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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연대와 ‘아주화친회’

2. 아시아의 연대와 ‘아주화친회’

‘러일전쟁 이후 東京에서 활동하던 중국인과 인도인 및 일본인 혁명가들 사이에 교류가 깊어지면서, 이들은 새로운 연대조직을 결성하였다. 1907년 중국 혁명가 장빙린·류스페이[劉師培]·허전[何震]등과 인도인 펄한·바오스가 중심이 되어 발족한 아주화친회는 반제국주의를 목표로 아시아 세계에 처음 등장한 국제연대 조직이다. 아주화친회 첫번째 회합은 중국 혁명가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구축하고자한 고토쿠 슈스이 등의 일본인이 참가하였고, 두번째 회합에서는 판 보이 쩌우와 베트남인 유학생, 필리핀인들이 새롭게 참가하여 함께 규약을 만들었다. 장빙린의 이름으로 작성된「아주화친 회약장」에는 모임의 목적을 ‘제국주의에 반항하여, 아시아에서 주권을 잃어버린 민족의 독립달성’ 으로 정하고, 회원자격을 ‘아시아인으로 침략주의를 주장하는 자를 제외하고, 민족주의·공화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자를 불문하고 모두 입회할 수 있다’ 고 규정하였다. 즉 침략적 민족주의자를 제외한 진보세력의 연합을 추구하였다(조세현, 2010: 68). 나아가 만약 가맹한 어떤 한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다른 각국의 동지가 서로 지원해야 할 것 등을 명기하였다.
장빙린
※자료 연계

이후 베트남·필리핀·조선·미얀마·말라야 등의 혁명지사들이 계속 가입하면서, 이 조직은 아시아 각국의 혁명 지사가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고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해방을 쟁취하려는 혁명연맹이 되었다. 아주화친회는 아시아의 연대와 사회혁명의 완수를 위해 팽창적·억압적·침략적8자국 중심적 아시아론이 아닌, 문명·지역·인종 등의 경계를 초월한 초민족적·초지역적 연대로서의 아시아를 주장하였고(황동연, 2005: 154.155), 본부를 동경에 두고 중국·인도·조선·필리핀·베트남·미국 등지에 분회를 설립하였다.
당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800명 정도의 한국인 유학생 대부분은 아주화친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본의 한국침략이 점점 드세지는 가운데 ‘일본인이 출석한다면 우리들은 출석하지 않는다’ 는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대다수 한국측 인사들이 참여를 거부한 사실은 제국주의 일본이 ‘화친(和親)의’ 대상인 아시아란 개념에서 제외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조소앙(趙素昻)은 한국인 유학생으로서 아주화친회에 참가하여 일본인 및 중국인과 연대하였다.주 901
각주 901)
조소앙은 1904년 한국 황실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부립 제1중학교에 재적하면서 제2차 한일협약에 대한 항의집회를 주도하거나, 한국인 유학생을 결집하는 학회지에 주필로 관계하는 등, 일본 체류 유학생 민족운동의 중심적 존재였다. 김기승(20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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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은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인도·타이·필리핀·베트남 혁명가와 연대를 호소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은 아주화친회의 활동경험과 관계가 있다.
조소앙
※자료 연계

아주화친회가 성립된 배경에는 일본이 러일전쟁에 내건 ‘동양의 평화와 서구의 식민지 침략에 저항하는 아시아인의 해방’ 에 대한 아시아인들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정부는 이들의 기대와 달리, 1907년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과 협조 관계를 맺어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으면서 한국의 식민지화를 추진하고, 국내에서는 사회주의자 탄압을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일본 정부는 1908년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을 체포하고, 일본과 프랑스의 협약을 근거로 프랑스 정부의 요청에 응해 베트남 유학생의 국외 퇴거를 강행하였다. 일본정부의 군국주의화에 따른 사회주의자 단속 및 아시아 민족운동가 추방으로 인해, 1908년 10월 아주화친회 핵심인사들이 체포되거나 해외로 망명하고, 『민보』는 일본 정부의 조사를 받아 폐간되었다.
아주화친회 규약이 내건 각국 혁명의 상호원조나 민족 독립이 직접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1900년대 동경에서 아시아의 민족해방과 사회변혁을 목표로 추진한 활동은 아시아에서 선구적인 국제연대의 사례로 큰 의의를 남겼다. 아주화친회가 시작한 동아시아 반전·평화를 위한 연대활동은, 일본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금요강습회’ 와 중국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사회주의강습회’ 간의 상호 밀접한 교류를 비롯하여, 1910년대 이후 일본과 중국에서 계속 이어졌다.주 902
각주 902)
1910년대 동경에서 반제국주의운동을 결의한 한인과 중국인 유학생들이 1915년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하였고, 중국 유학생들은 졸업후 근거지를 상해로 옮겨 1916년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였다. 조세현(2010), 160~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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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901)
    조소앙은 1904년 한국 황실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부립 제1중학교에 재적하면서 제2차 한일협약에 대한 항의집회를 주도하거나, 한국인 유학생을 결집하는 학회지에 주필로 관계하는 등, 일본 체류 유학생 민족운동의 중심적 존재였다. 김기승(2008) 참조. 바로가기
  • 각주 902)
    1910년대 동경에서 반제국주의운동을 결의한 한인과 중국인 유학생들이 1915년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하였고, 중국 유학생들은 졸업후 근거지를 상해로 옮겨 1916년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였다. 조세현(2010), 160~161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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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연대와 ‘아주화친회’ 자료번호 : edeah.d_0005_004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