪽.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자료번호 : edeah.d_0005_0040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