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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동아시아 각국 민족주의의 특징

Ⅷ. 동아시아 각국 민족주의의 특징

19세기 후반 이후 전개된 동아시아의 민족운동과 민족주의는 19세기 이전부터 민족으로서 결집했던 나라들과 그렇지 못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19세기 이전까지 원초적 형태로나마 민족적 결집을 통해 독립된 하나의 정치 단위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를 말하는데, 한국·중국·베트남이 이에 해당한다. 후자의 경우는 19세기 이전까지 소수 종족으로 나뉘어 민족으로서의 결집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던 지역으로 필리핀·인도네시아 등이 이에 속한다. 타이완의 경우는 둘 중 어느 하나로 특 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는 타이완 주민 구성이 이중적이며, 토착민에 대한 이주민 지배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그만큼 토착민들의 그에 대한 반감이 뿌리 깊다는 점, 나아가 현재 타이완의 국제적 위상이 독특하다는 점에 기인한다.
19세기 이전 한국·중국·베트남은 공통적으로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주의적 태도로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삼국의 민족 운동은 점차 종래의 전제군주제를 지양하고 국민 주권주의에 의거한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근대적 민족주의로 발전하였다. 중국의 경우 청국의 봉건왕조를 타도하는 명분으로 ‘멸만흥한’ 이라는 한족 중심의 민족 주의가 형성되었다. 이와는 달리 한국과 베트남의 경우에는 전제 군주제의 청산과 함께 종래의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를 극복하는 방향에서 근대적 민 족주의가 형성되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아시아의 민족운동 진영이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우익과 사회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좌익으로 나뉘었다. 중국과 한국의 경우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때가지 좌우익의 대립과 연합을 반복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베트남의 경우에는 1930년대부터 좌익의 우세가 확립되 었다. 이러한 이념적 분화는 중국의 경우 국공내전을 통해 공산당의 승리로 귀착되었고, 한국의 경우는 미소 냉전체제의 형성과 함께 민족의 분단으로 진행되었다.
삼국이 직면한 외세에도 차이가 있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청국과 러시아가 차례로 일본과 영향력을 다투다가 모두 일본에 패배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의 완전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일본의 혹독한 탄압으로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그 결과 일본 패망에도 불구하고 미소 양군에 의해 국토를 분할 점령당하는 사태가 되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서양의 열강들이 침략을 했으나 부분적으로 조차지를 얻거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머물렀다. 이와는 달리 한국을 발판으로 삼은 일본은 1930년대 이후 두 차례의 침략 전쟁을 통해 중국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비점령 지역을 거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나아가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친 후 독립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경우에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베트남 침략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5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패망을 앞둔 유리한 국제적 상황에서 베트남인들은 기민하게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다.
19세기 이전 타이완은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청불전쟁 이후 중국의 지배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청일전쟁 후에는 중국이 지배권을 일본에 양도하였다. 이후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타이완인들이 타이완민주국을 수립하여 독립을 선포하였다. 타이완인들의 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은 19세기 후반에는 무장투쟁, 20세기 후반에는 비밀결사를 통한 조직적 항쟁으로 변 화하였다. 그러나 먀오리사건과 쟈오바니엔사건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항일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본격화하지 못했다. 식민지의 자치권을 획득하기 위한 개량주의 운동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타이완 내에 지도적인 정치 결사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은 타이완을 일본에서 중화민국으로 반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300년 이상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19세기 후반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는 사이 필리핀공화국을 수립하고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필리핀인들의 독립을 위한 항미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미국은 필리핀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필리핀의회 구성을 통한 자치를 허용하였다. 이로써 필리핀의 민족운동은 필리핀 의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미국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기 위한 활동에 주력했다. 독립을 거부하던 미국은 세계공황으로 위기에 빠지자 독립을 허용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1935년 독립 과도정부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발생한 후 필리핀은 일본군이 점령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미국과의 전쟁을 위해 필리핀공화국의 독립을 허용하였다. 1944년 미군이 일본군을 격퇴하자 필리핀은 다시 미군이 점령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 점령 시 조직된 정부는 해체되었다. 결국 미국에 망명해 있던 독립과도정부 요인들이 중심이 되어 1946년 필리핀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세기까지 네덜란드 식민지 침략에 대한 인도네시아인의 저항은 토착 왕국들에 의해 개별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 식민지 이주민에 대한 토착민들의 반감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토양이 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지식인과 회교 지도자들에 의한 근대적 계몽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이는 독립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개량주의적 운동이었다. 일시 공산당이 조직되었으나 활동은 극히 미약했다. 1927년에 비로소 독립을 목표로 정당으로 인도네시아국민당이 결성되었다. 이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하나의 민족으로 독립된 하나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근대 민족주의적 목표가 확립되었다. 이후 인도네시아 민족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네덜란드의 탄압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이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였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약속하였다.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일본에 협력하면서 대중들에게 민족주의와 독립의식을 계몽하였다. 이러한 독립 준비 덕분에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공화국 정부가 수립되 고 독립을 선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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