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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평화사상의 등장과 전파

1. 반전 ·평화사상의 등장과 전파

침략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지향한 노력은 전쟁의 역사와 함께 처음부터 존재해왔다. 그렇지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친 제국주의 전쟁 시대는 전쟁의 형태와 사람들의 전쟁관이 크게 달라졌다. 18세기까지는 홍수 등 자연재해나 콜레라나 페스트로 대변되는 질병이 인류에게 전쟁보다 무서운 사건이었지만, 19세기 이후는 전쟁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 이 대단히 커졌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한편으로 자연재해나 질병에 인간이 대응해 갈 힘을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쟁의 파괴력을 증대시켜 전쟁 피해가 확대되었다(木畑洋一, 2004:15). 자연과학의 발달을 기반으로 대량살상용 무기가 개발되고 전쟁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국가권력의 민간인 통제와 ‘총력전’ 개념이 등장한 바, 전쟁은 이제 전염병보다 무섭게 삶을 위협하는 재앙이 되었다. 이 시기 반전운동은 반제국주의적·반국가적·계급적 혁명운동의 형태를 띠면서, 유럽에서나 동아시아에서나 대체로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박진수, 2008: 14).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무렵 일본에서 먼저 비전론(非戰論)이 등장하여,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비전론자는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1871~1911]를 비롯하여, 사카이 도시히토[堺利彦, 1871~1933],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1885~1923], 가타야마 센[片山潛, 1859~1933]등을 들 수 있다. 고토쿠 슈스이는 주간 『평민신문(平民新聞)』(1903. 11~1905. 1)을 창간하여 비전론을 전개한 초기 반전운동의 핵심적 인물이다. 그는 1900년「비전쟁주의(非戰爭主義)」라는 논설에서 처음으로 일반인의 관점에서 전쟁이 초 래하는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그는 군인들의 고생, 전장지 인민의 불행, 군인유족의 비참함, 무역과 생산위축으로 인한 빈민증가 등 전쟁의 참화를 지적하였다. 1900년 11월 그는「배제국주의론(排帝國主義論)」을 신문에 연재하였고, 1901년 4월 일본에서 처음으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전면적 비판서인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를 펴냈다. 서양에서 제국주의 주장이 전쟁론과 결합되고, 제국주의 반대의 사상은 평화론의 형태를 취하였다(入江昭, 1986: 38)고 한다면, 고토쿠 슈스이의 제국주의 비판은 일본에서 반전론을 향한 전초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박양신, 2008: 99). 러일전쟁을 막기 위해 고토쿠는 1904년 3월 러시아사회민주당에 편지를 보내 국제연대를 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일본내 사회주의자·무정부주의자·자유주의자·종교인 등이 다양한 형태의 반전 활동을 벌였다.
고토쿠 슈스이
- ※자료 http://cafe.naver.com/anarchism.cafe
이 시기 대외적 위기의식의 소산으로 그리고 문화적·인종적·지정학적 유사성을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 3국의 연대론이 부상하였다. 즉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연대의 대상으로 동아시아 지역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하였다.주 898
각주 898)
중국에서 Asia의 음역인 아세아(亞細亞)는 20세기 초에 들어서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하였다. 신해혁명 시기의 근대 지식인들은 아주(亞洲) 동방(東方) 등으로 표현된 아시아를 황인종의 포괄적 인종구성체로 이해함으로써 유럽 및 서구로부터의 독자성을 인식했다. 조성환·김용직(20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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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론을 주장한 일본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1885)』주 899
각주 899)
다루이 도키치는 백인종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황인종인 아시아 제민족이 단결해야 하며, 쇠퇴하는 동양의 기운을 만회하는 흥아(興亞)의 대업을 양성하기 위해 대동아연맹(大東亞聯盟)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케우치 요시미, 서광덕·백지운 옮김(2004),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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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0년흥아회(興亞會)의 출범, 독립협회의 한일제휴론 등이 그것이다. 일본 망명 중 새로운 사상에 접하게 된 량치차오[梁啓超]도 1898년 11월에 발족한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의 동인종 동맹론을 배경으로, 일본의 흥아론(興亞論)이나 아시아주의에 기대를 걸었다.주 900
각주 900)
량치차오가 일본의 흥아론이나 아시아주의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점에 대해서는,최원식·백영서 편(1997), 『동아시아인의 ‘동양’ 인식』, 문학과 지성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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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에는 조선·중국·일본·필리핀 등의 망명 지사들이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는 연대 활동을 전개하여 동아시아청년협회가 성립 하였다. 이시기 일본에서 혁명운동을 펼치던 쑨원[孫文]도 조선 개화파 인사와 회담하고 교류하였다(楊天石, 2006:109).
1905년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 이후,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 일본의 승리에 감격한 대다수 한국인들 역시 일본이 내건 ‘동양의 평화’ 에 기대를 걸었다. 러일전쟁 후 한 때 동경은 아시아인 혁명가나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을 아시아의 해방, 독립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일본을 배우고 일본의 지원을 통해서 자국의 독립이나 변혁을 완수하고 싶다는 기대를 품고 동경에 모여들었다. 당시 동경에 망명중인 량치차오 등의 저작을 통하여 일본 근대화에 공명한 베트남의 지식인 판 보이 쩌우(Phan Boi Chau, 1867~1940)가 일본을 방문하여 정부요인과 접촉하고 원조를 요구하였으며(유인선, 2004:185), 유학생을 파견하는 동유(東遊)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1906년 200명 이상의 베트남 유학생이 일본에 머물렀다.
량치차오
판 보이 쩌우
※자료 연계

당시 일본에는 중국인 유학생이 1만 명에 달하였으며, 1905년 동경에서 흥중회의 쑨원, 화흥회의 천텐화[陳天華], 광복회의 장빙린[章炳麟]등이 단결하여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 총리 쑨원)를 성립하였다. 중국동맹회 기관지 『민보(民報)』(주필 장빙린)의 편집에 관여했던 중국인 혁명가들은 1907년 사회주의연구회를 창설하고, 사회주의강습회를 개최하여, 일본에서 초기 반전운동의 핵심 인물인 고토쿠 슈스이 등을 강사로 초대하여 교류하였다. 고토쿠 슈스이 등 일본인들도 금요강습회를 만들어 강연회를 개최하여 중국 유학생과 망명객 외에도 김여춘·황태경·박종진 등 한국인이 참가하여, 3국의 혁명가·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들이 교류하였다.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1907년 7월 조선침 략에 반대하는「대한결의」를 공표하였다. 일본사회주의자들도 ‘사회주의유지자결의’를 발표, 일본정부가 한국독립을 보장하고 한국민의 자유·독립·자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고토쿠 슈스이의 저서에 영향을 받은 한국의 신채호는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수용한 1910년대 말 이후 아나키스트로서 활동하였다(이호룡, 2003: 68).
쑨원
※자료 연계

  • 각주 898)
    중국에서 Asia의 음역인 아세아(亞細亞)는 20세기 초에 들어서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하였다. 신해혁명 시기의 근대 지식인들은 아주(亞洲) 동방(東方) 등으로 표현된 아시아를 황인종의 포괄적 인종구성체로 이해함으로써 유럽 및 서구로부터의 독자성을 인식했다. 조성환·김용직(2002), 참조. 바로가기
  • 각주 899)
    다루이 도키치는 백인종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황인종인 아시아 제민족이 단결해야 하며, 쇠퇴하는 동양의 기운을 만회하는 흥아(興亞)의 대업을 양성하기 위해 대동아연맹(大東亞聯盟)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케우치 요시미, 서광덕·백지운 옮김(2004), 267쪽. 바로가기
  • 각주 900)
    량치차오가 일본의 흥아론이나 아시아주의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점에 대해서는,최원식·백영서 편(1997), 『동아시아인의 ‘동양’ 인식』, 문학과 지성사, 참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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